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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 마 2:1-12
사람은 남녀노소 누구나 계속하여 무엇인가를 찾아가고,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그 누구나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신기루를 찾아 나서면 그 인생이 불행해 지고 맙니다. 또한 인간의 허영심이나 지나친 명예심이나, 공허한 출세나, 탐욕에 붙잡혀서 재물이나 돈만을 찾아 나서다 보면, 그 인생이 결코 행복해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인생이 병들고 타락하고, 패망의 늪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이란 책에 “인간은 성공하였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잘 지내야 합니다. 물론 좋은 대학 가는 것도 필요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인간이 진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지 못한 채, 허망한 이방 종교나 우상 숭배나, 헛된 허영심과 공명심에 붙들려 살다보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다 불행해 지고 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어리석기 시작하면, 그 어리석음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미련하고 부족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지혜를 자랑하거나 자기 지식을 내세우면 안 됩니다.
열두 살난 아들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명절에 올라갔다가, 고향 마을인 나사렛으로 되 돌아가던 길에,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를 찾기 위해서 수많은 귀향 인파를 거슬러서 ‘우리 아들 예수 못 봤소, 누구 우리 아들 예수 본 사람 없소’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나이까?”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는 그가 하나님이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성취하고, 어디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아셨던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당신이 평생을 찾고 추구하는 바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인류를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특이한 사건은 바로 ‘동방박사들의 방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성경 예언을 통해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던 이방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고위층에 속하는 귀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진 작은 나라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난 한 아기에게, 그것도 축하 정도가 아니라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기 위해’일부러 찾아 왔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오면 성탄카드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준 기억이 납니다. 보통 성탄 카드에 보면,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의 좌우 한쪽에는 목자들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절하고 있는 장면이 흔히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 탄생의 현장에는 이 두 부류의 축하객들이 함께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 탄생 기사에 이들이 함께 등장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장면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천사들을 통하여 구주 탄생의 소식을 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제일 먼저 지금 갓 탄생하셔서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뵈옵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바로 그 현장에서 즉시 축하했던 사람들은 사실상 베들레헴의 목자들뿐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내용은, 예수님 탄생 직후가 아니라 약간의 시간이 지난 때라고 짐작됩니다. 이들은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페르시아 지역의 천문학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은 그 동방에서 ‘그의 별’곧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 주는 별을 ‘보고’예루살렘으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주는 별을 보고 즉시 출발했다고 해도, 적어도 서너 달 후에나 베들레헴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11절에 보면 그들은 베들레헴의 어느 한 ‘집’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마구간 안의 ‘구유’에 누이셨다고 했으니, 여기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된 시간과 장소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였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한 헤롯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때 그 나이를 계산한 방법 역시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 줍니다. 7절에 보면 헤롯왕은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라고 했습니다. 곧 그는 새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아기의 탄생 시각을 면밀히 계산했던 것입니다. 마 2:16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을 찾아온 때가 예수님의 탄생 직후였다면, 아무리 악한 헤롯이라 해도 그저 갓 태어난 아기, 또는 한 살도 안 된 아기 정도만 죽이라고 명령해도 충분했을 것인데도, ‘두 살 아래’라고 한 것을 보면, 역시 그 ‘별이 나타난 때’이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베들레헴의 목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조금 늦고, 장소는 달랐다 할지라도, 어쨌든 이 동방박사들 역시 목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첫 축하객들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목자들은 유대인인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입니다. 목자들은 가난한 서민이었던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상류사회의 귀족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부자나 빈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세상사람 모두가 다 함께 맞이하고 축하해야 할, 사상 최고 최대의 세계적 경사인 것을 이들이 함께 보여 준 것입니다.
