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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신앙 삼신(三神) 이야기.
삼신
1. 삼신의 정의
삼신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출산을 돕고, 산모와 갓난아기를 보호하며, 자식 갖기를 원하는 부인에게 아기를 점지하는 신인데, ‘삼신할매’, ‘제왕할매’, ‘제왕님네’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여성신격이다. 삼신의 어원은 ‘삼줄’, ‘삼가르다’ 등의 사례로 미루어, 본디 ‘삼’이 포태(胞胎)의 뜻이 있어 포태신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삼신의 유래를 말해주는 서사무가로 「제석본풀이」(또는 당금애기무가)와 「삼승할망본풀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산신(産神)이 한 분이라 하는데, 어떤 이는 피 만드는 산신, 뼈를 모아 주는 산신, 출산을 돕는 산신으로 삼신(三神)이라 말한다. 삼신모시기는 앉은 삼신(삼신단지를 신체로 하여 항시적으로 모시는 삼신), 뜬 삼신(임시로 모시는 삼신)으로 나뉘는데 요즘들어 앉은 삼신은 잘 모시지 않으며 대개 뜬 삼신만 모시는데, 여타 개인제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전승력을 가지고 있다.
2. 삼신신앙
「제석본풀이」는 제석굿에서 구송되는 것으로 흔히 당금애기가 삼신이 되기도 하고 삼불제석이 삼신이 되기도 한다. 「삼승할망본풀이」에서는 삼신할망이 어떻게 산육을 관장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삼신신앙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중부지방에서는 중간을 막고 두 끝을 터서 그곳으로 물건을 넣고 어깨에 메거나 허리에 두르던 전대(纏帶) 모양의 주머니에 쌀을 담고 한지 고깔을 씌워서 안방구석에 매달고 명절이나 가족 생일, 제삿날에 음식의 일부를 바치고 산 속에 관계되는 기원을 올리는데, 이것을 흔히 제석주머니라고 불렀다.
영남지방에서는 큰 바가지에 쌀을 담고 한지로 덮어 묶고 안방 시렁 위에 모셔놓은 것을 삼신바가지라 부르는데, 위에다 수명장수의 상징으로 타래실을 놓는 경우도 있다. 이 바가지가 삼신단지로 바뀌어 놓이는 경우도 많다.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가끔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있는데, 호남지방에서는 단지에 쌀을 넣어서 위와 같이 모시고 지앙단지, 지앙동우들로 부른다.
평소에는 안 놓다가 출산 전후에만 안에 쌀을, 위에는 미역을 걸쳐놓는 수도 있다. 같은 호남에서도 전라북도에서는 단지보다 바가지를 삼신의 용기로 쓰는 경우가 더 많은 느낌이다. 모시는 날짜, 안에 쌀을 넣는 일 등은 다 같고, 한지로 덮은 뒤에 왼 새끼줄로 감는 예가 많다.
삼신은 산속(産俗)을 전반적으로 관장하기 때문에 중요하게 모셔진다. 아이를 낳게 되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빌기 위해서 삼신상을 차리는데, 삼신상에는 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씩 혹은 한 그릇씩 올리는 것이 예사이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도 갖가지 질병이 따르기 때문에 삼신을 위한 의례는 지속적으로 행하여진다.
삼신은 산속에 관계되는 신앙의 소산으로 일반적 출산, 문학적 설명, 종교적 의례가 결합된 관념이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출산의 중요성을 감지하여 이를 방비하고자 했던 소박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재야사학자들은 삼신신앙이 무가에서 나오는 황궁시대와 유인시대를 거쳐서 한인천제, 한웅천왕의 시대에 와서 신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 많은 경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때 한웅천왕은 풍이(風夷)의 족장으로 삼신신앙을 받드는 제를 올렸는데 그때 옆에서 율려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풍물패였다고 한다.
즉 한웅천왕시대에 하늘에 제를 올릴 적에 율려의 소리를 내던 풍이족의 음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 시절 하늘에 제를 올릴 적엔 반드시 모우라는 흰 소를 잡아 바치고 제관이 흰 소꼬리를 잡고 춤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바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추는 춤의 시작을 찾을 수 있고, 또한 지금 풍물패들의 전립에 달린 상모의 근원이 된다고 본다.
즉 상모란 모자 꼭대기에 달린 쇠꼬리라는 뜻이며, 우리 속담에 ‘쇠꼬리 잡은 놈이 임자(임금)’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쇠꼬리 잡은 사람이 임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풍물이란 말도 풍이족의 문물이 줄여서 생긴 말이라고 주장하고, 곧 한인천제, 한웅천왕의 문물이며 한민족의 문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무구 중에 삼지창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 또는 두 개로 뻗은 창을 만들 수 도 있는데 세 개의 가지가 뻗어있는 삼지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 삼지창의 의미는 바로 삼신을 나타내는 뜻으로 생각한다.
