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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천 수필문학
윤재천 수필의 열정과 갈증
- 《퓨전수필을 말하다》를 중심으로 -
최원현
1. 윤재천과 한국 수필
한국 현대수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이름 몇이 있다. 1970년도를 전후하여 한국수필을 일으킨 분들이다.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수필문예》를 창간한 조경희. 서정범. 박연구. 윤재천을 비롯하여 월간 《수필문학》을 창간한 김승우·김효자 부부 교수, 《수필문학》이 폐간 될 위기에 놓이자 이를 살리기 위해 한국수필문학진흥회를 발족시켰던 김태길. 차주환. 이응백. 공덕룡. 김우현 등이다. 그 중 윤재천은 그 시기에 특히 많은 공헌을 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문학으로서의 수필은 참으로 미미한 존재였다. 다른 장르와는 달리, 수필을 잡문 시(雜文視)하는 통념(通念)이 강한 시기였다. 그런 때인 1967년 상명여자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학과장이던 윤재천은 교과과정에 수필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학문으로의 수필문학을 시도했다. 우리나라 대학에 처음으로 수필문학을 개설한 것이다.
그는 한국수필가협회도 만들어지기 전 공식적인 수필단체가 없던 때인 1969년 여름방학 때, 박연구 수필가와 명계웅 문학평론가와 종로 네거리 ‘양지’ 다방에 모여 ‘현대수필동인회’를 결성한다. 거기에 수필에 대한 사랑이 끓던 박찬계(중앙대학교 학생처장). 서정범(경희대학교 국어과 교수). 윤호영(국립경찰병원 신체검사과장). 윤홍로(대전대 국문학 전임강사). 정봉구(상명여사대 불문학 교수). 주종연(서울대학교 국문학 강사) 등 6명이 합류하여 아홉 사람이 동인이 된다.
동인회가 만들어지자 동인지를 내자고 했다. 수필을 쓰고 쓴 작품을 모았다. 편집회의를 열고 두 편씩의 작품을 싣기로 했다. 그리고 창간 특집으로 <수필적 수필론> 곧 수필로 쓰는 수필론을 싣기로 했다. 도미유학중인 명계웅 문학평론가의 ‘韓國隨筆文學考’라는 평론도 싣기로 한다. 제호(題號)는『現代隨筆』, 제자(題字)는 이건걸이 쓰고, 표지화(表紙畵)는 심만기. 발행은 범우사에서 하기로 했다. 그렇게 1970년 11월 27일 펴낸 것이 《現代隨筆》第1輯이다.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현대수필, 어쩌면 본격 수필의 시대를 여는 작업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전부터 한국수필의 발전을 위하여 씨를 뿌렸고 거름을 주었고 계속해서 영역 확대와 지경을 넓히기 위해 쉼 없이 애써왔었다.
윤재천은 1969년 11월 현대문학에 “만년 과도기”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는 1932년 경기도 안성에서 아버지 윤명희, 어머니 박수복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1952년 중앙대학교 국어 국문과에 입학하여 현대문학을, 1956년엔 중앙대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다. 그때 중앙대학교 문리대 학장이던 白鐵을 만나게 되어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 조교로 있게 된다. 그로 인해 스승 백철의 연구실 내방객인 시인, 소설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은 그의 문학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58년부터는 국어국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1967년엔 국문학 사전을 발간한다. 현대수필문학 동인, 한국수필학회 이사로 활동하며 1974년 처녀 수필집 다리가 예쁜 여인 발간을 시작으로 수필문학론, 수필 작법 등 많은 이론서와 수필집을 출간했다. 1992년에는 수필 전문 계간지 현대수필을 창간하여 2011년 겨울호로 통권 80호 창간 만 10년이 된다. 1993년에는 한국수필학회, 1994년에는 한국수필학연구소를 창립, 1994년부터 국내 유일의 수필 이론지인 隨筆學을 창간하여 자비로 2011년 19집까지 발간 전국의 대학도서관과 수필가들에게 보내주면서 학문으로의 수필문학 정립을 위해서도 혼심의 힘을 다하고 있다.
