2022.12.8.(목) 저녁8시 온라인 zoom
[100만 번 산 고양이]
참가자: 신은향 까밉 장성이 죠피아 한톨 lalala
허브: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르다.
죠피아: 10년전 읽을 때, 애들한테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은 슬프게 다가왔다. 뭔가 주체적삶을 말하는 것 같기도. 어느날에는 사노요코가 윤회를 믿나는 생각도 했다. 읽을 때 마다 바뀐다. 다른감정이었고, 오늘은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마음이 보여 슬프다.
성이: 우리애들도 그렇게 재미있어 한 것 같지는 않다. 10년만에 다시 본다. 고양이가 사랑한 게 눈에 띄었다.(예전에는 안보임). 마술사도 임금도 모두 싫어했는데, 고양이는 주인이 원하는대로 해준 것 같다. 정작 자기는 사랑을 하지 않은 듯 하다.
허브: 임금, 마술사 아이 등 인물과의 관계, 또 하얀고양이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한톨: 도서관 책분류가 유아인데. 유아들에게 과연 맞는 책일까 의문이 든다. ‘자유’가 떠올랐다. 인간들의 이기적인 모습. 이기적인 사랑. 진정한 자유가 뭔지 얘기해주는. 또 솔직히 어려웠다. 유아들이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수 있을지 궁금하다.
허브: 예전에는 이런 고양이의 죽음, 특히 목졸라 죽었다는 부분에 뜨악했는데, 오늘 느낀 것은 참 다양한죽음, 허무한 죽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까밉: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 고정순작가 최애그림책이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이유가 너무나 궁금하다. 질문이 많은 책이다. 왜 싫어했을까. 그 주인들은 고양이를 사랑해서 죽었을 때 울었다. 누군가에게 눈물을 흘리고 죽어서도 자기테두리에 묻는데, 고양이의 뭣때문에 그런가. 이런 것이 의문이다.
허브: 왜 100만번일까? 존경하는 교수님이 [왼 발 오른 발] [100만 번 산 고양이]같은 책을 쓰고싶은데, 못 쓸것같다고 한 책이다.
lalala: 그림책에 빠져들게 한 게 ‘사노요코’였다. 아저씨우산, 100만 번도 첫사랑같은 그림책이다. 가볍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고 환타지도 있는데, 문득 일상을 즐기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상황이 아저씨 우산같아, 100만 번 산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계속 맞아지는 퍼즐같은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여기저기 끼워맞출 때 모두 맞아 떨어진다. 고양이는 자기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 자신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하얀고양이로 인해다. 하얀고양이 외 사람들은 고양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자기입장에서 다룬다. 고양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으로 고양이를 필요로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운것은 이 얼룩 고양이여서가 아니었다. 다른고양이었어도 울었을 것이다.
허브: 임금과 주인들의 관계를 더 살펴보면 좋겠다.
성이: 고양이는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을 다 주지 않았다. 너희가 원하는대로 해줄게. 하는 심정으로 될대로 대라? 그런데, 도둑고양이가 되고나서야 자신을 좋아한다.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나자신을 사랑해야지. 본인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허브: 하나의 주제로 읽을 수 없다.
까밉: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사는 경우와 타인이 주인인 경우. 자기가 자신이 주인일 때 부터는 자기를 찾아간다.
죠피아: 내가 누구의 고양이로 태어나지 않고. 내가 주체적으로 살 때, 진정한 삶이라 보는데. 100만 번이 나 죽지 않는 고양이. 100만번. 살고죽고는 삶의 연속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야 이 고양이는 삶이 끝난 것이다. 고양이 삶에서 누구의 고양이 아무개의 고양이로 태어나는 것은 의미없다.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사랑하고 자기 주체적으로 살았을 때, 내 소임이 끝난다는 것을 알려주는게 주제이지 않을까. 흰고양이는 너무나 도도하다. 얼룩고양이에게 사람들은 도도하게 굴지않았다. 하얀고양이를 만나고 자기자신을 버리면서까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일생을 보여준다.
lalala: 주인들은 고양이를 이용했을 뿐이다. 자기만족에 고양이를 키웠다. 자기가 선택해서 산 삶이 아니었다. 하얀고양이를 만나고서야 처음으로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산다. 선택 당한삶에서는 자기자신에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하얀고양이에게 다가갈 때, 허세찬 얘기를 한다. 내가 백만번이나~ 하면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
죠피아: 그럼 하얀고양이는 다시 태어났을까?