굿을 하면서 삼지창을 세우는 것은 삼신을 바로 받들어 세운다는 뜻일 것이다. 이 삼지창에다 소나 돼지 등 제물을 꽂아 세우는 것을 ‘사슬 세운다’고 하는데 이 사슬을 세우는 이유는 그날 드리는 정성을 신들께서 잘 받으셨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제물로 바친 소나 돼지 등이 잘 서면은 신들께서 잘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삼신께 오늘 드리는 정성을 잘 받으셨나 알아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신은 삼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현재 무당들이 모시는 신당에는 삼신이 없다. 삼신이 어처구니없이 삼불제석이란 이름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우리의 삼신할머니가 불교의 옷을 입고 계신다. 또한 영주산, 방장산, 봉래산 등 삼신과 관련 있는 전국의 어느 곳을 가서 보아도 삼신을 모신 사당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다. 겨우 칠월칠석이 되면 茶人들사이에서 칠성다례를 올리는 정도로 끝이 났다. 이것도 칠성다례가 아니라 칠석다례라고 하여야 한다. 또한 제물도 양(陽)을 상징하는 오이, 가지, 호박 같은 것을 바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모교(母敎)라는 이름으로 온 국민들이 믿고 따르는 토속종교가 있다. 그곳에는 여인의 신상이 세분이 모셔져 있다. 이 세분을 베트남에서는 천신, 지신, 수신이라고 해석하는데 우리의 삼신신앙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과거에 고(姑)라고 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여실히 증명이 되고 있다. 또한 고(姑)거리에서는 재물을 오이, 가지, 바나나, 붉은 고추 등을 사용한다. 그들은 모교신앙에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엄청나게 몰려와 정성을 드린다. 부녀자들이 쟁반에다 모신(母神)에게 즉 삼신께 바칠 제물을 머리에 이고 사당으로 오는 행렬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3. 삼신할멈 설화
3-1) 제주도 「명진국 생불할망 본풀이」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寅時)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3-2) 삼승할망
옛날 옛적에, 동해용왕이 서해용왕의 딸하고 결혼을 했는데 나이가 마흔이 가깝도록 자식이 없었다. 동해용왕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초조하고 안타까웠다. 후사를 걱정한 부부는 옥황의 석불님에게 간절히 기원하였다. 용왕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섭섭하게도 딸이었다. 뒤늦게 딸이라도 낳은 게 더없이 좋아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다. 그러나 너무 귀엽게 키운 나머지 버릇없는 자식이 되고 말았다.
한 살 때는 어머니 젖가슴을 때린 죄, 두 살 때는 아버지 수염을 뽑은 죄, 세 살 때는 곡식을 흐트린 죄, 네 살 때는 조상에게 불경한 죄, 다섯 살 때는 친족들과 불화한 죄 등 지은 죄가 많아가니 동해 용왕은 딸을 그냥 둘 수가 없어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을 눈치챈 동행용왕의 부인은 딸의 목숨만은 보전하게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용왕을 달래었다.
“어찌 이 내 속으로 난 자식을 죽일 수가 있으오리까. 차라리 무쇠철갑을 만들어 먼 바다로 띄워버림이 어떠합니까.”
용왕부인은 딸을 인간세상에 보내어서 살리려는 속셈이었다. 차마 딸을 죽일 수가 없었던 이들은 딸을 무쇠상자에 담아 바다위로 띄워버리기로 했다. 용왕의 딸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어머니, 제가 인간세계에 나가 무엇을 하고 삽니까?” 하자,
“인간세계에는 아직 아이를 낳게 하고 길러주는 삼신할미가 없으니 삼신할미가 되어라.” 하였다. 그러자, “그걸 내가 어떻게 합니까?” 하니, “아버지 몸에 하얀 피 석달 열흘, 어머니 몸에 검은 피 석달 열흘……” 딸은 아이를 어디로 해산시키는가를 채 듣기도 전에 용왕의 호령이 떨어졌다.
무쇠상자에 딸은 들어가고 자물쇠로 채워져 바다에 띄워졌다. 정월 초아흐렛날 무쇠상자가 동해바다에 띄워지니 물속에서 3년, 물위로 올라와서도 3년, 물가에 닿아서도 3년, 꼬박 아홉 해를 헤매었다.
작은 너울 큰 너울에 휩쓸려 하염없이 떠다니던 상자는 금백산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큰 파도가 치자 비로소 육지에 올려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물상자인 줄 알고 뜯어보았더니 보물은 보물인데 웬 아리따운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열여덟살이 된 동해용왕의 딸이었다. 앞이마는 햇님이요, 뒷이마는 달님이었다. 두 어깨에는 은하수 별빛들이 오송송이 박인 듯한 아기씨였다.