동방박사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예물입니다. 사실 성경 그 어느 구절도 동방박사들이 딱 세 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들이 드린 선물의 종류가 세 가지라는 사실에서, 한 사람이 하나씩 해서 세 명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이제 이들이 드린 예물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에 동방박사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봅시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동방박사들만큼 오해와 논란이 많은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본문 1절의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라는 구절을 영어 성경에 보면, ‘wise men from the East’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동쪽으로부터 온 ‘현자들’곧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희랍어 원어 성경을 보면, 이들을 ‘magoi’로 표현합니다. 바로 이 ‘magoi’에서부터 동방박사들을 뜻하는 영어 ‘magi’가 왔습니다. 그러면 ‘magoi’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오늘날 학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이들이 천체와 별을 연구하는 점성학자들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그 당시 점성학자들이 주로 동쪽 지역에 많이 살았다는 사실과 또 별을 보고 아기 예수 나신 곳까지 왔다는 마태 복음의 기록을 볼 때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제 별을 연구하는 동방박사들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들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인 토라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베들레헴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로마의 허수아비로서 유대를 통치했던 헤롯왕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몹시 두려워하고 싫어했다는 사실과 아주 좋은 대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장차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넘겨주기까지 할 것이지만, 동방박사들과 같은 이방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미래의 운명을 미리 보여줍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약 2천 5백 킬로미터 떨어진 페르시아(이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고 어떤 역사의 기록이나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것이 1250년대에 들어와서 마르코폴로가 로마에서 북경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동방견문록을 통해서 역사적 실재인물로 밝혀졌습니다. 그가 페르시아 싸바시라는 곳을 들렀을 때, 그곳에 무덤이 있었고 세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비석을 자세히 보니까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까지 찾아가서 경배했던 동방박사들의 무덤이었고, 그들의 행적에 관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비문이 소개되면서부터 동방박사들의 이야기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바로 이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성경 말씀의 증거를 통하여 오직 ‘믿음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1-6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 동방박사들은 ‘디아스포라’곧 ‘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사람들이라고 짐작됩니다. 구약 시대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멸망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중동 지방의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특히 ‘동방’은 바로 이전에 바벨론 제국이 있던 곳으로서,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끌려갔던 곳이었고, 그들 중에는 나중에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예루살렘 귀환’때에 그곳에 그대로 정착하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에는 ‘디아스포라’라고 불리게 된 것인데, 이들은 그처럼 이방 지역에 살면서도 신앙만큼은 굳게 지켰을 뿐 아니라, 또한 이들의 전도를 통해서 같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많이 생겼었습니다. 동방박사들 역시 바로 그런 ‘이방인 개종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동방박사들은 천문학 등에 능통한, 문자 그대로 ‘박사’들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그의 별을 보고’곧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탄생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별’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설들이 나왔습니다. 어떤 혜성이 마침 때를 맞추어 나타났을 것이라는 가설은,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꽤 오래 전부터 있던 것으로서, 중세기에 예수님의 탄생을 그린 그림들 중에도, 동방박사들이 한 혜성을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찾아오는 모습이 묘사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특별한 별을 천문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별은 당대의 최고 천문학자들도 처음 본 것이었으며, 또한 보통 별들과는 달리 움직이기도 하고, 또한 서기까지 하면서 사람을 어떤 지점으로 인도해 주는 별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동방박사들이 보았던 별은,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님 탄생 때에만 특별하게 사용하신, 어떤 초자연적인 별이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동방박사들은 ‘그의 별’을 보자마자 즉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유대 땅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방박사들이 이 ‘유대인의 왕’을 어떤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자기네 나라 왕도 아니고, 더구나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 속한 아주 작은 식민지에 불과한 유대의 왕, 그래서 정식 왕이라고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영주’정도나 다름없는 ‘분봉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왕에게, 그토록 경의를 표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이 동방박사들은 지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바로 그들 역시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로서, 각 나라 모든 민족들이 경배드려야 마땅한 ‘왕 중의 왕’이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은 당장 ‘소동’에 빠져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헤롯왕은 자기가 엄연히 현재 유대의 왕으로서 왕좌에 앉아 있는데, 무슨 새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헤롯왕이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어디서 날 것인지를 궁금해한 것과, 자신의 ‘정치적 