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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고산실기(孤山實記)
고려 말의 문신·학자 공은의 실기
고려 말의 문신·학자 공은(孔隱)의 실기. 2권 1책. 석판본. 1918년 그의 후손 희(僖)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병관(李炳觀)·윤영구(尹寗求)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강영직(姜永直)·송영구(宋榮龜)의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권1에 시 3수, 부록으로 시 5수와 실적(實蹟)·행장·묘갈명·수비문(豎碑文)·기·통문(通文)·봉안문, 권2 부록으로 찬(贊) 185편, 술(述) 24편, 영(詠) 66수, 지(識) 14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공은의 시 3편은 모두가 고려가 망하였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부록에는 이색(李穡)의 시를 비롯하여 고려말의 명사 9명이 차운(次韻)한 시가 있어 그 당시 시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한편, 〈실적〉에는 그가 조선 태종의 부름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전라도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적소에서 죽었는데, 그 무렵 기러기 한마리가 3일간 슬피 울다가 그가 죽으니 덩달아 물에 떨어져 죽었다는 데서 그 지명을 ‘삼일포(三日浦)’ 또는 ‘비락주(飛落洲)’라고 한다는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이 밖에 그를 경현사(景賢祠)와 두문서원(杜門書院) 등에 배향하였다는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산유고(孤山遺稿)
영문표기 : Gosan yugo / Kosan yugo / Collected Works of Yun Seon-do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尹善道)의 시문집. 6권 6책. 목판본.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徐有隣)이 왕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 그 뒤 정조 22년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산유고》이다.
이 책의 편목을 보면, 권1에는 오칠언(五七言)의 고시·율시·절구·회문(回文)·집고(集古) 등 250편이 실려 있고, 권2에는 〈병진소 丙辰疏〉 등 16편의 소(疏)가 실려 있다. 권3의 상권에는 〈국시소 國是疏〉·〈논예소 論禮疏〉 등 13편의 소와 〈예설 禮說〉 2편이 있고, 하권에는 〈상친정서(上親庭書)〉를 비롯한 17편의 서(書)가 있다.
권4에는 〈답이현풍서 答李玄風書〉 등 100편의 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5에서 〈여갑산백서 與甲山伯書〉 등 21편의 서는 상권에 있다. 하권에는 13편의 축문, 〈향사당조약 鄕社堂條約〉 1편, 4편의 서(序), 2편의 설, 비명 5편, 잡저 5편, 〈산릉의 山陵議〉 등 의(議) 12편, 잡록 3편, 기 2편이 실려 있다.
권6은 별집으로 상권에는 시 8편, 부(賦) 4편, 논 3편, 책(策) 6편, 표전(表箋) 4편이, 하권에는 ‘가사(歌辭)’라는 표제 아래 75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琴詠〉·〈증반금 贈伴琴〉·〈초연곡 初筵曲〉·〈파연곡 罷宴曲〉·〈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어부사여음 漁父詞餘音〉·〈몽천요 夢天謠〉·〈견회요 遣懷謠〉·〈우후요 雨後謠〉 등이 하권에 수록된 시조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는 〈병진소〉·〈국시소〉 등 시정(時政)에 관한 상소문을 들 수 있다. 〈논예소(論禮疏)〉·〈예설〉 등 예학에 관한 논의와 〈산릉의〉 등도 조선조의 정치사·사상사 및 당쟁에 관한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별집에 실려 있는 시조 또한 시가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병진소〉는 1616년(광해군 8) 윤선도가 30세의 성균관 유생으로서 올린 글이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 옹립에 공을 세운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전횡과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그 내용이 광해군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당시의 권신들에 의하여 감추어진 채, 그 보복으로 그의 아버지 유기(惟幾)가 파직되고, 그는 이듬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견회요〉와 〈우후요〉는 이때 지은 작품이다.