까밉: 하얀고양이 눈매가 줄무늬고양이 눈매와 비슷하다. 줄무늬고양이는 하얀고양이를 만나면서 도도함이 옅어가고 우는장면에서는 도도함이 사라진다. 하얀고양이는 끝까지 도도하다.
성이: 흰고양이도 도도함이 약해졌다.
성이: 본인이 선택하고 사랑한존재.
허브: 사랑은 혼자하는 게 아니다. 임금님 뱃사공 마술사 아이등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지 않았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는데도 계속 데리고 다니고, 서커스도 도둑도 돈을 버는 수단으로 고양이를 이용한다.
성이: 얼룩고양이가 백만번 살았다고 하는데, 하얀고양이 역시 한 번 의 삶이었을까? 왜 도도할수있나. 이미 이백만번을 살았을수 있다. 이백만번 산 고양이, 얼룩고양이가 내가 말이야 백만번~ 할 때 초연하지 않았나.
죠피아: 누군가의 고양이일때는 결혼을 안했다. 하얀고양이 만나고 결혼을 했다. 그래서 결혼예찬론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고양이가 사람사이에서 살았다가 고양이 무리와 따로 살면서 자기의 삶을 살았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 같은 종의 무리로 제자리에 있음으로 아름답게 빛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네가 있어야 할 곳 고양이의 세계야~ 하는.
허브: 인간과 함께였을 때 고양이의 공간은 좁았다. 그러나 고양이 혼자였을 때는 확 펼쳐졌다. 사람을 위해서 였지.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죠피아: 그래서 하얀고양이는 다시 태어나는거야?^^
까밉: 얼룩고양이의 다양한 모험, 다양한 삶이 너무나 부러운데, 고양이의 기쁘지 않는 삶이 이상했다. 한곳에 머무는 것이 좀쑤시는 사람에게 이런 다양한 삶이 충만하지 않는 모습은 의외다.
허브: 충만한 삶. 자신이 주인이지 않았기에 그렇다. 밀란쿤데라의 영혼회귀사상, 삶이 무한 반복된다고 하는데. 윤회가 아니라, 우리의 삶은 나의 삶의 패턴을 바꾸었을 때, 변화 새로운 인식이 없는한 어제를 계속 사는것이다. 하얀고양이를 만남으로 자기 주인으로 살았기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나. 죽고살고가 아니라,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가 없을 때, 죽은 삶이다.
죠피아: 다람쥐쳇바퀴 삶은 의미있는 삶이 아니다로 들린다. 쳇바퀴에서 벗어나라면 내적변화로 변화가 일어나야하지 않나. 무한정 변화해야 하나?
허브: 인식의 틀이 깨지는 것. 초인적삶. 한 단계를 넘어가는.
죠피아: 영적인 세계로.
허브: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한 단계로 넘어간 이야기인 것 같다.
한톨: 백만번산고양이는 동일한 고양이가 아닌것같다. 모든고양이의 삶인것같다. 다양한 고양이의 삶, 내가 자유를 찾았고,
성이: 고양이가 인간의 아이라고 생각하면, 부모가 하라던 대로 한 아이가 자기의 삶을 살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울고.
까밉: 그러면 백만번의 시행착오?
허브: 백만번의 시행착오를 느끼지 못한다면 수도없이 같은 것을 반복하는 거 아닐까.
죠피아: 죽은 날들을 살고 있다.
허브: 관계안에서 다양하게 읽힌다. 나는 패턴대로 산다.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패턴에 의해 살아가는. 내가 산다고 했으나, 부모가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 안에서 내가 살아간다. 이런 것을 인식했다. 이 책이 이런 한 번의 단계를 승화시키는 부분을 깨닫게 하는 책인 것 같다.
까밉: 이 책에도 패턴이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고양이가 주눅든, 작아진모습), 다음에 나는(얼룩고양이가 중심이다)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허브: 완성.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것. 삶의 의미를 알고 충만함을 누렸기에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 소멸(단어가 적절하지는 않는데). 의식의 단계. 백만번의 단계, 더 이상 태어나지도 않는. 오늘은 면지 흰부분이 좋았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하고 끝나지 않고 텅 빈 공간으로 끝맺음을 하고 면지가 있다.(비룡소 목록이 면지가 아니라 흰부분이 면지가 되어야하는. 앞부분과 면지와 맞닿도록) 존재가 없어졌다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다.(흰부분 백지가 말하는 것)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 물질은 흩어져서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서 마침표를 쓰지않는다고 한다.