보좌관’들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불러서 그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는 사실은, 그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 헤롯왕의 예상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베들레헴’이 바로 그리스도가 탄생할 장소라고 대답하면서, 구약의 미가 선지자가 베들레헴을 두고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예언을 했다고 연이어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동방박사들과 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있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 탄생의 장소에 대해서는 이처럼 정확했지만, 그 그리스도께서 ‘한 다스리는 자’곧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일 줄 몰랐습니다. ‘백성의 목자’라는 말은 구약에서 ‘왕’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그래서 여기서도 ‘다스리는 자’와 동격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네들이 줄줄 외우고 있는,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는 메시야의 위상, 곧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이방인 동방박사들이 그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라고 일깨워 주는 말을 듣고서도, 그 메시야를 만나 뵈러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비록 메시야께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는 몰라서 그들에게 묻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금 태어나신 메시야가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분 앞에 경배드려야 한다는 일념에만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축하해야 할지를 명백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경배’라는 것은 ‘무릎을 꿇고 절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복종하다’라는 의미의 말이며, 특히 신약 성경에서는 항상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한정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곧 ‘경배’는 곧 ‘신앙’과 직결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신앙’이란 오직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만 확실히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 이 성경 말씀이 증언하는 대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는 일단 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저절로 이런 ‘믿음의 경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분노하는 열방과 대적하는 군왕’들을 향하여,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시 2:6)라고 선포하신 바로 그 ‘왕 중의 왕’이심을 믿는 성도는, 문자 그대로 ‘엎드려 절하면서’ 예배드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 이르도록, 영원히 ‘다스리시는 목자’가 되신 줄을 믿고,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의 분봉왕이 아니라, 천하 만민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선민을 통치하시는 ‘우주적 교회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심을 고백함으로써, ‘진실한 신앙의 경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구세주 예수께 오직 ‘감사의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7-12절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헤롯왕을 만나서 일단 예수님 탄생의 장소가 ‘베들레헴’임을 알게 된 동방박사들은 그리로 가는 도중에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게’됨으로써, 예수님께서 계신 장소에 정확하게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집에’들어가 보았는데 거기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거기에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없었을 뿐 아니라, ‘요셉’조차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적어도 예수님 탄생 직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 동방박사들은 ‘엎드려 아기께 경배’한 후에 곧 이어서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드렸습니다. 흔히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찬송가의 가사에서나 성탄카드의 그림에서도 으레 그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물론 동방박사들이 정확하게 몇 명이었느냐 하는 것은 아무 중요한 사실도 아니고, 따라서 전혀 궁금해 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이 한 아기에 불과했던 예수님에게 그런 ‘세 가지의 예물’을 드렸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대표적인 예물입니다. 그 찬란한 빛깔과 불변의 성질이 왕의 영광과 권위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유향’은 성전의 향단에서 향을 피울 때 사용된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기 30:37절에 보면, 성막의 향단을 위한 용도로 제조된 향은 ‘여호와를 위한 거룩한 것’으로서 백성들이 사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서도 아니 되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 곧 그의 ‘신성’을 상징한 것입니다. 끝으로 ‘몰약’은 침상이나 옷에 발라 향기를 내게 하거나, 술에 타서 마취제로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이것 역시 당시에는 아주 귀중한 ‘보배’의 한 종류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시체에 바르는 방부제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몰약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대속의 죽으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은 그것들이 ‘값비싼 보배’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왕권과 신성 및 인성’을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정말 놀랍고도 신비로운 사실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 바로 그런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특별한 세 가지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왕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한 아기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당장 그 아기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찼습니다. 그 아기가 ‘그리스도’인지 뭔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아기를 오로지 자신의 왕권을 도전할 라이벌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가 모든 유대인들이 그들을 해방시켜 줄 사람으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오히려 헤롯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권력과 부에 대한 위협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동방박사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어찌하든지 그 아기를 찾아내어 죽이려 하다가 그것이 실패하자, 아예 한 마을 전체의 어린 아기들을 몽땅 죽이는 끔찍한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했습니다. 