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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을 한 후 남산 왜성대에 있는 총독부 청사를 사용하였으나 공간이 부족하자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게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기 위해 철거된 흥례문 일대에 청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 독일인 게오르그 라란테이 설계를 시작하고 일본인 노무라 이치로, 와 구미에다 피로 시에 의하여 설계가 완성되자. 1916년 7월 10일에 착공하여 1926년 1월 4일 완공하였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 일부를 헐고 조선 총독부 건물을 건축하여 사용하게 된다. 1926년 1월 7일에 총독부가 이주했으며, 낙성식은 같은 해 10월 1일에 가졌다.
조선인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청사는 일본과 한반도에서 지어진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 자형 평면에 지하층과 지상 4층을 올린 총 건평 9,600여 평의 건물로 돔 모양의 중앙탑옥을 얹었다. 경성부 청사를 '本'자형 평면을 구성해 일제의 관공서가 모든 조선인과 건축을 억누르려는 일본인의 속셈이 담겨있다. 건축양식 면에서는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양식을 융합한 독특한 신고전주의(Neo-classic)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일제는 총독부를 짓기 위하여 경복궁 전각 19채, 대문 중문 22개, 당 45개 등을 해체하고, 경복궁에는 근정전과 경회루만 남겨 놓았었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 후 1945년에는 미군정 청사, 1950년 6.25 직후 서울이 함락되어 조선인민군 청사, 그해 9.28 서울 수복된 후 1962년 대한민국 중앙청이란 이름으로 정부 청사, 1968년에 서양식 정문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옛 자리에 복원하였다. 1986년 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김영삼 대통령 때 역사 바로세우기란 정책 일환으로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행사를 기해 참석한 광복회원. 해외동포. 각계 대표인사.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앙 돔 상부 첨탑(尖塔/spire) 철거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중앙청 옛건물이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996년 철거후 일부 잔해는 천안 목천독립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일제는 1938년부터 한글말 사용을 못하게 하고 이어서 1940년 들어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 씨 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평양 성당을 일본군 병사(兵舍)로 징발하고 성직자를 전부 시외로 내몰았다.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다. 평양교구에 속한 미국인 성직자 35명 춘천교구 성직자 32명을 체포하여 가두었다가 이듬해 본국으로 추방해 버린다. 특히 프랑스 성직자 행동도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경성교구 라리보 원(元) 주교가 1942년 1월에 직책을 노기남 바오로 신부에게 맡기고 은퇴하였다. 이에 노기남 바오로 신부는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2월에는 평양, 춘천 교구장을 겸임하게 된다. 일제는 경성 교구장 노기남 신부를 감시하기 시작하며 노 신부에게 프랑스 인 성직자들을 감시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용산에 있던 대신학교를 폐쇄하여 대신학생들은 원산 덕원에 있는 성 베너딕도 수도원 신학교로 교적을 옮긴다. 일제는 대구교구 프랑스 뭇세 문 주교 대신 일본인 하야사카 이레네오 신부를 앉히고 1943년 2월에는 광주 교구장도 일본인 와키다 신부로 바꿔 버렸다.
