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에 회갑을 맞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작성했다.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종합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정약용은 이 때 2종의 묘지명(壙中本, 集中本)을 작성했는데, 그중에서도 집중본에서는 그때까지 완성된 자신의 연구서들을 소개하며 그 내용적 특징을 요약했다.
「자찬묘지명」 집중본에 나타난 대학 관련 연구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학大學(太學)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배우는 곳으로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하는 방책을 가르친다.
② 명덕明德은 효제자孝弟慈이다.
③ 격물格物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을 헤아리고, 치지致知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知에 이르는 것이다.
④ 성誠은 물物의 시종始終을 관철貫徹하는 것이다.
⑤ 정심正心은 수신修身이다.
⑥ 노노老老, 장장長長, 휼고恤孤는 태학太學의 양노養老, 치세자齒世子, 향고자饗孤子이다.
⑦ 군자君子는 귀욕貴欲, 소인小人은 부욕富欲을 가진다. 용인用人이 불공不公하거나 염재斂財가 무절無節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상의 7가지는 정약용이 대학 해석에서 탁견이라고 자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①과 ⑥에서 보듯이 대학大學을 태학太學으로 규정하고, 대학에는 주자冑子=국자國子가 치국․평천하를 이룩할 방안이 수록되어 있다고 본 점이었다. 대학을 태학에서의 교육으로 보는 정약용의 입장은 대학공의大學公議․대학강의大學講義는 물론이고 여타의 경학經學 연구서에서도 일관되며,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타나는 경세학經世學 방안도 이러한 해석에 토대로 둔 것으로 나타난다.
본고는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나타나는 특징을 태학지도太學之道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정약용의 경학이 경세학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본문에서는 먼저 대학이란 텍스트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정리하고, 그가 주장하는 태학지도太學之道의 내용을 생도, 교육내용, 교육의 효과로 구분하여 재구성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이러한 정약용의 대학 해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본고의 자료는 주로 대학공의와 대학강의를 활용했으며, 여타 정약용의 경학 연구서 가운데 취지가 일치하는 자료를 함께 검토했다.
2. 대학 텍스트에 대한 입장
1) 저자
대학의 저자에 대해 정약용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대학공의의 첫머리에서 그는 주희朱熹, 정단간鄭端簡, 완원阮元 등의 학설을 소개했는데, 이는 ① 자사子思, ② 증자曾子, ③ 증자曾子와 그 제자로 구분할 수 있다.
①은 ‘공급孔伋(子思)이 송宋나라에서 어렵게 살던 중 제왕의 도道가 사라져 버릴 것을 걱정하여, 대학을 경經으로 하고 중용을 위緯로 했다’는 학설이다. 이는 가규賈逵가 처음 주장한 이래 우송虞松, 정단간鄭端簡이 이를 따랐다. 그러나 정약용은 정현鄭玄의 주注나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는 이런 언급이 없는 것을 근거로, 이는 가규가 스스로 지어낸 말로 보았다.
②는 ‘대대례大戴禮에서 증자 제자들이 스승에 대해 쓴 10편을 뽑아 이를 표장標章한 것’이라는 학설인데, 이는 완원阮元이 주장했다. 정약용은 이 설이 공자의 학문이 증자, 자사, 맹자로 전수된다는 도통론道統論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일 마지막에 있는 「천원天圓」편의 문장을 증자의 저작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③은 ‘대학의 경經1장은 공자의 말을 증자가 조술祖述한 것이고 전傳10장은 증자의 뜻을 그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학설인데, 주희가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이 역시 근거가 없는 것으로,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되는 증자․자사․맹자 중에서 유독 증자의 저술이 없었기 때문에, 주희가 그를 대학의 저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주희의 주장이 절대로 틀렸다고 했다. 결국 정약용은 이상의 세 가지 학설을 모두 따르지 않는 입장이었다.