“너는 귀신이냐, 사람이냐.”
“어찌 귀신이겠습니까. 나는 동해용왕의 딸로서 인간세계에 삼신할미가 없다고 하여 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집 식구도 쉰이 되도록 아이가 없는데 아이를 하나 낳게 해주면 어떻겠느냐.” 하자,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요.” 해서 동해용왕의 딸은 임박사댁으로 가서 임박사의 부인이 아이를 배게 하였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임박사 부인의 배는 커져서 열 달이 되어서는 만삭이 되었으나 용왕의 딸아이는 어디로 해산을 시켜야할지 몰랐다. 열 달이 지나고 열두 달이 지났다. 이제는 뱃속의 아이보다도 산모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용왕의 딸은 그만 겁이 나서 산모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을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 하였다. 그런데 그게 그만 산모와 아이를 잃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용왕의 딸아이는 겁이 나서 임박사의 집을 나와 자기가 처음 닿았던 바닷가로 달려가 한없이 울고 있었다.
임박사는 모처럼 얻은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게 되어 그 원통함이 한량없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끝에 금백산에 올라가 칠성단을 차려놓고 요령을 흔들면서 옥황상제한테 호소를 하였다.
“저게 무슨소리냐?” 옥황상제는 지부사천대왕(地俯四天大王)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그는 임박사의 억울한 사연을 아뢰었다. 옥황상제는 곧 인간세계에서 삼신할미가 될 만한 사람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부사천대왕은 명진국 따님아기를 삼신할미로 옥황상제에게 추천하였다.
옥황상제는 명진국 따님아기를 데려오게 하였다. 얼마 후 명진국 따님아기는 곧 옥황상제 앞에 와서 엎드렸다. 옥황상제는 명진국 따님아기에게 “내가 오늘로 너에게 삼신이 되기를 명하노라.” 하자, “옥황상제님,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어찌 삼신노릇을 합니까?” 하였다.
옥황상제는 명진국 따님에게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을 가르쳐 주었다. 명진국 따님아기는 옥황상제의 분부대로 삼신할미가 되었다. 남방사주(藍紡紗紬) 저고리, 백방사주(白紡紗紬) 바지, 대홍대단(大紅大緞) 홑단치마, 물명주 속옷 등을 황홀하게 차려입고 사월 초파일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명진국 따님아기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한참 걷다가 보니 처녀 하나가 울고 있었다.
“어떤 일로 이곳에서 이렇게 슬피 웁니까?” 하니, “나는 본래 동해용왕의 딸로서 인간세계에 삼신으로 왔다가 해산시킬 줄을 몰라 사람을 하나 죽이고 답답하여 우는 것이오.” 하였다. “뭐라구요? 내가 바로 옥황상제의 분부를 받은 삼신인데 그게 무슨 말이오.” 이 말을 듣자, 동해 용왕의 딸은 명진국 따님아기의 머리채를 감아쥐고 욕설을 퍼부었다. 명진국 따님아기는 차분하게,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싸우지 말고 옥황상제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다.
둘은 그 길로 하늘나라로 올라가 옥황상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아뢰었다. 그리고 누가 인간세계의 삼신인가 판가름 해달라고 호소했다. 옥황상제가 “너희들을 그냥 보고는 구별하기가 힘들구나. 그러니 꽃씨 두개를 내어 주거든 서천서역국 모래밭에 각각 심어서 그 꽃씨가 자라는 것을 보고 구별할 것이다.” 두 처녀는 꽃씨를 받아서 심었다. 곧 새싹이 나고 가지가 뻗어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해용왕의 따님아기가 심은 꽃은 뿌리도 하나요, 가지도 하나요, 순도 하나가 돋아나 꽃도 시들어가는 꽃 한송이가 겨우 피어 있었는데 반해, 명진국 따님아기의 꽃은 뿌리는 하나인데 가지는 4만 5천 6백 가지로 번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옥황상제는 즉석에서 판결을 내렸다. “너는 시들어가는 꽃을 피웠으니 저승할미로구나” 하고 명진국 따님아기를 보고, “너는 번성한 꽃을 피웠으니 삼신으로 들어서도록 하라.” 하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동행용왕의 따님아기는 명진국 따님아기의 꽃가지를 하나 꺾어 버리면서, “아기가 태어나서 백일이 지나면 경풍과 경세 등 온갖 병이 걸리게 하느니라.” 동해용왕의 따님아기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명진국 따님아기는 용왕의 따님아기를 어떻게 해서든지 달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낳으면 너를 위하여 아기 업는 멜빵 등 폐백과 좋은 음식을 차려 줄 터이니 서로 좋게 지내자.” 명진국 따님 아기가 이렇게 사정을 하자 서로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가 앓고 잘 자라지 않으면 저승할미를 위하여 음식상을 차려 올리는 것이다.
