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 김포신문 230804)
신의 반지하/박유하
오래 꽂혀 있는 책은 중력이 아닌 운명이 그 자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한 책을 들어 올리면 자리의 따뜻하고 쓸쓸한 내장이 따라 올라온다
시큼하고 깊은 종이 냄새
책 한 마리를 끌고 가면서
나는 따뜻하고 쓸쓸한 내장의 울렁이는 속을 익힌 적이 있다
따뜻하고 쓸쓸한 내장에게 내어 줄 살이 있을 때
신이 이토록 사랑한 자리는 늘 출렁거린다
열한 번째 발가락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가 쓸쓸하게 사라졌다
소화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육체가 유물처럼 어두워지는 무렵은
신이 사는 반지하
흘러간 살만큼 내려간 깊이에서
땅 위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우러러봐야 빛이 보였다
(시감상)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은 놓아두고 잊힌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내 안에 무엇인가 내가 놓친 무엇이 존재하는 것을 느낄 때, 어쩌면 그것은 방관이 아닌 놓친 것이 운명이라는 말로 변명해도 될 것 같은 논리적 모순. 반지하, 그곳은 목을 들어 우러러봐야 보이는 빛이 있다. 빛은 늘 그곳에 있는데 우린 때론 스스로 반지하에 살고 있을 때가 많다. 어쩌면 그것도 운명이라는 말로 방관하고 있는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프로필)
2012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한남대 교양대학 교수, 2022 시집(탄잘리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