2) 사서四書의 출현 시기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서한西漢에도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학과 중용을 본격적으로 표장한 것은 정호程顥․정이程頤에서 시작되며, 사서四書가 확립된 것은 원元의 인종仁宗이 팔비법八比法(八股文)을 창안한 후 주자장구朱子章句로 인재를 뽑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정약용은 예기禮記의 유래에 대해 유향劉向이 고정考訂한 오례五禮를 양梁의 대덕戴德․대성戴聖이 산정刪定하여 46편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마융馬融이 3편(月令, 明堂位, 樂記)을 추가한 것이 예기 49편이라고 했는데, 이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의 내용을 따른 것이었다. 정약용은 이처럼 예기 속에 있던 대학과 중용을 뽑아내어 사서로 만든 것이 남송南宋의 이정二程과 주희였고, 이를 공인한 것은 원元 인종 때라고 본 것이다.
정약용의 주장은 모기령의 설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모기령은 수서 「경적지」에 중용강소中庸講疏 1권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수대隋代에 대학과 중용을 뽑아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소경小經이라 했었는데, 송대宋代에 와서 이를 사서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당서唐書 「선거지選擧志」, 송사宋史 「선거지選擧志」에 나오는 소경小經에 대한 규정을 인용하면서 모기령의 설을 반박하고, 모기령은 대학과 중용을 표장한 정程․주朱의 공功을 질투하여 전대前代로 돌렸다고 비판했다.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을 독립시켜 사서四書로 만든 것은 주희의 공적으로 평가했다.
3) 편차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을 표장한 주희의 공적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학의 편차에 대해서는 주희의 견해와 차이가 있었다. 대학의 편차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었다. 하나는 예기에 수록된 고본대학古本大學의 순서를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으로, 왕양명王陽明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대학에는 착간錯簡이 없었다.’는 왕양명의 설을 소개했다. 다른 하나는 고본대학古本大學에는 착간이 있고 순서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이를 개정改正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호․정이와 주희가 대표적이다. 주희는 정씨 형제가 개정한 대학의 본문을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나누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설하는 전傳 5장 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보완하는 보망장補亡章(格致補傳)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고본대학의 편차를 원형으로 보고, 대학공의에서도 고본대학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다.
주희가 작성한 보망장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이 많은 논란을 벌였다. 원元의 학자 왕백王柏(魯齋)은 ‘대학에 착간은 있을 수 있지만 빠진 글은 없다’고 하면서 주희의 보망장을 비판했는데, 이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서는 권근權近(陽村), 이언적李彦迪(復古) 같은 학자들이 주희의 보망장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왕백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564년에 이황李滉(退溪)은 보망장을 비판하는 이담李湛(仲九)에게 편지를 보내 보망장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이담이 주희가 대학의 경문經文으로 판단한 일부 구절(知止而后有定, 物有本末)을 옮겨 전문傳文을 만드는 것은 ‘정침正寢을 헐어다 행랑行廊을 보수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정약용은 왕백이 위의 몇 구절을 옮겨다가 전傳 5장을 만든 것은 문제가 있지만, “치지致知․격물格物을 설명한 부분에는 망실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공정한 견해라고 평가했다. 정약용은 이황이 이담을 비판한 것도 그가 왕백처럼 몇 구절을 옮겨 전 5장을 보완했기 때문이며, “대학의 경전經傳은 탈자脫字나 오자誤字가 없다”고 했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 했다. 또한 정약용은 대학 전체를 하나의 장章으로 본 나여방羅汝芳(近溪)의 견해를 통유通儒의 쾌론快論이라고 극찬했는데, 이는 대학을 경經․전傳으로 분절分節해서 보는 주희와는 달리 대학의 본문 전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상호 연관되는 의미를 파악했던 자신의 입장과 상통하는 견해였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고본대학에는 오자誤字도 없는 것으로 보았다. 정씨程氏 형제는 고본대학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3글자를 오자로 보고 수정했다. 주희도 이를 수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학 원문의 오자에 대해서는 1789년 정조正祖가 주도한 대학강의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질문을 맡은 김희金憙는 대체로 주희의 견해를 수용하는 가운데 ③에서 주희의 대답이 불분명한 이유를 물었는데, 정약용은 ‘명命’자를 그대로 두어도 무리가 없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정자程子가 수정한 세 글자를 모두 원래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정약용은 예기에 수록된 고본대학이 편차가 맞을뿐더러, 그 원문은 궐문闕文이나 오자가 없는 완본完本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는 양명학 계열인 왕양명王陽明, 래지덕來知德, 나여방羅汝芳의 견해를 수용한 것이었다.
