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형문자의 역사
메소포타미아와 알 자지라, 그리고 에덴동산
레부스 체계
인류의 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크게 네 지역이 꼽히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Μεσοποταμία, Mesopotamia)라는 말은 그리스 어로 ‘강과 강 사이’라는 뜻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은 대체적으로 현대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 지역을 가리켜 ‘섬’이라는 뜻의 ‘자지라'라고 부른다. 최근 우리나라 언론에도 자주 언급되는 ‘알 자지라’라는 아랍 방송국의 이름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알 카에다, 알 지하드 등 아랍어에서 쓰이는 ‘알’은 영어의 정관사 the에 해당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릴 만큼, 땅이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기원전 약 4,000년경부터 인간이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에 나오는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 …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창세기 2장)라는 구절을 보면, 에덴 동산이 이 근처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쐐기를 닮은 문자
이 땅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탄생했다. 1년을 열두 달, 하루를 24시간으로 하는 태음력과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누는 60진법, 원을 360도로 나누는 것은 모두 수메르 문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까지 알려진 문자 중 가장 오래된 ‘문자’인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가 생겨났다. ‘설형(楔形)’이란 ‘쐐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그 글자의 모습이 마치 쐐기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선수가 한 골을 넣어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라는 예문에서 보듯이 우리가 흔히 ‘쐐기를 박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쐐기’는 일종의 나무못인데, 나무를 V자 모양으로 깎아서 나무로 짠 물건의 틈새를 박아 연결 부분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데 쓰인다.
글자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와 펜 등 필기도구가 필요하다. 설형문자를 쓰는 데 종이 구실을 한 것은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이며, 펜 구실을 한 것은 갈대나 뼈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갈대 등의 끝을 다듬어 뾰족하게 만들어서 누르거나 새겨서 쓰면 점토판 위에 자국이 남게 되며 이것이 문자가 된 것이다. 쓰기가 끝나면 점토판을 햇볕에 말려 보관했으며, 중요한 것들은 가마에 구웠는데 이렇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석판이나 금속판이나 바위, 금속, 상아, 유리, 밀랍 등에 새긴 경우도 있다.
여러 가지 설형문자 점토판
문자는 권력
지금이야 누구나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서, 문자를 알고, 사용하는 것을 특별한 기술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모두가 알아야 할 기본적이고 당연한 능력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예전에는 글자를 아는 것이 고급 기술 중 하나였으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권위와 특권의 상징이었다. 이는 한자로 쓰인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벼슬길에 올랐던 우리나라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설형문자가 처음 생겨날 당시에는 왕조차도 읽기, 쓰기 등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문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신전의 제관들과 의사, 상인, 서기(書記)들이며, 특히 서기 계급의 위력은 아주 대단했다. 기록을 맡아 하는 서기들은 설형문자를 읽고 쓰는 법은 물론,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기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기술을 익혀야 했고, 그렇기에 서기는 때로는 글자를 모르는 신하들이나 심지어는 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당시의 서기 학교터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선생이 쓴 글씨와 학생이 쓴 글씨가 나란히 적혀 있어 설형문자 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도 알 수 있다.
설형문자의 추상화
설형문자는 처음에 신전에 바치는 공물이나 농부들이 서로 물물 교환한 물건들의 양이나 수를 세고 기록하기 위한 기호로 사용되었다. 곡물, 소, 양 등 사물은 그림으로 그리고, 숫자는 짧은 선이나 원의 반복으로 표시했다. 이처럼 사물의 모양을 본떠 눈에 보이는 생김새를 적은 문자를 상형문자(象形文字)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형문자에는 한자가 있으며, 이른 시기의 설형문자 또한 상형문자에 속한다. 상형문자의 초기 단계는 사물을 그대로 모방하지만, 점차로 문자의 추상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산’을 나타내는 글자는 - 당시에 주로 산이나 강으로 경계를 삼는 일이 많았으므로 - 경계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도 하고, 이후 낯선 땅, 이국 등의 뜻으로 확장된다. 마찬가지로 ‘보리’를 나타내는 글자는 이삭, 농사일 등의 뜻으로, ‘사자’를 나타내는 글자는 힘, 용맹함, 살육, 공포, 폭군 등으로 의미로 추상화의 단계를 거친다.
레부스 체계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상형문자는 그 문자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표의문자(表意文字; 뜻글자)이다. 표의문자인 상형문자는 수많은 기호나 그림을 그려야 표현하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각 대상마다 하나의 그림을 필요로 한다. 이론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의 수만큼 글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수천, 수만 개의 글자를 따로따로 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서 귀로 들리는 소리를 적는 표음문자(表音文字; 소리글자)가 발생하게 된다.
