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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수필창작아카데미 24기-3차시 합평작(2025년 3월 10일 용)
1. 진일스님의 명상1/장만수1
밤이 있어야 별이 보이듯 대낮에는 별이 뜨 있어도 보이지는 않지요.
어둠이 없이는 밝은 별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둠은 밝음의 씨앗이고 절망은 희망을 위해 기꺼이 과거가 되어줍니다.
우리인생도 견딜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올 지라도 그런 밤이 있어야 별이 뜨지요.
그리고 그 별빛은 따뜻합니다.
달빛은 더 밝습니다.
별빛이 따뜻하고 달빛으로 밝음을 아는 것은 밤이 있기 때문이고,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 해가 뜨 오름을 믿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니 낙심하거나 절망함은 내 신심을 해치는 毒藥(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밭과 같다 했으니 그 마음밭에 긍정과 감사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가꾸어 나가면
하늘에서 햇볕을 비추고 비가 내려주어(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니) 때가되어 싹이나고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으니, 매사에 늘 긍정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마음밭에 희망을 심어시기 바랍니다(25.2.24).
2. 추억의 여행 / 신은선-1
1. 봄이 오는 길목에서 30여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했다.
갑자기 주어진 6시간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스무살의 기억을 더듬어 ‘그 곳으로 추억여행을 떠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초년생으로 풋풋한 나의 청춘과 맞닥뜨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약간의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을 쫓아 무작정 핸들을 돌렸다.
2.가난한 시절의 아련한 추억, 혀끝에 감도는 맛의 기억, 몸이 먼저 기억하고 그 곳으로 발길이 닿았다. 시장 안 식당은 오랜 세월에 찌든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 해 있었다. 보리밥을 지으면 나는 구수하면서도 쿰쿰한 냄새가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반겨주었다. 빛바랜 누런 벽지,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 벽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 등이 잊고 있던 감성을 불러 일으켰다. 드디어 양은 쟁반에 담겨져 온 된장과 시랏국, 김치, 나물한가지, 콩자반, 양재기에 나물 서너가지 전부였다. 보리밥은 따로 담겨져 나왔다. 검은색 짙은 국인지 찌개인지 불분명한 된장에는 알알이 부서진 콩알조각들이 둥둥 떠다녔지만 짜조롬한 맛은 옛 맛 그대로였다. 그 시절 먹던 보리밥이 오버랩 되었다.
3.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 계집애가 유일하게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보리밥이었다. 무생채, 배추겉절이, 상추, 콩나물에 흰쌀이 얼마 섞이지 않은 거의 꽁보리밥 수준의 보리밥 비빔밥이었다. 함께 주는 숭늉과 강된장이 너무 맛있는 할머니 표 보리밥. 물론 돈만 주면 무엇이든 맛난 것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겠지만 매달 올려 보내주는 생활비는 부모님의 피땀 어린 노동의 댓가인줄 알기에 아껴 쓰고 아껴 썼다.
4. 우리들이 대구로 유학을 온 것은 사촌 오빠가 풍기고등학교에서 대구경원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1남 4녀인 우리 집도 변화가 왔다. 부모님께서는 남동생을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시켰다. 유학을 시켜야 한다는 사촌오빠의 조언도 있었지만 교육에 대한 남다른 신념이 있으셨던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께서는 오빠집 근처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사서 공부시켰다. 처음에는 언니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졸업하기 전까지 4년동안 동생 뒷바라지를 했고 이어 둘째인 내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바톤을 이어 받았다.
어머니께서는 시골 분답지 않게 딸자식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다. 그 시절에는 여자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을 다니거나 좀 더 괜찮은 형편의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자매들은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모두 대학교를 졸업했다.
시골에서 1남 4녀 교육을 시키자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허리띠를 조아 매는 생활을 하셨을 것이다.
5.대도시로 유학 온 남동생을 돌보는 일이 네 자매의 역할이었다. 입이 까다로운 남동생은 인스턴트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 나물과 조림 반찬 등 동생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였다.
중학교3년, 고등학교3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 생각하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6.나는 강의 시간이 끝나면 부랴부랴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야 했고 매일 반찬 걱정을 했다. 과수원을 하시는 부모님께서는 매달 생활비를 부쳐 주셨지만 늘 빠듯한 돈으로 생활해야 했다. 시장에서 장을 보다보면 맛난 냄새가 사방에서 나를 유혹했다. 보글보글 끓여 오르는 빨알간 떡볶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어묵꼬치의 유혹, 치킨냄새는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돈 아낀다고 학식조차도 매일 매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식을 먹지 않은 날은 시장에서 풍겨오는 온갖 맛있는 냄새 때문에 주린 배를 움켜지고 장을 봐야 했다.