3. 태학의 생도
대학을 표장하여 사서四書에 위치시킨 정자程子는 “대학은 초학자가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라 했고, 주희는 ‘대학은 대인大人의 학문’으로 규정했다. 또한 주희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15세가 된 천자天子의 원자元子․중자衆子, 공公 경卿 대부大夫 원사元士의 적자適子,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들은 모두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여, 대인大人 즉 성인成人 가운데 준수한 자들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대학大學을 태학太學으로 규정하고 주자冑子와 국자國子만 태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주희와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그런데 대학의 생도에 대한 정약용의 생각이 처음부터 주희와 달랐던 것은 아니다. 1789년 대학강의에서 정약용은 소학小學은 동자童子의 학문이며, 대학大學은 대인大人의 학문이라고 구분하여, 주희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때 정약용은 소학과 대학을 학궁學宮의 명칭으로도 보아 새롭게 해석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이후 정약용은 경학經學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주희의 해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정약용은 먼저 ‘대인大人’의 용례를 검토했다. 정약용은 주희가 말한 ‘대인’이란 ‘관冠을 쓴 성인成人’을 말하므로, ‘대인의 학문’은 ‘온 세상 사람들이 두루 배울 수 있는 학문’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약용이 주역․맹자․춘추좌씨전을 검토한 결과, 대인은 ① 지위가 높은 사람(天子 諸侯), ② 덕德이 높은 사람, ③ 엄부嚴父, ④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네 가지 뜻으로만 나타났고, 관冠을 쓴 성인이라는 용례는 없었다. 따라서 정약용은 주희의 주장을 비판했다.
정약용은 고대古代의 학교에는 태학太學과 향학鄕學이 있었고, 그 생도는 각각 국자國子와 만민萬民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태학과 향학을 구분하는 근거를 상서尙書와 주례周禮에서 찾았는데, 근거가 된 원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약용은 「요전堯典」에 보이는 태학의 제도가 삼대(하夏 은殷 주周)에도 면면히 계승되었으므로 주周의 국자國子는 우虞의 주자冑子를 말하며, 주周의 제도는 주례周禮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주로 주례를 통해 태학의 제도를 고증했는데, 이를 보면 고대의 교육은 전악典樂이 주자冑子를 가르치는 태학太學과 사도司徒가 만민을 가르치는 향학鄕學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가운데, 대사악大司樂․악사樂師․학정學正․대서大胥․소서小胥․사씨師氏․보씨保氏는 태학을 담당하는 관리였고, 대사도大司徒․향대부鄕大夫․주장州長․당정黨正․족사族師․사간司諫․사구司救은 향학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파악했는데, 구체적으로는 ① 천자의 태자太子, ② 천자의 서자庶子, ③ 제후의 적자, ④ 공․경․대부의 적자를 의미했다. 이중에서 ①은 장차 천자가 될 사람이었고, ②는 토지를 분봉分封받아 제후가 되거나 적어도 봉읍封邑을 소유할 사람이었으며, ③은 제후, ④는 공․경․대부가 될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장차 천하를 다스리거나, 자신의 봉토封土를 다스리거나, 천자를 보필할 사람들이었으므로, 반드시 태학에 들어가 치국․평천하하는 대학지도大學之道를 배워야만 했다.
