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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백제에서는 가한 즉 칸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진한의 백성이 고구려 백제처럼 부여계가 아니고 흉노계임을 알수 있다.즉 흉노의 조상인 스키타이(거란족을 키타이라고 불렀다.)의 후예인 것이다. 우리 고대사분류로 보면 선비족혹은 흉노족 계통이 바로 진한의 조상인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보면 6국은 진나라를 가리켜 중화와 다르고 서이족이며 심지어 흉노족과 동족이라고 한 것도 있다.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이 흉노의 두만선우와 그 아들 묵돌에게 우리의 조상은 공통적으로 하나라의 옛왕으로 진과 흉노는 형제가 아니냐 했다고 한다.5호16국시대에 흉노족이 세운 나라가 바로 하나라이다. 그들은 하나라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했다.
문무대왕 비문에 보면 왕의 조상은 흉노의 왕자였던 투후김일제라고 했다.그런데 투후의 후손들이 진한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진한의 구성주민은 흉노계열과 전국시대 진나라인임을 알수 있다.
진나라 효공때 전국시대 6국이 당시의 패권국인 위나라가 주도하며 진나라를 침공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 진나라 사람들이 동쪽으로 피난 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위나라가 동쪽에서 침공해들어오고 있는데 동쪽으로 피난간다면 죽으러 간다는 것이다. 위험을 무릎쓰고 동쪽으로 피난한 까닭이 머겠는가? 동쪽에 자신들을 받아줄 동족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실제로 마한제국은 진나라 유민을 받아들여 진한을 이루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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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통일한 이후 폭정으로 망하자 진나라 유민들이 또 대거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바로 진한의 직접적인 조상인 것이다. 그 이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왔기 때문에 진한이라 불릴 것이 없었는데 이 때부터 진나라의 秦자를 따서 진한이라 부른 것이다. 이들이 피난왔던 길이 어디일까?
몽염장군이 생전에 공사한 바로 진직도 이다. 황하서쪽의 장안일대에서 동쪽으로 안전하게 이동하려면 진나라사람들은 필시 이 진직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해가 안되면 당시에 본인이 진나라에 살았다고 생각해보라 그 넓고 좋은 길을 두고 도적과 외적이 넘치는 다른 길을 이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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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때 고지도에는 두개의 구원이 존재한다. 둘중하나가 바로 진직도의 끝인 구원일 것이다.
이 당시 동이족은 고조선제국이 붕괴되면서 북방의 부여가 천자의 지위를 이어받고 마한제국이 동쪽에 기자조선이 부여의 남쪽에 있었다.
임인년 마한 신라 시조 39년, 고구려 시조 19년ㆍ유리왕(瑠璃王) 원년(한 성제 홍가 2, B.C. 19)
백제를 변한에서 갈라졌다고 하고 변한은 원래 진한에서 왔다고 하니 진한의 초기 위치는 백제의 도읍인 산둥성 료성시(백제위례성)근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는 마한제국의 수도인 월지국이 서쪽으로 생각될수 있다. 백제의 개국지인
한수일대를 중국사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137 백제의 한수는 탑수라고 불렸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442 한수의 근원은 산서성
한나라의 대신이던 왕망이 반란을 일으키고 신나라를 세웠는데 투후의 후손들은 왕망과 친척이었기에 당시에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왕망이 망하자 투후의 후손들은 한나라의 박해를 피해 도망해야만 했다. 투후의 후손들은 흉노족수만명과 함께 산둥성 하택시일대의 옛투국에서 살았다. 이후 왕망이 죽자 동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당연히 진나라와 흉노인들이 먼저 살고 있던 진한을 찾았던 것이고 그곳에서 김씨일족이 귀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춘정월 변한(卞韓)이 사로에 항복하였다.
임오년 마한 신라 시조
19년(한 원제 영광 5, B.C. 39) 삼국사기 동사강목 신라본기
백제가 건국되기 전 변한이 진한에 속한 사로국에 항복한 기록은 변한과 진한이 바로 옆이라는 옛기록과 일치한다.
