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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가꾸는 일을 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이브는 일의 효율성을 내세우며 서로 떨어져서 일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장면은 타락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브의 주장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교재의 318-321 쪽 부분을 보충하여 아래 내용을 읽어오기 바랍니다.
Eve's Choice in Separation Scene.hwp
Eve-s Choice in Separation Scene.hwp
Eve's Choice in Separation Scene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게 되며,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은 반드시 행해야 할 행위임을 밝힌 텍스트는 변화된 세계관과 함께 새로운 직업윤리와 노동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서늘한 미풍을 더욱 싱그럽게 하고
편안함을 더욱 편하게 하고,
건강한 갈증과 식욕을
더욱 즐겁게 할 정도의 수고인
그들의 상쾌한 원예일.
. . . no more toil
Of thir sweet Gard'ning labor than suffic'd
To recommend cool Zephyr, and made ease
More easy, wholesome thirst and appetite
More grateful. (4.327-30)
밀턴의 『실낙원』에서 우리는 베버(Max Weber)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를 찾아볼 수 있다.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깔뱅(Calvin)의 사상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즉 실제적인 노동을 통한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신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세속적인 직업이 바로 신이 준 소명(calling)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얻어지는 물질적인 이윤은 신이 준 축복의 표시라는 깔뱅의 생각이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종교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삶의 모든 영역이 거룩하다는 사상은 당시의 직업윤리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가꾸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이 노동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신이 부여한 존엄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종교개혁기의 변화된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를 『실낙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날마다 해야 하는 몸과 마음의 일이 있어서
거기에 그 존귀함이 나타나고,
그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나타난다.
Man hath his daily work of body or mind
Appointed, which declares his Dignity,
And the regard of Heav'n on his ways. (4.618-20)
낙원에서 아담과 이브는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돌아다니는 다른 생물들과 달리 매우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이 즐거운 노동을 통해 존귀해지도록 신이 창조한 것이다.
일어나시오, 아침은 빛나고 신선한 들판은
우리를 부른다오. 이 새벽을 놓치지 말고 봅시다.
우리가 가꾼 초목이 어떻게 자라고, 시트런 숲은 어떻게 꽃피며
몰약과 향목에선 어떻게 수액이 흐르고
자연이 어떻게 색칠을 하는지, 벌은
단물을 빨며 어떻게 꽃에 앉아 있는지를.
Awake, the morning shines, and the fresh field
Calls us; we lose the prime, to mark how spring
Our tended Plants, how blows the Citron Grove,
What drops the Myrrh, and what the balmy Reed,
How Nature paints her colors, how the Bee
Sits on the Bloom extracting liquid sweet. (5.20-25)
여기서 볼 때 에덴동산은 활기차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넘쳐나고 있으며, 아담은 매일 아침마다 자연의 다채롭고 신선한 변화를 설레는 가슴으로 대하며 기쁨으로 식물을 가꾼다.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는 노동의 역할은 각각의 사물을 떼어 놓거나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자연을 풍요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일이다. 이는 창조 세계를 지속적으로 조화롭고 충만하며 완전하게 만드는 일로서 창조 작업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창조에 대한 밀턴의 개념은 보다 역동적이고 열린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하겠다.