그런데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만 한정하면 주례의 원문에서 누락되는 부분이 생기는데, 1-4의 귀유자제貴游子弟, 1-6의 국졸國倅, 유졸游倅, 1-7의 제자諸子가 그것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을 모두 공․경․대부의 서자庶子로 파악하고, 이들은 원하는 경우에는 국자國子와 함께 태학에서 사씨師氏의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정령政令은 제자諸子에, 판적版籍은 대서大胥에, 징벌은 소서小胥에 소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공․경․대부의 서자庶子는 주자冑子=국자國子에 포함되지 않았다. 천자와 제후의 자식이라면 적適․서庶의 구별이 없이 모두 태학의 생도가 되지만, 공․경․대부의 자식은 적․서를 구분하며 서자에게는 자격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 정약용의 입장이었다.
태학의 생도에 있어 마지막 문제는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에 관한 것이었다. 준수한 백성이 태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근거는 주례와 예기에 나타났다.
정약용은 예기 「왕제王制」편은 한漢 무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기록한 것으로, 한대漢代에 옛 제도를 참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가운데 전악典樂과 사도司徒, 대사악大司樂과 대사도大司徒를 하나로 합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주희는 대학장구의 서문을 작성하면서 「왕제」를 근거로 했고, 후대 학자들은 주희의 기록을 근거로 대학에서 만민을 가르치는 것이 선왕先王의 법이라고 착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정약용은 상서 「요전」과 주례에 나타나는 고법古法과 예기 「왕제」에 나타나는 한漢의 제도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태학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3-1은 정약용이 주周의 제도로 보았던 주례의 규정이란 점이 문제였다. 주례에서는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는 향학에서 빈흥賓興하여 태학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주자冑子=국자國子가 아닌 만민萬民 중에도 태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정약용의 해석에는 허점이 생겼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시간에 따라 미묘한 입장의 변화가 나타난다. 대학공의에서 정약용은 당학黨學․주학州學에서 학습하는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賢能]를 선별하여 상급자인 司徒에게 천거[賓興]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들이 태학에 입학했는지는 거론하지 않으면서 태학이 만민을 교육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년에 작성한 상서고훈에서는 “백성 중 준수한 자를 향학에서 천거하여 태학에 올려 보낸다.”고 하여, 일반 백성 중에서 태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태학의 생도를 해석하는 정약용의 방식은 청淸의 고증학자인 모기령(老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정약용은 고대 소학小學의 제도를 해석하면서 모기령의 학설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는데, 여기에는 「왕제」편이 한 문제 때 박사들이 지은 것이며, 소학은 천자의 태자, 제후․경․대부의 적자들이 입학하는 학교이고 서인庶人의 자제는 들어갈 수 없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약용은 인용문의 말미에서 모기령이 비록 방대한 자료를 동원했지만 결국 ‘소학小學은 자학字學’이라는 것을 고증한데 불과하며, 모기령의 해석은 매우 편벽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태학의 생도를 고증했던 방식은 모기령의 고증 방식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보았다. 물론 공․경․대부의 서자나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는 태학의 생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입학 자격은 엄격히 제한되었고, 이들이 태학의 생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 그런데 「왕제」편에서 보듯 한대 이후로 태학의 생도가 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늘어났고, 주희가 대학을 대인지학大人之學으로 해석한 것도 후대의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봉건제가 사라진 한대 이후로는 태학의 제도가 크게 변하여 백성도 태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으므로, 모두 대학의 학습에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대학 연구에서 밝혀낸 옛 성왕聖王의 제도는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제한할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4. 태학의 교육내용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은 명덕明德을 실천하는데 있으며, 명덕의 내용은 행사行事이자 인륜人倫인 효孝․제弟․자慈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 과목이 주례, 예기의 「왕제王制」 「제의祭義」 「문왕세자文王世子」, 대대례의 「보부保傅」에 잘 나타나는데, 구체적으로는 예악禮樂․시서詩書․현송弦誦․무도舞蹈․중화中和․효제孝弟를 가르쳤다고 했다. 또한 정약용은 고대의 교육법에 덕德․행行․예藝 세 조목이 있었는데, 시서詩書․예악禮樂․현송絃誦․무도舞蹈․사어射御․서수書數는 모두 예藝에 속하지 교육의 근본이 되는 덕德(德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태학의 핵심적인 교육 내용은 덕德․행行에 해당하는 효제孝弟였다.
