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향 의 봄 ♣
이 원 수 詩 . 홍 난 파 曲
. 애국가보다 많이 불린다는 노래 <고향의 봄>은 이원수가 14세
때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고향의 봄>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우물처럼 깊게 담겨 있다.
「고향의 봄」이 우리 민족의 노래가 된 데에는 우리가 아픈
역사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고향이 곧 나라였고
고향의 정서는 잃어버린 나라의 정서와 맞닿아 있었다.
. 그리고 해방 뒤 6·25전쟁을 겪으면서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전쟁 이재민들은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고향
의 봄」을 불렀고, 그 뒤 1960년대부터 해외로 일을 찾아나간
동포들은 애국가보다「고향의 봄」을 먼저 불러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했다.
. 뿐만 아니라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위안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은, 노래 말 구절구절 표현된 고향의
모습이 우리네 전형적인 고향을 떠올리기에 충분하고 또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도 우려내기 때문이다.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런 봄꽃들이 만발한
우리네 뒷산과 나지막이 자리한 집들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샘솟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한국인의 가슴에 그리움을 우물처럼
깊게 새긴 대표 동요가「고향의 봄」인 것이다.
<'고향의 봄' 창작의 비밀>
. 이원수는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열 달 만에 창원으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마산으로 이사하여 마산
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창원 소답리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
동시「고향의 봄」을 썼다.
.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인 방정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잡지 <어린이>지에 원고를
보냈고, 그 다음해인 1926년 <어린이>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
지게 되었다.
. 이 동시에「산토끼」를 작곡한 이일래(李一來·1903 ~
1979)가 곡을 붙여 마산 일대에서 불리어지다가 홍난파가 다시
곡을 붙인 이래 아리랑만큼이나 민족애를 느끼는 동요로 전국
적으로 애창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곳은 경남 창원 소답동이다.
. 이원수는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에‘자전회고록 -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
이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
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
도 아름다웠다.
. 서당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것 같았다..."
. 이 동요의 배경이 된 고택은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로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200호로 지정돼 있으며, 고택 앞길을‘이원수길’
이라 부른다.
☞ 아동문학가 이원수 (1911~1981)
. 이원수는 1911년 음력 11월 17일 경상남도 양산에서 딸 많은
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넷,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었다. 목수인 아버지(이문술)를 따라 경남 양산, 창원, 김해,
마산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 1922년 마산으로 이사해 마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
했다. 마산에 정착한 후 방정환이 펴낸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
와 '신소년'을 애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 마산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25년 창원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고향의 봄」이라는 동시를 썼고, 이 작품이 1926년 『어린이』 4월호에 입선작으로 당선되었다.
. 1926년 마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
인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학급신문에 게재하여 경찰에서
문제를 삼았으나 당시 담임교사가 책임을 져 처벌을 면했다.
. 1928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윤석중, 윤복진등과 '기쁨사'의 동인으로 가담,
'어린이'지의 집필동인으로 활동 하였다.
. 1931년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함안금융조합에서 일을
하다가 반일 문학그룹인 '함안독서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1935년 2월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개월 동안 감옥 생활
을 하기도 하였다.
. 1936년 1월 출감한 후, 같은해 6월, 동요 <오빠생각>을 지은
최순애(1914~1998)와 결혼했다.
. 마산과 수원에 살던 10대 두 사람은 편지로 사연을 주고 받다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결혼해 직장까지 잘려 막막하던 시절
금융조합 한 이사(理事)의 도움으로 1937년 함안금융조합에
복직했다. 문제는 이 금융조합에 입사한 것이 이원수의 생애에
불명예를 안기게 된다.
. 직장을 마련해 준 분의 부탁으로 기관지에다 글을 쓴것이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 광복과 함께 서울 경기공립공업학교(現 서울공고)의 교사로
근무했고, 1947년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 해방 후에는 주로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면서 해방 후 혼란에
빠진 조국과 어린이들의 참상을 글로 표현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자녀 두 명을 잃는 비운을 겪어야 했던 이원수는 1954년
한정동과 함께 아동문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부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 대표작으로는 수 많은 동시와 동화 소년소설이 있지만 우리가
어릴적 즐겨부르던 동요 '겨울나무'(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와 가난했던 어린시절 광산으로 돌캐는 일을 다니던
누나를 생각해서 지은 '찔레꽃'(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언니
일 가는 광산길에 피었다오 ~)훗날 포크가수 이연실이 '언니'를
'엄마' 로 개사해서 불러 지금까지 사랑받고있다.
