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즘과 우리 사회의 신드롬
정봉구
위대한 문학은 한 시대가 스치고 지나가는 세속의 기미(機微)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독서 대중들 가슴속에 시류(時流)의 특징으로서 각인(刻印)을 남긴다. 그래서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대수롭지 않은 시정(市井) 얘기가 고전으로 반영된 불후의 작품이 되어,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플로베르(FIaubert:1821~1880)는 문학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많지 않은 거장(巨匠)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소설『보바리부인(Madame Bovary)』으로 우리들에게 더 친근하게 기억되며 문학사에 빛나는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는 이 소설로 하여 문학이 무엇이란 것을 독서 대중들에게 새로이 인식시켰고 문학이 지니는 사명이나 역할까지도 재음미토록 하였다.
본래 이소설 『보바리부인』은 플로베리의 처녀작으로 공표되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쓴 습작 『성 안트완느의 유혹』에 대한, 친구들의 혹평을 만회하기 위해 새로 쓰여진 분발의 후속타 대작이었다. 그에게 그와 같은 충격을 준 친구는 부이에(Bouihet:1822~1869)와 뒤 캉(Du Camp:1822~1894)이었으며 그들은 심지어 그 실패작을 태워 버리라고 까지 하였다.
그 쓰라림을 딛고 새로이 붓을 들어 몰두한 작품이 이『보바리 부인』이었다. 플로베리는 이 한 권의 소설을 쓰는데 무려 4년 반의 세월을 바쳤다. 1851년 9월부터 1856년 4월까지의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집필하기로 착상하게 된 발단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앞서 쓴 『성 안트완느의 유혹』초판에 대하여 혹평을 가한 부이에가 낙담하고 있는 친구 플로베르에게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 ‘들로네(Delaunay)사건’을 테마로 하고 새 소설 구상을 시도해 보라는 권유였다.
들로네 사건이란 그 당시 루왕(Rouen)시일대에서 떠들석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스캔들이었다. 드로네, 정확히는 들라마르(Delamare)라는 개업 의사가 루왕시 동쪽 약 15킬로쯤 되는 리(Ry)라는 곳에서 의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재취 부인 델핀느(Delphine)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결국은 궁지에 몰린 나머지 음독 자살을 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 문단을 분석하자면 로망티즘이 쇠퇴하기 시작하며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위로 불리는 새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서 플로베르는 나름대로 굳건한 자기세계를 형성하였다. 『보바리 부인』의 탄생이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플로베르는 흔히 있을 수 있는 한 가정의 비극을 펼쳐나간 것이다.
그래서 소설 『보바리부인』에는 ‘지방풍속’이란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문학사가(文學史家) 티보데(Thibaudet:1874~1936)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국한된 지방 풍속이 아니었다. “프랑스에는 단지 브르타뉴, 또는 프로방스, 또는 베아룽 하는 따위의 지방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의 지방, 그 하나의 지방은 하나면서도 하나로 떼어 낼 수 없는, 프랑스적인 지방으로 존재한다. 플로베르는 『보바리부인』에서 그 종합적인 형태를 세워놓은 것이다.”
이 종합적인 형태로 세워진 지방풍속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형태의 전형(모델)적인 인물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지방 정경이 펼쳐진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양상으로 준동하는 군상들. 그것들이 다름아닌 그로테스크의 진상들이다. 그로테스크(grotesque),우리말로 옮기자면 우스꽝스러운, 기묘한 ,괴상한등등 약간은 가관스럽다는 느낌도 있는 말이다. 그 속에서 ‘보바리즘‘도 발견된다.
플로베르는 『보바리부인』을 쓰면서, 먼저 쓴 [성 안트완느의 유혹]에서와 같은 지나친 서정성이나 주관성을 배제하며 냉철한 관찰과 엄격한 문체로 소설 문학의 극을 이루었다. 소설의 내용은 앞에 서도 언급했지만 흔히 있는 얘기로 한 여자의 전락 과정을 그린 것이다.
노르망디지방의 농부의 딸, 엠마(Emma)는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로마네스크한 영혼의 소유자다. 범용한 시골 의사인 남편 샤를르(Charles)에게 불만을 느끼고 가정 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먼저 홀아비 생활의 바람둥이 로돌프와 그리고 다음엔 젊은 멋쟁이로 공증인 사무실의 사무원 레옹과 불륜 관계 정사를 거듭하며 그 속에 빠져 버린다.
그와 같은 타락이 시작되며 쾌락의 선풍 속에서 엠마 보바리는, 자기가 소설을 그대로 살고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현실이 나타난다. 그녀가 남편 몰래 빌린 돈에 관해서, 무자비한 채권자가 그 변제를 재촉하며 그녀 남편에게 그것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녀는 비산을 먹고 자살한다. 멍청한 남편은, 아내를 잃고 나서 넋이 빠진 상태로 날을 보내다 얼마 아니되어 아내의 뒤를 따른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을 쓰면서 무진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작가가 지니는 초속적 감각(超俗的 感覺)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는 성공을 했다. 로마네스크한 꿈에 사로잡힌 주인공 엠마의 비극을 그리면서, 플로베르는 자신의 감수성으로, 부단히 엠마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로마네스크한 꿈을 현실과 대치시켜 놓음으로써 냉정한 객관 묘사를 구성한다.