조선조 예학논쟁의 발단이 된 윤선도의 〈논예소〉는 그가 73세 되는 1660년(현종 1)에 씌어졌다. 그 전해에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服)을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서인(西人)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의견을 좇아 기년(朞年 : 1년상으로 복을 입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에 남인인 윤선도는 허목(許穆)·윤휴(尹鑴) 등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다. 송시열 등은 효종이 둘째 왕자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어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 : 왕위의 계승이 윤리적 질서로는 정당하나 혈통상으로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설)에 해당하므로 기년복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선도는 종통(宗統)의 정당함을 내세워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세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부왕 생전에 효종이 다시 세자로 책립되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둘째 왕자라고는 하지만, 적장자(嫡長子)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왕위에 오른 현종이 기년설을 따랐으므로 남인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논예소〉는 불살라지고,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당하였다.
〈국시소〉는 윤선도가 71세 때인 1658년(효종 9) 동부승지로 있을 때 올린 글이다. 이 글에서는 본래 서인이었다가 남인이 된 정개청(鄭介淸)의 서원을 철폐하고자 하는 송시열 등 서인의 의도가 부당함을 지적하였으나, 오히려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산릉의〉는 72세 때인 1659년 효종이 죽은 직후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요청에 의하여 산릉(山陵)을 살펴 그 적부를 논한 글이다.
본래 효종의 산릉은 수원(水原)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일부에서 건원릉(健元陵)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의론이 돌아 그 적부를 윤선도에게 판별하도록 하였다. 윤선도는 수원에 쓸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고 건원릉 자리로 결정되었다.
〈산중신곡〉·〈산중속신곡〉 등은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좇는 것)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2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고향인 전라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당시 지은 작품이다.
이후 윤선도는 예송(禮訟) 후의 유배지로부터 1667년(현종 8)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 당시 발견하였던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때에 지은 것이 만년의 절창 〈어부사시사〉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하였던 윤선도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짐짓 어부의 생활을 하였고, 그 결과로 남겨진 많은 작품이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의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긴요하지만, 특히 조선조 사대부 층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조선조의 강호문학은 이현보(李賢輔)와 송순(宋純)에서 정립되었고, 윤선도에 이르러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73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하여 간행한 ≪이조명현집(李朝名賢集)≫ 3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仁祖實錄
<<참고문헌>>孝宗實錄
<<참고문헌>>顯宗實錄
<<참고문헌>>孤山先生年譜
<<참고문헌>>尹孤山硏究(李在秀, 學友社, 1955)
<<참고문헌>>孤山尹善道硏究(文永午, 太學社, 1983)
<<참고문헌>>假漁翁(崔珍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5, 1960)
<<참고문헌>>尹善道의 自然觀(尹聖根, 文化批評 7·8, 1970)
고소설(古小說(문헌))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집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집. 1권 1책. 한문 필사본. 〈최원정화풍남태설 崔猿亭畫諷南台說〉·〈왕수재취득용녀설 王秀才取得龍女說〉·〈이진사자지취삼계설 李進士者智就三計說〉 등 세 편의 한문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이들 작품은 전체적으로 야담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최원정화풍남태설〉은 성품이 어질고 문장과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지닌 최원정(崔猿亭)이 온갖 비리를 자행하던 재상 남태(南台)를 그림으로 풍자했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능력은 있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한 불우한 인재를 소재로 한 일사소설(逸士小說) 유형에 속하는데, 특히 부조리한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이 돋보인다.
〈왕수재취득용녀설〉은 왕수재(王秀才)가 승천(昇天)하려는 용을 방해하는 늙은 여우를 죽여 준 대가로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낳았다는 신화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고려사〉에 실려 있는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 이야기와 흡사한데, 여기서는 왕수재가 할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로 설정되어 있다.
내용은 왕수재가 남경으로 가는 통신사(通信使)의 일원이 되어 바다를 건너던 도중, 갑자기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변고가 일어난다. 이에 왕수재는 해신(海神)이 꺼려하는 불결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일행과 떨어져 홀로 섬에 남게 된다.
이 때 서해 용왕의 아들이 늙은이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왕수재에게 자신의 승천을 방해하는 늙은 여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왕수재는 활을 쏘아 여우를 죽이고, 용녀를 아내로 삼는다. 용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왕건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는 거타지(居陀知)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이진사자지취삼계설〉은 학식이 넉넉하고 강개한 뜻을 품고 있던 이진사가 도적에게 유치(誘致)되어 10년간 세 가지 계책을 써서 재물을 탈취하는 활약을 보인 뒤 돌아온다는 군도담(群盜譚) 유형의 작품이다.