윤재천의 호는 雲亭이니 구름정자 곧 ‘구름카페’다. 그는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옆자리의 모르는 이에게 희망을 풀어 주기도 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며 꿈을 되찾을 수 있는 곳 즉, 상상 속에서 다가오는 따뜻한 풍경’(수필 <구름카페> 중)의 구름카페를 소망한다. 아니 그 소망을 가슴에서 키운다. 그러면서 2001년 12월 1일 경기도 양평의 ‘참 좋은 생각’이란 카페에서 ‘수필의 날’을 제정 선포하고 매년 12월 1일을 ‘수필의 날’로 지키게 한다. 지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일신수필’의 집필일인 7월 15일로 기념하고 있는 그 출발점이 바로 윤재천의 수필의 날(6회까지 현대수필에서 주관하다 7회부터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로 이관)이다. 그리고 2005년 구름카페문학상을 제정(제1회 수상자 전규태)하여 2011년까지 7회째 시상하고 있다. 또한 2004년부터는 수필과 그림이 하나가 된 수화전(隨畵展)도 개최하고 있다.
그는 왜 이처럼 수필에 대한 열정을 펼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 수필에 미치게(?) 했을까.
2. 열정과 갈증 그리고 윤재천의 수필 실험
윤재천의 열정은 갈증이다. 누구에게나 열정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학적 치열성을 생명처럼 불태운 사람은 별로 없다. 윤재천에겐 그것이 숙명일 수 있다. 내가 먼저 하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대절명의 소명이다. 그렇기에 윤재천에게 문학은 삶의 차원을 넘는 생명 곧 목숨이었다.
‘문학의 힘은 작품자체가 지닌 매혹적인 면모와 함께 그것이 잉태할 수 있었던 정신의 깊이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역사를 예리하게 관찰하는 눈과 철학적 비판이 뒤따르지 않는 문학은 내용물이 없는 형식, 속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 하나에 집중되어 오래 머물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획득하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 속성이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로 알려져 있다. 누구나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모두 수필로 인정할 수는 없다. 옥석은 가려져야 한다.‘ (윤재천 <보다 확대된 세계를 향한 도전> 중)
옥석, 그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문제다.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보통의 작품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이다. 같은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이 아니라 다른 장르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다. 수필을 사랑하는, 수필에 평생을 건 그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게 가능한데 왜 그렇게 하지 못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쉴 수가 없다. 팔순이 넘었음에도 이십대의 청춘처럼 도전하고 자극하는 이유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창조해 내려 한다. 뒤집어도 보고 비틀어도 보고 아래서도 보고 내려다도 본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런 시도가 수화(隨畵)수필이었고 퓨전수필이다. 눈으로, 귀로, 생각으로, 잠시도 쉴 수 없는 그의 안타까운 시도와 도전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나를 밟아라, 나를 밟고 넘어서라.’고 독려하고 채찍질한다. 그런 그의 생각은 2002년 문예연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수필의 날' 제정에 따른 의의와 각오를
‘2001년 12월 1일,『현대수필문학회(현대수필)』에서 '수필의 날'을 제정하면서 발표했던 선언문은 단순히 의식(儀式)적인 절차에 의해 급조된 것이 아니고, 수필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인간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의 고양과 새로운 생명의 열기와 인간만이 보유한 아름다운 심성을 발견케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2002 문예연감 <Ⅳ 수필의 날 제정에 따른 의의와 각오> 중)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연간 수필 평에
‘수필문학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이론적 근간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약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경계를 마련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론이 만들어지고 그를 근거로 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고, 작품을 군집한 후 이를 바탕으로 한 이론을 결집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하고 그렇지 못한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만큼 병행할 수밖에 없다. 부단히 이론개발에 혼신을 다하면서, 예술적 가치를 고양할 수 있는 수필을 창작하는 일에도 매진해야 한다.
현실에 주목할 때, 우리에게 당면한 일은 수필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의 회복'은 신뢰의 건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2002 문예연감 <Ⅲ 수필발전을 위한 모색>) 라고 한다. 그의 수필에 대한 자존심은 바로 ‘수필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건강한 정신을 회복’인 것이다.