이렇게 이어지는 사이 노기남 신부는 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게 된다. 1942년 12월 20일 한국인 최초 주교 승격으로 성성식을 명동 대성당에서 갖는다. 노 주교는 즉시 교황청과 상의하여 1943년 3월에 홍 용호 신부를 평양교구장으로 발령을 내어 홍 신부는 이듬해 6월 29일 평양에서 성성식을 갖었다. 1944년을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한국인 신부들을 잡아 가두고 신부, 신학생, 군인, 노무자로 잡아가고 평양, 대전, 연안, 양양, 신계 성당을 병사(兵舍)로 쓰고 1945년 5월 29일에는 연합군과 연락을 할지 모른다고 목포에서 연금되었던 11명을 강제로 홍천으로 옮겨 노 대주교에게 감독하게 하였다. 이렇게 천주교회는 온갖 압박을 가하던 일본제국이 1945년 8월 15일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한다 비로소 36년간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민족해방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는 국내외 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해방과 더불어 신앙과 언론의 자유를 누리면서 참된 종교를 갖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주교 노기남 주교는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교우들에게 고유(告諭)를 발표한다. - 혼란스러운 정세하에서 각자 자중할 것과 앞으로 세워질 우리 정부를 위하여 매일 특별한 기도를 올릴 것을 지시한 것이다. 해방을 맞이한 서울교구는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그날 오후 5시 미군사령관 하지중장과 미군종 신부단 총재인 뉴욕 교구의 대주교 스펠만(Spellman) 추기경과 많은 미군을 맞이하며 명동 대성당에서 민족의 해방과 천주교의 발전과 연합군 승리를 천주께 감사하는 미사를 드리며 미군 진주를 환영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광주 교구장 일본인 와키다 주교가 사임하고 9월 28일 맥포린신부와 퀸란 주교가 각각 광주교구와 춘천교구장의 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노기남 주교도 겸직하던 춘천 교구장을 내려놓았다. 미군 서울진주 후 멈추었던 명동성당 종루에서 다시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간첩혐의를 받고 가택 연금이나 감옥에 투옥되었던 외국인 신부들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일제에 징발되었던 종교시설들도 전부 되찾아 제 기능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즐거움이 가시기도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남과 북으로 갈리는 바람에 평양, 함흥, 덕원, 연길 4교구는 공산치하에 남게 되고 남한에서도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사 자리를 좌익들 차지하여 정판사라 이름 짓고 인민보(人民報)라는 좌익계 신문을 발행하고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타파하기 위하여 1946년 8월 하순 정판사를 인수하고 이곳에 대건 인쇄소를 두고 경향신문을 발행하여 좌익계열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 설립 100주년 감사미사 후 단체사진.
해방 후 발전적인 징후를 발견한 교황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1947년 8월에 메리놀 외방전교회 번(Byrne. 方) 신부를 교황사절로 임명하고 10월 9일 부임하게 하였다. 이에 남한천주교회는 발전을 하게 되고 북한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서울교구에서는 윤 형중 (尹亨重) 신부의 주관하에 1946년 8월부터 일제 말기에 정간조치를 당했던 경향잡지를 속간하고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백 주년 기념일인 9월 16일 한국 순교자 현양대회를 결성하여 교회사 편찬, 순교자 발굴 등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9년 2월에 유홍렬이 지은 조선천주교사가 출판되었다. 남한에서 군정을 펴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를 열고 통일정부 수립을 다루었으나 소련의 방해로 성과를 얻지 못하고 1948년 5월 남한단독으로 총선거를 하여 8월 15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부를 건국하였다. 당시 교우였던 장면박사를 파리에서 개최되는 유엔총회에 참가시켜 교섭 끝에 12월 12일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을 받는다. 이듬해 미국이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승인하여 장면박사는 초대 미국대사기 되었다. 장면박사 와 그의 아우 장발은 재속회 회원으로서 한국에 재속회를 알리고 초대 재속회를 이끌었고 동생 장발은 서양화 작가로서 한국에서 최초의 성화를 그린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혜화동 성당과 정동 작은 형제회 수도원, 절두산에 걸려 있다. 