명진국 따님아기는 곧 삼신할미가 되었다. 우선 금백산 아래 비자나무를 기둥으로 삼고 정자나무로 도리를 걸고, 대추나무로 서까래를 걸어 으리으리한 누각을 짓고 다락 네 귀에 풍경을 달아 놓았다. 이 안에서 삼신할미는 문 밖에 아이없는 아이 60명을 세워 놓고, 문 안에 아이없는 아이 60명을 거느리고 앉았다.
그의 앞에는 천장의 벼루에 삼천 장의 먹을 갈아 놓고 앉아 한쪽 손에는 번성꽃을 들고 한쪽 손엔 환생꽃을 들고, 앉아서 천리를 보고, 서서 만리를 보며, 하루에 만 명씩 잉태를 시켜주고 해산을 시켰다. 그래서 매월 초사흘, 초이레, 열 사흘, 열 이레, 스무 사흘, 스무 이레에는 만민 자손들한테 고마운 사례의 제를 받는다.
어느 날 삼신할미는 급히 해산을 시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바쁘게 길을 걷다가 마마신인 대별상의 행차와 마주쳤다. 대별상은 오색 깃발을 펄럭이며 좌우에 육방관속(六房官屬)을 거느리고 수레를 타고 인물도감(人物都監)을 들고 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마마를 시키러 오는 것이 분명했다.
삼신할미는 길을 비키고 공손히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대별상님, 제가 사람들에게 잉태시키고 환생을 준 자손에게 예쁘게 마마를 시켜주소서.” 대별상은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게 무슨 망측한 짓이냐. 여자란 꿈만 꾸어도 좋지 않은데 대장부가 가는 길을 막다니, 괘씸하도다.” 대별상의 노기는 대단했다.
삼신할미는 분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교만한 대별상은 삼신할미가 풀이 죽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지나가는 것을 보자 더욱 오만해졌다.
또 삼신할미가 내어준 자손들의 예쁜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삼신할미는 분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삼신할미는 그 길로 생불꽃을 하나 가지고 대별상의 집으로 가서 대별상의 부인인 서신국 마누라에게 잉태를 시켰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서신국 마누라의 배는 표가 나게 커갔다. 드디어 열 달이 지났다.
그러나 해산을 못했다. 삼신 할머니가 해산을 시켜주지 않으니 해산을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서신국 마누라는 배가 하도 불러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벌써 몇 번이나 까무라쳤는지 모른다.
“여보, 마지막 소원이니 삼신할미를 한 번 청해다 주오.” 서신국 마누라는 남편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다. 대별상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마누라가 곧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별상은 흰 망건에 흰 도포를 입고, 마부를 거느리고 위풍도 당당하게 삼신할미네 집에 이르렀다. 대별상은 삼신할미가 대문 밖에 마중을 나와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삼신할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별상은 마음이 언짢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별상은 삼신할미네 대문 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를 너의 집에 청하고 싶으면 어서 돌아가 머리를 싹싹 깎고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고 맨 버선으로 와서 엎드려라.” 대별상은 어쩔 수 없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깎고,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고 맨 버선으로 달려와 엎드렸다.
삼신할미는 다시 잔잔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꾸짖었다. “이제는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줄을 알겠느냐. 언제나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느니라.” 대별상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빌었다.
삼신할미는 다시 딴전을 부렸다. “나를 꼭 모셔가고 싶으면 서천강에 명주로 다리를 놓아라.” 대별상은 서천강에 명주로 다리를 놓았다. 그제야 삼신할미는 서천강을 건너 대별상의 집으로 갔다. 서신국의 마누라는 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삼신할미는 서신국 마누라의 배를 두어 번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서신국 마누라는 옥같은 아들을 낳았다.
(적송지성, 추엽 륭 『朝鮮巫俗の硏究』, 진성기 『제주도 무가집』, 현용준 『제주도 신화』)
오늘날에도 産前의 공포가 대단하다. 하물며 과거에는 출산으로 인한 고통과 사망에 대한 공포감은 더 컸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여러 가지 산속(産俗)이 생기고 금기와 신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삼신할미 신화는 바로 인간의 불안과 공포감에서 우러나온 신화라고 생각된다.
