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調의 새로운 美學 推究
① 주제의식의 확대이다.
영탄적 정서를 지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실존의 의미와 현실적 삶의 모습이 결합된 정서를 표출하여야 한다. 현실 인식(역사의식)과 현대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② 소재의 확충이다.
산수경물(山水景物)만이 아니라 인간·사물·현상이 시조의 소재가 되어 구체적이고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실성을 현장감 있게 표현해야 한다.
③ 시조 형식에 대한 철저한 이해이다.
3·4조나 4·4조로 글자수를 맞춤으로써 시조가 아닌 4음보의 음보율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 율격의 시라는 점을 이해하고 자수율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다양한 의미를 자유롭게 표현해 나가야 한다.
④ 상상력의 확충이다.
시조는 감성적 상상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물, 또는 생명의 본질적 의미를 형상화해 가기 위해 논리적 감성과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⑤ 다양한 표현방법의 시도다.
직서적·직정적(直情的) 진술을 피하고 함축적이며 개성적인 표현법에 따라 감각적인 언어로 시상을 펼쳐 보일 때 신선감을 줄 수 있다
낯설기 기법
러시아의 문학자이자 형식주의자인 빅토르 시클로프스키가 개념화한 예술기법의 하나이다.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것보다 새롭고 낯선 대상으로부터 미학적 가치를 느낀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실천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이론으로 정착시킨 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란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시계 바늘은 일정한 시간을 가리켜 주는 시계의 부품이다. ‘시계바늘이 9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 표현은 일상적 언어로 지금 시각이 9시라는 말이다. 그러나 ‘시계 바늘이 9시를 읽고 있다.’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진다. 더구나 뻐꾸기시계가 9시에 뻐꾹 뻐국 울며 9시를 알릴 때 “우리 집 뻐꾸기가 9시를 울고 있다”라고 할 수도 있다. 가리키던지, 읽던지, 울고 있던지 간에 지금 9시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데 이를 이렇게 ‘읽는다.’‘울고 있다.’로 하면 낯설기가 된다.
새소리는 귀에 들리는 것이지만 ‘새소리가 떨어진다.’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진다. 이런 현상은 평소 우리가 사용해 온 관념화된 표현 방식 때문이다. ‘떨어진다.’하면 돌이니 과일 같은 것이 떨어진다고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시조를 씀에 있어 이런 작은 데서 우리는 “낯설게 하기”의 표현을 찾아 낼 수 있다. 우리는 ‘돌멩이가 굴러간다.’라는 표현에 익숙해 있다.‘돌멩이가 땅을 친다.’라고 하면 같은 의미지만 표현 방법이 낯설게 느껴진다.
고시조에서 “낯설게 하기”가 잘 된 작품을 살펴보면 황진이 작품이 단연 최고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임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황진이는 중종 때 기녀로 활동한 15세기 인물이다. “기나긴 밤 한허리를 베어낸다.”는 표현은 <낯설게 하기>의 표본이다.
현대 시조시인들 뿐만 아니라 시인들까지도 이런 표현을 위해 학문적 ‘봄날의 짧은 밤’을 ‘춘풍 이불’이라 한 것도 그 비유가 뛰어나다.
‘밤’이라는 사물은 만질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고 느낄 수는 있다. ‘밤’이라는 명사는 어두워질 때부터 동이 틀 무렵까지이다. 아마 어두운 밤 전체를 하나의 옷이나 피륙으로 보고‘자락’이라는 말로 나타내었다고 본다. 중장 역시 ‘봄날 짧은 밤’이라 하지 않고 ‘춘풍 이불’이라는 시어를 도입하고 있다. 봄밤도 짧은데 춘풍이야 오죽 짧겠는가. 잠깐 지나가면 끝이다. ‘춘풍’을 끌어들여 아주 짧은 봄밤이라는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 종장은 화자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는 말로 종결을 짓고 있다. 절창 시조이다.
그러면 현대시조에선 어떻게 <낯설게 하기: 시치미떼기>를 하나?
언어의 새로운 조합의 예를 들어본다.
예를 들어, 이태극(李泰極)의 시조 ‘서해상의 낙조(落照)’ 중에서 ‘물이 끓는다. 라든지 ‘구름이 마구 탄다. 는 등의 시구는 물리적인 사실에 어긋나기 때문에 낯설음을 느끼게 하며, 김춘수(金春洙)의 시 ‘나의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을 ‘늙은 비애(悲哀)’,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으로 표상 화함으로써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낯설게 하기’는 말과 글의 일상적 양식들을 붕괴시킴으로써, 일상 지각의 세계를 낯설게 하여, 독자가 상실한 신선한 감각 능력을 회복시키는 예술적 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 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게 된다.
