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瀋陽往還日記 (심양왕환일기)
2) 明나라 政勢 探索(명나라 정세 탐색)
다음날 저녁 무렵 명나라 기마병 3명이 사로잡혀서 왔는데, 칸이 대해(大海)로 하여금 그들을 달래어 명나라의 방비 상황을 묻게 하였더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영원위(寧遠衛)에는 한인(漢人), 진달(眞㺚)*, 몽골(蒙古) 등 모두 날랜 기병 12만명이, 금주위(錦州衛)에는 한인, 진달 등 날랜 기병 6만명이 항상 머물며 반란에 대비한다"고 하였고,
* 진달 : 여진계 민족으로 추정됨(게재자)
병기와 각종 방비와 관련된 것은 전보다 엄중히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 각종 군수물자를 실은 배 180척이 남경에서 3월 17일 이미 영원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형장 등이 칸을 수행하여 나갔을 때에 의주(義州)에서 포로가 된 백원길(白元吉)에게 물으니,
"벽동(碧潼) 사람 1명, 성천(成川) 사람 1명, 또 성명을 알 수 없는 사람 1명 등 3명을 지난해 12월 박중남이 되돌아갈 적에 데려왔다.
그들 중 1명은 망개토(亡介土 또는 莽古爾泰)의 집에 주고, 형제라고 칭하는 2명은 칸의 집에 주었다"고 하거늘,
이형장 등이 또 다른 포로 정국경남(鄭國敬男) 등에게 물으니 한결같이 백원길의 말과 같다고 하는바, 벽동, 통인(通引)과 성천 사람의 말은 臣이 들어갔을 때에 차인범(車仁範)이 했던 말과 같았으되 또 1명이 더해지고 거기에다 형제라는 말이 있게 된 그 실상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홍적(洪賊, 홍대웅)은 스스로 양반이라 일컬으며 이미 판관(判官) 자리를 거쳤다고 한 까닭에 많은 호인들이 판관으로 호칭하며 짝도 지어주고 집도 주면서 한적(韓賊, 한윤)과 같은 격식으로 대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형장 등은 칸에게 신임 받던 중군(中軍) 능거리(能巨里)의 처남과 함께 의주에서 포로가 된 인달(白仁達)이라고 하는 장에게 저들의 사정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천조(天朝)의 항장(降將) 마등운(馬登雲, 麻登云), 흑운룡(黑雲龍) 토총병(土摠兵, 王世選의 오기인 듯), 마총병(馬光遠) 등이 계획을 마련하고 이르기를",
"지난해 북경을 공격했을 때 홍산구(紅山口)를 통해 들어왔으니 지금은 필시 방비하고 있을 터라 그 길을 다시 침범할 수가 없겠지만, 홍산구를 지나서 4일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길은 무방비한 곳으로 만약 그 길을 통한다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가을걷이를 기다렸다가 몽골과 합세하여 거사하면 될 것이다 하였고, 그리하여 신부(新府)의 몽골 가운데서 장정 1만명을 뽑아 편성하고 칸의 매부 두랑개(豆郞介)를 장수로 하여 고산(固山) 하나를 증설하였으며,
또 고산에 편입된 소속 가운데서 18세 이상자 100여명씩을 뽑아서 또한 그 편성한데에 더 들여보냈고, 투항한 한인(漢人) 등 5000여명을 별도로 편성하여 모두 화기(火器)를 쥐게 하고 동양성(董揚聲)으로 하여금 장수로 정하여 훈련시켜서 천조(명나라)를 치려는 계획에만 전념하고 있을 뿐이다"하고,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매번 자신하기 어렵다고 운운하면서 특별히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4. 4월 20일 (客館에서 情報探索, 객관에서 정보탐색)
이른 아침에 골자(骨者), 능시(能時), 대해(大海), 아벌아(阿伐阿), 무칭개(無稱介), 이름을 알 수 없는 호인 등 6인이 칸의 뜻으로 왔다면서 臣에게 말하였습니다.
"국왕께서 평안하신가?"
"아주 편안하다"
"조정의 여러 대신들도 평안하신가?"
"평안하다"
"사신은 오랫동안 객관(客館)에서 머물러서 무료하고 많이 고단했을 터인데, 무엇으로 소일하며 지내는가?"
臣이 대답하였습니다.
"무료히 지낸 객고(客苦)는 말할 것이 못되고, 이곳에 도착하여 날이 오래도록 아직도 국서를 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다."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칸이 마침 다른 곳에 나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오래 지체하여 이렇게 되도록 하겠는가? 내일은 응당 맞아들여 만나보는 예를 행할 것이다."(이날 칸을 접견하게 되면 회답사인 공이 심양에 도착한지 거의 24일째에 이르는 날이다)
臣이 또 말하였습니다.
"내일 접견하려면, 언제 길을 떠나야 하는가?"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결정되지 않았지만, 따로 오래 지체할 일도 없다."
臣이 또 말하였습니다.
"도중(島中)에 변란이 생겼는데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났는가? 변란을 겪은 진달(眞㺚)들이 이곳에 왔을 것으로 생각되니, 자세히 듣기를 원한다."