겉으로는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했던 그 사람 속에, 그처럼 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방법치고는, 정말 소름끼치는 악한 마음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대인들 가운데서 헤롯왕만큼 육신적으로 잘 살고 있던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 무슨 ‘예물’을 보내기는 고사하고, 그 아기를 반드시 죽임으로써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동방박사들 역시 헤롯왕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 ‘고위층 인사’였으며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곧 경제적인 능력만을 본다면 양자가 다 그런 ‘보배의 예물’을 드릴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쪽은 그 아기를 죽이려고만 달려들었고, 다른 한 쪽은 그 아기 예수님 앞에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물을 바쳤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왕은 순전히 자기 욕망에만 사로잡힌 사람이었던 반면에, 동방박사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당연히 받으셔야 마땅할 ‘왕의 영광’대신에 ‘메시야의 수난’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탄생하신 구주 앞에서 예물을 드리는 성도의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부자라고 해서 다 자신의 ‘보배합’을 열어서 예물을 드리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해 주실’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엄청난 선물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명예와 물질에 대한 욕심에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보배’는커녕 ‘불만과 원망’만 가득찬 가운데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릴 수 없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신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이런 ‘하나님의 선물’에 비길 수 있는 ‘사람의 예물’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세주 앞에서, 더 이상 유치하고도 무례한 요구를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을 ‘왕’으로, ‘하나님’으로, ‘참 사람 되신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뜨거운 감사와 함께 가장 ‘보배로운 예물’을 바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 마땅히 그 탄생을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축하했어야 했을 사람들은, 바로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다스리시는 목자’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예수님을 죽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맞이하는 방법치고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환영행사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늦게 알았으며, 성경의 예언도 완전히 알지는 못하고 있던, 이 이방인 동방박사들 몇 명이, 예수님을 ‘왕으로 오신’분으로 알고 당연히 경배드리면서, 또한 ‘참 신이시면서도 참 사람이 되신’분에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귀한 예물까지 바쳤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구세주로 태어나셨다 하면 제일 먼저 ‘정말 그 아기가 구세주인가?’라고 의문부터 제기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리스도인지, 정말 ‘왕 중의 왕’인지 증거부터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가 구세주라고 하면 ‘과연 그 구세주라는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생각부터 먼저 합니다. 곧 구세주가 나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지 그것부터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이런 마음으로 대하는 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제대로 축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헤롯왕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예수님을 미워하고 멸시하고 박해하는 원수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아기 예수님이 ‘과연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이신지’그 증거를 요구하는 의심 가운데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아기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를 구원하실 왕으로 오신 분임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서 ‘경배’함으로써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아기 예수가 내게 무엇을 줄 것인가?’하고 손을 내밀기 이전에, 이 아기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그 사실만 해도, 이미 엄청난 축복이요 무한한 은혜인 것을 깨닫고, 오로지 ‘감사’가 넘치는 가운데 정성껏 ‘예물’을 드리면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카드에 동방박사들의 장면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출시켜 주는 어떤 신비감과 화려함 때문일 것입니다. 낙타를 타고 기묘한 의상들을 걸치고, 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한 별을 바라보며 찾아오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참 멋진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의 방문의 진짜 아름다움은 그런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신 메시야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아무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찾아왔으며, 그 아기께로부터 무엇을 얻기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바쳐야 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할 줄 알았던, 실로 정말 멋진 축하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의심이 아닌 ‘믿음의 경배’를 드리며, 요구 대신에 오직 ‘감사의 예물’을 바치면서, 이 ‘왕이시며 참 신과 참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크게 기뻐하며 축하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운데는 헤롯처럼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성도가 아무도 없게 하옵소서. 행여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종교인들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무감동하고, 무관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진정으로 경배하게 하옵소서.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보배합을 활짝 열어 드리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전과는 달라진 삶의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드림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 마 2:13-23