첫번째 계책은 안변부사(安邊府使) 행세를 하여 평안도 부자 피동지(皮同知)의 재물을 탈취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계책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행세를 하여 칠보산(七寶山)에 있는 여러 절의 재물을 탈취하는 것이며, 세 번째 계책은 선릉(仙陵)에 불을 놓아 함경감영(咸鏡監營)의 재물을 탈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삽화는 〈홍길동전〉을 비롯하여 야담집에 실려 있는 군도담에서 두루 보이는데, 여기서는 이들의 내용을 약간 변형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 나손문고(舊 金東旭 소장본)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韓國野談資料集成 12券(鄭明基 編, 계명문화사, 1987)
<<참고문헌>>高麗國祖神話(張德順, 서울대학교出版部, 1970)
<<참고문헌>>李朝漢文短篇集 下(李佑成·林熒澤 編譯, 一潮閣, 1978)
고송유고(孤松遺稿)
조선 중기의 학자 최찬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최찬(崔纘)의 시문집. 1권 1책. 활자본. 그의 현손 형(衡)과 7대손 흥한(興翰)의 편집을 거쳐, 1863년(철종 14) 8대손 기문(基文)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장헌주(張憲周)와 현손 형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6대손 인국(麟國) 등의 발문이 있다. 서문에 이어 목록과 시 28수, 부록으로 만시·제문·가장·주해·행장·묘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의 〈애대군가 哀大君歌〉는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의 모함으로 강화도에 귀양갔다가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하여 애통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옥중자경음 獄中自警吟〉 3수는 〈애대군가〉를 지은 것이 문제가 되어 옥중에 수감되어 있던 중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지 못하는 효심을 노래한 것이다.
부록 중 〈주해애대군가 注解哀大君歌〉는 그의 종증손(從曾孫) 승(昇)이 〈애대군가〉를 국역한 것으로, 국문학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고송유집(孤松遺集)
조선 중기의 학자 한대기의 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한대기(韓大器)의 시문집. 2권 1책. 고활자본. 1902년 그의 종9세손 정문(定文)·정용(定鏞)과 방계후손 기석(夔錫)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곽종석(郭鍾錫)의 서문과 세계도가 있고 권말에 김진탁(金鎭祏)의 후서와 허유(許愈)·김정문 등이 쓴 4편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6수, 잡저 4편, 권2에 척유(摭遺) 3편, 부록에 유사(遺事)·가장·행장·묘갈명·전(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에는 장편의 〈남도 南島〉·〈수족음 手足吟〉등과 비장한 문체로 쓴 〈용천검 龍泉劍〉을 비롯하여 정유재란의 국난기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재직하면서 두 아들과 함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한 곽준(郭䞭)을 소재로 지은 〈정유재고령우존재곽공반츤 丁酉在高靈遇存齋郭公返櫬〉 등이 실려 있다.
잡저에는 그가 임진왜란의 국난을 당하여 산속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겪은 고난과 치욕의 소식들을 기술하고, 복수의 결의를 다짐한 문답체의 〈기우록 奇遇錄〉과 백이(伯夷)의 충절을 기리는 한편, 임진왜란 때 전사한 김경근(金景謹)·박선(朴0x9C5A) 등을 위로하려는 의도에서 지었다는 〈수양왕전 首陽王傳〉 등이 특이하다.
이 밖에 그와 학문적 교류가 깊었던 김하(金㵑)·김렴(金濂) 등의 전기인 〈김씨팔군자전 金氏八君子傳〉 등이 실려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송집(孤松集)
조선 후기의 문신 신홍망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신홍망(申弘望)의 시문집. 3권 2책. 목판본. 1739년(영조 15) 증손 진구(震龜)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광정(李光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권상일(權相一)의 발문과 진구의 후지(後識)가 있다.