하루는 큰마음 먹고 보리밥을 한 그릇 주문해서 먹었다. 엄마가 해 주시는 맛 그대로였다. 된장이 어찌나 맛나던지...
숭늉 또한 시골냄새가 나는 구수한 맛이었다. 싹싹 긁어 먹는 나를 보시곤 주인 할머니께서 보리밥을 한 주걱 듬뿍 주시면서
“학생이 배가 어지간히 고팠나보네. 배가 고프면 모든 게 힘들지. 그러니 언제나 배가 든든해야 허” 많이 먹고 힘내라는 응원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부터 결혼하고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 그 식당은 나의 마음과 몸을 살찌우는 곳이 되었다.
7.생각해보면 별게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할머니의 보리밥 한 주걱과 응원의 한 말씀이 힘이 되었다. 앞이 깜깜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휩싸여 허우적거릴 때도 할머니의 말씀을 떠 올리며 힘을 내곤했다.
누구에게나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극한 상황에서 자신을 내려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그 자신이 의지하고 기댈 곳이 있다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오순도순 지구별 여행을 무사히 마치기를 기대 해 본다.
8.오늘은 나의 스무 살 그곳으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예순을 바라보는 봄길에서 나의 스무 살은 어땠는지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과연 열정을 가지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가?
세월의 무게는 나를 비켜갈 것이라는 오만함으로 편협된 사고로 삶을 살고 있지 않았던가?
마음은 늙지도 않았는데 몸은 어느덧 내일모레면 예순을 바라본다.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가 그곳을 갔지만 그곳에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할머니께서는 오래전 돌아가시고 머리카락 하얀 따님이 뒤를 이어 보리밥집을 이어 가고 있었다.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는 것일까? 세월의 무상함을 가슴 깊숙이 느끼는 하루였다. (2025.02.22.토)
3.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까지/황무선1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담금질의 시간 속에서 진통의 아픔을 감내한다. 어린 시절 향기로운 소나무 군락지인 고향 월송의 작은 방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벗삼아 공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행복했다.
오랜 기간 근무한 KT에서 정년퇴직이 다가올 무렵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허우적거렸다. 두근두근 새롭게 시작하는 미래를 떠올리며 흥분된 심리상태가 온 뇌리를 잠식했다.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최선을 다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자고 다짐했다. 4년 동안 타지인 안동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상을 향해 꿈꾸는 오작교가 되었다.
점심시간에는 가까운 안동도서관에서 습관처럼 몇 권의 책을 빌려 TV가 없는 공허한 사택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고독한 독서로 영웅이 되어 보는 취미가 유일한 낙이었다. 간혹 기와집을 몇 채씩 지으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방송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마음속에 깃든 문학의 보물찾기를 즐기자는 당찬 포부를 결심했다.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예술이다”에 공감하며 유년 시절 독서를 즐기고 재능 있는 글쓰기를 좋아한 것이 메아리가 되어 자신감으로 작용했기 때문일까?
방송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4년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소망하는 글쓰기를 하겠다는 무언의 용기가 온몸에 불타올랐다. 아등바등 붙들었던 성실한 직장생활은 윤택한 생활로 이어졌고 자녀들도 잘 성장하여 대견했고 시어머니께 용돈을 드릴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니 가슴 한 켠에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반짝이는 햇살이 되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가족에게 방송대 국문학과에 등록한다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원서를 야무지게 제출한 후 절반의 꿈을 이루었다고 합리화했다. 지적 호기심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의 모습을 닮았다. 오래전 꿈꾼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공부는 오래 지나지 않아 절망감으로 뒤덮였다.
새내기 무렵으로 기억한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A4용지 11포인트 기준으로 5페이지의 소설을 꽉 채우라는 것이다. 생뚱맞은 과제물에 당황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발품을 보탰고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정글의 법칙”을 올레 TV 재방송을 보며 힌트를 얻었다. 어차피 리포트를 제출하는 목표가 생기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독창적인 색깔로 무인도에서 견디는 방법을 능청스럽게 그렸다. 임기응변의 자격으로 작품에 몰입하니 국문학의 거부할 수 없는 환상적인 매력에 퐁당 빠져들었다.