3. 《퓨전수필을 말하다》에 나타난 윤재천 수필의 마음
《윤재천 수필론》(2010. 문학관)을 보면 한국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 기본적인 수필론에 이어 ‘새롭게 시도하는 아방가르드, 수심(隨心)으로 세상보기, 수필에 자유의 날개를 달자, 수필은 왜 변화가 필요한가, 시대에 맞는 수필, 정체(停滯)에서 접맥(接脈)으로, 퓨전수필, 명수필 바로알기 등 평소에 한 편이라도 수필을 써 본 사람으로 답답해하고 궁금해 하던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러나 ’수필은 인간학이다‘라는 전제하에 윤재천 수필론을 집대성해 놓은 이 책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책이 바로 아방가르드 글쓰기《퓨전수필을 말하다》(2010. 소소리)가 아닐까 싶다. 바로 715쪽이나 되는 방대한《윤재천 수필론》에서 작가가 가장 핵심적이다 싶고 누구든 이것만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32편과 대표작 수필 6편을 뽐아 손에 들고 다니기 쉽게 아담하게 출간한 책이 바로 《퓨전수필을 말하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필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한다.
‘수필은 그림과 리듬, 그 어떤 것도 포용해 일체화를 도모할 수 있는 그릇이다. 이것은 통찰력과 달관, 통합적 성찰을 전제로 할 때 도달 가능한 세계다.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를 잃었을 때는 와해된다. 단순히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상9飛上)을 도모하는 발판이 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인은 도약심리(跳躍心理)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획기적 발전이 현대인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수필은 이들을 다시 원래의 상태를 회복시켜 안정시키기 위해서든 아니면, 어느 정도의 방황을 통해 내재한 에너지를 소진시키기 위해서든 일정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수필의 사명이며 역할이다.‘ (<고정관념, 수사적 기법으로>으로 중)
윤재천의 이 작은 책 속에는 조금은 낯선 용어들이 등장한다. 골방수필, 장르수필, 마당수필, 뮤지컬 수필, 반추상(半抽象) 수필, 퓨전수필, 아방가르드 수필 등이다. 거기에 실험수필, 좋은 수필, 수심(隨心), 수필적 다다이즘, 해체와 융합도 나온다.
그러면서 수필의 문제점, 한국수필의 어제와 오늘, 수필의 문학성, 수필과 인문학, 수필과 시의 만남도 거론한다. 뿐 아니라 문학의 이미지 뿌리, 수필의 금기, 수필의 시의성(時宜性)·수사적 디자인·정체성에 변화와 모색, 의식의 변화, 편견, 상상력의 진실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복잡하면 어떻게 수필을 쓰겠느냐고 할만큼 다양한 측면에서 수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복잡하게 보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볼라치면 그건 바로 윤재천의 수필에 대한 이해요, 수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요, 미래 한국 수필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요, 수필에 대한 자존심이다. 그냥 한 번 죽 읽어만 봐도 수필에 대한 그의 열정과 갈증이 어떠한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그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너무나도 활짝 마음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먼저 수필의 맛내기라 할 수 있는 기지와 유머에 대해서 ‘스쳐갔으나 직접 보지 못한 것을 접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회포를 풀며, 정(情)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기지(機智)이고 유머이며, 여유를 갖게 하는 풍요한 지혜다. 특히 자연현상을 삶의 현실로 해석하여 진리에 접근하는 것만큼 감동적인 사례는 없다. 작가는 근원적이면서 영원불멸한 사실을 모아 쟁여놓은 창고의 소유주가 되어야 새롭고 풍부한 정보를 끊임없이 보급할 수가 있다. (고정관념, 수사적 기법으로. 10쪽)고 말한다. 윤재천은 수필은 작가자신과 동일체(同一體)인데 그것은 ‘다양한 제재를 발굴해 골고루 날개를 달아주어 하늘 높이 날게 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느낀 것과 생각한 거세 머물지 말고 어느 정도의 가공과정을 거쳐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수순이 될 때 수필은 제재에 구속되어 맴돌지 않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포용의 용기(容器)가 될 수 있‘(위의 글, 11쪽)기 때문이란다.