권1·2에 시 255수, 권3에 소 2편, 제문 7편, 부록으로 행장·묘지명 각 1편, 서(序) 4편, 제문 2편, 만사 10수, 명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는 영물·풍경·학문 등을 주제로 하여 순후하고 청고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회산봉한식 檜山逢寒食〉 3수는 16세 때 지은 것으로서 시상과 시관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여헌장선생문 祭旅軒張先生文〉은 장현광(張顯光)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지은 제문으로서, 그가 학계와 국가에 이바지한 공적을 높이 치하하고 이황(李滉)의 뒤를 이어 우리 나라의 이학(理學)을 발전시켰다고 칭송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고식(故寔)
조선 후기의 문신 김희락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김희락(金熙洛)의 시문집. 5권 3책. 목활자본. 1878년(고종 15) 손자인 철수(喆銖)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총서(總序)가 있고 권말에 권영하(權泳夏)와 철수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주자대전강의십조차자(朱子大全講義十條箚子)·어비십조별유(御批十條別諭) 1편, 차자(箚子) 및 어비 18조, 국조고사강의(國朝故事講義) 8편, 권2에 중용강의(中庸講義) 6조, 어제조문신희락대(御製條問臣熙洛對) 33장, 권3에 설 2편, 제(題) 1편, 책(策) 3편, 권4에 시 5수, 율부(律賦) 2편, 명 1편, 찬(贊) 1편, 전문(箋文) 2편, 의(議) 3편, 서(序) 2편, 기 2편, 변 1편, 전(傳) 1편, 상량문 3편, 교서 1편, 권5에 전교(傳敎) 1편, 규장각기주연설(奎章閣記注筵說) 1편, 행록 1편, 잡저 4편, 서(書) 4편, 제문 5편, 만사 4편, 부록으로 행장 1편, 만뢰(挽誄) 14편, 제문 1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그가 ≪주자대전≫과 ≪중용≫ 및 ≪국조고사≫를 부연하고 선현들의 주차(奏箚) 가운데 천덕(天德)과 왕도에 관계되는 것을 참작하여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를 올린 것인데, 정조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이 중 〈주자대전강의십조차자〉에는 답장흠부인설(答張欽夫仁說)을 비롯하여 중화설(中和說)과 답여자약서(答呂子約書) 등 10조가 있고, 또한 ≪홍재전서 弘齋全書≫에 대한 정조의 〈어비별유〉가 있다. 〈중용강의〉는 각 장마다 정조가 조목별로 묻고 그가 답한 것이다.
설에는 〈성즉리설 性卽理說〉·〈유정유일윤집궐중설 惟精惟一允執厥中說〉, 책에는 〈환향책 還餉策〉·〈팔자백선책략 八子百選策略〉·〈위의책략 威儀策略〉, 의에는 〈영성수성제의 靈星壽星祭議〉·〈금양의 禁釀議〉, 변에는 〈금고문변 今古文辨〉이 있다. 모두 정조의 하교를 받들어 지어 바친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고암문집(古巖文集(이태우))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태우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태우(李泰宇)의 시문집. 2권 1책. 석인본. 1938년 그의 5대손 원기(元基)가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원기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21수, 부 2편, 서(書) 8편, 잡저 2편, 기 2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권2는 부록으로 만사 28편, 뇌사(誄辭) 4편, 제문 11편, 유사·행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중 〈추흥육수 秋興六首〉는 임거(林居)의 가을풍경을 통하여 지은 일종의 자서전으로서 저자의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으며, 〈백운음 白雲吟〉은 장편시로 활달한 문장솜씨가 잘 나타나 있다. 부 중 〈역부 易賦〉는 역리(易理)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술한 것이다.
서(書) 중 〈답이덕은 答李德隱〉에서는 정주(程朱)의 학설이 아니면 배척하는 선비들의 고정관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밖에 잡저인 〈원조자경 元祖自警〉과 〈입지잠 立志箴〉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암문집(古巖文集(김세락))
조선 말기의 학자 김세락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김세락(金世洛)의 시문집. 8권 4책. 석판본. 1969년 그의 조카 병하(秉河)가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권1·2에 사(辭) 1편, 시 268수, 소 1편, 권3에는 서(書) 45편, 권4·5에 잡저 6편, 서(序) 14편, 기 20편, 발 19편, 잠명송(箴銘頌) 5편, 상량문 4편, 고유문 4편, 애사 2편, 제문 19편, 권6에 묘갈명 17편, 권7에 묘지명 4편, 행장 8편, 유사 1편, 부록으로 가장(家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의 〈자소 自笑〉는 자신의 학문이 미흡함을 반성하는 뜻이 담겨 있고, 〈희음일절요정만포숙낙중여안 戱吟一絶遙呈晩圃叔洛中旅案〉은 노처녀를 소재로 삼은 희작(戱作)으로 흥미를 끌게 한다.