또한 작은 형제회 이광제 티모티오 신부는 강원양양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며 6.25 전후하여 이북의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 등을 남한으로 탈출시키기 위하여 루트를 개척하였고 이를 실천하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양을 비유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탈북시키려다 체포되어 원산교도소에 수감되어 선종하게 된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1949년 5월 덕원교구의 사우에르 주교 외 59명의 신부, 수사, 수녀와 평양교구 호용호 주교 외 5명을 잡아 투옥시키고 수도원, 신학교, 성당, 병원 등을 몰수한 후 공산당기관이 입주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앞서 연길 교구 유셀바시오 신부는 해방을 맞던 그해 총살되고 이듬해 5월에는 브레헤르 백 주교이하 39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투옥되었다. 3천여 명이 살고 있던 평양에는 성직자가 강압에 의하여 사라졌고 진남포, 안주, 의주, 마산, 비현, 청진, 평강, 양양에만 신부 한 명씩만 남게 되었다. 북한에서 천주교 박해는 1950년 들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5월에 평양 서포리 소재 성모회 수녀원이 몰수되어 장면 누이동생 장 수녀등이 아사하고 6월 24일에는 북한 남아 있던 조인국 신부등 11명의 한인 신부까지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3,8선을 넘었다. 이를 계기로 6.25를 전후하여 북한에 체포된 성직자, 수녀, 신학생은 150명을 넘어섰다. 목숨을 빼앗긴 성직자도 2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만포진에 수용되었다가 석방되어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본연의 자리로 돌아온 성직자도 있었다. 공산군에게 최초로 잡힌 성직자 연길 교구의 브레이헤르 백 주교는 5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호콩을 경유 스위스로 돌아 가 선종하였으며 덕원교구 사우에르 辛 주교는 평양감옥에서 옥사하였고 로마교황사절 방 주교와 7명의 성직자는 만포진에서 11월 옥사하였다. 6.25 전란으로 많은 성직들을 잃었고 종교시설들도 많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인적, 물적 엄청난 손실을 딛고 분연하게 일어서게 된다.
병원과 학교와 각종 구호단체를 운영하던 천주교는 6.25 전란 후 미국 가톨릭 구제회에서 많은 구호물자를 정성껏 보내주어 전란의 피해와 상처를 딛고 복구를 해나가며 한편으로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사업에 치중한다. 이러한 사실이 급속한 천주교 신자의 증가를 불러왔다. 그러나 복한 전교지인 평양, 함흥, 덕원, 연길 4 교구 성직자들은 피난으로 남한으로 내려와서 왜관에서 임시로 자를 잡은 후 다시 전교지 회복을 기다렸지만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는 아픔을 딛고 왜관을 중심으로 전교와 사목을 이어 가고 있고 병행하여 출판사업과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도 서울 중곡동으로 내려온 후 청주를 중심으로 전교를 이어가며 다양한 사회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18 교구 중 서울, 대구, 광주는 교황 요안 23세가 1962년 3월 25일 서울의 노기남주교, 대구의 서정길 주교. 광주의 헨리 玄 주교를 각각 대주교로 승격시켜 대교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1백 년 만에 열고 세계 추기경과 주교들과 함께 교회 쇄신에 대한 헌장(憲章), 교령(敎令), 선언(宣言)을 공표하고 시작하였다. 첫 회 공의회는 한국의 대주교 3명과 함께 대전, 광주, 부산 주교들도 참석하였다.
요한 23세는 뒤를 이어 1963년 12월 4일 공포된 전례헌장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을 비롯하여 1965년 12월 7일에 공포된 "현대 세계 속에서의 교회사목헌장을 비롯하여 16개의 결의문을 채택한다. 이어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제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과 사제 독신생활에 대한 회칙을 반포하며 기아, 빈곤, 질병, 무지에 허덕이는 국가는 선진국들이 도와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울러 천주교의 사제가 신도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독신제를 엄수하여 줄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런 바티칸 공의회 개최 이후 공포된 헌장, 교령선언, 회칙이 각국에 어떻게 반영되고 향 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토의를 목적으로 1967년 10월 11일 - 18일까지 로마에서 3차 평신도 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 천주교 대표로서 역사학자 유홍렬외 19명이 참석하였다.
