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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제탑산룡암」 김정
[ 題塔山龍巖 金淨 ]
千尺巖崖傍碧流(천척암애방벽류) 천 척 바위 벼랑 곁으로 푸른 물 흐르고
如今佳會飮芳醇(여금가회음방순) 오늘 같은 좋은 만남에 향기로운 술 마시네
若將此樂爲圖畵(약장차락위도화) 만약 이 즐거움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作我千年長醉人(작아천년장취인) 나는 천 년 동안 술 취한 사람 되겠지
〈감상〉
이 시는 탑산의 용암에 쓴 것으로, 시중유화(詩中有畵)가 잘 표출된 시이다.
탑산의 용암에 올라 보니, 높은 바위 벼랑 옆으로 푸른 물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가 펼쳐져 있다. 그 좋은 경치를 바라보니 너무 기뻐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다. 만약 이러한 즐거움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천 년 동안 그림 속에 술 취한 사람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당풍(唐風)의 애호는 후에 삼당시인(三唐詩人)의 본격적인 당풍(唐風)의 부흥에 일종의 선구(先驅)가 되었다고 하겠다.
〈주석〉
〖崖〗 벼랑 애, 〖醇〗 진한 술 순
각주
1 김정(金淨, 1486, 성종 17~1520, 중종 15):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고봉(孤峯).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했으며, 기묘사화 때 제주도에 귀양 갔다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써서 기행문학의 성격을 바꿔 놓기도 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옮겨졌으며, 다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으며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다. 사림파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했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削除) 등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다. 시문에 능해 유배생활 중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특히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자고 읊을 뿐 지방마다의 생활풍속은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저서에 『충암집(沖菴集)』이 있다.
「제평성(박원종)화병」 팔절 신용개
[ 題平城(朴元宗)畫屛 八絶 申用漑 ]
其一(기일)
芳逕步携琴(방경보휴금) 꽃길을 거문고를 끼고 걸으니
剩知乘興處(잉지승흥처) 더군다나 흥이 나는 곳을 알겠네
誰家別討春(수가별토춘) 어느 집에서 봄을 이별하고 있는가?
背柳穿花去(배류천화거) 버드나무 등지고 꽃을 뚫고 가네
〈감상〉
이 시는 평성 박원종의 8폭 그림에 각각 시를 써 주었는데, 그중 첫 번째 시이다. 꽃이 가득한 길을 어느 선비가 거문고를 들고 걸어가고 있는 그림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신용개는 강직한 선비로 『기묘록(己卯錄)』에 이에 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곤이 예조 판서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을 함부로 준 것을 삭제하자고 청하는 의논을 피하기 위하여 능헌관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 후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들어가 시종하면서 아뢰기를, ‘근래 높은 품계에 있는 육경이 능헌관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하로서 몸을 아끼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는 볼 것도 없습니다.’ 하니, 남곤이 그때 같이 시종하면서 부끄럽고 황송하여 물러나와 정승 신용개의 집을 방문하였다. 신공이 마침 병으로 휴가 중이어서 누운 방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남곤이, ‘요즈음 논의는 심히 과격합니다.’ 하니, 신 공이 분연히 일어나, ‘공은 어찌 이런 말을 하오.
과격하다는 말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 말이니 후한(後漢)이 그 때문에 망한 것이오.’ 하니, 남곤이 계면쩍어서 가 버렸다(南衮以禮曹判書(남곤이례조판서) 欲避請削靖國功臣濫授之議(욕피청삭정국공신람수지의) 求爲拜陵獻官(구위배릉헌관) 其後趙靜菴入侍啓曰(기후조정암입시계왈) 近有祟品六卿(근유수품륙경) 求爲陵獻官(구위릉헌관) 人臣愛身如此(인신애신여차) 餘無足觀(여무족관) 衮方同侍(곤방동시) 慙惶而退(참황이퇴) 遂詣申相用漑第(수예신상용개제) 申公方呈病(신공방정병) 引入臥內(인입와내) 南衮曰(남곤왈) 近日論議甚激(근일론의심격) 申公奮然而起曰(신공분연이기왈) 公何以出此言(공하이출차언) 激之爲言(격지위언) 乃小人之陷君子(내소인지함군자) 而亡後漢者也(이망후한자야) 衮厭然而去(곤염연이거)).”
