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안사에서
아침부터 덥다. 대구문화재지킴이 회원이 1박 2일 답사 가는 날이다. 차 속 텔레비전에서는 한낮 기온이 삼 십 오·육 도를 오르내린단다. 에어컨 덕분에 더위를 실감하지 못하고 회장이 진행하는 퀴즈 풀이에 정신을 쏟고 있다. 차창 밖 산천의 수목이 신록을 자랑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듯하다. 처서가 지났으니 수목들도 곧 잎마다 알록달록 물감을 머금고 아름다움을 자랑하겠지. 그리고 미련 없이 잎을 떨구고 긴 겨울잠을 준비하리라.
‘화개산 도피안사(花開山到彼岸寺)’다. 대구에서 관광버스로 5시간을 왔다. 속세에서 피안에 이르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피안(彼岸)’ 불교에서 말하는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 또는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이름’을 뜻한다. 나는 지금껏 차안(此岸)의 세계에 있지 않았는가. 내가 피안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절이다.
혹 여기에는 피안에 도달하는 방법이라도 있을까. 사찰 소개 리플렛을 읽는다. 곱게 단풍 든 나무 아래 석탑과 대적광전이 돋보인다. 그 아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과 도피안사3층석탑(보물 제223호) 사진이다. 표제 밑에 도피안사를 요약 소개한 글이 있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대로 옮겨 본다.
“도피안사”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건국 이래 최초로 백성들이 순수하게 부처님으로부터 현몽을 받아 제작이 된 부처님으로서 우리나라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에 제작이 되었습니다.
짧은 생각인지는 모르나 도피안사 홍보자료로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리플렛 어디에도 피안에 이를 방법이 없다. 그렇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방법은 나 자신의 문제지 누구에게 배워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차안이나 피안의 생활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입구에서 본 사찰 소개 안내판이다.
도피안사는 서기 865년 통일신라 시대 제48대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가 향도 천여 명을 거느리고 천하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彼岸)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하여 화개산 현 위치에 도피안사를 창건하여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보물 제223호 3층 석탑을 조성한 후 사찰 이름을 도피안사로 명명했다.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겠다. 왜 이곳이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 같은 곳일까 생각하며 사찰경내 여기저기 소요한다.
여기도 다른 사찰처럼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새로 지은 듯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진 대적광전은 아직 단청도 하지 않았다. 극락보전도 일부만 단청이 보인다. 사찰마다 건물에 울긋불긋 단청한 모습을 보다가 원목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법당의 모습이 남달랐다. 피안과 차안의 차이가 이런 것일까. 다른 큰 사찰들처럼 웅장해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고향 집 마당을 거니는 듯 분위기가 정겹다.
요사채 앞에서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절 마당으로 올라올 때 본 연꽃이 생각난다. 극락세계를 달리 부를 때 ‘연방(蓮邦)’이라 하지 않는가. 정토(淨土)에 왕생하는 사람은 모두 연꽃 속에서 난다고 해 ‘연태(蓮態)’라고도 한다. 언제 보아도 꽃말처럼 연꽃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 보인다.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의 수많은 초록색 잎 속에 연한 홍색 꽃과 백색 꽃도 보인다. 진흙 속에서 자라 꽃을 피우나 맑고 깨끗하다.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나 그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도피안사에서 본 연꽃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절마다 모셔 놓은 부처님께서 연꽃 대좌에 계시는 연유를 알 것 같다.
공양간을 찾았다. 뷔페식이다. 사찰의 공양도 시속에 따라 변하는구나. 반찬이나 밥을 남기지 않고 양껏 먹을 수 있어 좋다. 벽에 “음식을 알맞게 가져와 드시고 먹은 그릇은 각자가 씻어 놓으세요.”라고 쓴 글자가 보인다. 집에서 식사 후 그릇 씻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어색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을 하며 공양을 마쳤다. 수저를 놓은 순간 옆자리의 여자회원 한 분이 내 그릇과 자기 그릇, 앞에 있는 다른 남자회원의 빈 그릇을 모아 가져간다. 예상하지 못한 배려다. 지금 순간은 차안이라도 피안에 온 기분이다. 여자회원의 배려가 한결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배려를 받고 보니 오는 도중 ‘3·8선 휴게소’에서 본 낡은 현수막의 문구가 새롭다. “화장실만 이용하지 말고 매점도 이용해 주세요.” 식당과 매점을 겸하고 있는 휴게소의 화장실 가는 길목에 있었다. 피안의 세계, 서로 배려하는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