아담과 이브는 끊임없이 에덴동산의 식물을 가지치고 경계를 넘어가려는 경향을 바로 잡아주고 약한 부분을 떠받쳐준다. 이와 같은 동산 가꾸기 작업은 바로 아담과 이브 자신들을 가꾸는 행위로서, 밀턴은 동산의 식물들처럼 무한히 뻗어나가려는 인간의 욕망에 한계를 두고 절제할 필요가 있음을 에덴동산의 자연과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가꾸는 노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은 식욕과 지식욕을 포함한 욕망을 절제하고 다스리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낙원』에서 노동/직업윤리는 완전히 내면화 된 성격을 지니며, 사회나 가족보다는 자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동산을 가꾸는 노동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시각 차이를 통해 우리는 양성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현대적 개인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조명해 볼 수 있다. 밀턴은 인간의 삶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나뉜다는 현대적 사상을 이혼에 관한 산문 『테트라코돈』(Tetrachordon)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개인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실낙원』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성적 분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갈라놓는 기저에는 가정과 일터, 가사노동과 사회노동,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분리 등이 존재한다. 따라서 여성의 종속은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사업 세계에 대한 가정적인 일의 종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턴의 텍스트에는 이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성적 종속과 일의 분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사이의 긴장, 유혹과 부부간의 이별 등의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실낙원』에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을 가꾸는 정원사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동산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자신들도 성장을 계속하며 가꾸고 돌보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낙원』은 ‘환경 서사시’(environmental epic)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밀턴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다룬 연구들이 몇몇 등장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켄 힐트너(Ken Hiltner)의 『밀턴과 생태학』(Milton and Ecology)이다. 힐트너는 오늘날의 환경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토대를 탐구하기 위한 문학적, 이론적, 역사적 접근을 밀턴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밀턴이 현대의 중요한 생태학적 논쟁들을 예견하면서, 성서의 자료에 대한 소위 ‘녹색 읽기’(green reading)를 통해 그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처한 환경의 중요성과 함께 인간이 이 환경을 어떻게 가꾸고 보존해야 할 것인가를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경험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에덴의 삶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실현될 수 있는 긴장으로 가득 찬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긴장은 아담과 이브가 떨어져서 일하게 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브는 원예의 일을 버팀목을 대고(prop), 가지를 치며(prune), 베어내고(lop), 묶는(bind) 것으로 규정(9.210)하고 있는데, 이처럼 동산을 가꾸는 일은 바로 동산 가꾸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들을 가꾸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브는 노동이 즐거운 일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일을 갈라서 하자는 주장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이해하는데 실패했을까? 일을 나누어서 하자는 이브의 주장에 대한 아담의 대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견 차이가 전형적으로 오늘날 가정에서 일어나는 말다툼과 다르지 않으며, 현대적 성격의 가정이 탄생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아담은 이브가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여 혼자 가도록 허락함으로써 에덴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선택하고 시험하는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의 식물을 자르고 베고 떠받치고 묶는 정성스런 손질을 통해 에덴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서술은 정성들인 손질과 보살핌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자질을 이해하기 위해 기호의 부분적인 의미를 제거하는 일종의 전지를 요구한다. 이리하여 이해와 성장의 잠재성은 늘 아담과 이브가 당장에 갖고 있는 능력을 앞지르지만, 이 불균형은 중압감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즐거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즐거운 노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일 상쾌한 아침이 동녘을 첫 햇살로
서광을 비추기 전에, 우리 일어나
즐겁게 일하여 저쪽 꽃밭을,
또한 한낮이면 우리가 거니는 저 푸른 오솔길을
손질합시다, 그 길에는 가지가 우거져
우리의 부족한 손길을 비웃고 있으니.
제멋대로 자란 가지를 치는 데는 더 많은 손이 필요하오.
또한 저 꽃들과 흘러내리는 나무진도
보기 싫고 반듯하지 않게 흩어져 있으니
편안히 걷자면 제거할 필요가 있소.
Tomorrow ere fresh Morning streak the East
With first approach of light, we must be ris'n,
And at our pleasant labor, to reform
Yon flow'ry Arbors, yonder Alleys green,
Our walk at noon, with branches overgrown,
That mock our scant manuring, and require
More hands than ours to lop thir wanton growth:
Those Bloosoms also, and those dropping Gums,
That lie bestrown unsightly and unsmooth,
Ask riddance, if we mean to tread with ease. (4.623-32)
그러나 이 노동이 앞서 아담이 한 말과 같이 단순히 바람을 더 시원하게 해주고, 편안함을 더 편안하게 느끼게 하고, 갈증과 식욕을 더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여가 생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에덴은 활기찬 변화와 성장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그냥 두면 야생으로 뻗어날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로 인해 끊임없이 돌보고 가꾸어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즉 자연은 혼란과 무질서와 보기 흉하게 될 잠재성도 지니고 있어서 아담은 필요하면 때로는 가지를 쳐내고 질서와 변화를 부여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이다.