국문학과의 즐거움은 일 년에 두 번씩 문학기행에 참여하는 것이다. 작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상상하고 섬세하게 표현한 마음의 눈을 읽는 것이 장점으로 다가왔다. 선후배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유명한 작가의 문학관에서 무궁무진한 언어의 세계를 탐구하고 배우니 늘 허기졌던 배움의 창고가 꽉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학우의 시 낭송을 감상하며 시의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멋진 시는 풍성한 묵은지를 닮아야 제맛이라 생각한다.
한 학년을 마치면 국문학과 문예지의 꽃인 반월제 행사를 마주한다. 수필을 쓰기 위해 이론적인 형식과 일상적인 체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방점이다. 반월지 작품은 매년 한 편의 수필을 출품하는 것이 보람되고 절망보다 희망을 노래하며 화자의 수필이 책꽃이에서 반갑게 맞이할 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며 기쁨이다.
요즘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인 빈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정신적 버팀목인 취미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질리지 않는 삶을 지속하고 치유하는 것은 내면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대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니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교수님의 강의는 어느덧 귀에 안전하게 착상되어 자리를 잡았고 흥미를 유발했다.
반복적으로 듣는 강의가 취미가 될 무렵에는 공부에 자신감이 생겼다. 인생은 부단한 장애물의 제거 작업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힘든 공부지만 애정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도전하고 문을 두드리면 엉켜진 실타래가 저절로 풀리는 법이다. 어린 시절 소홀했던 공부가 후회될 때도 있었지만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궁금한 내용의 얼굴이 줄을 서서 호기심을 부른다.
어려운 대학영어는 수많은 단어를 연습장에 옮기며 암기를 했고 어설픈 해석에 시간을 보태어 관문을 통과했다. 한문은 스마트폰에 한자 필기인식 사전을 설치하여 호위병처럼 다루었다. 강의에 집중하는 습관을 일기처럼 채워가고 성적 향상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려운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연상으로 쉽게 암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 친구에게 대학 공부를 함께 하자고 권유했지만 “나이 들어 힘든 공부를 왜 하느냐”는 시덥잖은 답변에 설득력을 잃고 기운이 빠졌다. 기말고사 시험이 다가오면 대경 방송대 복도는 공부에 도전하는 황혼의 학우들이 북새통이 되고 거대한 기업을 방불케 한다. 갇힌 사고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배움에는 나이와 반비례하고 두뇌를 자주 사용하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고 똑똑해진다. 국문학과는 글쓰기가 기본이며 주제와 맥락을 정리하는 것이 포인트다. 매사에 긍정적이며 노력하는 태도는 공부에도 예외가 없었고 오직“열심히 하자”라는 문구를 책상에 새기며 최면을 걸었다. 살아오면서 작은 훈장처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덤으로 생겼다. 다양한 모습의 얼굴에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의 흔적이 엿보인다. 가슴속에 사랑을 담고 살아온 모습은 자애롭고 포근함이 풍기고 열심히 건강하게 살아온 흔적은 나이와 다르게 날씬하고 당당한 아름다움이 숨었다. 상대방의 장점을 본받아 내 걸로 채우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과 시간을 잘 관리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유익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꿈을 향해 도전하면 반드시 밝은 미래가 약속처럼 다가온다.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숭고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4년 동안 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힘듦을 견디며 보석 같은 지식을 채웠다. 어려움이 곳곳에서 방해했지만 불편함을 사랑의 힘으로 꿋꿋하게 견뎌냈다. 주체는 본인이기에 긍정적인 생각과 현명한 판단이 중요하다. 눈을 떠보니 불쑥 많이 성장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글쓰기를 위해 많은 시간을 국문학이라는 장르에 투자했다.
수필을 쓰려면 다양하게 살아온 흔적을 심도 있는 표현으로 타자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어야 한다. 문학이 취미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추운 환경을 탓하지 않는 어머니의 거룩한 모성애와 사랑으로 연결된 책임감이다. 울진의 정직한 소나무와 아름다운 풍광은 고통스러울 때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조금씩 시간을 정하여 글쓰기를 한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지만 어릴 적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감동적인 삶에 미소가 번진다.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하얀 백지 위에 색깔을 입히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문학이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겸손함과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진다. 매미는 3년을 땅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가 깨어나서 7일을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문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렵고 힘든 긴 터널의 시간을 보냈다.
꿈을 향해 작은 소망들이 하나둘 성취하는 가운데 도전하고 노력하는 자세는 꽃보다 아름다운 자산이다. 만학에 시작한 공부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라는 양념이 징검다리가 되었다. 희망이 있는 문학의 놀이터에서 아름다운 눈으로 궁금한 세상을 여행하며 무지개 색깔의 사랑을 꽃피운다.