〈주석〉
〖逕〗 좁은 길 경, 〖剩〗 더군다나 잉, 〖討〗 없애다 토, 〖穿〗 뚫다 천
각주
1 신용개(申用漑, 1463, 세조 9~1519, 중종 1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申叔舟)이며, 5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신숙주에게 양육되었으며,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배웠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성종이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를 벗어 준 일도 있었다.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강직한 성품이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1502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503년 형조참판, 이어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04년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 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우참찬·대사헌을 거쳐 이조·병조·예조의 판서, 우찬성을 역임했다. 1516년 우의정, 1518년 좌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애절양」 정약용
[ 哀絶陽 丁若鏞 ]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통곡소리 그칠 줄 모르고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청문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주석〉
〖蘆〗 갈대 로(노), 〖穹〗 하늘 궁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상에 이미 상복 입었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조자손 삼대가 다 군적에 실리다니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급하게 가서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里正咆哮牛去皁(이정포효우거조) 향관은 으르렁대며 마구간 소 몰아가네
〈주석〉
〖舅〗 시아버지 구, 〖縞〗 희다 호(호소(縞素)는 상복임), 〖澡〗 깨끗이 하다 조, 〖簽〗 쪽지 첨, 〖軍保(군보)〗 군적(軍籍). 〖薄言(박언)〗 급박한 모양. 〖愬〗 하소연하다 소, 〖閽〗 문지기 혼, 〖里正(이정)〗 향관(鄕官).
〖咆〗 으르렁거리다 포, 〖哮〗 으르렁거리다 효, 〖皁〗 마구간 조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자식 낳아 군액당했다고 한스러워 그랬다네
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 음형당했던가?
閩囝去勢良亦慽(민건거세양역척) 민땅 자식들 거세한 것 진실로 역시 슬픈 일이네
〈주석〉
〖遭〗 ~을 당하다 조, 〖窘〗 고생하다 군, 〖蠶室淫刑(잠실음형)〗 남자는 거세(去勢)를 하고 여인은 음부를 봉함하는 형벌.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밀실에 불을 계속 지펴 높은 온도를 유지시키는 방이 잠실(蠶室)인데, 궁형(宮刑)에 처한 자는 그 잠실에 있게 하였음(『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辜〗 허물 고,
〖閩囝去勢(민건거세)〗 민(閩)나라 사람들은, 자식을 건(囝), 아버지는 낭파(郞罷)라고 불렀는데, 당(唐)나라 때에 그곳 자식들을 환관(宦官)으로 썼기 때문에 형세가 부호한 자들이 많아 그곳 사람들은 자식을 낳으면 곧 거세(去勢)를 하여 사내종이나 계집종으로 만들었다고 함(『청상잡기(靑箱雜記)』). 〖慽〗 슬프다 척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이치기에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곤도녀) 하늘의 도는 아들 되고 땅의 도는 딸이 되지
騸馬豶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불깐 말 불깐 돼지도 서럽다 할 것인데
況乃生民思繼序(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주석〉
〖騙馬(선마)〗 거세한 말. 〖豶〗 불깐 돼지 분, 〖繼序(계서)〗 선후로 이어 있는 차례.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악이나 즐기면서
粒米寸帛無所捐(입미촌백무소연)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같은 백성인데 왜 그리도 차별일까?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주석〉
〖粒〗 쌀알 립(입), 〖帛〗 비단 백, 〖捐〗 바치다 연, 〖赤子(적자)〗 백성. 〖鳲鳩篇(시구편)〗 『시경(詩經)』의 편명. 통치자가 백성을 고루 사랑 해야 한다는 것을 뻐꾸기에 비유해서 읊은 시.
〈감상〉
이 시는 1803년 어느 백성이 자신의 양근(陽根)을 끊은 것을 슬퍼하며 지은 시로, 당시 심각한 군정(軍政)의 문란을 노래한 다산의 대표적인 사회시(社會詩) 중 한 수이다.
이 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첨정(簽丁)」에 다음과 같이 시를 쓴 동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가경 계해년(1803) 가을에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에 편입되고 이정이 소를 토색질해 가니, 그 백성이 칼을 뽑아 자신의 양경을 스스로 베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러한 곤액을 받는다.’ 하였다. 그 아내가 양경을 가지고 관청에 나아가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울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했으나,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此嘉慶癸亥秋(차가경계해추) 余在康津作也(여재강진작야) 時蘆田民有兒生三日(시로전민유아생삼일) 入於軍保(입어군보) 里正奪牛(리정탈우) 民拔刀自割其陽莖曰(민발도자할기양경왈) 我以此物之故(아이차물지고) 受此困厄(수차곤액) 其妻持其莖(기처지기경) 詣官門(예관문) 血猶淋淋(혈유림림) 且哭且訴(차곡차소) 閽者拒之(혼자거지) 余聞而作此詩(여문이작차시)).”