아담은 그가 창조된 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다(8.323-30).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과일의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먹는 행위에서 생긴다. 따라서 비록 사탄(뱀)의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타락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악을 아는 지식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불순종을 이해하는 데서 생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의 중앙과 9권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이 나무는 어떤 한계를 표시하고 있다(Entzminger 1985, 33). 그 한계를 넘음으로써 인간은 타락하고 악과 비존재와 죽음으로 나아간다. 타락 전 관점에서 볼 때 나무는 인식론적, 언어학적 한계를 의미한다. 타락 전 아담과 이브는 비록 죽음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밖에 모르지만 금단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타락 행위는 죽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갖게 해준다. 이리하여 나무는 비존재로 가는 길을 막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즉 나무는 죽음으로 가는 문과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으로 가는 문 둘 모두를 나타낸다. 죄를 범하는 피조물들은 비존재를 향해서 고의적으로 나아가고 악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불순종의 극한에 있는 죽음으로 향하는 성향을 지닌 피조물들 중의 하나인 사탄은 아담과 이브가 자기와 같이 되려면 그들이 불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음으로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유혹과 불순종의 유일한 방편임을 알게 된다.
『실낙원』의 9권은 동산을 가꾸는 일에 대해 아담과 이브가 나누는 논쟁에 가까운 대화를 거의 200행에 걸쳐 다루면서, 아담과 이브 사이의 홈드라마에서 이들이 느끼는 감정적인 긴장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브는 동산이 “억제로써 더 번식할" 뿐 한두 밤 동안에 자신들의 정성들인 손질을 비웃듯이 제멋대로 자라 야생이 될 지경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번성하는 에덴의 상황을 아담에게 상기시키면서 서로 일을 나누어 하자고 제안한다.
아담, 우리가 여전히 이 동산을 가꾸고
풀과 나무와 꽃을 돌보며, 우리의 유쾌한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돕는 사람이 없는 한은
우리가 노력해도 일은 늘어나고
억제할수록 더 번식할 뿐이에요. 우리가 낮에
베어내고, 가지치고, 떠받치고, 묶은 것이 뻗어나서
하루 이틀 밤사이에 비웃듯이 제멋대로 자라
야생이 될 지경이오. 그러니 이제 조언해주거나
아니면 우선 내 마음에 생각나는 것을 들어주세요.
우리 서로 일을 갈라서 해요. 당신은 당신이 좋은 곳으로
또는 가장 필요한 곳으로 가서
이 정자에 인동을 감아올리든지, 또는 휘감기는
담쟁이에 올라갈 길 마련해 주든지 하시고,
나는 정오까지 저기 도금양과 뒤섞인 장미 숲에서
손질할 것이 있나 보겠어요.
우리가 서로 이렇게 가까이서 온종일
일하는 한 서로 얼굴 쳐다보고 웃음 나누게 되고
새로운 사물을 보면 잡담을 하게 되어
그 때문에 하루의 일이 방해되어
일을 일찍 시작해도 별 효과 없이
저녁때 맨손으로 돌아오게 될 거예요.
