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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강 받은 것을 소유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에는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구원받을 받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은혜의 복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올바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며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도 아닙니다. 물론 아주 멋지고 훌륭한 방법을 통해 올바른 행동을 이끌어 내지만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 즉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을 마그나 카르타 기독교의 기초로 시작하고 로마서의 마무리는 16장에서 믿음의 순종으로 끝맺습니다.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열방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롬1: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그가 믿음의 순종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아는 계명에 순종하고, 내가 아는 법에 순종하고, 내가 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렇다면 믿음의 순종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의 순종이란? 올바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중요한데 여러분의 영혼과 정신 뿐 아니라 육신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삶과 재정 그리고 가정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전반적인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미래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겠지요. 두려움과 걱정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확실해지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잘 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게 전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좋으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후한 분이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눅6:38)
그런데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요삼1: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기서 사랑하는 자여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저와 여러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네가 범사에 잘되고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그대가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되어 나가기를 빕니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대들의 모든 일이 잘 되길 기도합니다.
번영을 전하는 것에 회의적인 분들은 이 부분을 잘 보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번영은 영적인 번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번영은 마지막에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번영 또한 마지막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물질적인 번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번영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영적 번영에 대해서는 영혼의 잘됨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처럼 번영이 헬라어 동사로 쓰면 현재 수동태입니다. 현재란 현재시제를 말하는데 과거는 뛰었었다이고 현재는 뛰고 있다가 현재입니다. 이것이 현재 시제입니다. 그러면 수동태는 무엇일까요? 능동태와 수동태를 설명할 때 가장 좋은 예는 이것입니다. 능동태는 소년이 공을 쳤습니다. 능동태에서는 소년이 공을 칩니다. 그렇죠? 그러나 수동태는 소년이 공에 맞습니다. 능동태에서는 소년이 어떤 행동을 하지만 수동태에서는 소년이 어떤 행동을 당합니다. 능동태는 내가 행동을 하는 것이고 수동태는 남이 나에게 행동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영은 현재 수동태로 쓰입니다. 왜 수동태로 쓰일까요? 내가 번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번영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믿음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건강을 말 할 때는 건강하기를 이라고 말하며 현재 능동태죠. 다른 말로 말하면 여러분이 노력하지 않으면 즉 건강해지기 위해 무엇인가 노력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능동태인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여기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네 영혼이 잘 됨 같이라고 했는데 영혼이 어떻게 잘 될 수 있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물어 보아도 올바른 대답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고, 매일 같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답이 틀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삼서 1장 1절 맥락에서 찾아봅니다.
(요삼 1:1)"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요한삼서 1장 1절을 킹제임스 번역 본으로 보시겠습니다.
(요삼 1:1)"장로는 극진히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이 맥락을 살펴보면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진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삼 1: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1절에서 진리안에서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 네 영혼이 잘 됨 같이라고 말한 다음에 바로 또 진리 안에서라고 바로 나옵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여기서 행한다 하니가 시제로 보면 현재 능동태입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 자녀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듣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번영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이 잘 되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행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그리고 우리는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 되십니까?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일까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라고 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진리는 은혜의 편에 있습니다. 율법은 스스로 존재합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죠. 예수님은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에게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과 함께 즐기며 먹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을 따르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다는 정보를 듣고 조사차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서 빠져 나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고 전합니다. 그곳에 있던 바울이 이 모습을 보았고 바울이 이 일을 목격하고는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 2: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멀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관성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방인과 분리는 없는데 말입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두 절은 우리가 어떻게 의인이 되었는지를 말해 주는데 16절입니다.
(갈 2:15-16)"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서 육체는 모든 인간을 말합니다. 백인도, 흑인도, 황인종도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여러분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십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22:36-38)"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계명까지 말씀하십니다.