공상 많은 엠마 보바리는 줄곤 소설 속의 인생을 실인생으로 착각하며 로마네스크한 꿈 속에 생의 유토피아를 그려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값싼 센티멘탈로 도장된 소설을 탐독하며 그것을 현실로 착각한 것이다. 결국 보바리부인은 자신이 그리는 로마네스크의 희생이 된 것이다. 플로베르는 그것을 ‘서정병’이라 하였고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보바리즘’이라 명칭하였다. 여기서 엠마 보바리를 먹이로 삼은 무서운 함정이야말로 다름아닌 그 그로테스크였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서글픈 그로테스크였다.
플로베르가 이 소설에서 지향한 것은 ‘로망티즘의 위험이라는 교훈’이었다. ‘변론적인 서정주의와 사실적(寫實的)인 관찰과 서글픈 그로테스크의 3중 지향’에서 이룩된 이 소설은 우리에게 ‘범속한 영혼에 의하여 실제 생활에 이끌려 든 서정적인 커다란 갈망이나 엄청난 흥분이 유발하는 빈약한 배덕, 타락, 비참 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로망티즘의 위험이라는 교훈’을 뒷받침하는 엠마 보바리의 몰락과정이 ‘보바리즘’으로 상징되었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 속에서 인생이 영위하는 잡다한 삶 속에 내재하는 ‘서글픈 우스꽝스러움’을 지적하며 그와 같은 우스꽝스러움의 또 하나의 변형으로 ‘보바리즘’을 그려낸 것이리라. 결국 이 보바리즘을 부추기며 비극으로 몰아넣은 주변 세계의 속물주의야말로 플로베르가 고발하고자 한 그 시대의 지방 풍속이었다. 속물 근성에 오염된 허풍쟁이들이 우글대는 사회, 사이비 과학을 내세우는 반종교적인 자, 장삿속이 되면 눈치 빠르게 움직이는 인색한 얌체족, 사상적으로 옹색하며 무식하고 볼품없는 급진파 좌익, 거드름을 떠는 위선자인 우익, 엠마 보바리를 먹이로 삼은 건달도 결국 그런 패거리 중의 일원이었다.
나는 보바리즘을 논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이상한 기류를 예감한다. 소위 말하는 ‘공주병’이니 ‘왕비병’이니 하는 일종의 신드롬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한국판 ‘서글픈 그로테스크’일 텐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매스컴이나 유사 문학작품들은 그것을 조장하며 부추기는 듯싶다. 우매한 대중이 서글픈 증후군(症候群)으로 넘실거리는 것을 보며 답답할 뿐이다.
프랑스 문학은 플로베르와 같은 대문호를 만남으로써 한 시대의 시류를 역사의 증인으로 남기며 걱정스러운 교훈을 던져 주었다. 사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한 남자로서 평생을 살며 몇 차례 보바리 부인을 만날 수 있고, 또 아리따운 여인으로서 평생에 몇몇 바람둥이 로돌프나 제비족 레옹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은 우리의 실인생에서 의미를 창출하지 못한다. 실인생은 소설일 수 없다. 소설의 인생은 실인생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혹시라도 빠지게 될 위험을 예고 해 주므로 아름다운 것이다.
소설 『보바리 부인』은 1856년 10월부터 12월에 걸쳐 [르뷰 드 빠리]지에 연재되며 피나르(Emest Pinart)검사에 의하여 고발 되었다. 소송의 죄목 명세는 풍속 파괴와 종교 모독이었다. 다행히 이 소송은 세나르(Jules Senard)변호사의 변론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857년 2월7일이었다. 그 후 레비(Levy)서점에 의하여 이 소설은 출판을 보았고, 플로베르는 이 책을 세나르 변호사에게 헌정, 출간하였다.
위대한 문학은 역사의 증인으로 고전이 된다. 마찬가지로 불후의 사상서는 인생의 지표로 만인 앞에 제시된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지성에 따라서 또는 그것을 전달하는 중계자의 이성에 의하여 결과는 많이 다르게 반영된다. 보바리즘의 비극도 이런 아이러니에서 싹트고 증대(增大)하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불후의 사상서 내지는 어떤 기막힌 유행의 첨단서적을 탐독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뚤어지고 어긋난 현실을 동경하여, 거기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바르게 살아나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면, 그 독서는 마약이 될 것이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유행성의 몰지각 증후군도 동일한 존재이며 결국 그와 같은 착각을 지니는 증후군들은 모두 엠마와 비슷한 ‘서정병’ 환자, 즉 보바리 즘 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