‘남 앞에선 절대 울지 않을 것이고, 식구들이나 보러 한국에 돌아오진 않겠다.’ 10년 전 비행기 안에서 이런 결심을 하며, 미국으로 건너간 한 맹인 소녀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1959년 충북 청주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 김강숙 씨의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시력 장애아로 세상에 온 한 아기, 그가 바로 오은경 씨입니다. 열 살이 되어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할 때까지도, 어머니 김강숙 씨의 한이 되었던 아이, 하지만 이런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좀 별난 재주가 있었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의 음을 따라 흥얼거리곤 했고, 어머니는 흔히 보아 넘길 수 있는 이 재주를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았습니다. 음감이 뛰어난 딸에게 열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한 것입니다. 당시 청주맹아학교에 다니고 있던 그녀가 피아노 건반을 신기한 듯 짚어 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보이지 않을 텐데 용케도 그녀는 한 번도 틀리지 않고 건반을 짚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순전히 귀와 기억력, 손의 감각에 의해 배우기 시작한 그녀, 녹음기나 점자 악보도 없던 시절이라, 그녀는 나중에 연습하기 위해선 빠르게 머릿속에 그 악보를 통째로 암기해야 했지만, 너무도 행복했다고 회고합니다. 피아노를 배운지 1년만에 충북예술제에서 정상인들을 제치고 특상을 받은 것을 비롯. 청주맹아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각종 대회에서 열세 번이나 수상했고, 그중 여섯 차례 특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피아노를 잘 쳐도 맹인이 공부하기엔 역부족인 우리나라 여건에서, 그녀의 음악 수업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끝을 맺어야 했습니다. 활짝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그 재능이 꺾일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청주여사대(현 서원대학교) 주최 콩쿨에서 입상, 예비고사 면제 혜택을 받긴 했지만, 앞을 못 보는 그녀를 보곤 모두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뜻밖의 기회가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뜻을 가진 이에겐 길이 열리는 법이라고 하지요. 유학을 가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마음을 끓이고 있던 그 앞에, 국제선교회 고원용 목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청주맹아학교의 교장으로부터 그녀의 얘기를 건네들은 고원용 목사가 그의 집을 찾아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그후 캘리포니아 노스리지 음대에서 2년을 공부하고, 아틀란타의 에모리 음대로 전학해 그곳에서 수석 졸업을 하게 됩니다. 영어를 배우는 과정도 그랬지만, 미국 대학에서 시력을 요구하는 과목 외에는 보통 사람과 똑같은 학점을 이수해야 했던 그녀의 피나는 노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를 배울 때 점자 교과서가 없어서, 칠판에 선생님이 어떤 단어를 쓰면 옆의 학생더러 스펠링을 불러달라고 해, 나중에 점자 영어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고달팠던 작업들이었고, 남들보다 10배의 시간이 족히 걸렸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는 88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초청 연주회를 비롯, 독일 6개 도시 순회 연주회 및 각종 초청 연주회를 갖고, 우수한 성적과 예술적 자질을 인정받아 각종 장학금 혜택을 받았습니다. 특히 영광스런 것은 그가 에모리대 최초의 캔들러 예술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지도 교수인 윌리엄 랜슨교수는 자신의 제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의 연주는 우아하고 표현이 풍부하며 유달리 맑습니다. 그녀는 매우 뛰어난 음악가지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면 그녀가 맹인이라는 걸 자주 잊곤 합니다. 아무리 복잡한 곡도 그녀 손에서는 너무나 쉽게 제 모양을 갖춰 빠져 나오지요.’ 미국에서 ‘영혼의 음악을 빚어내는 동양의 작은 손’이라는 극찬을 듣고 있는 오은경씨, 그녀는 10년만에 장애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이 땅을 밟았습니다. 정다운 고국 땅에 입맞추며 그녀가 한 첫 번째 귀국 소감은 간단했다. “제 존재가 다른 맹인들에게 작은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맹인들이 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쟤는 특수한 재능이 있으니까 합니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은경이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래요. 제가 잘 치면 얼마나 잘 치겠어요.”
삶의 시각을 바꾸는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신발을 만드는 회사에서 두 직원을 아프리카로 시장 조사차 파견했는데, 가서 보니 원주민은 모두가 맨발입니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시장 개척 여부를 판단해서 본사로 전보를 쳤습니다. 한 사람의 전보는 이러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신발을 신은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음. 그들은 신발이 무엇인지조차 모름. 따라서 시장 개척의 여지는 전혀 없음.’또 한 사람의 전보는 달랐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신발을 신은 사람이 아직 한 사람도 없음. 그러므로 신발을 팔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함.’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능성을 발견하고 일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사람이 언제나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의 시선을 부정적인 방향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봅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많은 일들이 그 앞에 놓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나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두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의 시각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세 종류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앞을 못보는 사람으로, 우리는 그들을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의 결핍 상태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음악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악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영어권에 사는 사람이 불어는 모르는 것도 이 경우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린 아기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개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유대인의 선생으로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영적인 소경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은 유대인을 역시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의 참뜻과 영적인 세계를 모른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 제가 예수님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할 테니까, 각자 답을 맞춰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도 흔했습니다. 