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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홀로서기
(시편 125편 1~5절) 찬송 214장, 292장
사람들은 의지하기를 좋아합니다.
독불장군이 아닌 이상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내가 의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의지할 대상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고, 나를 의지하는 사람 역시 내가 의지할 대상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의지하면 할수록 좋아지기보다 싫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에게 의지하는 정도가 상대의 기준에 넘어서면, 그 사람은 나를 귀찮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도 이상으로 나를 의지하려고 하면, 나 역시 그 사람이 귀찮고 부담스럽게 여겨집니다.
적당하게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 정도 이상으로 의지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가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계이며 마음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 속에서 자라게 되면, 매사에 줏대가 없고, 의존적이 되어, 스스로 결정력이 약한 남자를 우리는 ‘마마보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마마보이로 취급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자식이 마마보이가 되는 것도 싫지만, 마마보이에게 내 사랑하는 딸을 맡겨야 되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마마보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마 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마보이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려는 ‘홀로서기’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홀로서기를 잘 하는 청년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칭찬합니다.
만일 홀로서기를 하려는 사람과 마마보이가 있다면, 누구라도 홀로서기 하려는 사람을 칭찬해 줄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른 인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홀로서기를 잘 하는 사람과 마마보이의 삶을 사는 사람을 비교했을 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전자의 사람인 홀로서기를 잘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홀로서기를 잘 하는 사람은, 어디에 내 놓아도 혼자서 헤쳐 나가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특수훈련을 받는 특공대가 훈련받는 것 중에서, 가장 힘든 훈련은, 낙하산 훈련이나 천리행군이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훈련도 역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힘든 훈련은, 지옥훈련이라고 하는 생존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특공대원을 어떤 기간 동안 깊은 산속에 혼자 떨어뜨려 놓고, 목적지를 찾아오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식량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합니다.
먹는 것에서부터 길을 찾아 지시한 목적지까지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풀뿌리를 케어 먹거나, 뱀을 잡아먹으며, 심지어 벌레를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겨울철에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땅을 깊이 파고, 그 속에서 잠을 잡니다.
이 생존훈련을 견디고, 정해진 기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진정한 특공대의 명예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기업들이 장교 출신이나, 특공대 출신들을 채용하기를 선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할 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독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도전적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홀로서기 인생을 좋아하고, 그들을 칭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홀로서기 인생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사람이나,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이런 사람은, 분명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고, 독단적인 사람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서기 인생보다, 마마보이 인생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인생철학을 같이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은, 세상에서는 홀로서기 인생을 살아야하고, 하나님께서는 마마보이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최악의 경우는 이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에게는 마마보이 인생을 살고, 하나님께는 홀로서기 인생을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5편 1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람은, 정도 이상으로 의지하면, 귀찮게 생각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일이 있어도, 적당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적당하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것은 의지하고, 저것은 의지하는 않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러한 환경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 3장 5~6절의 말씀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적당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범사’라는 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인정하라’는 것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가장 작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나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선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말로는 어떻게 될까요?
그들에게는 오직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나 더욱 선을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시편의 시인은, 본문 3~5절까지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비교하면서 이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에, 따라 선한 삶을 사느냐, 악한 삶을 사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데,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또, 악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며, 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홀로서기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로부터는 칭찬을 받을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칭찬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인 우리들은 늘 오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고, 하나님께는 마마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실천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이 좀 더 선한 삶을 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요동치 아니하며, 여호와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를 영원토록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의뢰하여야 합니다.
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요동치 않습니다.
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진정한 양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동요가 없습니다.
잠언 28장 1절의 말씀을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거처가 되시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시편 90편 1절을 보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든든히 보호하여 주십니다.
산들을 겹겹이 둘러 싼 것같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신다 함은, 그 보호가 얼마나 견고한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사실은 이것을 아는 자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에 단맛을 느낄 것입니다.
모든 어려운 일들 가운데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쉽게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펄전 목사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한 후 거기 모였던 모든 회중이 예배당에서 다 나오자, 그 예배당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보호로 그 회중이 피해를 입지 않은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일본 ‘아바시리’라는 지방에 신실한 성도가 사과나무 천주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벌레가 생겨 큰 손해를 볼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성도는 온 가족들과 함께 종일 벌레를 잡았으나, 다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그 가족들과 함께 그 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튿날 그의 가족들이 놀란 것은, 어떤 새들이 그 과수원으로 몰려와서 종일 그 벌레를 잡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성도들을 외부적으로 보호하시며, 도와주시는 일도 있지만, 성도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풀어 모든 난관을 참아 나아가게 하시는 일도 많습니다.
순교자들은,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견디기 힘든 시련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그 내용으로 보아서 느헤미야 때, 지어진 시로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본래 파사 궁정의 고관으로 있었지만, 조국의 비참한 소식, 즉 성이 무너지고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평안한 그 자리를 내놓고, 수 천리 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성전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주위에 그들을 해하려는 원수들이 많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에 기구를 들고,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들어 주를 향한다는 말씀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또, 겸손의 표시입니다.
순종의 마음입니다.
주의 손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마음입니다.
