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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대앵, 대애애앵”종소리는 신기하게도 십리가 넘을 우리 집까지도 들려왔다. 교회와 우리 집이 모두 조금 높은 곳에 위치했다 하더라도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동산도 두 개나 있건만 수요일 저녁만 되면 종소리는 어김없이 우리 집에까지 들려왔다. 할머니는 먼 어두운 밤길은 다녀올 수 없기에 종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를 하시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 3년간을 들었던 종소리다.
막내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 화요일 저녁이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업어 키워 주신 분이다.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와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이리 빨리 돌아가실 것 같진 않았었다.
하지만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뼈와 가죽만 남은 가느다란 몸매와 얼굴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앉아있는 것이라 할 정도로 똑같아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이가 들면 부모 모습이 된다더니 이모의 모습은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저렇게 똑같아질 수 있을까싶게 닮았다. 할머니도 치매로 고생 하다 가셨다. 할머니가 여든 일곱에 가셨는데 이모는 일흔 여덟에 가시니 9년이나 빨리 가신 셈이다.
새벽 첫차로 이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내려갔다. 성공한 세 아들의 문상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빈소에서 이모님과 마주했다. 10여 년 전에 찍었다는 소라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은 영정사진 속에서 이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원현이 왔냐? 오느라 고생했다.”사진 속에서 이모는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지난 번 병원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오셨소? 누구시요?”하던 이모였는데 오늘은 반갑게 알은 체를 하며 맞아주고 있다.
순간 어린 날 들었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허나 종소리가 들려올만한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모가 “요새도 교회 잘 댕기냐?” 하시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세상 천지에 네 의지 될 만헌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교회로 너를 데꾸 갔단다.” 이모는 웃는 얼굴 채로 조근조근 할머니 애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곱게 차려입은 모습도 외할머니 모습이다. 참 정갈하신 분이었다. 십리 황토 길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장에 다녀오셔도 어찌 걸음을 하셨는지 버선에 흙 한 점 튀지 않았고 결코 버선코를 넘어선 흙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는 없다더니 연세 들어가며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렸다. 그 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이모가 또 그 길까지 따라 걸었다. 해서일까. 내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로 장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 “괜찮다. 봤으니 되얐다. 잘 살어라.” 이모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왜 종소리였을까. 아마 이모도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멀리 퍼지는 종소리처럼 여운을 붙잡고 살았다 함일까. 그렇다고 누가 그 그리움의 끈을 흔들어 종을 쳐 줄 것인가. 그래도 종소리의 긴 여운은 내 남은 삶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잘 사냐?” “잘 살어라” 할머니와 이모 두 분 모두의 한결같은 물음이고 순하디 순한 그분들만의 나에 대한 축복이고 소원이었다. 나는 두 분의 목소리 여운을 내 가슴에도 울리고 있는 종소리로 들으며 두 분 바램의 의미 담긴 잘 사는 일을 남은 내 삶 동안 꼭 지켜가야 한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신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할머니는 평생 나만을 바라보며 사셨다. 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어린 날에는 온갖 부러움 다 받으며 사셨지만 바람처럼 나다니시는 할아버지 만나 결혼 후에는 어렵게 어렵게만 사셨다. 거기다 딸만 셋을 두신 것도 큰 서러움이셨을 텐데 큰딸 내외에 둘째 셋째 사위를 다 먼저 보내셨으니 그 참담한 가슴을 무엇으로 다독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 큰 딸이 홀로 남긴 세 살짜리의 유일한 피붙이인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시울은 한시도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철이 드는 걸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노래처럼 말씀 하셨던 그 걱정 속 할머니의 성화로 일찍 결혼을 했던 나는 다행히 남매를 두게 되었고 딸과 아들은 내게 다섯이나 되는 손주를 안겨 주었다. 그 딸아이의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도 보고 가셨으니 당신의 모든 염려는 기우(杞憂)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 결혼식 날 돌아가셨다. 결혼식을 막 마쳤는데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의 전보를 받았다. 신혼여행 대신 상주가 되어 5일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길에 함께 했다. 멋쟁이셨던 할아버지, 그러나 당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암울한 시대에 가장 평범한 삶으로 살다 가신 분이셨다. 내게는 참으로 엄하셨다. 행동거지 하나, 사람의 도리 하나하나 어린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심어주셨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방향을 인도하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의 내게 대한 바램은 오직‘잘 살어라’였다. 그‘잘’과‘살어라’의 의미를 아직까지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종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내 가슴 속을 울리고 있는 말씀이다.