Adam, well may we labor still to dress
This Garden, still to tend Plant, Herb and Flow'r,
Our pleasnat task enjoin'd, but till more hands
Aid us, the work under our labor grows,
Luxurious by restraint; what we by day
Lop overgrown, or prune, or prop, or bind,
One night or two with wanton growth derides
Tending to wild. Thou therefore now advise
Or hear what to my mind first thoughts present,
Let us divide our labors, thou where choice
Leads thee, or where most needs, whether to wind
The Woodbine round this Arbor, or direct
The clasping Ivy where to climb, while I
In yonder Spring of Roses intermixt
With Myrtle, find what to redress till Noon:
For while so near each other thus all day
Our task we choose, what wonder if so near
Looks intervene and smiles, or object new
Casual discourse draw on, which intermits
Our day's work brought to little, though begun
Early, and th'hour of Supper comes unearn'd. (9.205-25)
서로 독립적으로 일하자며 노동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이브의 제안은 비평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녀의 독립성을 표현한 방식이 적절한지 여부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브의 주장을 보면 그녀는 자신들의 노동이 즐거운 일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이브가 보여주는 약간의 성급함은 그녀가 자신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개인적인 한계를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머지않아 “젊은 손”이 자신들의 일을 도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브는 그 가능성이 충족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그녀는 “그러니 이제 조언해주시거나 아니면 우선 내 마음에 생각나는 것을 들어주세요”라며, 남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남편과의 친교보다 경제적인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앞서 아담이 노동을 신이 맡긴 소명으로 여기는 청교도적인 직업윤리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브는 노동의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이브는 동산을 가꾸는 일이 자기들의 힘에 너무 벅찬데다가 가까이서 일하게 되면 수시로 대화를 하게 되어 일에 방해가 되므로 떨어져서 일하자며, 물리적으로 구분된 공간에서 일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낸다. 이브가 “일을 일찍 시작해도 별 효과 없다”며 노동의 효율과 물질적인 생산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이 그들의 첫 말다툼을 일으키고 결국 헤어짐과 타락으로 이끌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은 신의 택함(election)의 표시인 반면 생산성은 타락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브의 제안에 대해 “집안일을 잘 보살피고 / 남편의 좋은 일을 돕는 것보다 / 여자에게 더 아름다운 것은 없소”(for nothing lovelier can be found / In Woman, than to study household good, / And good works in her Husband to promote; 9.232-34)라고 말할 때, 아담은 젠더에 따라 “집안일”과 “좋은 일” 사이를 구별 짓고 있다. 비록 이것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일과 아내의 일 사이의 차이를 개략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퀼리건은 이브의 일은 가정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남편의 안녕을 포함한 가사 일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라면, 아담의 일은 신학적인 울림이 있는 “좋은 일”로 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는 암시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Quilligan 183).
밀턴은 아담과 이브 사이의 홈드라마에서 이들 사이의 감정적인 긴장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서로 일을 갈라서 하자는 이브의 제의를 거부하고 일에 지나치게 우선순위를 둔 아내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사랑의 고귀함에 대해 일깨워준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휴식을 원할 때
음식이든 마음의 양식인 대화이든,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달콤한 미소를 교환하는 것이든
그것을 방해하실 만큼 그렇게 엄격히
노동을 강요하시진 않는다오. 미소는 이성에서 나오며
짐승에게는 없는 사랑의 양식이라오,
사랑은 인생의 가장 낮은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분은 우리를 귀찮은 노고를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 이성과 결합된 즐거움을 위해서 만드셨지요.
머지않아 젊은 손들이 우리를 돕겠지만,
그 때까진 이 길이나 나무 그늘이나 우리의 보행에
필요한 너비만큼은 둘이 힘을 합치면
쉽사리 황무지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어요.
Yet not so strictly hath our Lord impos'd
Labor, as to debar us when we need
Refreshment, whether food, or talk between,
Food of the mind, or this sweet intercourse
Of looks and smiles, for smiles from Reason flow,
To brute deni'd, and are of Love the food,
Love not the lowest end of human life.
For not to irksome toil, but to delight
He made us, and delight to Reason join'd.
