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활지표; 知足하는 마음, 不足之足
노 종 해(CM리서치)
충주제일교회에서, 첫 목회 시작 때(1972년) 사용하던 國漢文혼용 “貫珠 聖經全書”를 여동생이 돌보는 목포 디아코니아요양원의 어머니 머리맡에서 발견하고, 목회 2년차(1974년) 성경전서 뒷장에 적힌 송구봉(宋龜峰, 1534-1599) 선생의 족부족(足不足)이란 한시 구절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不足之足 每有餘
足而不足 常不足
부족하더라도 족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여유가 있고
족하지만 부족하다고 여기면 언제나 부족하다
젊은 날부터 좌우명으로 마음에 새겨둔 성경말씀은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敬虔)에 큰 이익(利益)이 되느니라(딤전6:6)”입니다.
목회 초년 당시 성경 뒷장에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며 시인이신 송구봉(1534-1599)의 한시(漢詩) “不足之足”을 보니 성경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역 47년(1972-2019)으로 한국 국내목회 15년, 선교사 32년 이후 정년은퇴생활에도 여전히 삶의 지표로 새기고 있는 “지족하는 마음”, “불족지족”(不足之足)을 품고 지내고 있습니다.
國漢文혼용 “貫珠 聖經全書”(1964년 출판)에는 잊지 못할 내력이 있습니다. 나의 첫 목회는 1972년 충주제일교회 전도사로 출발하였습니다. 평양에서 1.4후퇴 때 피난 내려와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결혼하고 아내와 첫 아들과 함께 부모 곁을 떠나 처음으로 지방 충주에 이주하게 된 때이지요.
1974년 어느 날, 한 권사님께서 자신의 성경책이 새것인데 목사님 성경과 바꾸자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전도사님의 성경책에는 주요 핵심 말씀에 밑줄이 있기 때문에 그 것만 읽어도 성경말씀의 핵심을 알 수 있겠다고 여겨서랍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밑 줄 그으며 탐독했던 성경책을 넌지시 본 권사님은 자신의 성경책과 바꾸자는 것입니다.
당시 서로 바꾼 성경책 첫 장을 열면 "주님께 영광, 목회2년, 1974년10월 23일일이란 표시와 함께 밑부분에 작은 글씨로 "송금선 권사님과 교체한 성서"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그 성경책을 어떻게 어머니께서 간직하고 계셨는지 알지 못하였고, 멀리 목포 요양원에 계시면서 침대 머리 곁에 십자가와 함께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충주 목회 때 에서 목사 안수 받고(1974년), 군종장교훈련(1975년)으로 떠난 때였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군목임관 후 돈암교회, 온양온천교회, 정동제일교회, 쿠알라룸푸르 한인교회 등 시무로 성역47년 중 국내 목회와 해외 선교사로 사역활동하며 성경책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목회 초년시절의 성경책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목회2년의 "그 성경책"이었던 것에 놀라웠고, 뒷장에 "足不足"이란 한시의 구절이 좌우명으로 적혀 있음을 보고 더욱 감탄하였습니다!
그런데 10월30일(금),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에 수도의 삶으로 헌신한 여 동생, 어진이 "언님"(기장,목사)으로부터 택배로 전달 받아 새롭게 기뻤습니다. 성경 뒷장의 기록을 보내 목회 초년시절의 감흥이 솟아올랐습니다. ”不足之足 每有餘 足而不足 常不足“, ”부족하더라도 족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여유가 있고 족하지만 부족하다고 여기면 언제나 부족하다“
목회생활의 죄우명 지표인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敬虔)에 큰 이익(利益)이 되느니라(딤전6:6)”란 말씀을 되색이며, 뜨거운 감흥으로 기쁨이 넘쳐 올랐습니다.
*목포 요양원 어머니 침대곁의 십자가와 성경
족부족(足不足)이란 한시(漢詩)의 송구봉 선생은 어떤 분이신가?
인테넷으로 검색해 보니, 송구봉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 명망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비록 서손(庶孫)으로 신분차별에 굴하지 않고 학식과 지도력이 뛰어난 분이였음도 알았습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생각하면 거북선이 떠오릅니다. 바로 그 거북선의 설계도는 송구봉(宋龜峰,1534-1599) 선생이 이순신 장군에게 넘겨 주었답니다. 이순신 장군은 설계도로 거북선을 제작하였고, 이로인해 송구봉 선생의 이름에서 구선(龜船), 즉 거북선이라 했답니다.