인간 여로(人間旅路)에 있어서의 천주백성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평신도 대회에서는 인종차별주의 철폐, 사회발전 균등화, 평신도 기구 결성 촉구 등 여덟 가지 결의문을 채 택하고 실천을 다짐하고 폐회하였다. 한국 천주교에서도 1968년 7월 23일 대전에서 교구대표들이 모여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를 결성한다. 이러한 결성을 이어받아 각교구에서도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실천으로 호응한다. 그리고 한국천주교의 오랜 숙원인 대원군 집정 시 박해로 순교한 일만 명의 중에서 24위를 선택하여 복자위에 올리는 시복식을 로마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에서 130명의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교황은 강복 주례사에서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의 훌륭한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하였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24위 시복식을 경축하면서 진리는 어느 순간에도 변하지 않으며, 충절은 항상 푸르다는 진리불변 충절상청(眞理不變 忠節常靑) 이란 휘호를 가톨릭 신문사에 내려 주었다고 한다. 바오로 6세는 교황 자문기관의 추기경 성원의 수를 135명으로 늘리면서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 대주교 김수환 스테파노를 추기경으로 선임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세례명은 스테파노로서.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8·15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7년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聖神大學)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에 졸업,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주임신부로 사제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1953~55년 대구 대주교의 비서신부·재정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지냈다. 1953년에는 대구교구가 설립재단인 김천시 성의(聖義)중·고등학교 교장과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의 주임신부를 겸임했다. 1956년 10월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했으며, 그해 1964년 6월부터 2년 동안 주간 가톨릭 시보 사장을 지냈다.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5월 31일 마산교구장으로 서품되었다.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의 기류 속에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뒤를 이었다. 1969년 4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70~75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1차 부임했다.
1970년에는 3년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으로 재임했고, 1981~87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2차 부임했다.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5월 미국 노틀담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88년 11월 일본 조치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90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90년 10월 미국 시튼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94년 연세대학교 명예신학박사, 1995년 타이완 푸젠 가톨릭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의 자리에서 그는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또한 아시아 주교회의와 세계 주교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100만 신도가 운집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회를 개최, 세계 최초로 교황청 밖의 시성식을 열어 한국의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으며, 1989년 10월 9일에는 교황과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가톨릭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적 행사인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또한 헌혈, 안구·장기(臟器) 등의 기증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근본적인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만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북방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2002년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여 북한선교를 위해서도 애썼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에서 집전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하였고, 2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에서는 공동집전을 맡아 한국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200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오다가, 2009년 2월 16일 호흡 곤란과 혈압 저하로 인해 87세로 선종(善終)하였다. 빈소는 명동성당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닷새간의 일정으로 치러졌는데 이 기간에 시신이 유리관에 보관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20일 오전 가톨릭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교황특사 자격으로 장례미사를 집전한 뒤, 같은 날 오후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생명 연장만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당부함으로써, 산소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의 처치를 받지 않고 생을 마쳤다.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존엄사 논란은 물론, 국내 첫 존엄사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수술을 받았으며, 장례 절차 등도 '다른 신부와 달리 특별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추기경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다. 선종 이후 그를 추모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뜨거워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이 40만 명에 이르렀으며, 장기 기증 서약도 확산되었다.
경북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7 번지에서 옹기장수 아들로 1922년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 태어나고 자란 집은 고작 부엌 포함하여 3칸짜리 초가다. 그야말로 아주 평범한 초가 3칸이다. 마루도 정면 방 앞에 붙어 있는 툇마루 뿐이다. 지금 당장 해체하여도 모든 것을 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는 자연 물들이다. 초가 삼칸처럼 추기경님도 꾸밈이 없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늘 지니고 사셨던 성직자셨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느 종교든 상관없이 한국인이면 다 좋아하는 인물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다. 그러한 정(情)은 추기경님이 지니고 계신 인품 때문이었다. 그리고 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소박한 덕의 향기는 그 어느 누구에게나 스스로 미소를 짓게 한다. 그 만큼 인자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추기경님은 여기저기에서 상을 받으셨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 공로훈장 등을 수상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바보라는 인상을 우리 모두에게 각인시켜 스스로 낮추며 겸손함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지혜를 남겨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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