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찬송가의 유래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전해져 예배가 드릴 때 어떤 찬송을 불렀을까? 처음에는 우리 말 찬송이 없었기 때문에 한문으로 된 중국어 찬송가를 이용했다. 1887년 백홍준, 서상륜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문안 교회도 처음에는 중국어 찬송을 불렀다. 백홍준의 딸 백성관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새벽이면 기도하시고 중국어 찬송을 부르셨다”고 하고 아펜셀러 목사님도 “조선말로 찬미를 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반면에 이화하당이나 배재학당의 채플에서는 영어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역이나 선교부에 따라 각기 다른 찬송을 지어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 찬송가 편찬은 선교사가 입국한 지 8년이 지난 1892년 감리교의 죤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한 27편이 수록된 악보 없는 ‘찬미가’였다. 2년 후 장로교는 언드우드에 의해 117곡으로 된 ‘찬양가’를 편집하였다. 상단에는 4성부(4聲部) 악보가 그려져 있고 하단부에 가사를 기록한 최초의 서양식 악보가 인쇄된 음악책이었다.
이 찬양가는 주로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사용하였다. 반면에 서북지역에서는 장로교 선교사 그래함 리와 기포드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를 사용하였다. 이를 기초로 마펫이 137곡을 수록한 곡보 ‘찬셩시’를 간행하였는데 장로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감리교의 죤스와 로드와일어의 ‘찬미가’도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207곡으로 늘어나 감리교의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 찬송가 편찬에 기여한 인물은 침례교 선교사 펜윅이었다. 그가 1899년 14장의 찬송을 편집한 ‘복음찬미’가 계속 증보되어 1939년 판에는 274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이 침례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 주도적인 두 교회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연합과 일치를 위해 통일괸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열매를 맺어 1908년에는 장.감 연합의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262곡이 수록된 이 찬송가는 1908년 초판이 6만부, 1910년까지 22만 5천부, 1911년 한 해 동안 5만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이 오늘날 불리는 찬송가의 모태가 되었다. 찬송가는 한국 음악에도 양향을 끼쳤고 많은 현재명, 박태준, 안익태 등과 같은 서양 음악가들을 키워낸 온상이었다.
한국 초기에 번역되고 가장 많이 애창된 노래는 미국인 와너가 1859년에 쓴 가사에 브레드버리가 곡을 붙인 “예수 사랑하심(563장)”이었다. 이 노래를 번역한 사람은 펜윅과 애니 베어드였다. 1890년 펜윅이 번약했던 천 가사를 보면 예수님을 “예수씨”라고 번역하였다. 당시 성경번역에서도 바울씨 요한씨 베드로씨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첫댓글 아 !
예수씨!
천집사씨, 깃털보다 몸통을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