송구봉 선생은 천문, 지리, 의학, 복서 등에 통달한 분이지만 당대 사람들은 서손(庶孫)이라고 업신여기고 상대도 안했으며 천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율곡(李栗谷) 선생이라든지 당대의 대 성리학자들은 그분의 학식과 인품을 알아보았고, 친구로 스승으로 후대를 이어 존경했습니다.
송구봉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은 경기도 파주에 거하였으며 서로가 편지로 주고받는 사이였습니다. 편지의 연락은 심의겸의 조카인 심경이 맡았으며, 율곡 선생은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가면서도 송구봉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율곡전서 상권 11 참조) 또한 예조판서를 지낸 정철과도 예절에 관해서 서신으로 질문을 받는 사이였습니다.(분집권 6, 예문답 계함(정철)운 참조)
송구봉 선생의 제자들로는 김장생, 김집, 강찬, 서성, 송이창, 정엽, 김유, 김반, 허우, 정홍명, 심종직, 유순익 등이 있으며, 성리학, 문필가, 문학과 벼슬로 모두 당대에 이름을 떨친 분들이었습니다.
송구봉 선생은 말년에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에서 아들 부부와 함께 살았으며, 1599년(선조 32년) 8월 8일 충남 당진군 은거지에서 한 많고 파란만장했던 66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현재, 송구봉 선생 유허비는 파주시 교하면 산남리에 있으며, 묘소는 당진시 원당읍 마양촌에 있습니다.(rch)
----------------
송구봉 시문 연구 초록
(이하, 東洋文獻學會 카페에서 인용)
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시인인 송구봉(송익필)의 시에 나타난 염락풍적 요소를 고찰해보고자 하는 데에 있다. 구봉은 험난한 삶 속에서도 높은 학덕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고, 문인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특히 구봉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시문을 창작하였는데, 그는 시에서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만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인격을 수양하는 자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구봉의 이러한 면모가 후대에 충분한 귀감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와 문학사적 가치는 간과되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구봉 시 연구를 통해 그의 시에 나타나는 도학적 자세를 되짚어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구봉은 자신의 아버지인 송사련의 과오로 인해 양반의 신분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환천 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수양을 중시하는 이기심성론과 실천을 강조하는 예학사상의 체계를 세웠으며, 이를 시세계에 구현시켜 염락풍의 높은 경지를 이룩해 내었다.
염락풍시는 심성 수양을 중시하는 시로서, 송나라 때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 등의 성리학자들이 창작한 시들을 일컫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또한 염락풍시는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문학을 道의 실현 수단으로 보았으며, 시를 통해 심성을 함양하고, 사물의 관찰을 통해 그 이치를 깨달으며, 수양의 모범이 되는 하늘의 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자세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은 성리학적 수양의 자세를 읊은 시, 사물의 관찰을 통해 사물의 근원과 이치가 구현되어 있음을 읊은 시. 절대적 존재인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겠다는 자세를 읊은 시 등의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구봉의 시에 구현된 염락풍시의 양상은 구봉의 한시 작품 458수 중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를 드러낸 시는 122수 정도인데, 이 중 수양의 자세를 드러내고 만물의 이치를 파악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한 작품은 43수로 요약된다.
구봉의 시 세계는 크게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는 시(天道順行의 詩), 사물의 관찰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는 시(觀物察己의 詩), 사물의 관찰을 통해 만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시(觀物察理의 詩)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偶題, 樂天, 天, 獨坐, 更滯松樓 등의 시에서 구봉은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위의 시들은 불우한 자신의 처지에도 이를 비관하지 않고 하늘의 섭리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즉 낙천달관의 경지에 이른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靜坐, 足不足, 寓新坪 次隣人, 名者實之賓詩, 秋夜蓮堂 四首, 詠閑 등의 시에서는 사물의 관찰을 통한 심성 수양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위의 시들은 산림에 은거하며 그곳의 경치와 사물을 시에 담아내며 이러한 자연을 닮아 심성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구봉 자신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으로 影賦, 望月, 靜中, 幽居, 立春後, 春晝獨坐, 夕吟 등의 시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만상의 이치를 깨닫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들은 그가 평범한 자연현상을 보고 그 내면에 담긴 철학적 원리를 발견하여 인간의 삶과 연관지었다는 점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더불어 그는 만물을 관찰하며 얻은 깨달음 속에서 질곡어린 자신의 일생을 발견하며 위안을 얻고자 한 것이다.
또한 구봉은 염락풍시에서 개인의 정서만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심성을 갈고 닦는 측면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나아가 고난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 승화시킨 점이 일반적인 염락풍시와 구분된다. 이는 삶에 대한 고아한 성찰과 성리학적 사고 체계가 시에 녹아든 것으로서, 그의 학문과 사상이 시세계에 잘 구현되어 있어 구봉을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염락풍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