These paths and Bowers doubt not but our joint hands
Will keep from Wilderness with ease, as wide
As we need walk, till younger hands ere long
Assist us. (9.235-47)
타락 이전의 자연은 아담과 이브가 노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아담과 이브는 이 동산을 질서 있게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보행에 필요한 너비만큼”이라는 아담의 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할 노동이 단순히 자연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낙원의 풍요와 황무지는 이처럼 너무나 가까이 존재하고 있다. 풍요로움과 지나침/야생의 경계 또한 매우 미세해서 이를 손질하고 억제하는 매일의 노동만이 걸어 다니기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산에서의 노동이 아담과 이브에게 유쾌한 성질의 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새벽 일찍 일어나 매일 손질을 해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자라 야생으로 변할 위험이 있을 만큼 끊임없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아담은 아직도 대화가 기운을 소생케 하고 여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브는 앞서 아담과 라파엘이 대화하는 것을 듣지 않고 물러날 때 그녀의 남편이 “유쾌한 딴 얘기를 섞고, 부부의 애무로써 고상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intermix / Grateful digressions, and solve high dispute / With conjugal Caresses; 8.54-56) 바랐던 때와는 많이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담은 “유쾌한 딴 얘기”와 “애무”를 곁들여 이브로 하여금 에덴동산이라는 외부 세계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주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게 해주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사랑과 기쁨을 확인하는 내면의 세계를 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브 역시 아담의 내조자(help-meet)일 뿐 아니라, 자신이 가꾸는 가정과 함께 남성들이 공적인 업무와 의무의 세계로부터 쉴 수 있는 피난처나 안식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그대와 더불어 있으면 시간도 다 잊어요”(With thee conversing I forget all time; 4.639)라며 아담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했던 이브가 이제는 대화가 방해가 되므로 떨어져서 일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밀턴은 부부 사이의 정신적인 교제와 대화의 중요성을 이혼을 다룬 여러 글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양성의 행복”(the Good of Both Sexes)을 위해 1643년 8월에 『이혼론』(The 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출판한 이래 1645년 3월까지 『이혼에 관한 마틴 부처의 견해』(The Judgement of Martin Bucer Concerning Divorce, 1644)와 『테트라코던』(Tetrachordon, 1645), 『콜라스테리온』(Colasterion, 1645) 등 남녀 간의 관계에 맞추어 기독인의 자유를 규정하려는 글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각 개인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내용으로 말미암아 그 반응도 민감하고 즉각적이었다. 밀턴은 모든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인간의 행복과 복리를 위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혼을 금지한 성경의 구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이 이혼에 관한 팸플릿에서 처음으로 계약과 형평, 자연법, 자유 등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후에 그의 정치사상과 후기 시에서 핵심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밀턴은 결혼 수년 전부터 이혼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후년에 『기독교 교리』(The Christian Doctrine)에서도 같은 관점을 반복하고 있다. 그 자신의 결혼과 별거라는 개인사를 떠나서도 밀턴이 결혼과 이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학자들 사이에 이 문제가 지대한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을 겪으면서 신교와 구교 간에는 여러 사안에서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결혼과 이혼의 문제는 각 교파의 신자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민한 부분이어서 신학자들의 이론이 반드시 투영될 수밖에 없는 프리즘과 같았다.
성서는 남녀 간의 결혼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결합에 비유하면서 그 신비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결혼한 부부와 비유하는 것은 영육간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었을 경우에만 해당되며 단지 함께 잠자리를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부애의 은총과 신비를 겪을 수 없다는 것이 밀턴의 생각이다. 결혼의 목적은 흔히 생각하듯 욕정의 불에서 해방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생식과 출산을 위한 것도 아니라 상호 위로와 도움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없애주려고 영혼과 정신의 동반자인 “적절한 돕는 자”(a meet help; CPW 2.240)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단지 육체적 욕정의 대상을 구하는 열정이 아니라 동료애로 맺어질 적절한 교제의 대상을 찾으려는 결혼에 대한 욕구를 밀턴은 “이성적인 열정”(rational burning; CPW 2.251)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외로운 삶의 해악으로부터 남자를 위로하고 새 힘을 돋구어주기 위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적절하고도 유쾌한 친교를 대화로 나누는 것이 결혼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밀턴은 해석한다. 육체적 동반이 아니라 정신적 교제가 결혼의 핵심이라는 생각은 밀턴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변함없이 견지했던 관점이었다.