하늘을 동경하는 심령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위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역경 가운데서 성을 쌓으면서 그의 눈은 항상 위를 향했습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 성도들도 이와 같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기록한 존 번연은 청교도입니다.
당시의 청교도운동은, 영국 성공회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존 번연은, 영국 성공회의 허락없이 전도생활을 한다고 하여 붙들려 감옥에서 12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전도도 못하고, 감옥에서 젊음을 허송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나, 존 번연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는, 일제시대에 105인 사건으로 일경에게 붙들리어 감옥생활을 했는데, 그 감옥 속에서 신약성경 100독을 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위를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노라면, 어떤 때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늘같이 믿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천사처럼 믿던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또, 주 안에서 한 몸이 되었던 남편이 먼저 가는 수도 있고, 한 몸이 되었던 아내가 먼저 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면, 반드시 위로가 내려올 것입니다.
새로운 소망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이 우리에게 와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길이 우리에게 열려지게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에서도 우리가 바라볼 곳은, 오직 주님의 얼굴입니다.
막막하고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힘이 부족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45장 22절을 보면,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터를 두고, 주소를 정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방어를 하나님께 맡기면, 염려도 없고, 실패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믿는 사람은, 신령한 도움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다고 하였습니다.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의 말씀을 보면,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까지 둘러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울타리로 가정과 사업을 둘러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절의 말씀을 보면,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악인의 손이 성도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막아 주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은, 하나님께서 운영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므로, 악인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4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주어진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평강의 복은 장수와 건강을 바탕으로 하는 안정된 생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거짓이 없이 정직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평강을 보장해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을 보면,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세계의 불가사이 중에 하나인 이집트의『피라미드』를 보면, 이렇게 광대한 것을 “어떻게 수축을 했을까?”하는 신비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피라미드를 연구하다가 그 주변에서, 무덤을 많이 발견하였는데, 그곳에 있는 유골들을 살펴보니, 한결같이 18세에서 40세 사이에 죽은 유골이었다는 것입니다.
무릎의 관절이 심히 다친 상태가 발견되고, 영양실조에 무거운 짐을 들어 혹사당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이 고작 오래 살아야 40세 였다는 것을 추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도, 아마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진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을 울부짖으며,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에는, 기도의 불이 꺼지기 쉽지만, 고통스러울 때에는,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앞이 막히고, 뒤가 막히고, 사면초가에 처하여 희망이 사라졌을 때....
바로 그때,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같습니다.
남모르는 깊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다 같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그들의 암울한 사정을 아뢰며, 그들의 고통을 호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수난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어릴 적부터 택하셨고, 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시고,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고,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기적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의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19절의 말씀을 보면,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어려움을 만날 때,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중에 진실한 사람을 만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미국의 어떤 종교 문제 연구소에서 11년 동안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람들이 신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조사를 했는데, 그 첫째가 교회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만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에 요동치 아니하고 견고하게 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들이 잘 살게 되니까 우상을 섬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시하게 되고, 경배의 대상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46편 3절에 보면,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분임을 알고,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해 주실까요?
첫째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요동치 않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7절에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을 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은 자손을 바라 본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14~16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나아가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18만 5천명의 군사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더구나 조금 남은 군사들이 조국에 돌아가 구테타를 일으켜 아들이 자기 부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잠시 교만하여 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였더니,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큰 위기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거짓없이 진실하게 살 때 요동치 않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자연은 거짓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디서 누구에게 심었으며, 언제 싹이 나고, 언제 거두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날 대형 사고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쉴 사이도 없이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의 진짜 원인은, 진실된 양심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진실이 실종되었을까요?
어디서 양심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어디서 진실이 사라진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찾게 하십니다.
야곱은 복 받기를 원하는 중심은 좋으나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이자, 철학자, 신학자로서 기독교 사상과 서양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만의 유익을 위한 거짓말도, 나쁜 죄악이거니와 종교적인 거짓말은 더욱 큰 죄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7장 19절을 보면,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축복기도를 할 때, “네가 에서냐?”하고 물으니, “네 제가 에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월이 흘러서 그 거짓말의 싹이 나고, 열매를 거두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라헬을 사랑하여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봉사했는데,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그 언니 레아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한 것이므로 변개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29장 26절을 보면, 외삼촌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고 하면서 레아와 합방시킨 것을 핑게를 하였지만, 실상은 야곱이 심은 것을 거두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축복의 안수를 받는 자리에서 종교적인 거짓말을 하였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피 값을 바라보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요동치 않게 하시고 복된 삶을 열어 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인사를 하던 시절에 바로 엊그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여호와 샬롬!”하고 인사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과 당신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 축복의 언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인사를 하게 된 배경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400년을 살았고, 광야에서 40년, 바벨론의 포로에서 70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그들이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식구 중의 하나가 포로로 잡혀가는가 하면, 자고 일어나면, 생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놀라운 은혜요, 복이었습니다.
가난해도..., 굶어도...,
하나님의 평강만 임한다면...,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짓없이 진실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주님의 평강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평탄케 하시고,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들이 흔들림이 없이 영영이 견고케 하여 주실 것이며, 좋은 세월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실 줄 믿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