그는 수필을 통해 세계를 향해 문을 열자고 한다. 그렇기 위해선 수필의 형식도 다양해 져야 하는데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 시대를 선도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다. 앞서가지는 못해도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읽으며 그 흐름을 외면하지 않을 때 객관적이며 보편적 진실을 유도할 수 있’(골방수필. 14쪽)고 ‘유려한 감성을 받쳐주는 냉철한 지성이 있어야 하며, 명확한 주관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공정하고 객관적 공감이 배면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골방수필을 말한다.
소쇄원의 광풍각은 아예 벽이 없고, 동천석실은 사방에 문을 달아놓았다. 가진 것은 한 평 방이지만 사방 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의 풍광과 소리와 냄새까지 가슴으로 품어안을 수 있으니 골방에 앉아 온 천하를 소유하는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골방수필. 16쪽)
골방은 무한한 사유와 사고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골방은 닫히고 갇힌 공간이 아니라 열고 내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시는 이미지를 언어화 시키는 작업이지만, 수필은 마음의 움직임을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16쪽)
‘수필은, 같은 것을 봐도 자신만의 심안(心眼)으로 보고 마음의 움직임을 진솔하게 따라가는 글이다.’ (17쪽)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글은 사념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문을 활작 열어젖힐 때 골방은 더 이상 구석지고 어둔 곳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 온 세상을 품어 안는 베이스캠프가 된다.‘(18쪽)
골방은 좋은 수필이 쓰여질 수 있는 효율적이고 적합한 공간이다. 그래서 골방수필은 소극적이고 편협적인 공간이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가장 세계적인 것을 추구하는 윤재천 사고의 발화점이며 변화된 시대를 가슴으로 안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는 ‘다문화 가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더 이상 단일민족이라는 고정된 관념에 묶일 수 없는 현상’(20쪽)임도 지적하면서 ‘작가와 작품에서 필요한 것은 개성’으로 ‘장르적 편견을 극복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일민족이 아닌 다문화 민족, 어쩌면 두렵고 떨리는 현상일 수 있다.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형식이 없는 글, 40대 이후의 문학 등으로 정의되며 영역이 축소지향적이 되었지만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는 시대 속에서 그런 변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흡수하고 수용할 수 있는 문학 장르야말로 수필이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사고가 바뀌었음을 말한다. 윤재천은 그래서 ‘다문화시대의 장르수필’과 ‘마당수필’을 제안한다. 골방은 안에서 밖을 보지만 다문화시대와 마당은 나가서 펼치는 무대다.
시의 산문화와 소설의 사소설화(私小說化), 수필의 허구와 같은 것이 전통적 장르해체의 구체적인 예가 된다. 함축과 상징의 구축물로 인지되던 시가 사설(辭說)을 도입하고, 허구의 대표적인 문학으로 인식되던 소설이 수필과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없으며, 수필이 고정된 관념을 깨고 상상력을 도입해 소설과 같은 인상을 느끼게 하여 관념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다.(다문화시대의 장르수필. 21쪽)
글은 작가만이 아니라 독자를 변화시켜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를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내재적 힘을 지닌 존재이다.(21쪽)
그래서 다문화시대에 다(多)문학을 포용하자는 말이다. 독자가 다양해졌는데 작가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가 놀아야 할 우리의 마당이다. 골방뿐 아니라 마당, 마당은 그 자체로도 놀 터가 되지만 멍석을 깔면 골방을 펼쳐놓은 꼴이 된다.
마당놀이, 우리 전통의 열린 무대로 관객과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장을 보여준다. 풍자와 해학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웃고 웃으며 관람하게 하고, 돌아가는 길에도 눈물나게 우스워-풍자를 통한 해학의 묘미를 재음미 하게 한다. 수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열어갈 때, 자신만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마당수필. 25쪽)
우리만이 펼칠 수 있는 우리의 수필문학은 서구의 정원과 분위기와 정서가 다른 만큼 우리만의 마당을 통해 펼쳐낼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우리의 무대일 수 있다. 그 무대에서 펼쳐낼 수필은 그만큼 다양할 수가 있다.