그런데 정약용이 강조하는 덕행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사行事’를 의미했으므로, 심성心性의 수양을 강조하며 실천력이 떨어지는 성리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정약용은 불가佛家와 유가儒家의 특징을 구분하면서, 불가는 치심治心을 사업事業으로 하지만 유가는 사업으로 치심을 한다고 하여, 유가의 특징이 실질적인 사업에 있음을 강조했다. 게다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명심明心․부성復性․격물格物․궁리窮理․치지致知․주경主敬은 고경古經에 전혀 보이지 않고, 성의誠意․정심正心에도 학교의 조례條例가 될 만한 명문明文이 보이지 않으므로, 성리학의 한계는 더욱 분명했다. 정약용은 대학의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은 실제적인 일에서 실천하는 것이지, 불가처럼 벽을 마주보고 앉아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좌선坐禪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성의誠意․정심正心이 비록 학자의 지극한 공부이지만 매번 일로 인하여 성의를 다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지, 벽을 향해 앉아 마음을 살피고 스스로 허령한 본체를 검속檢束하여, 허공처럼 밝고 티끌 하나에도 오염되지 않아야 성의․정심이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치심을 성의라 하여 곧장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본체를 뱃속에 넣어둠으로써 진실무망眞實无妄한 이치를 돌이켜 살피려고 한다. 이는 평생토록 정좌靜坐하여 묵묵히 내 몸속을 살펴야 비로소 가경佳境이 있는 것이니, 좌선坐禪이 아니고 무엇이랴.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내용을 구체적인 일[實事]에서 실천하는 덕행=명덕으로 보았고, 명덕은 바로 효孝․제弟․자慈라고 규정했다. 정약용은 명덕明德=효제자孝弟慈를 입증하기 위해 유학의 도가 요순堯舜→하夏→은殷→주周→공자孔子로 계승되며, 대학․중용의 연원은 상서와 주례에 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에서 보듯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은 상서 「요전堯典」 「고요모皐陶謨」, 주례 「대사악大司樂」에 연원을 두었으며, 대학의 덕행인 효우孝友는 고요皐陶의 9덕九德과 대사악大司樂의 6덕六德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정약용은 한유漢儒들은 훈고訓詁에 빠져서 「고요모」편이 대학과 중용의 연원임을 밝히지 못했는데 주희가 이를 처음 발명했다고 하여, 주희의 공적을 평가했다.
정약용은 상서 「요전」에 나오는 준덕峻德, 5전五典, 5교五敎가 모두 동일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는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노魯의 태사太史 극克의 견해를 따른 것인데, 5전五典과 5교五敎를 맹자와 중용에 나오는 5상五常(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으로 보는 정현鄭玄․채침蔡沈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었다. 정약용은 교육을 할 때 부모, 형제, 자식 사이에 이뤄지는 천속天屬의 사랑을 기초로 하여, 군신君臣, 부부, 붕우 사이에 이뤄지는 인합人合의 윤리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태사 극克의 견해를 지지했다. 또한 정약용은 5교五敎 중에서 부의父義․모자母慈는 자慈, 형우兄友․제공弟恭은 제弟에 해당하므로, 준덕峻德=5전五典=5교五敎는 결국 효․제․자이며, 이는 다시 사군事君․사장事長․사중使衆으로 나타나므로, 효․제․자는 명덕明德인 동시에 친민親民이라고 해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효孝․제弟․자慈의 확산