이모는 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끈이었다. 그 끈도 이젠 끊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젠 그때의 교회당 종소리도 요즘엔 들을 수 없다. 그냥 시간 되면 교회도 알아서 가고 오라고 하지 않아도 갈 줄 안다. 그러나 오라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계없이 종소리가 울리면 그 종소리의 의미를 생각했었고 한 번쯤 마음도 가다듬었던 옛날의 그 종소리, 이모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까지도 내게 그 종소리를 상기시키셨는데 사실 이모님이 내게 들리던 마지막 종소리였던 것 같다. 그 종소리마저 끊긴 지금 이제는 그 종소리의 여운으로나 살아야 할까.
소라 색 한복 저고리를 입고 고운 미소로 나를 보던 이모님, 수요일 저녁이면 들려오던 종소리에 손 모으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할머니,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하라며 가르침 주시던 할아버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다 나를 바로 세워주던 종소리였다. 그런데 긴 여운으로 들려오던 그 종소리조차 이젠 자꾸만 놓치는 것 같다. 그런 나는 누구에게 얼마큼의 어떤 종소리가 되고 있을까.
월간 수필과비평 2016년 10월호. 11월호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강남문인협회장. 사)한국문인협회·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등 14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 등 여러 교재에 수필 작품이 실려 있다.
최원현 수필 <종소리>에 대한 문학평론>
레테의 강을 바라보며
-기억과 망각의 글쓰기
허상문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망각의 여신이다. 저승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망각의 강이 흐른다. 이 강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는데, 죽어서 저승에 가는 망자들은 모두 이 강물을 마셔야 한다. 강물을 마신 망자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전생의 번뇌를 잊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에서의 모든 기억을 없애는 것은 물론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을 은폐하게 된다.
레테의 강은 그동안 철학과 문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이 그동안의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영혼을 얻어 환생하기 위해 이 강물을 반드시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이승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 채 저승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마신 강물의 양에 따라 기억은 완전히 소실되기도 하고 어렴풋이 남아 있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주인공 단테가 꿈에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나 천국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죄와 지옥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 우리도 언젠가는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이 지상에서 저지른 수많은 죄악과 업보의 기억들을 모두 지우고 저세상으로 갈 것인가.
지난여름 우리는 유례없는 지독한 폭염에 시달리면서 앞으로 어찌 살아갈 것인가 하고 한숨지었다. 여름이 지나자마자 이제는 지진으로 집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것을 보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다시 태풍으로 삶의 터전이 만신창이가 된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치게 될 재앙이 얼마나 더 엄청난 것이 될지 모두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재해가 인간이 자연과 세상에 저지른 교만과 욕망이 빚어낸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은 전혀 인식치 못하고 있는 듯하다.
더욱 커다란 문제는 인간에게 아무리 힘들고 끔찍한 재앙이 몰려온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 일들을 모두 망각의 강물 속으로 떠내려버리고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길 뿐이라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인간의 의식과 사고란 매일매일 한 끼의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가장 엄숙하면서도 가장 비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가족들과의 뜻하지 않은 슬픈 이별, 이웃들이 겪는 어처구니없는 불행, 결코 잊지 못할 세월호사건의 분노가 아무리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슬픔과 불행의 기억들은 결국 레테의 강을 건너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망각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세상에 ‘영원’이란 말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간직할 수 있다면, ‘망각’이란 말도 없을 것이다. 망각이 있기 때문에 기억은 의미가 있고,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살기 위해 기억하고 살기 위해 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삶에서 기억할 만한 것을 기억하고, 망각해야 할 것을 망각하는가. 때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망각 없는 삶을 상상하지만, 기억과 망각이 없는 삶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인생이란 ‘기억’과 ‘망각’이 만나서 만들어낸 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망각이란 ‘기억의 밤’이요, 진리(이데아)란 그 어둠을 뚫고 나오는 ‘사유의 빛’이라고 해석하였다. 기억과 망각이 낮과 밤과 같이 분리불가분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둘이 항상 동시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망각을 동반하는 정신적 산물이다. 기억을 위해서는 망각이 필수적이며 망각을 위해서도 기억은 필수적이다.