수필은 다루지 못할 소재가 없고 건드리지 못할 주제가 없다. 자기 목소리를 확실하게 낼 수 있을 때까지 몰두하며 시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방가르드(혁신적) 정신만이 가장 진솔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다. 작가에겐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26쪽)
유능한 작가에겐 전체를 보는 눈, 부분을 보는 눈, 대상을 종합 분석적으로 보는 눈, 세 개의 눈이 필요하다.(26쪽)
작가는 보다 다원화되고 다양한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전체와 부분을 다른 의미로도 파악하며 분석도 할 수 있어야 작가라는 말이다.
마당놀이(廣場劇)는 연출자와 출연자, 관객이 구분 없이 흥겹게 하나가 되는 화합의 마당이다. 열린마당이어야 너나없이 어깨춤이 절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새롭게 도전하는 아방가르드정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당에서 우리가 펼쳐낼 수 있는 것들엔 무엇이 있을까. 윤재천은 수필이 단순히 정서를 담는 그릇, 감성의 표현만이 아니라 독자에게 보다 심도 있는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윤재천은 ‘뮤지컬 수필’을 제안한다.
한 편의 수필이 컨버전스화한 융합적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 섭렵해야 한다. 잡다한 지식의 융합, 절묘한 조합으로 글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 지고 깊어져야 한다. 컨버전스는 서로 다른 상상력이 충돌할 때 발전적인 방향이 모색된다는 의미다. 전통적 사유와 새로움의 만남에서 의도하지 않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발명이다. 디지털시대에는 융합이 세계적인 흐름이다. 한 편의 뮤지컬에는 모든 장르의 예술이 응집되어 있다. 글도 종합적이고 혼연일체적인 면모를 보여야 한다. (뮤지컬수필. 42쪽)
곧 융합이라는 세계적 흐름의 디지털 시대에서 한 편의 뮤지컬이 보여주는 모든 장르의 예술 응집처럼 수필도 이런 융합의 종합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융합만이 아니다. 더러는 풀기도 해야 하는데 수필이 발전하려면 이런 통합과 풀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풀고 열린 마음으로 껴안을 줄 알아야 한다. 나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를,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43쪽) ‘수필문장도 새로운 세대와 감각에 맞는 문장과 문체를 계발하고 실험정신으로 도전해야 한다.’(44쪽) ‘총체적인 것의 만남-한 편의 수필창작은 건강한 상상력의 응집이다. 연기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종합공연(뮤지컬)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사색하며 완전한 만남을 위해 도전해야 한다. (뮤지컬수필. 45쪽)
새로운 시도들을 통한 융합과 풀기, 묶기와 나누기 그리고 열기로 새로운 만남을 만드는 것이 바로 보다 넓은 영역 보다 높은 차원의 아방가르드 수필쓰기를 도모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윤재천은 여기에 반추상 수필도 추구한다.
수필은 경험의 기록이기도 하고, 기대하는 소망의 피력일 수도 있어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넘어 다양성을 토대로 자라나야만 미래를 바라보는 수필이 된다.(반추상수필. 46쪽)
수필은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며 그 형식이나 문체가 기존의 틀에서 확고하게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전통작품에 아방가르드적 글쓰기 방법을 적용시켜 그 세계를 넓히고자 함이다. (47쪽)
반추상 수필 - 카메라가 발명되고 대중화되면서 ‘그림의 시대’가 끝나는 줄 알았지만 이 자리를 추상화가 차지해 세(勢)를 넓히면서 오늘과 같은 그림의 부흥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모든 것은 작가와 독자에 의해 그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고 쇠퇴하기도 한다.(48쪽)
수필이 문학이 아니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것은 자기 체험의 기록이기에 창의적인 내용이 없다 해서이다. 그러나 수필은 사실을 말하기보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진실은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수필 속의 사실이 진실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작가적 상상력으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 보여주던 모습으로가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수필의 형식을 윤재천은 그렇게 골방수필, 장르수필, 뮤지컬 수필, 반추상 수필로 제시한다. 여기에 중요한 몫을 하는 게 상상력이다.