峻德․五典․五敎
天屬의 사랑
人合의 윤리
孝
子孝
事君
弟
兄友, 弟恭
事長
慈
父義, 母慈
使衆
정약용은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이 모두 효․제․자이므로, 치국․평천하를 이룩하게 될 주자冑子=국자國子는 자신이 먼저 효․제․자를 실천함으로써 천하에 명덕을 밝힐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효․제․자를 실천하여 친민을 이루는 방법은 윗사람이 노노老老․장장長長․휼고恤孤, 즉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며, 고아를 구휼하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약용은 노노․장장․휼고를 주희의 해석처럼 ‘자수自修의 효․제․자’, 즉 왕실 내에서 실천하는 효․제․자로 본 것이 아니라, 백성의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고, 백성의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며, 백성의 어린이를 사랑으로 기르는 것으로 해석했다. 윗사람이 그런 모범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이를 보고 각자 효․제․자를 실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태학에서 실천하는 교육내용을 바로 노노․장장․휼고로 보았다. 정약용은 노노老老는 천자가 기로耆老들을 봉양하는 것이고, 장장長長은 세자世子가 학궁學宮에서 서치序齒를 실천하는 것이며, 휼고恤孤는 천자가 고아들을 먹이는 것인데, 이를 ‘태학의 3례三禮’라고 규정했다. 정약용은 예기, 대대례, 서대전書大傳 등에서 태학의 3례를 고증했는데, 이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정약용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태학에서 3례를 실천함으로써 효․제․자의 기풍을 이룰 수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대학지도大學之道이자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장차 군주가 되어 치국․평천하
<표 2> 태학太學의 3례三禮
三 禮
內 容
出 典
太學老老之禮
有虞氏(燕禮) : 國老를 上庠, 庶老를 下庠에서 養
夏后氏(饗禮) : 國老를 東序, 庶老를 左學에서 養
殷(食禮)
周(兼用) : 國老를 東膠, 庶老를 虞庠에서 養
禮記 王制
天子의 視學, 東序에 가서 三老 五更 群老를 만남
禮記 文王世子
三公은 朝, 三老는 學에서 거행
禮記 禮運
養老는 五帝의 憲
禮記 內則
三老 五更을 大學에서 食
禮記 樂記
天子가 春秋로 入學하여 國老에게 醬을 대접함
大戴禮 保溥
太學長長之禮
世子가 太學에서 齒하여 父子, 君臣, 長幼의 道를 알게 함
禮記 文王世子
帝가 東學에서 上親 貴仁하면 親踈에 차례가 있게 됨
帝가 南學에서 上齒 貴言하면 長幼에 차등이 있게 됨
帝가 西學에서 上賢 貴德하면 聖智가 제 자리에 있게 됨
帝가 北學에서 上貴 尊爵하면 貴賤의 등급이 있게 됨
帝가 太學에서 承師 問道하면 德智가 자라고 理道를 얻게 됨
大戴禮 保溥
書大傳
大學恤孤之禮
春에 孤子를 饗하고 秋에 耆老를 養
禮記 郊特牲
仲春에 幼少를 養하여 諸孤를 살림
仲秋에 衰老를 養하여 几杖을 줌
禮記 月令
司徒는 春에 孤子 8인을 入朝시켜 春事를 이룸
司空은 冬에 國老 6인을 쉬게 하여 冬事를 이룸
大戴禮 千乘
天子 視學에 群吏에게 ‘東序에서 老幼를 위로하라’고 함
禮記 文王世子
辟雍은 大射 養孤하는 곳, 靈臺은 望氣하는 觀
毛詩 靈臺䟽
事老 養孤하여 化民 升賢하는 자에게 상을 줌
韓詩外傳
顯宗이 有司에게 命하여 尊耆耄 恤幼孤하게 함
後漢書 中元元年
를 이룩할 사람들이 태학에서 백성을 상대로 하여 3례를 실천하면, 천하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효․제․자를 실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백성들이 효․제․자를 실천하는 세상, 그것은 바로 정약용이 꿈꾸는 이상국가였다.
