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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 있는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1467~1555) 종가에는 ‘積善’(적선)이라고 쓴 큰 현판이 걸려 있다. ‘선을 쌓아라’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이다. 이 현판은 농암의 아들 매암 이숙량[23世 승정원 좌승지 권전(權詮)의 장인이다.]이 벼슬을 받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선조 임금이 “너의 집안은 적선지가(積善之家·선을 쌓는 집안)아니더냐”며 즉석에서 ‘적선’ 글씨를 하사한 것이다. 선조는 평소 농암 집안의 경로효친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권전(權詮)선생은 본인의 15대조이다.]
농암 종가 별당에는 실제 ‘愛日堂’(애일당)이란 현판도 걸려 있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웃어른에 대한 효심의 가풍이 듬뿍 담긴 현판이다.
답사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전남 구례의 문화류씨 고택 운조루에는 쌀이 두 가마 넘게 들어가는 큰 통나무 뒤주가 있다. 뒤주 아랫부분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고, 그 구멍을 막는 마개에는 ‘他人能解’(타인능해)란 글귀가 적혀 있다. 쌀을 채워두니 배고픈 주민은 누구나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의미다. 배고픈 이웃들을 걱정한 운조루 주인의 마음 씀씀이, 또 대를 이어 나눔과 배려를 실천한 가풍이 오롯이 녹아든 뒤주인 것이다.
급속한 산업화, 서구화 속에서 한국 전통문화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전국 곳곳에는 종가가 존재한다. 사전적으로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 집’이라는 종가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한국 전통문화의 여러 다양한 측면을 지금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서 지도층이던 이들 종가는 큰 존경을 받는다. 존경을 받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한 사회의 지도층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나눔과 배려 등 도덕적·사회적 책임과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대를 이어 성실하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농암 종가의 현판, 운조루의 뒤주는 가풍으로 이뤄져온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을 상징하는 귀한 유물인 셈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특별전 ‘종가(宗家)’는 종가들에서 전래되는 갖가지 유물, 증언 등을 통해 종가의 생활철학, 살림살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집안에서의 부모공경, 사회적으로 타인을 위한 나눔과 배려같은 덕목들을 강조하는 종가의 철학이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파편화된 현대 사회인에게 울림을 주는 그런 자리이다.
종갓집의 지붕과 대청마루, 사랑방, 장독대 등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전시장에는 전국 종가 22곳에서 가져온 역사·생활 자료,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위한 미디어아트 등 모두 156건 238점이 선보이고 있다. 전시품 중에는 ‘적선’ 현판과 더불어 보물 1202호인 ‘애일당구경첩’도 있다. 농암에게 90세가 넘은 부모가 생존하신 것을 기념해 그의 지인들이 1519년에 그림과 송축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농암이 수백명의 노인들을 초청해 경로잔치
를 벌이는 모습도 실렸다. 농암은 이 잔치에서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위해 50세가 넘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췄다고 전해진다.
종가의 자녀교육을 엿볼수 있는 자료들도 많다. 12대를 이어온 경주최씨 ‘최부잣집’ 사람들의 생활규범을 적은 ‘육연’(六然), 청렴함을 상징하는 안동김씨 보백당 현판, 종가 자녀들의 어린시절 반성문 등이다. 이건욱 학예사는 종가의 자녀 교육은 “자녀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목표를 뒀다”며 “핵심적 교육방식은 어른들이 먼저 실천하는 솔선수범이었다”고 밝혔다.
종가의 안살림을 이끈 종부들이 당시 며느리에게 쓴 편지들도 나왔다. 김제 서도 안동장씨 문중의 종부이던 남양홍씨가 1840년 막내 며느리에게 쓴 편지는 최초 공개되는 것이다. 진성이씨 노송정 이계양 종가의 18대 종부 최정숙의 편지 등에선 가풍을 잘 계승하라는 당부와 함께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이 애틋하게 담겼다. 2월 24일까지. /농암 종가 사랑채에 걸린 ‘적선’ 현판.