일을 나누어서 하자는 이브의 주장에 아담은 “지나친 대화에 싫증나면 잠시 헤어지는 것은 참을 수 있지”(if much converse perhaps / Thee satiate, to short absence I could yield; 9.247-48)라면서도, “위험이나 치욕이 닥칠 때 / 아내는 자기를 보호하고 함께 최악을 견뎌주는 / 남편 곁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어울린다”(The Wife, where danger or dishonor lurks, / Safest and seemliest by her Husband stays, / Who guards her, or with her the worst endures; 9.267-69)고 대답한다. 적의 공격에 대처하는 능력이 아담 자신보다 못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말에 이브는 상처 입은 감정을 드러낸다(Edwards 153). 이브는 “사랑하면서 어떤 불친절을 당한 사람처럼”(As one who loves, and some unkindness meets; 9.271), 악한 적의 존재 때문에 하나님이나 아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의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그런 생각이 당신의 가슴에 깃들 줄이야”(Thought, which how found they harbor in thy breast; 9.288)라며 서운해 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는 이들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대화는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이브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고집하고, 아담은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위로하고 자신들에게 가해진 상처를 회복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분노와 증오, 불신, 의심과 불화”(Anger, Hate, / Mistrust, Suspicion, Discord; 9.1123) 등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격정으로 인해 점점 상처를 받고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험하니까 시험과 시련에 노출되지 않도록 남편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아담의 주장과,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일하러 떠나는 이브의 행동 가운데 어느 쪽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것인가? 아담은 이브가 자기 곁에 머물도록 보다 강하게 명령해야 했을까 하는 등의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들이 헤어지기 전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는 밀턴이 『아레오파기티카』에서 말한 자유의지 사상이 이브의 목소리로 표현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만일 교활하고 난폭한 적의 위협을 받는
좁은 지역에 제한되어 살면서
어디 가서 만나든 혼자서는 같은 방어력으로
막아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태라면,
항상 해를 두려워할 것이니 어찌 행복하다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해는 죄보다 앞서지 않지요. 다만
적은 유혹하여 우리의 고결함을 더럽히려고
달려들지만, 그 더러운 생각은 우리의
면상에 치욕을 주지 못하고 추하게
제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피하고
두려워하겠어요? 도리어 그의 추측이 어긋나
우리 명예는 배가되고 마음에는 평화를,
이를 지켜보시는 하늘로부터는 은총을 받을 거예요.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시련을 받아보지 않고서야
신의니, 사랑이니, 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 현명한 창조주가 혼자이거나 둘이거나
안전하지 않도록 우리의 행복한 상태를
불완전하게 해 놓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은 덧없고
그토록 위험하다면 에덴이 에덴이 아니지요.
If this be our condition, thus to dwell
In narrow circuit strait'n'd by a Foe,
Subtle or violent, we not endu'd
Single with like defense, wherever met,
How are we happy, still in fear of harm?
But harm precedes not sin: only our Foe
Tempting affronts us with his foul esteem
Of our integrity: his foul esteem
Sticks no dishonor on our Front, but turns
Foul on himself; then wherefore shunn'd or fear'd
By us? who rather double honour gain
From his surmise prov'd false, find peace within,
Favor from Heav'n, our witness from th' event.
And what is Faith, Love, Virtue unassay'd
Alone, without exterior help sustain'd?
Let us not then suspect our happy State
Left so imperfet by the Maker wise,
As not secure to single or combin'd.
Frail is our happiness, if this be so,
And Eden were no Eden thus expos'd. (9.322-41)
딕호프(John Diekhoff)가 지적한 것처럼 “시련을 받아보지 않고서야 신의니, 사랑이니, 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는 이브의 주장은 『아레오파기티카』의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429). 이 팸플릿에서 밀턴은 “악의 온갖 유혹과 그럴 듯한 쾌락을 알면서도 이를 멀리하고 분별하고 진정 더 좋은 쪽을 택하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전투적 크리스천이다”(CPW 2.514-15)라며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데 있어서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회피적이고 은둔적인 미덕”(a fugitive and cloister'd vertue; CPW 2.515)을 칭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 이브의 목소리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실낙원』 3권에서 성부는 “타락하는 것은 자유지만 / 나는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그를 옳고 바르게 만들었다”(I made him just and right, / Sufficient to have stood, though free to fall; 3.98-99)며, 타락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이 자유의지 사상은 5권에서 성부(the Father)가 라파엘(Raphael) 천사를 인간에게 파견하면서 하는 말과, 라파엘이 아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먼저 성부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의 행복한 처지를 알려주고 “그의 순종과 자유로운 신분과, 가까이 있는 그의 적에 대해”(of his obedience, of his free estate, of his enemy near at hand) 깨우쳐주기 위해 라파엘을 인간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사의 자유에 맡겨진 그의 힘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
즉 그 자신의 자유의지, 자유지만
변하기 쉬운 그의 의지에 맡겨진 행복을 알리고,
너무 안심하여 빗나가지 않도록 경고하라.