다산(茶山)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첨정(簽丁)」에서, “요즘 피폐한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는 아기를 낳기가 무섭게 홍첩이 이미 와 있다. 음양의 이치는 하늘이 품부한 것이니 정교(情交)하지 않을 수 없고, 정교하면 낳게 되어 있는데 낳기만 하면 반드시 병적에 올려서 이 땅의 부모 된 자로 하여금 천지의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원망하게 하여 집집마다 탄식하고 울부짖게 하니, 나라의 무법함이 어찌 여기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지으며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하고, 그보다 더 심한 경우에는 강아지 이름을 혹 군안(軍案)에 올리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니 가리키는 것은 진짜 개이며, 절굿공이의 이름이 관첩(官帖)에 나오기도 하는데, 이도 사람의 이름이 아니니 가리키는 것은 진짜 절굿공이이다(今殘村下戶(금잔촌하호) 嬰孩落地(영해락지) 呱聲一發(고성일발) 紅帖已到(홍첩이도) 陰陽之理(음양지리) 天之所賦(천지소부) 不能無交(불능무교) 交則有生(교칙유생) 生則必簽(생칙필첨) 使域中之爲父母者(사역중지위부모자) 怨天地生生之理(원천지생생지리)
家嗷而戶啜(가오이호철) 國之無法(국지무법) 一何至此(일하지차) 甚則指腹而造名(심칙지복이조명) 換女而爲男(환녀이위남) 又其甚者(우기심자) 狗兒之名(구아지명) 或載軍案(혹재군안) 非是人名(비시인명) 所指者眞狗也(소지자진구야) 杵臼之名(저구지명) 或出官帖(혹출관첩) 非是人名(비시인명) 所指者眞杵也(소지자진저야)).”라 하여, 당시 군정(軍政)의 문란에 대해 지적하면서 “이 법을 바꾸지 않으면 백성들은 모두 죽고야 말 것이다(차법불개(此法不改) 이민진류의(而民盡劉矣)).”라 말하고 있다.
각주
1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 38~1836, 헌종 2):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 근기(近畿) 남인(南人) 가문 출신으로,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노인일쾌사 육수 효향산체」 정약용
[ 老人一快事 六首 效香山體 丁若鏞 ]
其五(기오)
老人一快事(노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운 일은
縱筆寫狂詞(종필사광사)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경병불필구) 어려운 운자에 반드시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추고불필지) 퇴고도 꼭 오래할 것이 없어라
〈주석〉
〖香山(향산)〗 향산거사(香山居士)는 백거이(白居易)의 만년 별호(別號). 〖競病(경병)〗 험운(險韻)을 가지고 시를 짓는 것을 말함. 양(梁)나라 조경종(曹景宗)이 개선할 때에 양(梁) 무제(武帝)가 잔치를 베풀고 연구(聯句)를 시험했는데, 험운인 경병 두 자만 남았을 때 조경종이 최후로 참여하여 바로 지어 쓰기를, “떠날 땐 아녀들이 슬퍼하더니, 돌아오매 피리와 북 다투어 울리네. 길가는 사람에게 묻노니, 곽거병 그 사람과 과연 어떤고[去時兒女悲(거시아녀비) 歸來笳鼓競(귀래가고경) 借問行路人(차문행로인) 何如霍去病(하여곽거병)]?” 한 데서 온 말임(『남사(南史)』 「조경종전(曹景宗傳)」).
興到卽運意(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뜻을 움직이고
意到卽寫之(의도즉사지) 뜻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간다
我是朝鮮人(아시조선인) 나는 조선 사람이니
甘作朝鮮詩(감작조선시) 조선시를 즐겨 쓰리
卿當用卿法(경당용경법) 그대들은 마땅히 그대들의 법을 따르면 되지
迂哉議者誰(우재의자수) 오활하다 말 많은 자 누구인가?
區區格與律(구구격여률) 구구한 그대들의 시격과 운율을
遠人何得知(원인하득지) 먼 곳의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으랴?