설형문자 역시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보자.
초기의 설형문자에서 ‘화살’을 나타내는 말은 화살 그림의 상형문자 ‘티(ti)’였다. 그런데 나중에 ‘생명’을 나타내는 말을 그릴 필요가 생겼지만, 생명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생명을 나타내는 수메르 어 역시 그 발음은 ‘티’였기에, 화살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를 가져다가 생명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즉, ‘티’라는 소리값을 가진 상형문자는 처음에는 화살의 모양을 본떠 만든 표의문자였지만, 나중에는 그 모양과는 관계없이 ‘티’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로 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믿음’을 나타내는 belief를 써야 할 때, 직접 그 모습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꿀벌’의 뜻을 가진 bee를 나타내는 상형문자와 ‘나뭇잎’을 의미하는 leaf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를 더해 bee+leaf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럴 때 bee+leaf를 구성하는 두 글자 bee와 leaf에는 ‘꿀벌’이나 ‘나뭇잎’이라는 원래의 의미는 남아 있지 않고, 단지 bee와 leaf의 소리값만 빌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문자가 단순히 대상을 표상하는 표의적 방법에서, 그 대상의 소리를 옮겨 적는 표음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레부스(rebus) 체계라고 한다.
설형문자의 발전
설형문자의 발달 최초의 설형문자 - 90도 회전한 모습 - 고대 바빌로니아 설형문자 - 아시리아 설형문자
설형문자로 쓰인 점토판은 대체적으로 기원전 3,000년경부터 발견되며, 이후 약 3,000년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여러 문화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걸쳐 점차 발달된 다양한 형태의 설형문자들이 출토되었으며, 문자의 수는 초기에 1,800개 정도 사용되었으나, 이후 바빌로니아에서는 570개 정도로 줄어들었고, 후기 아시리아에서는 350개 정도로 감소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설형문자는 글자의 획도 간략해지고, 자수도 42개로 정리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뜻을 표현하는 표의문자에서 소리를 표음문자로 변화함에 따라, 해당 언어에서 사용되는 소리의 수만큼만 글자수가 필요하게 되므로 그 수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언어만 해도 수메르 어, 아카드 어, 바빌로니아 어, 히타이트 어, 페르시아 어, 엘람 어 등이 있으며, 기원전 1세기경까지 사용되다가 이후 그리스 문자나 아라메어 문자의 보급으로 점차 잊히게 되었다.
설형문자로 이루어진 작품들
설형문자로 이루어진 작품 중 유명한 것은 기원전 2천년대 점토판에 적혀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시가이다. 이 시가에는 수메르 남부의 도시국가 우루크(Uruk)의 강력한 왕이며,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 여행을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는 먼 옛날에 신들이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켰지만 우트나피시팀이라는 사람이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간신히 살아남았고, 인류를 멸망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신들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리스도교의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창세기 6~9장)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리에게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구절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800년 경) 역시 설형문자로 적혀 있다.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인 함무라비가 제정한 것으로, 현무암으로 된 돌기둥에 당시 언어인 아카드 어의 법전이 설형문자로 쓰여 있어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담이지만, 탈리온 보복법 즉,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이 법전의 정신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잔인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크게 앙갚음을 받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눈에는 눈으로만 보복할 것이지 그 이상의 보복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창세기 4장 참고)
길가메시 서사시가 적힌 점토판과 함무라비 법전
설형문자의 해독
중세 때부터 부유한 유럽인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적 하나쯤은 집에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했을 만큼, 설형문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체계적인 고고학 방법론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어서, 독일인 그로테펜트(G. F. Grotefend, 1775∼1853)가 고대 페르시아 어의 설형문자를 거의 해독하는 데 이른 것은 1802년이었다. 이후 설형문자 해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이란의 베히스툰(Behistun, 오늘날의 비시툰) 마을에 있는 거대한 비문이다. 영국군 장교인 롤린슨(Henry C. Rawlinson, 1810∼1895)은 비문이 조각되어 있는 절벽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사본을 만들었다. 그는 이후 10년 동안의 연구 끝에 1847년 이 비문이 고대 페르시아 어, 엘람 어, 바빌로니아 어의 3개 국어로 되어 있으며,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대왕의 전승기념비문이었음을 밝혀냈다.
베히스툰 비문과 베히스툰 비문 절벽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