‘작품으로서의 수필은 단순한 실제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원대한 목적에 따라 낳아진 글’이어야 한다. ‘상상력은 예술가가 체험과 이상을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담기 위해 취하는 조치’로 ‘실제로 눈앞에 없는 그 어떤 것을 이미지화 또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사건으로 변환해 구조를 완성하는 것‘ (상상력으로 진실을 말하는 힘. 60쪽)으로 그게 바로 공감이고 감동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의 기능은 무엇일까. 윤재천은 ‘첫째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세계-지각이나 기억에 없는 전혀 새로운 대상세계를 상상력을 통해 생산하는 영감(靈感에 의한 창조행위와 둘째 체험을 표현하는 의식의 한 양식으로서 상상력이 이루어내는 기능’을 말하고 있다. 체험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고 보다 심원하고 진지하게 진실과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세상에 없는 형상들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우리 수필가들도 ‘자각과 부단한 연마를 통해 우리 수필이 한 단계 도약을 위한 발판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63-65쪽)한다. 그렇다면 윤재천이 말하는 아방가르드란 또 어떤 것인가.
‘작가가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 설정된 가상적(假象的) 현실’이다. ‘허구가 포함된, 겸재 정선(鄭敾)의 그림과 같은 진경산수화로 형상화되지 않으면 예술적 가치를 인장받기 어렵‘ (새롭게 시도되는 아방가르드.69쪽)듯이 ’개념이 있는 전사의 모습으로 전통의 통념에서 벗어나려고 장르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며 앞서가는 작품을 쓰게 될 때, 수필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70쪽)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누군가 무엇인가를 시도했다는 것은 또 다른 시도를 불러 옴이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가 아니라 계속되는 도전이며 그것은 발전이 됨이다. 그래서 윤재천은 수필의 마음으로 세상보기를 원한다.
다지고 정립시켜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을 때 수필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자만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풍토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오직 맑고 깨끗해지려는 수심(隨心)으로 바라볼 뿐이다. (수심으로 세상보기. 74쪽)
윤재천의 수심은 수필의 형태를 접목과 융합, 퓨전’으로 강조한다. ‘좋은 만남은 서로 상생하고 성장하게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면서 ‘같은 눈높이에서 각각 다른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원한다.
‘수심(隨心)은 수연(隨緣)이다. 마음에 한 가닥 여유가 있어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깊숙이 네 안으로 들어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그 성찰이 사람과 글을 있게 한다.’ (77쪽) ‘수필은 경험을 재료로 하여 적어나가는 글이지만 그 안에는 보다 순수하고 정갈한 서정과 겸허함이 서려있기 때문’이란다.
수필은 잔잔한 삶의 모색이다.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목표하는 것은 태생의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 환희에 찬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필을 써나갈 때 인문학이 목표하는 바가 이루어지게 된다. ’(80-81쪽)
수필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얼까. 우선 수필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윤재천은 ‘금기’란 말을 써서 수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열어 보인다. 금기란 하지 말아야할 일이다. 그런데 윤재천은 수필에는 이 ‘금기’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말이다. 곧 무엇이든 해보라는 말이다. 수필이 다른 장르만큼 폭넓은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수필에 도전정신이 치열하지 못하고 이론적 무장에 소홀했기 때문’이며, ‘수필의 제재는 다른 장르에 비해 다양’하고 이는 ‘특별한 제약 없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인데도 늘 ‘사실적 자기 체험’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양한 제재를 수용하는 것은 모든 글이 수필의 범주 속에 속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수필은 정서적 체험의 결과로 획득된 것이어야 한다. 작가의 신선한 안목과 예리한 통찰력, 독자의 마음을 끄는 흡인력이 전제되지 않았으면 수필이 아닌 잡문으로 보아야 한다. (수필에 금기란 없다. 84-85쪽) 그래서 ’수필은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다. 수필 나름의 빛깔과 향기, 고유의 체온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지적인 냉철함을 전제로 한 사고와 관찰의 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춰야 한다. 사실과 자유로운 구성, 실험정신을 통한 변모의 쇄신만이 새로운 시대 현실에 적응하는 유일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모든 예술은 독자를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수필문학도 과감한 쇄신이 필요하다. 냉철한 지성에 곁들인 정감어린 인간적 향기-유머와 위트는 삶의 피곤함을 잊게 하고, 보다 진취적인 의욕을 솟구치게 하는 데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긍정적인 이단자가 되지 않으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없다.‘(88-89쪽)
그러나 윤재천의 수필에 대한 정리는 의외로 간결하고 쉽다.