4. 구름바다를 건너는 다리/ 금우동1
대한항공을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중이다. 어떻게 나이 일흔을 넘겨 생애 첫 여권을 만들고 이곳으로 떠나게 되었을까. 이른바 효도 관광이다. 딸 셋 중 막내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가 되었다. 덕분에 이번 여행은 막내의 비행 일정에 맞춰 결정되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바다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내 인생에도 건너야 했던 수많은 다리가 있었음을.
비행기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은가.
수많은 도전과 시련의 다리를 건너며, 마침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 마치 이 비행기가 구름 위를 가로지르듯, 우리도 각자의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번 여행지는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도나우강의 다리를 통해 하나의 도시가 된 부다페스트다. 우리에게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노래로 익숙한 이 강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400년의 식민 지배와 공산 치하의 시련,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견뎌낸 머저르 민족의 아픔이 서린 곳. 수많은 세월과 역사가 흐르는 그 강 위의 다리는, 마치 한 시대에서 또 다른 시대로 건너가는 인간의 여정을 닮아 있다.
이번 여정은 딸과의 특별한 시간이다. 함께한 다섯 명의 조종사 중 유일한 여성 부기장이 딸이라는 사실이 더욱 자랑스럽다.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바다를 바라보며, 조종사가 바다와 하늘을 착각해 바다로 추락하는 사고가 드물게 발생한다는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어려운 이 풍경 속에서, 나는 삶과 운명의 경계를 되새긴다.
딸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다리를 건너왔으리라. 평범했던 중학교 2학년 시절, TV 뉴스에서 공군사관학교에 여생도가 입학해 조종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날 이후, 밤낮없이 공부에 몰입했고 결국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로서 학비 걱정을 덜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사관학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생도들의 내무반을 방문했을 때, 옷장 안 작은 종이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힘든 훈련을 견디고 있는 딸을 생각하니, 아내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집에 온 딸이 우연히 다리를 부딪쳤을 때, 단단한 책상다리에 부딪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훈련을 통해 단련된 근육이 운동선수를 연상케 했다. **‘명검은 천만 번의 두드림 속에서 태어난다’**는 말처럼, 딸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시련과 훈련의 다리를 건너왔다.
아내는 지금 또 다른 다리를 건너고 있다. 파킨슨병을 앓은 지 20년이 넘었다. 양쪽 무릎과 왼쪽 발목, 그리고 왼쪽 고관절에는 인공관절이 들어가 있다. 오른쪽 발목은 걷기조차 힘들고, 허리 통증과 호흡 곤란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간다.
젊은 시절, 우리 가정을 위해 그토록 헌신했던 아내가 이제는 스스로 일어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스물둘의 아내와 혼배성사를 올린 날이 떠오른다. 8남매의 맏이였던 아내는 처가에서 개혼을 하며 나와 함께했다. 나는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며 막막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었다. 연탄 한 장을 밤새 번갈아 피워 어머니와 신혼방을 데우던 시절, 장인이 다녀가신 뒤 아내에게 연탄 100장 값이 든 돈을 쥐여주고 가셨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되었다.
아내는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 인형 눈 붙이기, 밤 까기, 삯바느질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과 자녀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시장에서 사온 옷보다 손수 지은 옷이 더 많았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희생은 변함없이 우리 가정을 지탱하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창밖의 운해를 보며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우리가 함께 건너온 수많은 다리들. 때론 험난했고, 때론 눈물겨웠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며 여기까지 왔다.
인생은 다리를 놓는 과정이다.
꿈과 현실을 잇는 다리, 고난과 성취를 잇는 다리, 그리고 사랑과 희생을 잇는 다리. 이번 여행은 나에게 다시금 다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딸이 건너온 다리, 아내가 견뎌온 다리, 그리고 내가 지나온 다리. 그 모든 다리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다시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내 인생의 다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잠시 비워둔 자리도 다시 일상 속에 스며들 것이다.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지길 바라며, 이번 여행이 그 에너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언젠가 온 가족이 함께 구름바다의 다리를 건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인생의 모든 다리를 건너,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하나가 되는 그날을 위해.
첫댓글 공지
1. 한 학기 당
개인 1인 5작품까지 합평작품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문우들이 습작품을 볼 수 있도록
카페에 탑재하는 것은 제한이 없고 환영합니다.
5작품 이상 올렸을 때는
강사가 임의로 선별하여 편집합니다.
글을 많이 올렸다고 매주 다루지는 않습니다.
2. 다음 수업시간에 합평으로 다룰 작품은
제목의 색깔이 푸른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3. 합평작품은 탑재 순서대로 다룹니다.
네, 감사합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