기억과 망각의 재현이 문학작품을 통해서 만큼 다양하고 폭넓게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그야말로 문학작품은 기억과 망각의 보물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데 몰두해왔다. 그러나 언어로는 결코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었다. 기억의 불확실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문자의 발명이었고, 인류는 오랫동안 문자를 기억의 불완전성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삼아 왔다. 문자와 관련된 우리의 상식은 기록되는 것만이 제대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문자의 등장이 문학이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면서 기억의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어 온 것도 이런 상식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작품에 그려진 기억과 망각의 모습을 통하여 삶과 세상의 모습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문학작품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드러내는 일종의 기억 행위이다. 문학작품의 주요한 내용들은 과거를 기억하면서 새롭게 구성되기도 하고, 지난 시간의 삶과 인간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문학작품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원리와 존재방식은 항상 과거와 현재를 대응시키면서 우리를 기억과 망각 속으로 이끈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시간인식을 가장 잘 구현한 예술로 현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모더니즘 문학에서 그 예를 찾아 살펴볼 수 있다. 모더니즘 문학에 나타나는 인간관과 역사의식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학적 기법이 잘 보여주듯 인간의식과 사고란 끊임없이 흘러가며 유동한다는 것, 그 속에서 진정한 삶과 존재의 의미를 모색하고자 한 모더니스트들의 노력마저도 외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기억 속에서 소멸되어가는 것들로부터 더 깊은 삶과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모더니즘 예술이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필문학은 그것이 삶의 충실한 기록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억의 서사’와 ‘서사의 기억’을 동시에 구현하는 문학양식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기억의 씨줄과 망각의 날줄이 만들어내는 직조물이며, 그런 한에서 수필은 기억과 망각 중에서 전적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수필은 이야기의 구성을 위한 관점 자체가 기억과 망각의 서사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삶을 기대하고 갈망한다. 수필은 이처럼 새로운 삶을 꿈꾸는 자들의 몫이며, 우리가 수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 역시 지난 시간으로부터 새롭고 행복한 현재의 인간과 삶에 대해 갈망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은 바로 니체가 “행복을 행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한 언표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수필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 속 기억의 응축으로서의 문학이며, 삶의 증언으로서 인간의 기쁨과 아픔을 현재화한다. 기억의 시간들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내어 그 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야말로 수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흘러간 시간에 대한 기억은 반드시 어떤 필요에 의해 재생되는 것이라기보다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물밀 듯 밀려와서 문학작품으로 구성된다. 특히 이런 기억이 전쟁이나 테러, 가족사에서 있었던 비극, 자연재해와 같은 참혹한 사건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것으로부터 나온 것일 때 과거의 사건은 현재와 등가의 의미로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게 된다. 또한 이런 기억이 마치 유령처럼 강렬하고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이 우리를 압도하게 된다. 언어를 통해 현실을 재현해내는 문학은 역설적이게도 그 언어를 재현해내는 기억으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우리들의 기억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진다. 때로 우리의 삶에서 망각이란 좋은 일인지 모른다. 잊을 수 없는 슬픔과 비극은 망각이라는 기억의 소멸 덕분에 풍화작용을 이루어 흔적만 남는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어떤 기억이 있다. 쉽게 지워지지도 않고 아프고 힘들면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마음의 심연 저 아래에서 오랫동안 존재하면서 잊힐 만하면 꾸역꾸역 우리의 의식에 다시 살아나는 기억, 그런 상흔 같은 기억과 망각의 사건들은 삶과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최원현의〈종소리〉는 주목에 값하는 작품들이다.
최원현의〈종소리〉
〈종소리〉는 기억 속의 종소리를 통하여 그 속에서 실려오는 삶과 존재의 의미를 추적하는 수필이다. 종소리와 함께 화자에게 막내이모의 부음이 들려온다. 이모는 어머니 대신 나를 업어 키워 주신 분이지만,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와서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다. 나이가 들면 부모 모습이 된다더니 이모는 외모뿐 아니라 치매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대로 닮았다. 이모와 할머니에 대한 묘사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한다.
