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수구다라니 염송과 납탑의 배경
(3)해인사묘길상탑의 법보로서의 수구다라니
수구다라니를 서사하여 탑에 봉안한 사례로는 『백성산사전대 길상탑중납 법침기』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자료는 『해인사묘길상탑기』로 통칭되는 것으로 해인사 일주문밖의 탑 안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이다. 탑지는 모두 4매로 『해인사 묘길상탑기』 및 『영이묘년상월 운양대 길상탑기』‧『백성산사전대 길상탑중납 법침기』‧『오대산사길상탑사』및 『곡치군(哭緇軍)』‧『해인사 호국삼보전망치소 옥자』이다. 제1매는 최치원(857~?)이 작성하였는데, 앞면에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탑을 세우는 것이라는 건탑 목적을 밝혔다.
뒷면은 『영이묘년상월 운양대 길상탑기』로 건탑 비용 및 참여 공인(工人)의 명단이 있다. 제2매는 탑 안에 넣은 법보(法寶)를 나열하였다. 제3매의 앞면 『오대산사길상탑사』와 『곡치군』은 승려 승훈(僧訓)이 작성하였는데, 치군(緇軍)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제4매는 『해인사 호국삼보전망치소 옥자』로 894~895년 사이 해인사 근처에서 일어난 난에서 사망한 56명의 승려 및 속인들의 명단이다.
이처럼 탑지 4매는 모두 연관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들 자료를 통해 해인사에서는 진성여왕9년(895)에 약 7년간 계속되어 온 '초적(草賊)'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해인사 별대덕(別大德)승훈이 주도하여 탑을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하대 들어 농민 주도봉기가 진성여왕3년(889)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과정에서 대안사, 보리사, 성주사, 봉암사, 흥녕사 등의 사찰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데 해인사 또한 난에 휩쓸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해인사는 사원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승․속이 함께 '치군'을 구성하여 대응하였다. 탑지에는 해인사 이외에도 운양대‧백성산사‧오대산사 등의 사찰명이 등장한다. 이 사찰명은 해인사를 중심으로 치군을 편성하는데 참여한 사찰들로 생각된다.
이 중 제3매에 해당하는 『백성산사전대 길상탑중납 법침기』에 따르면,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를 납탑했다고 한다. 함께 넣은 법보를 『무구정대다라니경』‧『법화경』‧『정명경』‧『금강반야경』 등 '경(經)'명으로 표기한데 반해 수구다라니의 경우 경의 명칭이 아니라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라고 하였기 때문에 경 전체가 아니라 다라니만을 납입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라고 한 것에서 보사유가 한역한 『불설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신주경』에 근거한 다라니를 서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당에서 수구다라니 서사 후 묘에 시신과 함께 안치한 사례와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수구다라니를 죽은 승군들을 위해 만든 탑 안에 안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수구즉득다라니경』에는 죽은 자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고통을 그치게 한다는 수구다라니의 영험을 전하고 있다. 만족성(滿足城)의 믿음이 약한 비구는[小信心比丘] 도둑질을 하며 살다가 죽었는데, 비구의 시신 주위에 수구다라니를 두고 탑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다라니는 이 비구가 주도적으로 수지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비구에 대해 자비를 일으킨 우바새가 비구를 위하여 곁에 두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수구다라니 덕분에 그 비구는 모든 천(天)의 수호를 받음으로써 죄장이 없어지고 결국 33천에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같은 설화에 대해 불공역본에서는 게송을 덧붙였는데, 수구다라니를 안치한 탑을 수구탑(隨求塔)이라고 하였다.(표Ⅳ-3-1 참조) 탑지 중 제1매에서 "특별히 억울하게 죽어 고해(苦海)에 빠진 영혼을 구해 올려 제사를 지내서 복을 받음이 영원히 그치지 않고 이에 있도록 하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56명의 사망자들이 죄를 없애주고 마침내 33천에 태어날 수 있게 한다는 수구다라니의 공덕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납탑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이라고 했던 것일까. 해인사의 '치군(淄軍)'들이 대응한 세력은 빈번한 자연재해와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 상황에서 소극적인 유망민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모습으로 실체를 보이기 시작한 세력들이었다. 이들이 주도한 난은 9세기 말에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사원도 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사원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던 상황에서, 도처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自守‧自保] 세력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고, 해인사에서도 자체 무장력을 갖추어 대응했던 것이다. 즉, 이들이 적으로 대항한 실체는 외적이 아니라 같은 신라 사회 내부 구성원들인 농민들이었다. 해인사의 '치군'도 전문적인 무장(武將)이 아니라 해인사 소속승려와 속인, 해인사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로 추정된다. 전투나 무장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신라 내부의 사람들의 공격에 대응하다가, 결국 56명이나 죽음에 이르는 상황은 평범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죽은 이를 대신하여 타인이 죽은 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수지하게 하여도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수구다라니의 공덕이 위로가 되었을 것임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신라의 경우 『수구다라니경』의 서사와 수구다라니만다라 제작 사례는 남아 있지 않으며 수구다라니를 염송하거나 법보로서 탑에 납탑된 사례, 2건만이 남아 있다. 당시 당과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 영향력이 미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현전하는 사료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송시기에 만들어진 수구다라니를 서사한 인쇄물과 유사한 것이 고려시대 불상의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점이나, 조선시대 왕실발원 간행물인 『오대진언』에 수구다라니가 포함되었던 것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진 『수구다라니경』의 전통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보천이 개인적인 수행을 위해 수구다라니를 염송했던 것은 중국과 일본에서 승려들이 수구다라니를 염송했던 사례와 공통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8세기 이후 삼국에 수구다라니를 개인적 수행 과정에서 수지․염송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한편 망자추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해인사묘길상탑 안에 경 전체가 아니라 수구다라니만을 서사해서 납입했던 사례는 다라니의 위신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에서는 망자의 죄업이 소멸되어 육도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시신의 무덤 안에 같이 봉안하였으나 신라의 경우 같은 목적이지만 탑 안에 법보로서 안치했던 모습은 신라에서 수구다라니를 변용하여 이해하였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 밀교경전의 유통과 그 영향/ 옥나영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