(마22:39-40)"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이 두 계명을 실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두 계명을 실행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거듭났고 온 마음을 다해 열정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듭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거룩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이룰 수 있을까요? 율법은 죄를 알게 하지만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없습니다.(갈2:16) 어떻게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직접적으로 율법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은혜로 나누겠습니다.
(엡 1: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죄 사함을 받으셨습니까? 네, 받았습니다.
여기서 받았다는 단어를 헬라어를 통해서 그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습니다 시제로 보시면 현재 능동태로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저기서 걸어 나올 때 여러분이 저에 대해 생각했던 나쁜 생각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겐 두려움이 있죠?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삶에 대해서 무감각해질 것을 걱정하겠죠. 잠깐만요. 이것은 다시 돌아와 살펴 보도록 하고 먼저 우리가 이미 받았다는 것을 보겠습니다. 받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코입니다. 현재 수동일까요? 능동일까요? 현재 능동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저도 제가 받았으면 좋겠네요가 아니라 받은 것을 가지면 됩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용서 받았습니까? 주님의 은혜의 풍성함만큼 받았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풍성함을 펼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에서 따라는 헬라어로 카타(κατα)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는 것 일까요? 그냥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치뤄야 할 값이 있었고, 예수의 피로 우리는 속량되었고 그 값이 치뤄졌습니다. 속량은 헬라어 단어로 아폴루트로시스(απολυτρωσιζ)입니다. 뜻은 몸 값을 치르고 자유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꼭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았다는 헬라어 단어 에코는 잡으라는 뜻인데 손으로 꼭 쥐다. 꽉 붙잡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받은 것을 소유하세요. 꼭 잡으세요.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악한 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확신해? 의문을 던지게 할 것입니다. 어떻게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영원히 죄 사함을 받았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본능적인 것 육신의 것이 들어 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을 음란하거나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나요? 그럼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제가 잠깐 기다려 달라고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제 살펴 볼 것은 이것입니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는데 9절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2장도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2장 12절을 보십니다.
(요일 2:12)"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여기서 자녀들아라고 했습니다만 원문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아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음이요 여기서 사함을 받다는 동사로서 완료 수동태로서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완료는 무슨 뜻입니까? 완료는 한 번에 모두를 위해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이미 완료된 현재의 결과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과거에도 죄 사함을 받았고, 현재에도 받았고, 미래에도 받았습니다. 수동적이죠. 죄를 고백하는 것은 능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로 다시 가 보시겠습니다.
(엡 1: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죄 사함에서 죄란 단어는 헬라어 원어 성경에 보시면 파라프토마(παραπτωμα)입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닮은 구절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을 보십니다.
(골 1: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 죄는 하마르티아(αμαρτια)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나온 죄인 파라프토마나 골로새서 1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인 하마르티아인 두 단어 모두 도덕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마 6:14-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이라고 했는데 사람의 잘못이 헬라어로 보시면 파라프토마입니다. 앞에서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의 죄가 파라프토마였고 우리의 파라프토마를 사해주시고 여기서는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의 파라프토마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얼핏 생각하기에는 모순인 것 같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단지 십자가 전과 후로 나뉠 뿐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을 보십니다.
(엡 4: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기서 용서는 과거완료로 사용되었습니다만 과거 완료라는 말은 단번에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 같이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전에는 용서를 받기 위해서 용서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는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해 합니다. 용서는 과거 완료로 모두를 위해 단 한번에 모든 것이 성취 되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전하는 설교의 부족으로 인해 용서해 대한 기본 이해가 부족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고난이 있다고 말하죠. 용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용서에 대한 올바른 기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만큼 용서 받았는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그녀는 창녀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셨고, 그 여인은 향유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7장 38-39절을 보십니다.