소의 〈청참오적물허왜청소 請斬五賊勿許倭請疏〉는 1905년 을사조약을 당하여 상소한 것인데, 일본에 대한 굴욕적인 협약을 깨고 을사오적을 참하여 민족자존의 대의를 밝힐 것을 요청한 내용으로 우국충정이 담긴 글이다.
잡저의 〈한명제구불법론 漢明帝求佛法論〉은 중국의 불교역사를 말하고 역대왕조에 불교가 끼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파악, 유교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글이다. 〈양화설 養禾說〉은 제초(除草) 등 농사짓는 방법을 설명한 글이다.
이 밖에 기행문인 〈유주왕산록 遊周王山錄〉·〈동유록 東遊錄〉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고암문집(顧菴文集)
조선 말기의 학자 이종연의 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이종연(李宗淵)의 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911년 족질 상각(相慤)이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상각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56수, 서(書) 19편, 권2·3에 잡저 6편, 제문 13편, 권4에 시장(諡狀)2편, 행장 3편, 부록으로 만사 13편, 제문 8편, 뇌사(誄辭) 1편, 가장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사원강의 泗院講義〉와 〈녹재강의 鹿齋講義〉는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 등에 대한 논술이다.
그 가운데 ≪대학≫의 ‘심(心)’을 설명하면서 수신(修身)과 정심(正心)의 도는 ‘복성(復性)’에 있으니 주자의 ≪대학≫ 서문에서도 “하늘이 성(性)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중용≫의 내용도 ‘심’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대학≫과 ≪중용≫은 서로 안팎〔表裏〕을 이룬다고 강조하였다.
≪맹자≫ 강의에서는, ≪논어≫에서의 인(仁)은 용(用)을 말하였기 때문에 애(愛)의 이치를 먼저 설명하였고, ≪맹자≫에서의 인은 체(體)를 말하였으므로 심(心)의 덕(德)을 먼저 설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중용≫ 강의에서는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성(性)의 원리에 대하여 심과 성은 한 이치이며, 성을 높이는 것은 심을 높이는 것임을 논하고, 학문은 경(敬)을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지식을 쌓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덕에 나아가는 바탕〔基本〕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 ≪근사록≫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심경≫,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에 대한 내용이 있어, 심성론·이기론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고암유고(顧菴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정립의 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정립(鄭雴)의 시문집. 6권 3책. 석판본. 1936년 그의 10대손 상필(相弼)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성두식(成斗植)의 서문과 권말에 후손 상필·인식(麟植)·창식(昌植)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사(詞) 3편, 부 5편, 시 68수, 소 4편, 권2에 소 3편, 서(書) 12편, 권3에 잡저 22편, 권4에 서(序) 3편, 기 1편, 잠 2편, 송(頌) 3편, 상량문 1편, 축문 16편, 제문 19편, 묘갈명·묘지명·묘표·행장·전(傳) 각 1편, 권5·6은 부록으로 연보·제현시(諸賢詩)·사적·행장·가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소의 〈오현종사소 五賢從祀疏〉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5현의 행적을 열거하여, 문묘에 종사할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다. 또, 〈신리성우계소 伸理成牛溪疏〉에는 임진왜란 때의 일로 성혼(成渾)의 무함에 관하여 이론을 밝혀 진술하였다.
잡저 가운데 과표(科表)의 〈명국황태자고치사사문화보감이책수기치인지요 明國皇太子高熾謝賜文華寶鑑以責修己治人之要〉 등 16편은 명나라와의 교린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 책은 주로 정치에 관한 저자의 소신을 밝힌 것으로, 당시의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