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우리에게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주기 속에 가을을 맞이한다는 것이 전혀 새로울 건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유독 가을을 마주하게 되면,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리곤 합니다. 논과 들의 소중한 생명들이 여름의 강렬한 태양을 머금고 알곡을 살찌우다가도 가을이 되면 그 맛과 향, 영양이 깊게 스미며 영글어 가듯이, 가을은 우리의 존재도 이 미세한 흔들림 속에 익어가게 합니다.
이 미세한 흔들림은 뭘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져 그 근원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흠칫 놀라면서, 다시금 그 근원에 가닿으려는 내 안에 일어나는 몸부림이 아닐까요? 우리의 존재는 이 가을, 이렇게 흔들리면서 익어갑니다.
저는 마음이 답답하거나 복잡할 때,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시집(詩集)을 꺼내듭니다. 그러면 詩는 답답함에 짓눌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저의 등을 다독이며 깊은 위로를 전해줍니다. 詩가 전해주는 위로를 얻고서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면, 나를 옥죄던 현실은 그대로이나, 그 현실이 달리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의 새로운 의미들을 붙잡게 된 저는 이미 이전의 제가 아니게 되지요.
詩는 일상을 신비로 바라보는 이의 탄성이며 읊조림입니다. 그러니 일상을 진부하게 바라보는 이에게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것이 詩입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무정하고 강퍅해진 것은 아마도 詩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詩에 대해 아는 바 없지만, 그럼에도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詩 한편쯤은 가슴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늘 있습니다.
감리교 목사이면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고진하 목사님이 올 초 세상에 내놓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제목이 <시 읽어주는 예수>입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눈과 걸음이 동시에 멈추었고, 자연스레 집어 들어 단숨에 읽어버리지 않고, 차분한 호흡으로 틈틈이 한두 편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詩가 주는 풍성한 의미들을 음미하려면 찬찬히 곱씹어 읽어야합니다.
‘시 읽어주는 예수’...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시낭송회에 온 듯합니다. 고진하 목사님은 삶의 고갱이를 담은 詩들을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려주려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다양한 시인들이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얻은 통찰들을 언어라고 하는 틀을 가지고 전해주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야기들은 진리의 핵심에서 만납니다. 그들이 비록 신(神)을 직접 거론하지 않아도, 그들은 분명 신이 우리에게 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대신 전하는 신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詩들은 예수의 음성과 만납니다. 그래서 고진하 목사님은 스스럼없이 예수님을 시 낭송가로 모신 것이겠지요.
‘시 읽어주는 예수’는 정호승 시인의 시 ‘시인 예수’로 문을 엽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 시인이게 하는 시인 /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 / 새벽의 사람 /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 / 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 ...”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예수... 시인 예수는 불의와 절망의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읊조리고 노래했던 시인입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생의 축복을 만끽하는 축제의 장으로 만드신 시인 예수는 우리 또한 시인이기를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단순히 멋드러진 언어의 나열로 만들어낸 시가 아닌, 우리의 진실을 재료로 삼아 생을 진지하게 대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감동과 신비를 온 생애를 통해 표현해내고 누리는 그러한 사람이기를 말이지요. 그런 시인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흔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소소한 경험들 속에서도 생의 의미를 캐내어 주는 詩들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詩들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詩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詩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누구에게나 똑같은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만나는 사람들의 삶의 형편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찾아갈테니까요. 그래서 책에 소개된 詩들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이 이 책과 마주한 순간 詩들이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직접 그 속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책과 마주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복잡한 일상, 고단한 삶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이 책 <시 읽어주는 예수>는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따뜻한 友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