문무왕의 조상인 투후의 후손들은 즉 산둥성 하택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기존 진나라와 흉노인들이 살던 진변한에 들어와 귀족으로 대접받은후 서서히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초기부터 백제가 신라를 자주공격했다고 나온다. 그때문에 신라의 조상들은 동쪽으로 이동해 간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우리 가문의 족보에는 신진한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새로운 진한 즉 기존 진한의 영토가 아닌 새로운 곳에 진한이 다시 나라를 열었다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956고려의 경주는 텐진동쪽
그 증거가 바로 고려시대 경주의 위치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호동왕자의 활약으로 낙랑국을 멸망시키자 낙랑사람5천명이 신라에 귀순했다라고 쓰여있다.
병자년 신라 남해왕 13년, 고구려 유리왕 35년, 백제 시조 34년(망 천봉 3, A.D. 16)동사강목
백제가 건국한뒤에 엄청난 기세로 마한제국을 멸망시켰다. 마한제국은 사방4천리로 당시에 초나라가 사방5천리라는 기록이 있는데 마한제국이 얼마나 컸는지 알수 있다.
이 거대한 땅이 바로 사방5천리이다. 발해제국이 사방5천리라고 했으니 초나라와 영토가 같다. 마한제국은 초나라에 비해 조금밖에 작지 않았는데 백제가 모두 차지했으니 그영토가 초기에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수 있다. 실제로 남조인 양나라의 기록에는 신라에 대해 옛 진국에서 만리 백제에서 동남으로 5천리라고 하고 신라의 남북쪽은 모두 고구려와 백제땅이라고 했다.양서에 기록된 신라는 법흥왕때이다.마한제국이 한반도와 산둥 하북을 모두포함한 것을 알수 있고 백제가 그곳을 초기부터 점령했음도 알수 있다.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정유년 신라 유리왕 14년,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백제 다루왕 10년(한 광무 건무 13, A.D. 37) 삼국사기
백제에 의해 마한제국이 점령된후에 신라인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바로 위의 기록이 그 대답이다
지금 산해관과 영평부에 호동이라는 지명이 보이는가
낙랑국을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이다. 그의 지명이 영평부북쪽에 남은것은 저 곳일대가 바로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수 있다. 실제로 산둥성 임치에서 최씨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몇년전에 압록강하류에서 백제의 전방후원분과 고구려의 적성총을 대량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얼마전에 서울시에서 무려 500m나 되는 초대형 전방후원분이 발견된 적이 있다. 백과사전에는 백제의 전방후원분은 그 원형이 양자강하류와 산둥반도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많이 띨빵한 학자들이 그것을 가리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얼토당토 안되게 주장하는데 돼지가 웃을 일이다. 중국사서에 진(晉)나라이래로 강좌지방 즉 양자강하류가 백제땅이라고 쓰여 있다. 구당서에 백제가 바다를 건너 월주에 경계가 닿는다고 하여 백제사 전공인 이도학교수가 절강성의 옛 월주 지금 소흥에 가서 확인하니 일부 주민들이 백김치를 아직까지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중국의 영향이 아니라 원래 백제인들이 전방후원분무덤을 만들어서 썻던 것이다. 지금 일본의 전방후원분무덤이 아직도 백제계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국보로 간직하는 칠지도에 새겨진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다라는 글귀를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기술이 정확하다면 신라는 진한에서 제일 잘나가던 왕국이었다. 초기에 변한을 병합하고 강대국으로 키워나가려는 도중에 백제가 변한지방에 와서 건국되면서 불과 수십년만에 사방4천리나 되는 거대한 제국 마한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모두 차지해 버린다. 신라역시 이당시에 이미 백제로부터 침공기록이 무수한 것을 보아 이미 복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남북조시대 남조와 북조의 기록을 보면 신라왕을 가리켜 원래 백제사람인데 바다를 건너가서 나라를 열었다. 백제에 순응한다. 백제의 속국이다 이런 표현이 많다. 이미 초기에 복속이 되었고 백제에 의해 위의 지도상의 영평부일대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에 경주를 저곳에 둔 것이다.