〈주석〉
〖迂〗 물정에 어둡다 우
凌凌李攀龍(능릉이반룡) 염치없고 뻔뻔한 이반룡은
嘲我爲東夷(조아위동이) 우리를 동쪽 오랑캐라 조롱했는데
袁尤槌雪樓(원우퇴설루) 원굉도는 오히려 설루를 쳤으나
海內無異辭(해내무이사) 천하에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네
〈주석〉
〖凌凌(능릉)〗 차가운 모습. 〖李攀龍(이반룡)〗 명대의 학자로, 시와 고문(古文)에 능함. 〖嘲〗 조롱하다 조,
〖袁尤槌雪樓〗 원굉도(袁宏道)는 바로 명(明)나라 때의 시인이고, 설루(雪樓)는 역시 명나라 때의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서실(書室) 이름인 백설루(白雪樓)의 준말이다. 원굉도는 본디 시문에 뛰어난 사람으로서 그의 형인 종도(宗道), 아우인 중도(中道)와 함께 모두 당대에 명성이 높았는데, 그는 특히 왕세정(王世貞)과 이반룡(李攀龍)의 시체(詩體)를 매우 강력히 배격하고 홀로 일가(一家)를 이룸으로써 당대에 많은 학자들이 왕세정·이반룡을 배제하고 그를 따르면서 그의 시체를 공안체(公安體, 공안은 원굉도의 자)라 지목했던 데서 온 말임(『명사(明史)』 권이백팔십팔(卷二百八十八)).
背有挾彈子(배유협탄자) 뒤에서 총알이 겨누고 있는데
奚暇枯蟬窺(해가고선규) 어느 겨를에 마른 매미를 엿보리오?
我慕山石句(아모산석구) 나는 산석의 시구를 사모하노니
恐受女郞嗤(공수여랑치) 여랑의 시라는 비웃음을 받을까 두렵네
〈주석〉
〖背有挾彈子(배유협탄자) 奚暇枯蟬窺(해가고선규)〗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음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가 밤나무 숲에서 이상한 까치를 발견하고 그를 잡기 위해 활에 화살을 끼우고 있었는데, 이때 보니 사마귀(당랑(螳螂))는 신이 나게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이상한 까치가 그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으며, 또 그 뒤에서는 장자 자신이 그 이상한 까치를 노리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임(『장자(莊子)』 「산목(山木)」).
〖我慕山石句(아모산석구) 恐受女郞嗤(공수여랑치)〗 산석의 글귀란 바로 한유(韓愈)의 「산석(山石)」시를 말하고, 여랑(女郞)의 시란 곧 여인같이 온순한 풍의 시를 뜻한다. 원(元)나라 때의 시인 원호문(元好文)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 “정이 있는 작약은 봄 눈물을 머금었고 기력 없는 장미는 저녁 가지가 누웠다(이상은 송나라 진관(秦觀)의 시임) 하니, 이를 한퇴지의 「산석」시에 대조해 보면, 이것이 여랑의 시임을 비로소 알리라(有情芍藥含春淚(유정작약함춘루) 無力薔薇臥晩枝(무력장미와만지) 拈出退之山石句(염출퇴지산석구) 始知渠女郞詩(시지거녀랑시))” 한 데서 온 말로, 즉 송(宋)나라 진관(秦觀)의 시를 한유의 「산석」시와 비유하면 한유의 시는 장부에 해당하고, 진관의 시는 여랑에 해당한다고 한 데서 온 말임(『한창려(韓昌黎)집』 권(卷)3).
焉能飾悽黯(언능식처암) 어찌 구슬픈 말로써 꾸며
辛苦斷腸爲(신고단장위) 애간장 끊는 시를 쓰리오?
梨橘各殊味(이귤각수미)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니
嗜好唯其宜(기호유기의) 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라오
〈주석〉
〖悽〗 슬퍼하다 처, 〖黯〗 슬프다 암, 〖橘〗 귤 귤, 〖嗜〗 즐기다 기
〈감상〉
이 시는 노인의 한 가지 즐거운 일에 관한 시 여섯 수를 백향산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1832년 지은 것으로 소위(所謂) ‘조선시선언(朝鮮詩宣言)’으로 유명한 시이며, 우리나라의 시를 중국 문학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려는 다산(茶山)의 강한 주체의식(主體意識)의 발로를 드러낸 것이다.
다산은 「척발위론(拓跋魏論)」에, “성인의 법은 중국이면서도 오랑캐의 짓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의 짓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하니, 중국과 오랑캐는 그 도와 정치에 있는 것이지 강토에 있는 것이 아니다(聖人之法(성인지법) 以中國而夷狄(이중국이이적) 則夷狄之(칙이적지) 以夷狄而中國(이이적이중국) 則中國之(칙중국지) 中國與夷狄(중국여이적) 在其道與政(재기도여정) 不在乎疆域也(불재호강역야)).”라 하여,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화이(華夷)의 개념을 달리 적용하여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적 권위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동호론(東胡論)」에, “『사기(史記)』에 ‘동이는 어질고 선하다.’고 했는데, 참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물며 조선은 정동(正東)의 땅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 풍속이 예(禮)를 좋아하고 무(武)를 천하게 여겨 차라리 약할지언정 포악하지는 않으니, 군자의 나라이다.