이 신화에 나오는 서신국 마나님은 두신(痘神)이다. 이는 어린이들이 겪어야 할 홍역과 천연두는 무섭기 때문에 신격(神格)이 형성되어 이 병에 걸리면 두신을 잘 모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구(舊)삼신할미는 용왕국 출신의 악신(惡神)으로 선신(善神)인 삼신할미에게 져서 저승으로 쫓겨갔기 때문에 저승할미라고 하는데 저승할미가 들면 어린이가 병들고 마침내는 목숨을 잃는다. 이런 악신을 다스리는게 삼신할미이기 때문에 삼신할미를 잘 모셔서 순산을 빌고 병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4. 가신신앙
가신신앙은 가택의 요소마다 신이 존재하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고, 그 신에게 정기 적, 또는 필요에 따라 의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가택신앙이라고도 하며 가정신앙, 집안신앙 또는 집신신앙이라고도 한다. 가신은 집안 곳곳에 존재하므로 가신신앙은 다신신앙(多神信仰)이다. 가신에는 성주, 조상, 조왕, 삼신, 조왕, 터주, 업, 철륭, 우물신, 우마신 등이 있다.
집의 건물을 주로 관리하는 신은 성주신(成造神)이다. 성주신은 건물을, 특히 대들보의 밑이 되는 마루를 관할한다. 마루라는 공간은 특히 서울지방의 가옥구조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주로 제사나 굿 등의 의례가 이곳 마루에서 행해진다. 마루 치장이 곧 그 집의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흔히 마루에 뒤주를 놓고 그 위에 자기(磁器)를 놓아 치장한다.
마루에서 평상시 먹고, 자는 것은 아니지만 여름이나, 사정에 따라서는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마루는 신성한 의미가 큰 곳이다. 마루는 흙과 온돌의 중간적 구조로서 땅으로 열린 중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온돌이 먹고, 자는 평면적 구조라고 한다면, 마루는 앉거나 서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방에서 식생활이나 성생활이 이루어지는데 반하여, 마루에서는 잔치나 제사, 굿 따위가 행해진다. 사람은 방에서 살다가 죽어서 마루로 돌아온다. 따라서 마루는 신성한 종교적 의미가 있다. 이와같이 신성한 장소를 관할하는 성주신의 위치는 그만큼 중요하다. 또 신성한 장소를 지키는 성주신은 속된 것, 부정한 것을 싫어한다. 집안에 초상 등의 부정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성주신이 부정(不淨)을 타게 된다.
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달아올리는 상량식(上樑式)에서 성주신을 받아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들보에 백지로 신체(神體)를 만들어 붙이는 것이 상례다. 매년 또는 수년에 한번씩 신체는 집의 중심이 되는 대청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에 백지(한지)를 접어서 실타래로 묶거나, 백지를 막걸리로 추겨서 반구형(半球形)으로 만들어 붙인다. 직사각형의 한지를 실타래 외에 띠풀로 매기도 한다.
이러한 신체와 함께 대청 한편에는 성주단지나 성주독을 놓기도 하고 성주단지나 성주독만을 신체로 봉안하기도 한다. 성주신의 신체를 봉안하는 것을 ‘성주 옷 입힌다’, 또는 ‘성주 맨다’고 하는데 대주(大主)의 나이에 7 또는 3이 들 때 맨다. 성주독이나 단지에는 쌀 또는 나락(낟알)과 같은 곡물을 담는다. 이는 우리의 오랜 농경문화를 반영한 것인데, 이 단지 안의 쌀은 주로 음력 10월 가을 추수 때 갈아넣는다.
이 속에 넣었던 곡물은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들만 먹는다. 그 곡물 자체를 복이 담긴 신성물(神聖物)로 여겨 이를 내보내는 것은 복을 내보내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주신앙 외의 다른 가신신앙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안동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모시는 용단지 속에도 곡물을 담아두는데, 추수 때에 갈아넣고, 그 전에 담았던 곡물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성주신은 특히 가옥을 신축했거나 이사를 했을 때에는 반드시 새로 매므로, 가옥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어 가옥신(家屋神)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성주신은 살아있는 대주(大主)를 상징하고 대주의 건강과 재수를 수호하는 역할도 한다. 경북 안동 지역에서는 성주신에 대한 제의는 으레 ‘성주는 대주를 믿고 대주는 성주를 믿는다.’는 말로부터 주언(呪言)이 시작된다. 여기서 대주는 집안의 호주(戶主)를 뜻한다.
그래서 호주가 세상을 떠나면 기존의 성주 신체를 태워서 없애고, 새 호주를 맞아 성주도 새로 맨다. 새 성주는 새로 호주가 된 사람이 이어받는다. 새로운 호주가 가정의 질서 체계에 적응하듯 새 성주 역시 그러한 질서 체계를 이어받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다른 가신에 대한 제의는 보통 주부가 주재하지만, 성주신에 대한 제의는 대주가 직접 참석하여 부부가 함께 지내기도 한다.