아버지 이름은?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자란 곳, 또는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공생애 시작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결혼했을까요? ‘아닙니다.’십자가 처형을 당한 나이는? ‘서른세 살입니다.’예수님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유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복음서가 신약성경에 몇 권이나 될까요? ‘4권’입니다. 4권의 특징이 각각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독자는 누구일까요?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의 율법이나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유대의 역사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 특징이 오늘 설교 본문으로 삼은 마 2장에서 두드러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세주 예수님을 탄생시키신 것은 사람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 같은 죄인 위하여 보내 주셨으니, 정말 선물 치고 이런 선물은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선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충동에 이끌려, 또는 마지못할 사정이 생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라면, 아마도 그 의미는 반감, 반의 반감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럴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을 보내 주셨을 뿐 아니라 최장의 준비를 거쳐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성경 말씀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은 실로 오래 전부터, 이미 창세기 때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이후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곳곳에서 실로 자세하고도 빠짐없이 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메시야 강림이 결코 우연의 결과도 아니며 하나님의 즉흥적인 기분에 이끌려서 행하신 일도 결코 아닌 것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사건이 기록될 때에도, 바로 이 사실이 누차 강조되고 있습니다. 1:22절에서 요셉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계시될 때부터 이미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 2:13-23절에서도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는 구절로 종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생애 중 어린아이 때 아주 특별한 사건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미리 예언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실 것이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13-15절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동방박사들이 자기에게 돌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아기의 소재를 알려 주면, 당장 잡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던 헤롯은, 닭 쫓던 개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 박사들이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헤롯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귀국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노기등등해진 헤롯이 어떻게 하면 그 아기를 죽일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던 중, 하나님께서는 미리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사전 경고해 주면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있으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여기 13, 14절, 그리고 20, 21절에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라고 아기 예수님을 어머니 마리아 앞에 기록해 놓은 것은, 그 아기가 보통 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요셉은 그 말씀대로 즉시 애굽으로 온 가족을 피신시켰습니다. 당시 애굽의 큰 도시들에는 의례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구역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애굽에 가서 산다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미 한인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의 LA에 우리나라 사람이 이민가서 살게 될 때, 그리 큰 불편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 가신 이 사건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과 밀접하게 상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 야곱의 가족들이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서 또 다른 요셉의 보호를 받았던 것처럼, 여기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부친인 요셉의 보호를 받으면서 애굽에 피신하셨습니다. 그 야곱의 자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백 여년 후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시켜 주셨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나중에 애굽을 떠나 유대 땅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사건은, 예수님의 애굽 피신에 대한 예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그 사실, 예수님께서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실 때 다시 나왔던 것과 똑같은 일을 겪게 되실 것을 두고,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으로, 호세아 11:1절에 이미 예언을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 마태는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바로 그 사실 ‘주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것이 바로 예수님의 애굽 피신을 통하여 정확하게 성취되었음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함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해야 합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쓴 존 번연은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갇힌 존 번연은 감옥에서도 너무나 경건하여 간수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간수가 그에게 와서 “시간을 드릴 테니 잠시 나가서 사모님과 아이들을 보고 다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면서 가옥에서 내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존 번연 목사님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내키지 않은 그는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간수에게 “당신은 허락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아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존 번연 목사님이 감옥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왕이 보낸 사신이 감옥을 살피러 왔습니다. 