아! 이미 중국에 태어날 수 없었다면 오직 동이뿐이도다(史稱東夷爲仁善(사칭동이위인선) 眞有以哉(진유이재) 況朝鮮處正東之地(황조선처정동지지) 故其俗好禮而賤武(고기속호례이천무) 寧弱(영약) 而不暴(이불폭) 君子之邦也(군자지방야) 嗟乎(차호) 旣不能生乎中國(기불능생호중국) 其唯東夷哉(기유동이재)).”라 하여, 우리나라가 우수한 문화를 자진 민족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처럼 다산에게 있어 중국은 열등의식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우리나라의 우수한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시(中國詩)를 흉내내려 하지 않고 조선시(朝鮮詩)를 짓고자 했던 것이다.
각주
1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 38~1836, 헌종 2):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 근기(近畿) 남인(南人) 가문 출신으로,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연암억선형」 박지원
[ 燕巖憶先兄 朴趾源 ]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自將巾袂映溪行(자장건몌영계행) 스스로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감상〉
이 시는 홍국영(洪國榮)의 핍박을 견딜 수 없어 개성 외곽에 있는 연암에 숨어 살 때 선형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과정록(過庭錄)』권(卷)1에 의하면, 정조 11년(1787)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이 향년 58세로 별세하여 연암협(燕巖峽)의 집 뒤에 있던 부인 이씨 묘에 합장하였는데,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연암(燕巖)은 고문사(古文詞)에 있어서 재사(才思)가 넘치고 고금에도 통달하였다. 당시 지은 평원(平遠)한 산수(山水)에 깊은 감회를 소산(疏散)시키는 듯한 그의 시는 대미[大米, 송나라 미불(米芾)을 가리킨다]의 수준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고, 마음이 내킬 때 쓴 그의 행서(行書)와 해서(楷書)는 뛰어난 자태가 넘치며, 너무도 기묘하여 어떤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일찍이 읊은 시에, ‘푸른 물 맑은 모래 외로운 섬에, 교청처럼 맑은 신세 티끌 한 점 없다네.’ 하였다.
이것으로써도 그의 시 품격이 오묘한 지경에 도달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다만 긍신(矜愼)하여 잘 내놓지 않으므로, 마치 하청(河淸)에 비유된 포룡도(包龍圖)의 웃음(포룡도(包龍圖)는 곧 송(宋)나라 때 용도각대제(龍圖閣待制)를 지낸 포증(包拯)을 가리키는데, 성품이 워낙 강직하여 그가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안에는 귀척(貴戚)이나 환관(宦官)들도 감히 발호하지 못하고 그를 무서워하였으며, 그가 하도 근엄(謹嚴)하여 웃는 일이 없으므로, 심지어는 사람들이 일컫기를 ‘그가 웃으면 황하수(黃河水)가 맑아질 것이다.’고까지 하였다. 당시 포대제(包待制) 또는 염라포로(閻羅包老) 등으로 불렸다)과 같아서 많이 얻어 볼 수 없으니, 동인(同人)들이 못내 아쉬워한다.
일찍이 나에게 오언(五言)으로 된 고시론(古詩論)을 기증하였는데, 폭넓은 문장력이 볼만하였다(燕巖古文詞(연암고문사) 才思溢發(재사일발) 橫絶古今(횡절고금) 時作平遠山水(시작평원산수) 踈散幽迥(소산유형) 優入大米之室(우입대미지실) 其行書小楷(기행서소해) 得意時作(득의시작) 逸態橫生(일태횡생) 奇奇恠恠(기기괴괴) 不可方物(불가방물) 甞有詩曰(상유시왈) 水碧沙明島嶼孤(수벽사명도서고) 鵁鶄身世一塵無(교청신세일진무) 亦知其詩品入妙(역지기시품입묘) 但矜愼不出(단긍신불출) 如包龍啚之笑比河淸(여포룡비지소비하청) 不得多見(부득다견) 同人慨恨(동인개한) 甞贈我五言古詩(상증아오언고시) 論文章(논문장) 頗宏肆可觀(파굉사가관)).”라 말하고 있다.
〈주석〉
〖袂〗 소매 몌, 〖映〗 비추다 영
각주
1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 13~1805, 순조 5): 호는 연암(燕巖). 장인 이보천(李輔天)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正使)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열하일기』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淸)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이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이 속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문승질박(文勝質薄)한 비평소품(批評小品)을 찬양한 것은 아니다.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 박지원은 산문뿐만 아니라 시 또한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