▼ 보물 제1202호인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조선시대 문신 농암 이현보에게 90세가 넘은 부모가 생존하신 것을 기념하여 그의 지인들이 증정한 그림과 송축시(頌祝詩)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이현보는 94세의 아버지 이흠(李欽)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등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고, 당호를 “봉양할 수 있는 날을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의 ‘애일당(愛日堂)’으로 지었을 정도로 효자였다. ‘구경(具慶)'이란 ‘부모가 모두 생존하셔서 경사스럽다’는 뜻이다. 이 책에 이현보가 80세 이상 노인들을 초대해 경로잔치를 벌이는 ‘화산양로연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이현보의 양친뿐만 아니라 남녀귀천에 관계없이 수 백 명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대접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현보는 이날 부모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경주최씨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자신을 지키는 여섯 가지 지침이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藹然)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득의담연(得意淡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종손인 최염 씨는 아들이 고시공부 할 당시 매일 같이 육연을 쓰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아들 역시 아침저녁으로 육연을 되새기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진했다. 그 결과 아들이 9전 10기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 김제 서도리 인동장씨 종가의 종부인 남양홍씨가 1840년 막내 며느리에게 쓴 편지.
김제 서도리 인동장씨 종가의 종부였던 남양홍씨가 68세에 자손들에게 집안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막내며느리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는 남양홍씨 자신의 집안 소개와 자식들과 며느리들에 대한 자랑이 주 내용이다. 셋째와 막내며느리의 임신을 기뻐하면서도 아기가 없는 첫째와 둘째며느리를 걱정하는 시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1840년 네 명의 며느리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는데, 현재 막내며느리에게 보낸 편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번 역 문】
나는 이 글을 왜 쓰는가?
나의 나이가 어느새 68세라. 기운이 있을 때 커가는 자손에게 우리 가문 이야기를 쓰는데 이 글을 받을 사람은 막내 며느리니라.
............(중략)
나의 며느리들이 우리 가문(家門)에 시집을 온 지 거의 삼십년이 되었다. 임신(壬申)년 이후로 차차 너의 네 동서가 이전에 들어왔거나 이제 갓 시집왔거나 간에 시부모를 섬김이 동서 형님과 차등이 없이 마찬가지며, 동서 사이에 구순하여 말썽 없이 의좋게 잘 지내고 우애가 넘쳐 한번도 안색을 변하여 화증하는 것, 곧 성질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일년을 하루 같이 만나면 웃는 거동이니 그 부모 된 자가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
네가 시집을 온 오륙 개월 후에 드디어 태기(胎氣)가 있어 기쁘고 생광(生光)함을 어디다가 비교하리? 아쉬운 때 어두운 때 낙심 중에 있을 때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비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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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손아래 셋째며느리와 막내며느리가 임신을 하여 배가 불러가는 것에 반비례하여서 위로 맏며느리와 둘째며느리가 아기 가짐이 늦어가는 셈이니 어서 위 두 형도 아기를 가져야지 하는 바쁨과 조급증이 더욱 급하였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저렇게 아기를 낳지 못할 것을 내 심려만 골똘하였을 뿐이로다.
......
그렇다면 동생의 아기를 보는 중에 형인 자기는 아기를 못 낳았는가 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심통을 부릴 만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바로 심증(心症)은 하나도 없었다.
막내동서가 임신할 때부터 맏동서는 지극히 돌보고 해산을 도와 산간을 하고, 갓난아기 삼일 되면 입히는 배냇저고리부터 챙겨 입히니 형이 동생을 위하는 것이 나는 기뻤다.
일변 맏며느리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깎은 듯 에인 듯하였다. 동생은 아기를 낳았는데 형이 되어서 아기를 못낳은 것을 본 내 마음은 쓰라렸다.
......
너의 심중에 한이 맺혀 생전 깊을 것이다.
한번 수백리 밖으로 시집을 간 후, 시집간 달로 친정에 근친하여 부모를 찾아뵙지 못하고 시집온 지 삼사년이 된 근래 양친부모가 삼사 개월 안에 종천영결(終天永訣)하셨구나. 부모가 다 세상을 뜨셨으니 얼마나 애통하겠느냐? 한번 멀리 시집을 가서 친정 부모와 이별을 한 것은 여자로서 할 운명이고, 유형(有形)이요 처신이라고 옛사람이 세운 법이지만, 사람마다 본디 다 친정에 가서 부모 뵙기를 어이 소원하지 않으랴? 출가한 딸이 친정부모님 얼굴을 직접 뵙고 반기고 어루만져 사랑하며, 시집살이가 편하다든가 고되다든가 하는 하소연을 친정부모에게 하는 것이 소원인데, 너는 부모가 그리 빨리 함께 돌아가셔서 다시 못 뵙고 하소연도 못하게 되었으니 너의 첩첩이 쌓인 한이 깊을 것이라. 깊고 말고!