가신제는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에도 지내지만 예전에는 특히 햇곡을 천신하는 음력 10월 상달에 가신단지에 들어있는 곡물을 갈면서 크게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상신은 후손을 보살펴 주는 신으로 자리는 안방의 윗목 벽 밑인데 대체로 신체가 없다. 이렇게 신체가 없이 모시는 가신을 ‘건궁’이라 하며 조상은 건궁으로 모시는 경우가 흔하다.
조상신이 제석신(帝釋神), 세존단지 등 불교적인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신불습합(神佛習合)의 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원래 제석신은 불교의 상상의 산(山)인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는 최고신이며, 세존은 석가모니를 뜻한다. 세존단지의 경우 석가를 상징하는 석가와 우리 가신의 신체로 하는 단지가 합해진 말이니, 그야말로 불교와 우리 민간신앙이 중층을 이루고 있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 제석신이 아이를 관장하는 삼신으로 인식되는 예도 있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 산간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한지로 된 봉투에 쌀을 넣어 벽에 걸어두었는데, 이를 제석신이라 한다. 그 신은 육아를 맡고, 또 후손을 보살펴준다고 한다. 조상신은 가신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도 있다. 이는 명절이나 기일(忌日)에 제사를 받는 조상이다.
하지만, 가신으로서의 조상과 제사를 받는 조상과는 차이가 있다. 유교식 제사를 받는 조상은 서열이 명확하다. 가령 종가(宗家)에서는 집에서 4대 봉사를 하고,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산소에서 음력 10월 시향(時享) 때에 제사를 모신다. 그러나 가신으로서 그 자리에 앉고자 하는 조상은 서열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가족들에게 현몽을 하거나 또는 점복자와 같은 전문 사제자의 점사에 따라 모신다. 그러므로 가신으로 모신 조상신 가운데에는 막연히 ‘옛 조상’ 인 경우도 있다. 현몽이 있기 전에 우환이 있다던가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면, 그 일로 점복자를 찾게 되고 결과 그 조상신을 모시게 된다. 조상신으로는 주로 한(恨)이 많거나 무언가 색다르게 살다가 죽은 자가 들어앉는다.
조왕신은 부엌에 있는 신으로, 그 자리는 부뚜막이다. 삼신과 더불어 육아를 담당한다. 간혹 재산신으로 여기는데 불은 재산을 상징하고, 부엌에 불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재산을 상징한다. 가령 화재가 난 꿈이 재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새로 이사 간 집에 성냥을 가지고 가는 것도 재산이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많아지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있다.
예전에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는 곧 재산을 날리는 소박데기감’이라고 하여 괄시를 했던 것도 바로 불과 재산을 관련시키기 때문이었다. 조왕의 신체로는 조왕중발이라 하여 사기 종지에 정화수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체가 없는 건궁조왕도 흔하다. 조왕중발의 물을 매일 아침 갈아 올리고, 별식을 올리는 것으로 신앙의례를 표현한다.
원래 부엌은 신성한 곳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14 고구려 본기 제2대 대무신왕조에는 큰 솥이 불을 때기 전에 열이 나서 밥이 되었다는, 일종의 주술적인 힘을 가진 성물임을 뜻하는 내용이 있다. 부엌에 있는 제일 큰 솥을 조왕솥이라 한다. 부뚜막은 조왕신의 자리여서 주부들이 부엌에서 일할 때 아무리 피곤해도 부뚜막에는 걸터앉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조왕신을 재복을 관장하는 으뜸신으로 중시한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전래하여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궁중의 귀신을 쫓는 의례인 나례(儺禮)에도 조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중요한 가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조왕신은 섣달그믐 무렵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를 찾아가서 지난 일년간의 일을 고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 때 각별히 말조심을 하고, 때론 부뚜막에 엿을 붙여두기도 한다. 혹 하늘에 가더라도 옥황상제에게 좋지 않은 말을 전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입을 막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된 설화다.
조왕신은 자녀들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평소 조왕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 조왕을 모셔놓고 정화수를 올리는 등 새삼 섬긴다. 그러다가 일이 무사하게 지나가면 조왕중발을 거둔다. 상당히 실리적이고 공리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공리성은 조왕신에 대한 신앙 뿐 아니라 우리의 민간신앙 전반에 걸쳐 공통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삼신은 자녀의 출생, 육아, 성장 등을 관장하는 신(神)으로 그 자리는 안방 아랫목이다. 신체는 삼신자루라 하여 한지로 만든 자루 속에 쌀을 넣어 아랫목 높이 달아 놓는다. 또는 쌀을 바가지나 동이에 담고, 시렁을 만들어 거기에 얹어놓기도 한다. 이를 각각 ‘삼신바가지’, ‘삼신동이’라고 한다.