남조(南朝)가 유흥치(劉興治)와 진달이 우리나라에 투항해 오려는 뜻이 있음을 듣고, 남조에서 차인(差人)을 보내어 유흥치에게 전한 격서(檄書)에 이르기를,
"그대의 형 유흥조(劉興祚)는 절의를 지키다가 따라서 죽어 끝내 충신이 되었으니, 그대 또한 어찌 보답을 다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도중(島中)에는 투항한 진달의 숫자가 많아 후환이 걱정되니 모두 사로잡아 향리로 돌려보내면, 그대에게 관작을 올려줄 것이고, 흠차장군(欽差將軍)은 그대로 동중을 다스리게 할 것이다"고 운운하였다.
유흥치는 그 말만 믿고는 여러 장수들과 은밀히 진달을 처치할 일을 의논하여 계책을 꾸미기도 하였다. 필경 또 그의 처에게 이를 말하였는데, 그의 처는 일찍이 심양에 잡혀 있다가 지난해 유흥치가 우리나라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뒤로 돌려보내지도록 허용된 사람이었다.
그 처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금나라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 차마 못할 계획을 세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면서 반복하여 나무랄 때에, 유흥치가 가까이서 심부름하던 진달아이가 몰래 엿듣고 진달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또 다른 장관(將官)이 심부름을 시키던 진달아이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미리 알려주었는데, 두 아이의 말이 서로 어김없이 들어맞음으로 진달들은 놀라서 허둥지둥하다가 굳게 결심하고 감히 한인들을 공격하여 우두머리 장관 20여명과 군병들을 죄다 섬멸하였다. 유흥치 형제 등도 결박하여 막 죽이려 할 때 유흥치가 애걸하기를,
"나와 그대들이 당초 맺은 약속대로 함께 심양에 들어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진달 중에는 가하다고 하는 자도 있고 불가하다고 하는 자도 있어 논의가 어수선하여 결정하지 못하자, 또 소를 잡아놓고 결연히 명세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진정시킨 뒤에 한밤중을 틈타 몰래 인근 섬의 명나라 군대에게 청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다시 교전하게 되었을 때, 진달이 돌진하여 들어와 단지 유흥치 형제만 죽이려드니 곧 쫓겨 도망쳤는데, 어렵사리 배를 타고 살아 돌아온 자가 400여명이었다. (중략)
臣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그렇지 아니하다. 투항하는 진달들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의 뭍에 내린 초기에 방비한 일을 그대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라. 저들은 곧 그대의 나라로 도망치는 노비였다. 당초에 그 상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서 방비한 것은 변방을 지키는 관원의 직분이요, 저들의 말을 듣고서는 이내 대포 쏘기를 중지하고 토벌하지 않은 것도 화친 맺은 뜻을 준수한 것이니, 그 관원이 일을 처리함은 또한 옳지 아니 한가?"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은 옳다"
臣이 또 물었습니다.
"우리나라 배신(陪臣)들의 소식은 어떠하다고 하던가?"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진달은 모두 한인들과 서로 교전하였는데, 어찌 해가 미칠리 있겠는가? 배신들이 무사히 나왔다."
이와 같이 운운하였습니다.
(144-028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27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27일차에서도 '만회재공의 심양왕환일기'가 밴드에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 주1) '만회재공' 편은 자료가 많은 관계로 총10회차에 걸쳐 게재되며, 이번차는 10회 중 5번째 입니다.
▲ 심양왕환일기 : 명나라에 군량미를 제공한 사실을 후금이 트집 잡는 등 외교적문제로 비화되자, 만회재공 할아버지께서 회답사로 심양을 방문하여 이를 성공리에 해결하고 돌아온 과정을 기록한 일기임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만회재공(정철)의 유고 계속, 10회 중 5번째)/ 무곡
만회재공 할아버지께서 심양에 도착한지 20여일이 지나도록 후금의 칸을 접견하지도 못하고 객관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지는 등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무곡
후금(후에는 청)은 명나라와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으로 후방이 불안해, 조선을 먼저 쳐서(병자호란 1636년) 후방을 안정화 시키고 그다음 수순으로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1644년)시키는 정책을 구사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무곡
대화를 통해 당시 국제정세를 소상히 알 수 있어 도움이 됩니다./ 벽천
碧泉 위윤기 !
알고보면 지금의 심리전이나 정보전과
같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전쟁같은 측면도 있었겠죠./ 무곡
무곡 위상환 님
당시 그 똑똑하던 문과 과거급제자들은 다 어디가고 무관이었던 만회재공을 승진시켜 차관으로 외교사절로 보낸 것은 당시 썩을대로 썩은 조선정치의 현실을 보는 듯합니다./ 벽천
碧泉 위윤기 님!
시작은 저자의 지적과 같다고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문관출신 장군인 서희 이상의 훌륭한 협상전문 외교관으로 (만회재공께서는)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역사책에 소개되어야 되는데, 현재까지는 많이 아쉬운 것 같습니다.
이런 유전자가 있기에 외무고시 2부(재외동포 자녀대상 특채)가 아닌, 정식 외무고시 합격자 출신 러시아대사로서(장관급 이상의 대우) 훌륭하게 근무한 위성락종친이 탄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 하나) 임진왜란때도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끌려간 백성들 귀국 문제 등 종전후 문제를 해결할 고위공직자가 없어, 스님인 사명대사가 협상가로 가게 되었답니다.
결과는 아시는대로 대성공을 거두고 귀국을 하였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추가 둘) 사명대사께서는 김천 직지사(신묵스님)에서 출가하여 임진왜란때 승병으로 큰 역할을 하신 큰 스님입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