수필은 인간다움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무수히 겪게 되는 일상의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적 향기의 탐구나 탐색이 수필이다. 자기 성찰은 궁극적으로 자기애(自己愛)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수필은 자기 정신과의 만남을 도모하는 작업이다.수필은 내구성을 확보해야 하고, 주제와 그 처리에 면밀한 창의성을 도출해야 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주제의 모색, 과감한 장애요소의 타파, 분명한 자기목소리를 내면서 개인적 편견에 머물지 않는 정신이 반영된 작품만이 생명력 있는 수필로 존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90-91쪽 요약)
자신에게 맞는 글을 시도해 보고 다양한 이론과 접목시키면서 자기에게 맞는 문장과 문체를 만들어야 한다. 확고한 자기영역을 구축하고 자기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열정과 몰입하는 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92쪽)
윤재천의 이러한 애정 어린 조언은 50년 수필의 삶이라는 경험에서 얻은 아름다운 경험담이다. 그는 수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간난의 수고와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음에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수없이 말해온 것들을 되풀이 강조한다.
수필은 언어예술이다. 수필의 제재는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수필은 개성적 성격이 강한 문학 장르이다. 수필은 마음의 움직임을 스케치하는 거울이다. 어느 예술이든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21세기는 만남과 만남을 통해, 접목과 잡목을 통해 ‘더불어 함께하는 수필’이 되어야 한다. 수필은 기법의 문제에서 유연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수필가는 시야와 지경을 넓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문학의 힘은 진솔한 자아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향기의 탐구나 탐색은 수필의 본령이다. (수필의 문제점. 95-97쪽 요약)
그가 말하는 수필쓰기는 그야말로 50년 수필쓰기의 노하우로 평생을 수필과 함께 하여 몸으로 터득한 수필론이다.
주제는 직접 노출되지 않고 전체에 은밀하게 용해될 때 문학적 미감이 증대된다.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선명해야 하고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사고로 끌고 나가는 주도면밀함이 필요하다. (98쪽)
수필에 금기란 있을 수 없다.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변화를 받아들이고 열린 사고로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 수필은 이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도 손맛에 따라 맛이 다른 것처럼, 오랜 수련으로 얻어진 자기만의 브랜드는 작가자신의 생명이다. (99쪽 요약)
윤재천에게 수필은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학 장르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눈을 열면 독자가 빠져들 수 있는 좋은 수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해도 보고 나눠도 보며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아가 보기를 권한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작가정신을 견지하는 것만이 융합수필을 창조하는 진정한 프론티어 정신이다. (100쪽)
수필의 문학성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작법에서 과감히 탈피해 새로운 문학적 진리를 구축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수필의 문학성. 103쪽)
새로운 기법으로 미적 감동이 충만한 글, 새로운 나를 발견하여 삶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글로 사람들의 고정된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글은 독자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104쪽)
작가는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그 시대의 구성원들이 무엇을 고민하며, 부딪쳐 있는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세상 현실은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그런 세상이 도래하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의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수필의 시의성. 113쪽)
사고(思考) 자체가 시대상황에 맞아야만 공감을 통해 존재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기에 간과해서는 안 된다. (115쪽)
4. 윤재천이 말하는 우리 수필의 과제
이제까지의 우리수필은 문학적 수고에 따른 산물이라기보다는 감성과 서정의 결과물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이다. 원래의 에세이는 통찰력이 바탕이 된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갖춘 글을 의미한다.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보다는 적절한 조화를 통해 우리 사회와 예술, 수필에 새로운 지평이 구축되어야 한다. (120-121쪽 요약)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성과 서정이란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에세이적 안목 곧 수필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보다 큰 안목을 바라고 있다. 그것은 결코 기존의 틀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자는 것이다.