삼신은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로 통칭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 다른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삼신을 ‘지앙’이라 하고,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세존 할매’라 일컫는다. 집안에 따라서는 삼신할머니와 삼신할아버지 부부를 모시기도 한다.
또한 모시고 있는 신체(神體)를 곧 가신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가신신앙(家神信仰)의 일반적 특징으로 인해 삼신의 명칭이 결정되기도 한다. ‘삼신단지’, ‘삼신바가지’, ‘삼신주머니’ 등이 그러한 예이다. 여기에 지역적 특징이 가미되어 전라도 지역에서는 ‘지앙동우’, ‘지앙단지’,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는 ‘세존단지’라고 한다.
삼신의 점지를 받아 아이가 태어나면 7살 때까지 보호를 받는다. 그 후부터의 수명은 칠성신이 관장한다. 삼신은 아이를 관장하는 가신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을 차린다. 유달리 깨끗한 신이라고 생각하여 정화수만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물을 떠올린다. 또 설, 정월 대보름, 추석, 동지 등 주요 명절에도 삼신의례를 지낸다.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로 새 밥을 올리는데, 특히 삼신에게는 비린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
삼신은 그 가계의 여자조상이 좌정한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이 경우 대개 작고하신 시어머니 혹은 바로 윗대 할머니가 삼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만일 시어머니가 삼신일 경우, 이를 모셨던 며느리가 작고하면 먼저 모셨던 삼신(시어머니)은 나가고 작고한 며느리가 삼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삼신은 보통 장손에게로 이어지지만 간혹 예외적으로 차자(次子)라 해도 삼신을 모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현몽에 의해서 삼신을 모신다. 삼신은 아이갖기를 빌며 모시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이가 있더라도 섬기는 예가 있다. 현몽, 또는 점괘에 따라 삼신을 섬기게 되는데, 현몽이나 점(占) 보기를 전후해서 집안에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징후가 나타난다. 이는 다른 가신을 모시기 전에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가신신앙의 보편적인 봉안 동기다. 삼신바가지 혹은 삼신단지에 담긴 쌀은 일 년에 한 번씩 햇곡이 나면 갈아 둔다. 묵은 쌀은 집안 식구끼리만 먹으며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다.
터주는 지신(地神)이라고도 하는데, 집터를 맡아보며 집안의 액운을 걷어주고 재복을 주는 신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터주대감, 또는 터대감이라고 한다. 터주를 상징하는 신체는 집의 뒷뜰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신체로 모신다. 터주가리는 서너되들이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쌀 또는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는다. 이 터주가리에 담았던 곡물은 해마다 추수 때에 갈아넣는데, 역시 묵은 곡식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들이 먹으며 복을 빈다. 남을 주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격히 금한다.
가을에 햅쌀로 갈아넣을 때 메를 지어 올리는 경우도 있다. 터주신에 대한 제의는 특별히 지신제를 올리는 경우와 정초 차례나 그 밖에 명절에 떡을 한 접시 올리는 경우가 있으며 별식이 나도 한 그릇 올리는 등 대체로 다른 가신에 대한 의례와 대동소이하다. 이처럼 터주에 대한 제의는 여타의 가신과 흡사하지만, 충남 서산지역에서는 보다 크게 지낸다.
정월 중 길일(吉日)을 잡아 지신제라는 명칭으로 고사를 지낸다. 터신, 즉 지신이 주요신으로 인식되어 정월 고사를 지내는 것이다. 지신에게만 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신에게도 함께 올리지만, 지신을 중시하여 지신제라 하는 것이다.
업신은 광이나 곳간과 같은 은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재복을 준다는 가신이다. ‘업’, ‘업왕 신’, ‘업왕’, ‘업위신’이라고도 하지만, 민간에서는 업이라는 말과 함께 ‘지킴이’, ‘지킴’, ‘집지킴이’, ‘집지킴’ 등으로 불린다. 지킴이란 말이 넓은 의미에서는 집을 지켜주는 모든 가신을 일컬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마을 지킴이라고도 한다. 집안의 지킴이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지킴이로 구렁이가 있다는 사례가 조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대체로 집안에서 위하는 업신을 지킴이라고 한다. 다른 가택신과 달리 업신은 대체로 동물이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색다르다. 업신의 대상은 동물이지만 신체를 달리 봉안하기도 한다. 흔히 성주신은 대주를 상징하고 삼신은 여자 조상을 의미하며, 조상신은 윗대 조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별도로 신체를 봉안한다. 대주의 경우 집안의 살아있는 남자 어른인 호주(戶主)를 말하지만, 조상은 윗대 어른인데 유교식의 제사를 받는 조상과 가신으로서의 조상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여기 조상은 막연한 윗대 어른으로 실상 관념적이다.