Happiness in his power left free to will,
Left to his own free Will, his Will though free,
Yet mutable; whence warn him to beware
He swerve not too secure: . . . (5.235-38)
이 성부의 말에는 ‘free’와 ‘will’이 반복되면서, ‘will’이 힘찬 동사에서 ‘free’의 수식을 받지만 동시에 ‘mutable’의 수식도 받는 취약한 명사로 미묘하게 옮아가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정도를 벗어난다는 의미로 쓰이는 ‘swerv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빗나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신의 메시지는 인간에게 임박한 위험의 정도를 한층 깊이 느끼게 한다.
5권에서 라파엘은 아담에게 신이 인간을 완전하고 선하게 만들었다는 것과 인간이 타고난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님은 할 수 없어서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섬김을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5.524-34). 라파엘은 아담과 헤어지면서 “굳건히 서라. 서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 그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렸나니. / 안으로 완전하게 되어 외부의 도움 구하지 마라”(stand fast; to stand or fall / Free in thine own Arbitrement it lies. / Perfet within, no outward aid require; 8.640-42)고 하는데, 이에 비추어 볼 때 앞선 이브의 주장과 요구는 옳고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레오파기티카』에서 아담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경험으로 인해 선과 악이 함께 결합되게 되었다는 슬픈 사실을 풍부한 시적 은유를 통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선과 악은 같이 자라는 것이어서 서로 떼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선에 대한 지식은 악에 대한 지식과 서로 얽혀 있고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서, 프시케가 부단히 애써서 고르고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뒤섞여 있는 씨앗도 이보다 더 혼란스레 섞여 있지 않았으리라.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쌍둥이처럼 달라붙어 세상에 나온 것은 사과 한 알의 껍질을 맛보던 때부터이다. 아마 이것이 선과 악을 아는 아담의 운명일 것이니, 곧 악으로 선을 아는 운명이다. (CPW 2.514)
여기서 밀턴은 기독교 전통에 속한 아담을 그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와 연결시키면서, 선과 악을 서로 몸이 붙은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 쌍둥이처럼 묘사하고 있다. “운명”(doom)이라는 단어는 아담의 행위를 숙명론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지만, 악으로 선을 알게 되는 선택은 아담의 자유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권의 줄거리(Argument)에서 밀턴은 이브가 서로 떨어져서 일하자고 주장한 동기에 대해 “조심성이 없다거나 꿋꿋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싫고, 오히려 자기 힘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해서”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담은 이브가 불쾌하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포기하고, 그녀가 머물기를 바라면서도 “가시오. 억지로 머무르는 것보다 가는 것이 나으니”(Go; for thy stay, not free, absents thee more; 9.372)라며 마지못해 가도록 허락한다. 이에 대해 화자는 “인류의 조상은 이같이 말했으나, 이브는 고집하며, 그러나 순종적으로, 마지막 대답을 한다”(So spake the Patriarch of Mankind, but Eve / Persisted, yet submiss, though last, repli'd; 9.376-77)라며 주의 깊게 배열된 단어를 통해, 자기주장을 견지하면서도 순종하는 태도를 보인 이브의 모순된 충동을 암시하며 그 순간의 심리적·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있다. 에덴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선택하고 시험하는 장소로 제공되면서, 충분히 유혹에 견딜 수 있으나 타락하는 것은 자유라고 하는 말이 이제 사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잠시 후 화자가 다시 개입할 때 고뇌에 찬 한탄을 통해, 타락의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자신의 깊은 동정과 개인적인 감정은 물론이고 이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있다(9.404-7).