*물소리만 들리다➛물소리 홀로 산다. 물소리 숨쉬는 곳
*잡초가 무성하다➛잡초들이 수런수런 모여 산다.
*외로운 노인➛고독에 갇힌 노인, 고독만 쌓는 노인
*새소리가 들리다.→새소리가 귀를 친다. 새소리 밟히다.
*가을이 오다 →가을이 착륙했다.
*자유를 되찾다→갇힌 시간을 풀다.
*굴러가는 돌멩이→달음질치는 조약돌
*바람이 세게 분다.→바람이 소리친다. 바람이 난리친다.
*일용직 근로자→공사판을 떠도는 돌
*빗방울→흙이 먹는 진주알, 흙이 먹는 우유 방울
*새벽→먹빛 어둠 거둬내는 일꾼,
*추억→지난날의 눈동자.
*아픈 추억 →설움이 쏟아지는 골짜기
*봄을 알리는 새소리→봄을 묻힌 새소리.
고무신 -장순하 (張諄河, 1928~ )
눈보라 비껴 나는
전ㅡㅡㅡ군ㅡㅡㅡ가ㅡㅡㅡ도(全群街道)
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 백색부(시조집ㆍ1968)
시조가 이 정도 되면 고유의 형식을 뛰어넘어 회화성마저 띤다. 눈보라 날리는 날, 전주와 군산을 잇는 도로를 달리며 본 풍경을 스케치했다. 외딴집 섬돌에 놓인 세 켤레 신. 두 내외의 신 사이에 아이의 신이 놓였다. 그것을 시인은 ‘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이라고 썼다. 이 작품은 시조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시인의 뜻은 실험 정신을 실제적으로 구현해보고자 함에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한 전범이다
심회/김광수
적요의 한나절을 허랑히 다 버리고
마음이 허전하여 무작정 걷는다만
아쉬움 웃자란 길섶 뉘우침만 무성하다.
푸른 날빛 스치고 간 생애의 비탈에는
구름으로 휘어잡는 백장미 꽃 대궁이
미명에 빠진 영혼을 추스르며 서있다.
시에서의 낯설기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는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의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고 하였다.
19금/ 김영주
목욕탕 집 멀쩡하던 담벼락이 술렁인다.
어젯밤 달빛 아래 무슨 수작 있었는지
목련꽃 펑펑 터뜨리며 “우리 너무 화끈했나.”
옷이 자랐다/최수영
구순의 오라버니 옷이 자꾸 자랐다.
기장도 길어지고 품도 점점 헐렁하고
마침내 옷 속에 숨으셨다. 살구꽃이 곱던 날에
사실은 옷이 자라는 게 아니라 체구가 줄어드는 것인데 이 현상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초장 ‘옷이 자꾸 자랐다.’중장‘품도 점점 헐렁하고’ 종장 ‘옷 속에 숨으셨다.’는 체구가 점점 줄어듦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 우리에게 노화과정을 맛보는 슬픔을 전해주고 있다. 낯설기가 잘 구성된 작품이다.
* 낯설기 남용 예문
낯설기 남용이란 한 마디로 사리에 맞지 않는 지나친 비유로 쓰는 경우이다. 오용은 아예 비유가 잘못 된 것이다. ‘비오는 밤 내린 달빛’‘어둠이 내려앉은 한낮에’등과 같이.
그 얼굴 /
십 리 산골길에 오두막 한 채 *초장; 음수 이탈
강담 너머 내다보던 나이 잊은 가시버시
이 빠진 누룽지 같은 얼굴 겸연쩍게 웃더라. *종 전구; 비유 남용
-종장 “이 빠진 누룽지”는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낯설게 하기“를 한 표현 같지만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첫마디 3자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이 빠진 얼굴’ ‘누룽지 같은 얼굴’이 되므로 종장 첫 소절과 둘째 소절에 연이어 관형어가 와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첫 소절 3자가 비독립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격조 있는 작품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면 시조의 작품성은 <낯설게 하기>를 반드시 충족시켜야 그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꼭 그렇지 않다. 다음 예문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관념적 언어로 된 시조 작품 중에 뛰어난 것도 많은데 이는 서정성이 강하기 때문에 독자로부터 애송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김상옥의 <봉선화>이다.
봉선화/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 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손에 본 듯 힘줄만이 스노나.
3수로 된 연시조이지만 어느 한 곳도 비유로 된 곳이 없고 같은 말이 반복된 곳도 없다.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서정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 김흥열 『현대시조 연구』 발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