. 고난과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늘 어린이들을 위해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온 이원수는1970년 서울교육대학에서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되었고, 1973년 한국문학상, 1974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0년 대한
민국 문학상 등을 각각 수상했다.
. 1981년 1월 24일 71세를 일기로 타계한 후에는 금관문화
훈장이 1982년에 추서되었다.
. 본 포스트에 올려진 동요 관련 이미지들은 이원수선생님
동시에 김동성 작가가 그림을 더해 가사의 한 줄 한 줄을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만든 그림책에서 발췌한것이다.
. 위에 그림은 맨 마지막 뒷장 속지의 그림이다. 이원수 선생님이
기억속의 고향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나온다 .
.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헌정의 마음을 담아낸 듯 하다.
☞ 홍난파 (1898∼1941. 작곡가·바이올린연주자)
. 일반적으로 홍난파(본명은 홍영후:洪永厚)라고 하면 음악가
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해방 후 거의 독과점이다시피한
그의 음악이 문학가이기도 했던 그의 면모를 가리운 이유다.
. 홍난파는 1924년(26세) 전 까지는 음악연주활동보다는 소설,
수필, 번역, 평론 등 문학 활동에 치중했던 인물이었다.
. 그의 이름앞에는 항상 한국 음악사상 '최초'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즉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
를 열고 최초의 실내악단(난파삼중주단)을 결성하였으며 최초의
음악평론가, 최초의 음악잡지 삼광(三光) 발행인, 최초의 방송
관현악단(경성중앙방송국) 지휘자와 같은 수식과 더불어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 <음악계(音樂界)>를 만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연악회 (硏樂會)>라는 음악 연구 단체를 만들어 악기와
음악 이론을 가르쳤다. 또 아이들을 위한 동요와 우리나라 가요
의 작곡에도 힘썼다.
.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2세때 서울 정동
으로 이사했다.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
교회에서 언더우드의 조선어선생이기도 하였던 아버지의 영향
으로 어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음악에 접하였고
서양음악에 입문하였다.
. 1910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중학과정에 다니면서
1912년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
所)에서 성악과 기악을 배운 후 1914년 졸업하였다.
. 난파는 잠깐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가량 의학공부를
하였으나 음악으로 뜻을 굳히고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관립
도쿄[東京]음악학교(일명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와 1926년
도쿄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國立]음악대학)을 다니면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 그후 1931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에 다니던중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 홍난파는 미국에서 독립운동 단체‘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에 약 석 달 동안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서
나오려면‘앞으로는 일본제국의 백성으로 본분을 다하겠다’
라는 다짐을 해야 했다.
. 이 시기를 전후로 1941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와 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는 등 친일의 흔적을
남겼다. 결국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 사실 홍난파 뿐만 아니라 조두남, 안익태, 현제명,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음악
가들은 폭압적인 일본에 친일을 위한 곡들을 쓸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나 뷴명한것은 식민지의 백성으로 울분을 지니며 살았던
이들은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동요를 수 없이 작사
작곡하였다.
. 홍난파의 음악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봉선화>다. 친구
김형준의 시에 그가 처음으로 지은 곡‘애수’를 붙여 만든
노래로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한 노래로
전국에 퍼져나갔다. 일본 경찰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
. 이밖에도 그의 주요작품은 <봉선화>(1920) 외에 <성불사의
밤>(1932) <옛동산에 올라>(1932) <고향의 봄>(1927)
<달마중> (1932) <낮에 나온 반달>(1927) 등의 동요, 등이
있다.
. 홍난파는 1937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거의 활동을 못하다가
1941년 8월 30일에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 정부에서는 1965년 10월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 고 향 의 봄 ♣
이 원 수 詩 홍 난 파 曲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배경음악 >
♬ 고향의 봄 / 리틀엔젤스 . 하모니카연주 ♪
< 고향의 봄 / 리틀엔젤스 >
☞ 동영상보기 (하모니카 연주를 배경으로 유튜브에 업로드 한것임)
VIDEO
첫댓글 오래전에 한번 소개했던 동요인데 그사이 많은 자료가 스캔되어 새롭게 꾸며봤습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샘솟게 하기에 충분한 동요, 해외로 일을 찾아 나간 동포들이 애국가 보다 더 많이 불렀다는 '고향의 봄' 을 봄이 시작되는 첫 주말저녁 봄음악이야기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