수필적 다다이즘은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수용하면서 상상의 기폭을 증강시키며, 보다 확대된 시각으로 숲리작법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50년전 청자연적식의 수필 해석은 그 당시에는 새로운 시도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것만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장르와 분야를 뛰어넘는 의식이야말로 시대를 선도할 작가의 소명이며 저버릴 수 없는 문학의 힘이다. (수필적 다다이즘. 132쪽)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기고, 자연스러움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수필적 다다이즘은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다는 포괄적 긍정에서 시작된다. (135쪽)
체험이라는 소극적이고 한계적인 사고의 틀에 상상을 접속하여 확대된 시각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체험을 근간으로 하지만 상상이 있는 체험의 표현은 독자에게 더 큰 공감과 감동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는 먼저 경험한 바를 그대로 기록하는 글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필의 새로운 가능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정서가 다르고 오감(五感)에서 우러난 향취 또한 다르므로 독특한 맛을 내야 하고, 이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작가에겐 무엇보다 진실에 도전하는 용기와 이를 발전시켜나가는 적극적 추진의지가 필요하다. (실험수필. 146쪽)
윤재천의 열망은 바로 우리 모든 수필가의 열망이다. 문제는 알고는 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함이다. 무엇 때문일까. 스스로의 한계에 묶여있음이다. 그리고 이룸에 대한 갈증이 없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명감 내지 치열성이 없음이다. 너무 점잖기 때문인가. 그러나 ‘지금은 수필시대다. 수필의 시대가 되어야만 한다. 격정이나 가장된 허구보다는 진실이 제값을 하는 문화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 조성될 때 바람직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의식의 변화. 150쪽)
그의 수고는 참으로 값지다. ‘나에겐 오랜 꿈이 있다’고 말하던 그 꿈들을 대부분 이뤄놓은 지금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꿀 것이다. 그가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5천명이 넘는 수필가들의 자존심 문제다. 그가 추구하고 제시하고 실험하고 이뤄낸 것들을 보며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남홍숙의 <윤재천 수필문학 연구>는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남홍숙은 윤재천 수필론 중 특질적인 것 4가지를 추출해 고찰하면서 윤재천 수필론을 정리해 놓았다.
1) 수필은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진지한 해석이다.
2) 수필은 내용과 형식의 구속이 적은 포용력이 강한 문학이다.
3) 수필에는 인간적 체취가 서려 있어야 하고 자기 삶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어야 한다.
4) 수필에는 날카로운 비판이 내재되어 있어야 하나, 검증과 객관성 없이 비 난해서는 안 된다.
5) 수필은 함축미를 가진 언어에 의해 자체의 미감을 확대하기도 하고, 점층 적 효과를 발현하기도 한다.
6) 수필은 쉽고 부드럽게 써야 한다.
7) 수필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진지한 해석, 포용력, 남다른 애정, 비난이 아닌 날카로운 비판, 함축미의 언어에 의한 점층적 효과, 쉽고 부드럽게, 새롭고 다양한 전개, 이는 윤재천이 우리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수필쓰기의 비법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울 순 없다. 모르는데 해석이 나올 수 없으며 강하지 않으면 포용할 수도 없다. 자기의 향기를 내기란 더욱 쉽지 않다.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 비판은 검증과 객관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함축, 쉽고 부드럽게 그리고 다양한 전개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가 다음 작업을 승계해야 한다. 그의 이만큼의 수고는 분명 한국수필의 새 시대 그리고 ‘지금은 수필시대’라는 우리의 자존심을 분명히 일으켜 세우고도 남는 성과다. ‘퓨전수필을 말하다’가 주는 의미는 그래서 대단하다. 50년 수필과의 삶이 이뤄낸 그만의 향기고 그의 열매이고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발자취다. 그의 열정과 수고 그리고 끝없는 갈증에 경의를 표한다. (2011.11)
최원현 essaykorea.net
《한국수필》로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수필가협회 연수원장·운영이사, 한국수필문학진흥회·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수필세계·좋은문학·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등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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