이후 신라인과 가야인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전라남도일부인 것이다. 이곳에서 선비족이 유입되면서 법흥왕의 성이 모진이라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다. 남조시대 양서의 기록이 바로 경상북도 경주가 당시 법흥왕때의 신라중심지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유물로도 울산과 울진에서 법흥왕이 다녀간 기록이 있다.
나는 신라가 최초로 경주시에 정착할때를 김씨최초왕인 미추왕때로 보고 있다. 경주시인근의 고성발굴에서도 성벽각서에 금성과 양주에서 사람을 징발해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시간을 경주시에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다로 나아가
대사도(大謝島), 구흠도(龜歆島), 어도(淤島), 오호도(烏湖島)를 지나는 데
300리,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서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鎭)까지 가는 데 200리,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 청니포(靑泥浦),
도화포(桃花浦), 행화포(杏花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 오골강(烏骨江)까지가 800리이다.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오목도(烏牧島), 패강구(貝江口) 초도(椒島) 를 지나면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도달한다.
또 진왕석교(秦王石橋),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를
경유하여 1000리를 가면 압록강과 당은포(唐恩浦)에 이르고, 이어 동남쪽으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王城)에 도달한다. 《신당서(新唐書)》
동사강목
신당서지리지에는 또다른 신라의 수도가 등장한다. 바로 당나라 등주에서 3천리 거리에 신라왕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학자 임국웅은 송나라등주가 동아현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는 증거는 바로 양곡현의 위치때문이다. 고대에 양곡은 해가뜨는 곳 즉 등주처럼 동해바로 옆에 위치했다. 순임금이 우이를 살게 한 곳도 이곳이고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할때 우이를 목표로 했는데 그곳도 이곳이다. 수서에는 양곡현의 일부 경계만 얻어서 현을 설치했다라고 한다. 즉 양곡현대부분이 수나라땅이 아니란 것이다. 양곡현과 동아현은 바로 옆이기 때문에 이곳이 바로 고대의 등주즉 당나라 등주일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곳으로 고대에는 황하가 흘렀고 황하가 범람하면 거의 바다처럼 보이기때문에 충분히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005 명나라고지도
실제로 명나라때도 산둥성 덕주시앞의 강을 가리켜 동해라고 써있다.
고대에는 심양에서 봉황성까지 약 7백리이고 심양에서 베이징까지 1400리 베이징에서 덕주까지 약 천리 ,천진에서 양곡현까지 1200리내외이기 때문에 대략 당나라등주에서 3천리 거리에 거대한 고성유적은 지금 요동반도 봉황성밖에 없다.
신라는 원래 진한과 변한의 땅인 산둥성 료성시일대에서 진과 흉노인들이 살면서 세워진 진한을 바탕으로 왕망의 친척인 투후의 후손이 망명하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으나 백제가 마한제국을 붕괴시키면서 패자로 등극하면서 속국으로 들어갔다. 이후 텐진의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계속 동쪽으로 가서 법흥왕시기에는 백제로부터 벗어나 경주시일대에서 독립했다. 이때 인구 약 100만내외의 작은 나라였으나 법흥왕과 진흥왕대에 영토가 크게 늘어 북한과 요동반도일대에도 영토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수도를 요동반도 봉황성으로 옮겻을 것이고 통일전쟁이후에 결국 승리하면서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 텐진의 동쪽으로 수도를 옮겼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에서 그곳을 경주라고 칭한 것이다. 신라말기에 영토가 줄어들면서 다시 요동반도 봉황성으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망한 것이다. 발해가 망할때 신라가 요나라에 요청에 응해 군대를 보낸 것이나 신라가 고려사신에게 우리 북쪽에 말갈이 있다라고 한것은 한반도 경주시가 신라 말기의 도성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도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할때 경순왕이 되는 김부가 강원도로 피난을 왔으며 그래서 김부라는 지명이 지금도 강원도에 있다라고 쓴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의 대부분을 망할때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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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함에 감사하다.
기쁨은 반드시 커다란 일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남의 평가에 신경쓰지 말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보람을 찾으면 된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명성보다는 진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잠 못 이루지 말고 잊을 것은 빨리 잊도록 해야 한다.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근심하지 않는다.
행복은 모르고 지나간답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며 감사하는 하루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