우리 며느리 넷의 효행은 옛 선인들의 효행과 같아서 칭찬을 할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인품인지라 우리 며느리 덕행(德行)을 자랑하여 남이 알게 하고 싶으나 누구와 더불어 자랑하랴? 누가 능히 우리 며느리가 착하고 어질음을 알 자가 없으니 아무도 개구(開口)하여 말하는 바가 없는지라 나는 이렇게 가친 글로 대강으로 썼노라.
지금 세상에도 없고 옛날에도 없이 난필(亂筆)로 그렸으나 우리 자손간이나 보면, 그래서 지금까지 말한 이러한 내용을 본받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한다면 반드시 우리 집을 예의(禮義)와 문장(文章)이 있는 훌륭한 가문, 예문가(禮文家)라 말하리라.
부디 타인은 보이지 말고 자손간이나 보아라.
나의 기특하고 자랑거리가 될 이 추필(醜筆)을 구경하여라.
경자년 1월 홀연이 생각하니 내가 이렇게 글로 써두지 않으면 이 다음 사람이 우리집 사정과 아들과 며느리에 대하여서 알 길이 없을 것 같아서 기록을 하노라.
□ 노송정 18대 종부가 며느리에게 보내는 편지
진성이씨 노송정 18대 종부 최정숙이 2004년 시집 온 맏며느리에게 보낸 편지이다. 종부는 종가라는 낯선 환경을 처음 접하는 며느리에게 종가 종부로 시집온 것에 고마워하며, 한편으로는 종부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슬기롭게 이겨나갈 것을 당부했다. 특히 “너는 나와 어떤 의미로 보면 동창생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진성 이씨, 노송정 가문에 종부로서 30년 전후로 너와 내가 입학하고 지금 몇 년 겹친 현실에서 선후배로 유세 떨다, 나 떠나고 나면 지금 내 위치에 네가 서 있을 생각하니 만감이 가슴을 휘 누비는구나.”라는 말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한 여성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했다. 며느리를 맞이하는 종부의 따뜻한 마음씨를 엿 볼 수 있음
【번 역 문】
아가야 윤정아
하 많고 많은 창밖의 사람들 중에 네가 우리 치헌이 긴 인생의 동반자로, 우리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어 울타리 안으로 써억 들어오는 지금 우리는 너무나 반갑고 기쁘구나.
얼굴이 이여쁘고 학벌이 좋고, 사회적인 명예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건 너의 마음이 따뜻하고 건강하고 어여쁜게 내 눈에 보여 무엇보다 고맙고 반갑구나
두사람이 많이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이십수년 생활하다 서로 가끔 낯설기도 하겠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가족은 올가미가 아니고 안전띠라고 생각하며, 사랑을 근본으로 꾸밈없이 차근차근 의논해 나가면 그렇게 어렵고 힘들지만은 않으리라 미루어 생각해 본다
아가야 윤정아
너는 나와 어떤 의미로 보면 동창생이랄 수도 있지 않겠나?!
진성 이씨, 노송정 가문에 종부로서 30년 전후로 너와 내가 입학하고 지금 몇 년(?) 겹친 현실에서 선후배로 유세 떨다, 나 떠나고 나면 지금 내 위치에 네가 서 있을 생각하니 만감이 가슴을 휘 누비는구나.
우리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너 답고, 나 답도록 태산같은 자긍심을 갖자구나
나는 이 어미는 꼭 한번 지나가는 이 세상에 우리가 이렇게 기막힌 인연으로 만나 어줍잖은 행동이나 속빈 헛기침하는 내 공허한 마음 채워 주는 너를 고마워 할 것이며, 너의 젖은 옷 말려 입혀주고 털어주는 어미가 되려 노력하마.
흔히 사람들은 사랑은 소득세와 같아서 그 계산법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하지만 우리, 너와 나는 종이 한 장 끼울 여백도 두지 않는 꾸밈없는 사랑의 계산법을 쓰자구나.
한해 한해 나이테를 두루는 말없는 나무들처럼.....
아가야 윤정아
때로는 생활이 지치고 힘겨울지라도 우리들의 안전띠를, 울타리를 사랑하며
서로를 다독이며 포용하는 눈빛과 배려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단다.
일생일대에 한번 밖에 없는 혼인 절차에 서운한 점이나 미흡함이 왜 없겠냐마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보완해 나가기로 하고 두서없는 글 이만 줄일까 한다.
건강하고 행복하여라
갑신년 칠월 한낮에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는 어미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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