순간 어린 날 들었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하나 종소리가 들려올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모가 “요새도 교회 잘 댕기냐?” 하시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세상 천지에 네 의지 될 만헌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교회로 너를 데꾸 갔단다.” 이모는 웃는 얼굴 채로 조근조근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곱게 차려 입은 모습도 외할머니 모습니다. 참 정갈하신 분이었다. 십릴 황톳길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장에 다녀오셔도 어찌 걸음을 하셨는지 버선에 흙 한 점 튀지 않았고 결코 버선코를 넘어선 흙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는 없다더니 연세 들어가며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렸다. 그 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이모가 또 그 길까지 따라 걸었다. 해서일까. 내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모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거듭 환기하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을 통하여 작가는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산 자와 망자,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공존은 고인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살아난다. 화자의 기억은 종국적으로 나와 공통의 기쁨과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온 망자들에 대한 기억들로부터 소생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갔던 길을 이모도 다시 가고, 그들의 모습은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가 일깨워준다. 작품에서 종소리는 나와 이모 혹은 생명과 죽음을 연결하기 위한 문학적 메타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종소리는 치유되지 않는 삶이 지닌 실존적 무게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작품에서 종소리는 계속 되풀이면서 독자와 작가를 연결하는 상징기제로 도입된다. 작가는 반복적인 종소리를 통하여 그것이 그냥 스쳐지나 가는 소리가 아닌 화자의 과거 기억을 새롭게 환기해 주는 기능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반복은 잠재해 있던 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는 의미다. S.프로이트에 이르면, 기억과 망각은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망각되는 것이란 없으며, 우리가 흔히 망각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의 흔적으로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있던 것이라고 프로이드는 말한다. 이처럼 망각이란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것, 완전히 잊히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잊어진 것으로 보일뿐이다. 마찬가지로 〈종소리〉에서 작가의 의도는 “왜 종소리처럼 여운을 붙잡고 살았다 함일까. 그렇다고 누가 그 그리움의 끈을 흔들어 종을 쳐 줄 것인가. 그래도 종소리의 긴 여운은 내 남은 삶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언술에서 잘 드러난다.
〈종소리〉에서 작가는 소리의 현존과 그 울림들이 지어내는 마음의 가역반응을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이것은 서사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펼쳐진 두터운 관계망 위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개별자적 운명의 덧없음을 그려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작가가 지니고 있던 소중한 가족 관계와 그들에 의탁해 세상을 살아왔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의 여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흡사 J. 호이징가가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의 암울한 삶의 분위기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열망하던 사람들을 종소리를 통하여 함께 연결시키고자 했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종소리〉에서도 작가는 반복적으로 종소리를 우리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인간과 삶의 깊은 유대와 연결의 의미를 묻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인간의 지난 삶은 흔히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이기보다는 회한으로 가득해서 우울하고 어둡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난 시간에 대하여 밝고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아프고 쓰라린 기억을 회상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억이 과거 경험의 심상 속에서 관념이나 감정을 보존하면서 우리들의 정신활동과 행동에 관여한다고 하면, 추억이란 어떤 특정한 양태의 의식을 지목하면서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지각한 여러 가지 현상들이 그 흔적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추억의 재건은 불가능할 것이다.
<종소리〉에서 추억의 재건은 할머니와 이모가 화자에게 지니고 있었던 간절한 축복과 염원에 의한 것이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의 내게 대한 바람은 오직 ‘잘 살어라.’였다. 그 ‘잘’과 ‘살어라’의 의미를 아직까지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종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내 가슴속을 울리고 있는 말씀이다.” 화자에게 주어지는 할머니와 이모의 ‘잘 살어라.’라는 염원은 은은한 종소리로 전달되면서 어떤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긴 여운으로 이어지면서 화자의 가슴속에 울리는 종소리는 정신의 각성을 이루는 구도의 과정처럼 다가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의 물음인 “잘 사냐?” “잘 살어라.”라는 양가적 의식에 담겨 있는 일관된 의미는 자신에 대한 축복이고 염원이었다는 사실을 화자는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모가 이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그러한 추억은 자꾸 사라져 가고 종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화자는 절망한다.
이모는 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끈이었다. 그 끈도 이젠 끊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젠 그때의 교회당 종소리도 요즘엔 들을 수 없다. 그냥 시간 되면 교회도 알아서 가고 오라고 하지 않아도 갈 줄 안다. 그러나 오라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계없이 종소리가 울리면 그 종소리의 의미를 생각했었고 한 번쯤 마음도 가다듬었던 옛날의 그 종소리, 이모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까지도 내게 그 종소리를 상기시키셨는데 사실 이모님이 내게 들리던 마지막 종소리였던 것 같다. 그 종소리마저 끊긴 지금 이제는 그 종소리의 여운으로나 살아야 할까.
인간이 기억을 만들듯, 기억은 망각을 만든다. 망각은 기억이라는 글씨를 쓸 수 있는 빈 종이이자 쓴 것을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빈 공간이다. 이 세상에 오직 빛만 있다면, 우리는 어둠의 의미를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망각의 세월 속에서도 기억이 선택되는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최원현의 〈종소리〉에서 이모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기억의 종소리는 우리들이 망각해서는 안 될 삶을 위한 깊은 사랑의 충고이며 안내자의 목소리이다.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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