이때 가장 놀란 사람은 간수였습니다. 왕이 보낸 사신이 돌아간 다음 간수가 존 번연 목사님에게 와서 “목사님, 이제 제가 목사님께 다녀오시라 마라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언제든지 다녀오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잠시 밖으로 나왔으니 얼마나 집으로 가고 싶겠으며 가족들을 보고 싶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았으면 성령의 감동이 있어도 감동보다는 감정을 따라 갔을 텐데, 존 번연 목사님은 감정보다 감동에 순종해서 위험한 순간을 넘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헤롯의 유아 대학살 사건이 있을 것이 또한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16-18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못 알았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세속적인 왕권을 차지하러 오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런 끔찍한 살인극까지 벌이면서, 어찌하든지 자기 왕위를 빼앗을 정적을 일찌감치 제거해 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 헤롯이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는 말은, 이 동방 박사의 방문이 예수님의 탄생 직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음을 시사해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만약 동방 박사의 방문이 예수님 탄생 직후였다면, 신생아들만 살해해도 충분할 것이라는 사실은, 헤롯의 머리로도 간단히 계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의 여행은, 당시로서는 최소한 몇 개월 걸리는 길이었으므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탄생과 동시에 별을 보았다 해도, 바로 그날 밤에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도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11절의 ‘집에 들어가’라는 말씀 역시, 그런 추론을 뒷받침해 주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 탄생 시에는 마구간에 계셨지, 어떤 ‘집’에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아마도 예수님 탄생 후 최소한 몇 개월이 지난 다음에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과 함께 다시 베들레헴에 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각에 그 장소로 동방박사들을 인도해 주셔서 만나게 해 주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당시 베들레헴은 작은 동네였고,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약 이삼십 명 정도였을 것이지만, 이 정도의 아기들을 죽이는 것은 헤롯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이전에 유대를 다스렸던 왕가의 혈족을 완전히 단절시켰고, 산헤드린 공회원의 반 이상을 처형했으며, 삼백 명의 궁중 관리들을 죽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아내 미리암, 그의 장모 알렉산드라, 그리고 그의 아들 중 세 명을 처형시켰던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이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을 비꼬아서 말하기를,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라고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헬라어로는 ‘돼지(후스)’라는 말과 ‘아들(휘오스)’이란 말이 발음도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그의 아들 되는 것보다는 더 생명 보존하기 쉽다는 뜻의 익살이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그런 악명 높은 헤롯의 명령에 의하여, 베들레헴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은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식이 눈앞에서, 군인들의 칼날에 죽임당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던 여인들의 슬픔과 통곡이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충격적인 비극의 사건을 두고, 본문은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31:15절에 기록된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였으며 바로 베들레헴 근처에 장사되었던 여인입니다. 여기서는 물론 그 죽은 라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여인들을 총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라마’에서 크게 통곡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 갈 때, ‘라마’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장면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애통의 눈물을 흘렸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원수의 손에 붙잡혀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곧 위로하려야 위로할 길이 없는 극심한 비극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구원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갈 때 겪었던 그 애통 역시 예수님의 탄생을 그대로 예표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마태는 이 일 역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가 그대로 성취된 것이라고 확증했던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성장하실 것이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19-23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역사가들은 성경의 헤롯왕을 ‘헤롯대왕’이라고 부릅니다. 대왕이란 명칭은 아무에게나 붙여주지 않습니다. 조선의 왕들 중에 대왕이란 명칭을 붙여주는 왕은 “세종대왕”정도일 뿐입니다. 헤롯은 그 업적을 살펴보면 ‘대왕’이란 명칭을 붙여줄만 합니다. 헤롯은 본래 유대인이 아닙니다. 에돔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유능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로마 황제의 환심을 듬뿍 사서 유대왕이 되었습니다. 헤롯은 일반 유대인들에게는 미움을 받았으나, 정치는 잘하여 유대나라를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주전 25년에 유대나라에 큰 가뭄이 있어서 흉년으로 굶어죽을 형편입니다. 그때 헤롯은 자신의 금접시를 녹여서 금모으기를 해서, 재빨리 애굽으로부터 곡물을 대량 수입하여 흉년의 위기를 잘 넘긴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헤롯은 한마디로 쇼맨십에도 능하고 통치에도 유능한 왕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에 가보니 2000년 전 헤롯이 만들어 놓은 유적들이 많았습니다. 헤롯은 당시 항구도 만들고, 도로도 정비하고, 상수도 시설도 많이 정비하였습니다. 2000년 전의 상수도 개념은 정말 최첨단 복지 시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성전도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헤롯을 한편으로 싫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지지하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출신을 보면 미운데, 업적을 보면 유능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왕이 바로 헤롯인 것입니다.