죠피아: 마침표를 쓰면 끝나는 느낌인데, 다시 계속이어지는 느낌.
*검색으로 확인해보았습니다.^^(https://06012014.tistory.com/112) 찍는게 원칙이라합니다.^^ 다만 봉투에는 표제어로 사용할 수 있기에 봉투에는 안 찍어도 어법상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허브: 사람이 죽으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몸이라는 것은 그렇지만, 우주안에 있는 것은 원래 그자체로 있다고 한다. 그 비물질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있는 것이다.
죠피아: 안녕. 다시만나자(再見) 인데, 죽은사람한테 잘가는 어떻게 쓰냐, 물었더니 똑같이 再見이라한다. see you말고 good bye는 없냐고 물었더니 죽어서도 내세 다시 만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죽은사람 한테도 헤어질때도 모두 再見이라 한다. 다시 만나는 거...^^
성이: 작가님이 중국에서 태어났다.
허브: 죽는다는 그냥 끝이 아니라 왔던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초연해진다.
lalala: 얘가 죽었다 살아난다고 해서 죽음의 개념을 넘는다기 보다 리셋하는 것같다. 만족하 는 것 같다. 만족했기에 다시 태어나 둘 다 행복하게 다시 살면되지 않나? 왜 저런생각을?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이었기에 다시 리셋하고 했나? 마지막에는 만족했기에 리셋하지 않았다. 만족한 삶을 살았다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것같다. 죽음보다는.
까밉: 덧붙여서 하얀고양이와의 삶에서 얼룩고양이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불사른 삶을 살았기에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이런삶이 또 궁금하기도 하고.
허브: 죽음보다는 만족한 삶이 더 중요. 그 순간을 온전히 살았다는. 또하나는 숨을 쉬어도 죽어있는 삶일 수 있다. 더 이상 살아나지 않았다는 더 이상의 패턴을 반복하지 않는 것. 마지막장이 새로운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 끊어낸 것일 수도 있고. 반복된고리를 끊어낸 것이라는 생각도 듦.
이 책은 주제를 말하는 것 자체가 그림책을 좁히는 것이 생각한다. 다 이해했어 하면 매력이 떨어지는. 저의 소감은 이 책은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없는 책.
까밉: 호기심많은 아이의 눈빛을 보았다. 아이의 내면이 그대로 보이는 눈이 너무나 이뻤는데, 얼룩고양이가 우는 눈이 어린아이의 눈 같았다. 아이의 눈으로 돌아가는 고양이를 만난 시간이었다.
죠피아: 불교적 색채가 많은 그림책. 철학적 주제. 해탈의 경지에 이른 고양이. 태어나는것조차 무의미. 존재자체도 무의미한 단계까지 가지않았나. 오늘은 이런것들을 말로 정리를 할 수있어 좋았다.
성이: 갑자기 어린왕자에서 장미와 여우 장면이 있는데, 고양이와 흰고양이의 관계가 장미였을까 여우였을까가 궁금해졌다.
한톨: 7살 애들과 헤어지는 마지막날이었는데, 아이들은 내년에 다시 만나면 되죠하는 해맑은 아이들과 이별을 하고 왔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하면서 보았다. 아이들과 어떻게 읽어야 할까.
lalala: 나는 과연 제 삶자체가 도둑과 살고있는걸까,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걸까, 하얀고양이와 살고있는걸까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늙을 때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갑자기 사노요코의 100만 산 고양이가 생각나면서 나는 리셋을 할 건지, 이 번 생을 마지막으로 되살아나지 않을지 너무궁금하다.
내세에 만나자. 나는 이번생으로 족하다. 나는 이생망인데? 지금도 늦지않았다. 아니 무릎이 너무아프다. 고쳐서 써라. 고쳐서. 저는 이번생이 마지막인 것으로 마치고 싶어요.^^ 다음생은 백지로~
이런 토론의 시간을 가졌어요.
12월 22일 [키오스크]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