그런데 업신의 경우 그 대상은 구체적으로 ‘현재 존재하는 동물’ 이라는 사실이 특이하다. 업신의 대상으로 ‘구렁이’, ‘족제비’, ‘두꺼비’ 그리고 사람을 들고 있다. 업이 그 집을 나가면 패가망신한다든가 또는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업신은 대체로 신체가 봉안되지 않고 건궁업으로 모시지만 간혹 업가리라 하여 옹기에 쌀을 넣고 그 위에 짚주저리를 씌운 터주와 흡사한 신체를 갖춘 사례가 드물게나마 나타난다. 비록 건궁업이지만 다른 가신과는 달리 업구렁이라든가 업족제비, 업두꺼비와 같은 동물을 업신으로 상정하고, 또 사람에게 붙어다닌다는 인업을 업신으로 삼고 있다.
인업은 사람에게 붙어다니면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신으로, 그 형상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인업과 인업을 달고 있는 사람과는 별개의 존재인데도 그 사람 자신이 인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업의 자리는 광, 곳간과 같이 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는 바로 업신이 재복신임을 말해 준다. 업신을 대접하는 의례는 정기적으로 지내거나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지낸다. 정기의례는 설날, 추석, 동지 등 주로 큰 명절에 다른 가신과 함께 올리고, 그 밖에 사람 눈에 띄었을 때에는 단독으로 올리기도 한다. 업신이 눈에 띄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업의 대상들은 사람들에게 예사롭게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업을 섬긴다든가, 그 밖에 가족이라도 각별한 사람에게 보인다. 그것도 각별한 일을 예견할 때 나타난다.
경북 안동, 예천, 풍기, 상주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용단지를 섬긴다. 특히 안동 지역에 서는 용단지 신앙이 가장 보편적인 가신신앙이다. 용단지는 신체(神體)의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용신은 바람과 비, 물 등을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 하늘과 땅을 오가는 전능한 신이다.
가신으로 모시는 용신은 농경신, 재산신으로 받들어진다. 재산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업신 또는 터주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용단지를 터주신이라고도 하고, 또는 업신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용단지는 용이 드는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 용이 든다는 말은 재산이 들고, 가정을 잘 수호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 자리는 곡물이 드나드는 부엌, 고방 또는 돈궤를 두는 다락 등이다. 용단지에는 쌀이나 나락을 담아둔다.
꺼칠용과 안용이라 하여 용단지 두 개를 위하기도 하는데, 이 때 꺼칠용은 남자, 안용은 여자를 상징한다는 가정도 있다. 또는 꺼칠용은 사나운 용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꺼칠용 단지에는 벼낟알 또는 겉 보리 나락을 담아두며 안용에는 쌀을 담아둔다. 다른 가신 단지와 마찬가지로 신성시하여 여기에 들어있던 곡물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들이 먹는다. 특히 가뭄이 들면 곡물을 갈아 넣어 정성을 드리기도 한다. 용단지를 위하는 까닭은 농경신인 용신을 받듦으로써 풍작을 기원하고, 재물을 보살펴주며 아울러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가신은 저마다 고유의 기능이 있지만, 또한 다른 가신의 기능이 혼재되어 있다. 농경신으로서의 성격은 가신이 전반적으로 지니고 있는데, 용단지는 보다 농경성이 강하다. 말하자면 농경을 보살펴주는 일은 용단지의 고유기능인 것이다. 그런데 용단지는 집을 수호하고 재물을 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가신인 업신, 또는 터주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특히 터주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안동 지역에서 용단지는 업신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늘날 농사를 짓지 않는 가정에서도 용단지를 섬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호남에서는 터주신으로 섬기지만, 장독신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철륭을 비롯하여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우물신, 소와 말을 지켜주는 우마신도 있다. 또 대문에는 문신(門神)이 있어 액살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며, 변소에는 측간신이 있어 항시 조심해야 한다. 가신은 대체로 집안의 평안을 위해 돌보는 착한 신이지만, 측간신은 좀 사악한 심보가 있다 하여 우리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상 예전 재래식 변소는 깊고 어두워 위험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조심해야 하는데, 그것을 신관념(神觀念)에 반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남에서는 왕신단지라는 사나운 가신을 모시기도 한다. 가신은 생업과 관련된 기능신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인삼농사를 하는 경북 풍기지역에서는 생업과 관련된 인삼신(人蔘神)을 상정하여 인삼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직능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가신신앙에서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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