여기 ‘헤롯’은 소위 ‘헤롯대왕’이 죽게 되자 천사는 요셉더러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해 주었습니다.하지만 요셉은 유대 지방에 새 왕이 된 ‘아켈라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무서웠습니다. 헤롯은 죽으면서 자기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방을 다스리게 된 아들이 바로 아켈라오였는데, 그도 역시 포악한 왕이어서 즉위하자말자 삼천 명의 유력한 인사들을 살해하면서 또 다른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유대 땅으로 돌아가기를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천사는 그런 요셉에게 이스라엘 땅 중에서도 유대가 아닌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로 가서 살도록 지시했고, 그래서 결국에는 베들레헴 대신 나사렛이 예수님의 대부분의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당시 조금 전에 말씀드린 ‘헤롯대왕’의 세 아들들 중에 하나인 ‘헤롯 안디바’가 물려받아 다스리게 되었던, 갈릴리 지방에 속한 가난하고 아주 작은 촌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당시 국제무역을 하던 대상들이 다니던 길목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자연히 나사렛 사람들은 세상 물정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빠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고, 어떤 새롭고도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전통적 유대인들은 나사렛 사람들에 대하여 반감 내지는 멸시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나다나엘이 처음에 예수님을 소개 받을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런 감정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사렛 사람이란 가난하고 작은 촌 곧 ‘비천함’과,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이 촌뜨기로 여기고 깔보던 갈릴리 사람 중에서도 특히 더욱 혐오를 받은 곳 곧 ‘멸시’의 대명사이기도 했었습니다.
본문 23절에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부분은 사실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곧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것은 어느 특정 선지자가 한 말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이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는 낮고 천한 몸으로 탄생하실 것이며, 또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들을 총칭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 성장기를 나사렛에서 보내시게 되었던 사실을 두고도, 역시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시는 방법 중에 가장 유용한 방법 중 하나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캄캄한 밤길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습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보화가 가득합니다. 인류 역사에 공헌을 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 속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비도 마티’라는 스페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논문준비를 하려고 도서관에 가서 ‘히에로’라는 별로 유명하지 못한 18세기의 스페인 철학자의 논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얄팍한 히에로의 논문집을 찾았습니다. 그는 논문을 몇 장을 넘기다가 종이쪽지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종이쪽지는 저자인 ‘히에로’의 유언장입니다. 이미 색이 바란 그 유언장에는 “이 책을 처음 찾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유언장에 기재된 재산을 주겠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유언장으로 재판을 해서 25만 달러(약 3억 원 가량)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그 논문 속에 그런 유언장이 숨겨져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만약 그 논문 속에 유언장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람들은 서로 그 논문을 차지하려고 싸웠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함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숨겨진 보물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히에로의 논문 속에 숨겨진 25만 달러의 돈 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으므로, 성경 속에 감춰진 온갖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은 본문에서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는 말들과 ‘이루려 하심이라, 이루어졌느니라’라는 말들이 나타내듯이, 구약 곳곳에 이미 예표되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계획하셨던 일이었고, 그 계획을 미리 예언해 주셨던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그 예언해 주신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성취된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어떤 우연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지구상에 끝없이 태어나고 있는 하고많은 신생아들 중에 하나로 어쩌다 태어난 생명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이란 존재는 그저 평범한 한 아기로 태어났다가, 어떤 특수한 성장 환경과 조건에 의하여, 나중에 무슨 성인들 중에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던 성자 하나님이셨으며,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전부터 죄인들에게 메시야, 곧 구세주로 오시기로 예정되어 계셨던 분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그저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다.’는 말씀뿐이었다면, 그저 무슨 우연의 일치라고 하든지, 아니면 대충 아무에게나 맞아 떨어질 수 있는 일반적인 예언이라고 속단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은 너무나도 특별한, 결코 흔하지 않은, 정말 발생하기 드문 일들이었으며, 그것도 세 가지나 되는 사건들이 연이어서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런 특수한 사건들까지 이미 구약 성경에서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으니, 이 메시야의 탄생은 아무리 보아도 우연의 일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하루아침에 급조된 무슨 날치기 선물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화육강생이란 것이 하나님께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포장만 그럴듯하게 씌워서 보내신 것이 절대로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만세 전부터 이미 예비되어 있던, 하나님께서 동원하실 수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능력이 완전히 동원되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던 선물입니다. 구약 성경의 수많은 예언들과 신약의 확증들이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역사상 비교할 대상이 없도록 가장 오래 전부터, 이미 우리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후에, 때를 꼭 맞추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 탄생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정성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우리가 조금도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네비게이션은 우리가 갈 곳을 알려주는 기계입니다. 네비게이션이 있으면 어느 길로 가도 걱정할게 없습니다. 인도하는 대로 순종만하면 됩니다. 인생 네비게이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만 한다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서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귀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가장 큰 선물로, 오래 전부터 준비해서 보내 주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함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절망과 탄식뿐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성령충만하게 하옵소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 같이,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주님의 보호하심을 입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