5. 태학 교육의 효과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인 주자冑子=국자國子는 장차 치국․평천하를 이룩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은 치국․평천하로 결론을 맺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후대에 사士․서인庶人의 자식이 대학을 공부하여 치국․평천하의 도道를 알기는 하지만 실제로 치국․평천하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원래의 태학지도太學之道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내용을 명덕明德이자 친민親民인 효․제․자를 실천하는 3례로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자덕慈德을 가장 중시했다. 치국․평천하를 한다는 것은 결국 효․제․자를 확충해 나가는 것이지만, 특히 자덕은 대중을 부리고[使衆], 백성을 돌보는데[牧民] 필요한 덕목이므로, 치국․평천하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상서 「고요모」편에 나오는 지인知人․안민安民을 대학의 종지宗旨이자 결론으로 보았다. 앞서 보았듯이, 정약용은 「고요모」편을 대학의 연원으로 보았는데, 지인․안민의 해석을 통해 이 논리를 더욱 강화시켰다. 다음의 <표 3>는 지인․안민을 중심으로 한 「고요모」편과 대학의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표 3> 「고요모皐陶謨」와 대학大學의 관계
皐陶謨
大學
知人則哲 安民則惠
用人 理財
三德 六德 九德
官人之法
艱食 鮮食 內粒
惠民之法
정약용은 군자와 소인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평천하가 이뤄지는데, 그 방안은 바로 지인(用人)․안민(理財)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사람에게 두 가지 욕구가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군자가 가진 귀욕貴欲과 소인이 가진 부욕富欲이 그것이었다. 정치란 바로 이들이 가진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관리의 등용을 공정히 하면 군자의 귀욕이 충족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가볍게 하면 소인의 부욕이 충족되며, 그 결과 국가는 안정되고 평천하를 이룩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기본 입장이었다.
정약용이 평천하를 이루는 방안을 지인․안민을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대학공의, 상서고훈을 비롯한 여러 연구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정약용은 이런 논지를 유지하면서도 사용하는 용어는 조금씩 달랐는데 이를 하나의 표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4>와 같다.
<표 4> 평천하平天下를 이루는 방안
대상
君子 貴族 仕於王朝者
小人 小民 耕於王野者
욕구
貴欲
富欲
원리
知人 用人 賢其賢 親其親
安民 理財 樂其樂 利其利
덕목
官人之德
惠民之德
방법
公選擧 去黨 擧賢 立賢 進賢
薄賦斂 懲貪 豐産 散財 薄賦
결과
朝廷安
野人安
이상에서 보면 정약용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귀욕과 부욕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는 방향으로의 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목된다. 정약용이 인성人性을 기호嗜好로 해석하고 귀욕과 부욕이란 인정人情을 충족시키는 경세학經世學의 방안을 마련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인성론人性論 논의에 있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정약용의 해석이 처음부터 이런 논리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정약용은 1789년에 용인用人․이재理財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현자賢者를 등용하면 조정이 편안해지고, 생산이 풍부하면 야인野人이 편안해져서 조야朝野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후대에 이를 수정하면서 용인․이재는 군자의 귀욕과 소인의 부욕을 충족시키는 것임을 덧붙였다. 정약용의 해석에 이처럼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정조正祖 때문이었다.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방법은 9경九經․8통八統이며 그 세목細目은 매우 많은 데 어째서 지인知人․안민安民 두 가지만 중요한가?[선조先朝(正祖)께서는 규장각奎章閣 강의講義에서 매번 이것을 가지고 강관講官들에게 물었는데, 한사람도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 공선거公選擧․박부렴薄賦斂은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비는 근본이다.[先朝(正祖)께서는 매양 치도治道를 논할 때마다 ‘거당징탐去黨懲貪’ 네 글자를 요지要旨로 삼았는데, 하나는 관인官人의 요체였고, 하나는 안민安民의 요체였다.]
예전에 선조先朝께서는 새로 선발된 문신文臣이 대학을 진강進講할 때마다 반드시 그 뜻을 묻기를 “진현進賢․박부薄賦는 진실로 국가의 대정大政이 된다. 그런데 9경九經과 5전五典에는 절목이 많은데 어째서 이 두 가지만 중언부언하고 다른 일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는 것은 모두 적확한 견해가 없었고, 국왕의 가르침도 본지本旨를 분명하게 선포하신 적이 없이 그저 물러가라고만 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후 깊은 산속에 물러나 있으면서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갑자기 환하게 깨닫는 것이 있어, 나라가 치란흥망治亂興亡하는 원인이 이 두 가지 일뿐이요, 인심人心의 동향과 천명天命의 움직임이 이 두 가지 일뿐임을 알았다.