이처럼 헤어지기 전 아담과 이브가 나누는 대화는 이들의 관계가 이전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의 대화는 이들을 더 이상 “한 몸, 한 마음, 한 영혼”(one Flesh, one Heart, one Soul; 8.499)이 아니라 두 마음을 가진 두 사람으로 구별 지으며 분리시킨다. 밀턴은 성경에서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구절을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일치와 조화를 포함하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아담의 정욕과 이브의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욕망은 앞으로 시가 비극적으로 진행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상호간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알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며, 이 대화가 그들을 지탱시켜주고 자기 망상에 빠질 가능성도 줄여준다. 그런데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이 상호간의 대화가 없다는 것은 불순종할 전제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담을 떠난 후 이브는 “생각 없이”(mindless; 9.431) 꽃을 가꾸고 떠받치는 일을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자세는 서로 주의를 해야 한다는 아담의 결론과 상반되는 것이다.
밀턴은 유혹의 장면에 앞서 “남편의 손에서 자기 손을 살며시 빼”(from her Husband's hand her hand / Soft she withdrew; 9.385-86)고 홀로 숲으로 향하는 이브를 매력적이면서도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손을 마주 잡는다는 것은 결혼과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화합을 상징하는데, 이 장면이 우리가 타락하기 전 부부로서 아담과 이브가 손잡은 것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다. 타락 이후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친화적이지 않고 서로에게 낯선 상대로 변한다. 이제 자연은 적대적이고 황량한 면모를 지니게 되고, 따라서 노동도 더 이상 상호 호혜적이고 자기 달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로 변모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동산을 가꾸는 일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시각 차이를 통해 양성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리, 개인과 자연 사이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다.
밀턴이 창조한 에덴동산은 활기차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넘쳐나는, 매일 지속적으로 가꾸고 손질하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세계이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의 식물을 가꾸는 일의 성격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지속적으로 조화롭고 충만하며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들을 가꾸는 행위이기도 하다. 에덴동산이 인간의 지속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기의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를 반영하고 있으며, 육체적 노동의 가치를 인정한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밀턴이 그리고 있는 창조나 에덴동산은 역동적이면서 열린 성격을 띠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의 식물처럼 무한히 뻗어나가려는 인간의 욕망에 한계를 두고 절제할 필요가 있음을 노동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을 가꾸는 일을 두고 아담과 이브가 나누는 대화와 이어지는 이별장면에서 우리는 양성간의 관계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현대적 자아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리 등에 대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 밀턴은 이별의 장면에서 아담과 이브가 나누는 논쟁에 가까운 대화를 통해 이브의 약점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녀의 강점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담이 이브에게 혼자 떠나도록 허락한 동기와 정당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독자에게 친숙하면서 이해할만하다는 사실에 비평가들은 대체로 의견을 같이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누린다. 이 과정에는 반드시 상황이나 서로의 생각에 대한 해석행위가 수반되며, 이때 잘못된 해석을 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별장면을 읽을 때 독자는 섣부르게 아담과 이브 어느 한 쪽에 타락의 책임이 있다든지, 누구에게 더 비난의 여지가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밀턴이 이브를 자유롭게 알고, 자유의지에 따라 원하는, 따라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주장할 수 있는 자로 그리고 있으며,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논쟁은 성자 하나님이 죄를 범한 이브에게 “너는 너의 남편의 / 뜻에 복종할 것이고, 그는 너를 지배하리라”(to thy Husband's will / Thine shall submit, hee over thee shall rule; 10.195-96)고 심판하기 전인 타락 이전의 세계에서는 책망 받을 만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브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이 죄와 잘못으로부터 깨끗한 순결한 정신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도덕적 선택을 하는 자유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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