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9 주일설교
사독과 아비아달
(왕상 1:5-8)
사람은 반드시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젊을 때 어리석은 실수를 했더라도 나이 들어 지혜롭게 행동하면 이전의 실수가 묻힙니다. 젊을 때 믿음이 없더라도 나중에 회개하면 오히려 간증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갈수록 나빠지거나 끝에 가서 어리석게 산다면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후반부가 더 멋진 인생, 갈수록 더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행기 Pilot에게 이륙-비행-착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착륙입니다. 10시간이나 20시간 동안 잘 비행 한 후 착륙을 잘못한다면 큰 사고가 납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복되게 착륙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인생과 신앙생활을 잘 착륙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출발은 달랐지만 비슷하게 살았고, 비슷하게 살았지만 끝은 전혀 달라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과 아비아달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서로 다른 판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그들의 후손까지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먼저 아비아달 제사장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래 전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놉에 있던 성소로 도망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성소를 책임지고 있던 대제사장이 바로 아히멜렉이었는데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부탁해서 여호와께 드렸다가 물려낸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얻어 떠났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있었는데 도엑이 그 사실을 사울에게 고발했습니다. 사울은 군대를 보내어 아히멜렉 가문의 제사장 85명을 죽였는데 그 난리 통에 아히멜렉의 아들 한 명이 구사일생 탈출하여 다윗에게 도망쳤습니다. 그가 바로 아비아달 제사장인데 아비아달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에봇을 챙겨왔습니다. 그 덕분에 다윗이 여호와의 뜻을 물을 때 그 에봇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윗과 인연을 맺은 아비아달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 섬겼습니다.
이제 사독에 대해 좀 알아봅시다. 사독은 언제부터 다윗과 인연을 맺었는지 뚜렷한 설명이 없습니다. 역대상 6장의 족보를 보면 사독은 아론의 아들 중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후손으로 나와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에서 여호와를 특별히 사랑했던 제사장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 전에는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있었고 번제단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1000마리의 번제를 드렸던 곳이 바로 기브온 산당입니다. 사독의 가문은 오래전부터 기브온 산당에서 섬겨온 것 같습니다.
그 후, 압살롬 반란 사건 때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압살롬의 결정과 행동을 다윗에게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소식을 전하러 가다가 압살롬의 군인에게 잡힐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독과 아비아달은 대를 이어 다윗 왕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약 2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의 운명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다윗은 이미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선포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사실을 <왕상 1:28~35>에서 확인해 보십시다.
아도니야는 반역을 모의하면서 군사령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독 제사장과 나단 선지자와 다른 왕자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왕상 1:7~8>의 내용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재빨리 다윗에게 반란 사실을 보고하자 다윗은 사독 제사장, 나단 선지자, 브나야 장군을 불러 즉시 솔로몬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반란을 실패한 아도니야가 몇 년 후에 다시 한 번 반란을 계획하자 솔로몬은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형했습니다. 다만 아비아달은 제사장이니까 죽이지는 않고 고향으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아비아달은 이미 대제사장인데 무엇을 더 원해서 반란에 개입했을까요? 질투를 한다면 아비아달이 아니라 사독이 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언약궤를 모신 아비아달보다는 기브온 산당의 사독이 한 급 아래였겠죠?
그런데 아비아달이 이처럼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결국에 추방당한 이것은 우발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엘리의 집안에 대해 예언한 것이 성취되는 사건이었습니다(왕상 2:27).
하나님은 왜 이렇게 엘리 집안을 저주하셨을까요? 사무엘상 2장에서 보면 당시 대제사장인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모독하고 제물로 드린 고기를 빼앗아 가서 구워먹은 망나니들이었습니다. 또 성소에서 섬기는 여인들을 성폭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기 아들들을 단속하지 않았습니다. 한 선지자가 와서 엘리에게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면 집안이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삼상 2:29~34). 그래도 엘리가 돌이키지 않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같은 경고를 했습니다(삼상 3:11~14).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엘리의 증손 아히멜렉 시대에 온 가문이 사울의 칼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아비아달마저 고향으로 추방당해 버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자녀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타락할 때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제사를 모욕할 때 찾아왔던 하나님의 사람은 장차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이 일어날 것과 엘리의 후손들은 빌어먹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그 예언이 결국 성취된 것입니다(삼상 2:35~36).
그러나 아비아달이 추방당한 것은 조상 엘리의 잘못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닙니다. 아비아달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아합 왕조차도 선지자의 경고를 받고 겸비했을 때 하나님은 심판을 유보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 21:28~29).
엘리의 후손 아비아달과는 달리 사독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비느하스의 후손입니다. 사독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고 그 후 대대로 대제사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44장에 보면, 400년이 지난 후에도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신실하다고 하나님께서 칭찬을 하셨습니다(겔 44:15). 그리고 1000년 후, 예수님 시대에도 사독의 후손들이 성전을 맡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두개파입니다.
그런데 사독의 이야기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엘리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아비아달을 생각하면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반면에 비느하스와 그의 후손 사독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사독의 후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독처럼 바른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대대손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후손들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소원입니다. 여러분도 원하시죠? 자, 그러면 아비아달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 더 점검해 봅시다.
사독과 아비아달, 다윗 시대에는 모든 것이 비슷했는데 그 마음속에 있는 동기가 이런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동기는 부모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독은 조상 중에 그 유명한 비느하스가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이 미워하셨던 것을 미워했기에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받았습니다(민 25:10~13).
반면에 아비아달의 조상은 엘리 제사장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엘리는 자식들이 하나님을 멸시함에도 그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사람, 경건의 모양만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4~5).
사독과 아비아달을 사집사와 아집사라고 해 봅시다. 사집사가 올곧고 헌신적이면 아집사는 저절로 비교가 됩니다. 아집사는 사집사 때문에 피해자가 되었죠. 이럴 때 아집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1)남들이 하듯이 사집사을 칭찬하고 고마워한다. 2)자기도 사집사처럼 올곧게 헌신하려고 노력한다. 3)사집사를 헐뜯고 기회를 만들어 사집사를 내어보낸다. 4)더러워서 자신이 그 교회를 나가버린다.
앞의 두 가지는 좋지만 뒤의 두 가지는 잘못된 것입니다. 1, 2번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지만 3, 4번은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1, 2번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지만 3, 4번은 자기를 섬기는 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여 앞의 두 가지를 선택하는 어리석음 범합니다. 아비아달 제사장도 3번을 선택했습니다. 아비아달은 그의 조상 엘리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지위에 있던 아비아달은 사독을 제거하고 유일한 제사장이 되고 싶어서 반란에 동참했습니다. 아실 아비아달 제사장이 아도니야 왕자를 도운 것은 사실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아도니야와 요압과 아비아달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 것이죠.
오늘날 교회들이 어렵게 되는 이유는 자기를 사랑하여 다른 성도를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람과 경쟁했는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과 경쟁하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과 싸웠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제사장직을 잃고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아비아달 계열의 제사장들이 아니라 사독 계열의 제사장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름은 거룩한 사람들, 즉 성도입니다. 사독의 뜻은 의로운 자인데 성도와 같습니다.
아비아달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지만 마음의 동기가 잘못되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제사장직을 박탈당해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사심 없이 하나님을 섬겼던 사독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손 대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제사장 가문이 되었습니다. 사독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비아달이 혼자서 사독을 시기하고 사독을 미워하고 사독과 경쟁하더니 혼자 넘어져 버렸습니다. 결국 사독을 싸우지도 않고 아비아달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원은, 저의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아들들과 또 아들들의 아들들이 수천 대가 지나도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을 높이는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저 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독의 후손 같은 가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