정약용이 지인․안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에 대한 정조의 반복된 질문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정조 치하에서는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유배기 이후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지인․안민이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평천하를 이룩하는 방안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이 정조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약용은 대학의 마지막 부분이 지인․안민을 실현하는 방법인 입현立賢과 산재散財를 반복해서 강조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보면 대학의 끝부분은 입현立賢과 산재散財에 관한 경계가 2번씩 반복되고, 네 구절의 끝은 모두 실국失國으로 맺음으로써,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이 중층적으로 나타난다. 정약용은 대학의 저자가 태학 교육의 목표인 치국․평천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현과 산재,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을 실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멸망하게 됨을 반복하여 강조했던 것으로 보았다.
6. 맺음말
지금까지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나타나는 특징을 태학지도太學之道로 규정하고, 그가 논증한 태학太學의 생도와 교육 내용, 교육의 효과를 정리해 보았다.
정약용은 대학을 이해함에 있어 대학․중용을 표장하여 사서四書를 정립했던 성리학자들의 공적을 평가했다. 또한 그는 고본대학古本大學을 완본完本으로 보고, 대학의 원문은 경經․전傳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장章으로 보았는데, 이는 양명학 계열의 견해를 따른 것이었다.
정약용은 대학大學=태학太學의 생도를 치국․평천하를 이룩할 책임을 가진 주자冑子=국자國子로 보았고, 태학의 교육 내용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백성들에게 명덕明德=효孝․제弟․자慈를 실천하는 3례 위주였음을 논증했다. 그리고 태학 교육의 효과는 주자冑子=국자國子가 지인知人․안민安民을 실천함으로써 자덕慈德을 실현하는 동시에 치국․평천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논증하는 과정에서 모기령毛奇齡의 학설을 많이 수용했고, 지인․안민의 의미를 해석할 때에는 정조正祖에 의해 촉발된 점이 많았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있어 정조의 영향은 다양한 측면으로 나타났다. 먼저 정약용의 경학 연구서 가운데 대학강의大學講義(1789), 중용강의中庸講義(1790), 시경강의詩經講義(1791)는 정조와 직접 문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정약용의 경학관이 반영된 「대학책大學策」․「십삼경책十三經策」도 정조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었다. 따라서 정약용의 대학 연구는 정조와 인연이 깊었다.
다음으로 정조는 대학을 군주를 대상으로 한 책으로 규정하고, 대학의 핵심은 치국․평천하에 있으며,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군주가 치국․평천하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구체적 방안이 담겨있다고 주장한 국왕이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대학과 대학연의․대학연의보를 합하고 이를 대학의 8조목 체제에 따라 편집한 대학유의大學類義 21권을 제왕학帝王學 교과서로 편찬했다.
정조와 정약용의 대학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정조는 대학을 제왕학 교과서로 파악하고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에서 군주의 실천 방안을 추출했으며,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제한하고 치국․평천하를 이룩하는 방안을 대학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는 정약용이 정조 치하에서 국왕의 지우知遇를 받으며 실무 관료로 활동했고, 정조가 사망한 후에는 정조의 정치 이념을 더욱 논리화하고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경학 연구를 경세학經世學 연구로 연결시킨 점이었다. 정약용은 경학을 先王의 제도를 파악하는 것으로, 경세학을 선왕의 제도를 변통變通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대학에서 재해석한 지인知人․안민安民을 실천할 수 있는 경세학 연구에 몰두했다. 따라서 정약용의 경세학이란 결국 지인․안민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는 작업이었고, 이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으로 나타났다.
정약용은 경학 연구를 바탕으로 경세학을 이론화하고, 구체적인 경세 방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경세학자經世學者’라 하겠다.
참고문헌
退溪先生文集
大學公議
大學講義
中庸自箴
尙書古訓
小學枝言
讀尙書補傳
春秋左氏傳
大學章句大全
書傳集註
二程全書
林東錫, 中國學術綱論, 고려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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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是學舍經學硏究會 譯, 茶山의 經學世界,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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