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기념관 「병자호란」특별전시 -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1일 전쟁기념관(서울 용산구) 입구에는 견학나온 학생들과 시민들로 가득했다. 전시관 1층에는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관 입구에는 한글과 일어로 번역된 소책자가 비치되었다.
전쟁기념관 특별기획전은 '조선의 산하, 전운이 감돌다', ' 뒤바뀐 산하, 병자호란', '북벌과 부국강병의 꿈', '병자호란을 돌아보다'라는 4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 학생과 시민, 외국인 등, 특별기획전 전시를 돌아보고 있다.
병자호란은 인조 14년(1636) 청나라가 조선에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1612년 후금(後金:뒤의 靑나라)은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했고, 후금과 조선은 형과 아우가 되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은 정묘호란 [인조 5(1627) 후금이 조선에 1차 침입한 전쟁] 이후, 후금의 요구대로 무역을 통해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과 필수품을 공급했다. 그러나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어기고 식량을 강탈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조선에 온갖 압박을 가했다. 또한 압록강을 건너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고 변방의 백성과 수장(守將)들을 괴롭혔다.
▲ 기획전 입구에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 등, 주화파 신하들이 남긴 글이 대형 족자에 쓰여 걸려있다.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양반과 조정 신하들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拜金: 후금과 화해를 반대함) 을 주장했다. 인조도 이 것에 동조하고 후금의 사신 접견을 거절하고 그들을 감시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을 알아차리고 도망가, 모든 사실을 청태종에게 고하므로 조선을 두번째 침략한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조선은 또 다시 전쟁을 겪게되고 백성의 고통은 말할수 없이 피폐했다. 청의 속국이 된 조선은 왕자와 척화파 관료등 20만 명의 백성이 인질로 잡혀갔다. 막강한 청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한양을 쳐들어왔다. 놀란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45일을 버텼다. 그러나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1617년 1월, 인조는 신하를 의미하는 남색 복장을 하고 찬바람이 부는 삼전도 나루터(지금의 송파)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3배 9고두례를 해야했다. 3배 9고두례란, 3번 큰절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아 단 위에 있는 청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청나라 인사방식이다.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이자, 인조의 치욕이다.
청 은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위한 비를 조선에 건립할것을 강요했다. 삼전도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새겼으며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골문자, 오른쪽에는 만주문자, 뒤쪽에는 한문으로 씌여있다. 1980년 송파대로 석촌동 주택가 공원에 세워졌다가 2010년 한강변 나루터였던 원래의 자리인 잠실동에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은 임금과 집권 양반층의 무능 때문에 수많은 민초들이 격어야 했던 전쟁이다. 인조 임금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국제 정세에 재빨리 대응했다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병자호란은 무능한 임금(인조)과 감당할 능력도 없이 날뛰던 척화파(김상헌,정온,윤집,오달제 등) 들이 부른 참극이다.
전쟁기념관은 병자호란 종전(전쟁이 끝남) 380주년을 맞아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 의 특별기획전을 11월 19일 까지 전시하고 있다.
2017. 8/4. 이복원 기자
전쟁기념관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 특별전시(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