(눅 7:38-39)"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눅7:41-43)"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1절에서 데나리온이 나오는데 데나리온은 당시 일꾼들의 하루 일당이 1데나리온입니다. 여기서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 당시 노동자의 품삯을 치자면 1년 반 치의 임금에 해당 되는 돈입니다. 빚 진자는 이 정도의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오십일치의 노동자의 임금입니다. 이렇게 수입의 차이에 따라서 이해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두 사람이 오백 데나리온, 그리고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빛을 준 채주자가 관대해서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알고 둘 다 탕감을 해 주어 빚에 대해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빚 진자 둘 다 탐감을 받은 것입니다.
42절에서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둘 다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고어로 된 버전으로 읽어 보시기를 권하는데 특히 킹제임스 버전은 이것을 아름답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7:42)"(킹흠정)그들이 전혀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 준 사람이 두 사람 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나니 그런즉 내게 말해 보아라. 그들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시거늘
여기서 그들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버전은 누가 더 많이 사랑하겠느냐?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헬라어를 연구하는 박사 테이어는 아주 간단하게 질적으로 더 많이 양적으로 더 많이를 묻습니다. 누가 그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 많이 사랑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를 묻습니다. 시몬이 있다가 대답을 합니다.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떤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지금 제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 중에 누가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시몬이 대답을 합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겠지요. 더 많이는 헬라어로 플레이오(πλειω)인데 질적으로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시몬은 많이 탕감을 받은 자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한 사람을 말합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죄 사함을 받은 자일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죄 사함을 더 많이 받은 자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자들은 죄 사함에 대해서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붙잡기를 그 유업 안에서 걸어가기를 전해야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덜 사랑하게 하지 않으며 방종 방탕한 삶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랑을 더 많이 깨닫고 이해하는 자가 하나님을 더 많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강대상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죄 사함을 받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뛰어 넘어야 할 어떤 구멍을 남겨두는 것과 같습니다. 남겨진 이런 빈 공간을 스스로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스스로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지쳐갑니다.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을 보시면
(마18:21-22)"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당시 빌립 또는 누군가를 용서한 직후라서 인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말한 후에 빌립을 바라봅니다. 지금 삼 년 동안 이미 일곱 번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용서한 횟수를 그만 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은 완전수입니다. 완전히 완전하도록 용서를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18: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에게 종들이 돈을 빌렸고 결산을 하려고 빚진 자를 데려오는데 얼마를 빚졌습니까? 만 달란트 몇 백만 달러를 빚졌고 갚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24-35절까지를 보십니다.
(마18:24-35)"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26절에서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진짜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실 만큼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시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주님이 하신 것을 보세요. 27절에서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하늘에 계시 아버지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준 것입니다. 몇 백만 달러를 탕감해 준 것입니다. 순식간에 빚이 사라졌습니다. 종은 순식간에 모든 죄를 용서 받은 것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전부 용서 받았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다음 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종이 임금을 떠나 바로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납니다. 자신에게 빚진 자는 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입니다. 몇 백만 달러가 아닙니다. 몇 천 달러입니다. 그러나 자기에 몇 천 달러 빚지 자의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합니다.
(마18:28-30)"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조금 전 자기의 모습입니다. 그렇죠? 동료가 빌었지만 그는 기다려주지 않았죠. 허락지 아니하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이 종은 자신이 빚진 것을 다 탕감 받고 난 직후에 자기 자신에게 빚을 진 자는 얼마 되지 않은 빚인데도 용서하지 못하고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을 받았는데 왜 어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는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용서해 주었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분 중에도 이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지만 듣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 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아니요. 다음 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마18:31-35)"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하늘 아버지도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여러분의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펴 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로 인해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것을 소유하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는 교회가 궁금해하는 가장 큰 질문에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방탕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분열과 가슴쓰린 일들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접근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예수님의 두 빚진 자의 비유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의 답은 무엇입니까?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리더들은 옳은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에 대해 말을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축복 받았고 우리보다 더 거룩하며 그들을 높여 부르는 것만큼 그들을 생각하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더 많이 안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더 많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은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헬라어로 두 단어로 설명되는데 올소스와 크리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