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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포즈난
베를린과 바르샤바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포즈난은 베를린에서 유로라인 버스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폴란드의 차들은 낮에도 모두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닌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없는 곳도 있다.
포즈난의 구시청이 있는 구도시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지붕이나 벽의 색깔이 매우 아름답다.
구시청 건물의 시계탑에서는 매일 정오가 되면 시계 위의 문을 열고 염소 두 마리가 나와 박치기를 여러 번 한다.
다른 도시에서는 시계탑에서 사람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곳 포즈난에서는 인형이 아닌 염소가 나타나기에 더 특색 있어 보인다.
구도시 주변에는 많은 상점이 있으며 24시간 계속 여는 가게도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폴란드 서부 고도 포즈난 구시가지의 하이라이트는 중세 이래 옛 시청이 있었던 마켓광장이다.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과 동유럽,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유서 깊은 도시의 구 시청 광장은 대개 마켓광장이라고 부른다. 시청뿐 아니라 교구청 교회, 우체국과 가게들이 모여 있는 구시가지 중심이어서 그 도시의 대표적 관광지인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마켓 스퀘어(market square), 독일어로는 마르크트플라츠(marktplatz)인데 시장 광장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예전 도시 중심 광장에 시장이 섰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포즈난 마켓광장 이름은 조금 달라서 '구 광장'을 뜻하는 '스타리 리넥(stary rynek)'이다.
광장가에 고급스런 레스토랑부터 눈에 든다. 북서쪽에서 들어오면 광장 중심 옛 시청 건물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시청과 중심 상가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친 건물들이 사방 140m의 정방형 광장을 이룬다.
13세기에 포즈난의 중심 광장이 됐고 16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이자 조각가 조반니 바티스타 디 콰드로가 시청을 비롯한 건물들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신축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이후 화재와 태풍으로 파괴돼 몇 차례 새로 세웠지만 1945년 2차 대전 말기 퇴각하던 나치가 포즈난을 최후 저지선으로 정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와중에 광장과 건물의 60%가 파괴된다. 그래서 지금 시청과 대부분 건물은 전후 9년 공사 끝에 1954년 새로 지었다.
고풍스런 파스텔톤 건물들에 눈과 마음이 화사해진다. 광장의 서쪽 테두리를 이루는 건물들이다. 대부분 건물이 2차 대전 후 새로 지은 것들이지만 사진 오른쪽 끝 고딕 건물은 콰드로가 설계한 16세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59년 건물 전면에 그린 그림에서 말탄 인물이 디 콰드로다. 지금은 라친스키도서관의 분관이 돼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문학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시엔키에비치(1846~1916)는 영화로 잘 알려진 소설 '쿼바디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의 문호이다.
분수대 동상은 전쟁과 파멸의 군신(軍神) 아레스(로마신화의 마르스)다.
올림푸스의 12신 중의 하나로 아프로디테(비너스)가 반해 불륜에 빠지는 이야기를 화가 조각가들이 즐겨 작품 소재로 썼다.
마켓광장엔 모두 네 개의 분수대가 있는데 이 마르스 동상을 비롯한 세 개는 1615년 크리스토퍼 레들라가 조각해 세웠다가 파괴돼 지금 것은 2005년 라팔 노팍 작품이다. 분수대들은 19세기 말까지 포즈난 시민들의 식수원으로 썼다고 한다.
'페르세포네의 납치' 석상은 시청 오른쪽 앞에 서 있다.
마켓광장에 있는 네 분수대 조각상 가운데 가장 늦은 1766년 조각가 아우구스티네 스웹스가 만든 바로크 스타일 작품이다.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로 붙잡혀 가자 어머니인 곡식과 땅의 여신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헤매느라 땅과 곡식을 돌보지 않아 온 대지가 불모의 땅이 돼버린다. 납치극을 못 본 체하던 제우스가 데메테르를 달래면서 페르세포네가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면 구해낼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먹이면서 페르세포네는 지하에 발이 묶인 채 하데스의 아내가 된다.
데메테르는 더욱 낙심해 일손을 놓아버리고 제우스는 대지를 되살리기 위해
페르세포네가 일년의 3분의 1은 지하세계에, 3분의 2는 어머니 품에서 지내게 한다. 이때부터 페르세포네가 저승에 머무는 동안엔 땅에 생기가 사라지고 곡식도 자라지 않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면 초목과 곡식이 되살아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4계절이 생겼다는 얘기이다.
시청 앞 왼쪽에는 기다란 기둥 포함해 높이가 5m나 되는 동상이 서 있다.
저 기둥에 범죄자를 묶어놓고 매를 때리고 낙인을 찍고 귀나 손가락과 손을 자르는 형벌을 줬던 pillory 또는 pranger다. 1535년에 세웠다고 하니 르네상스식 시청보다 10여년 앞섰다.
칼을 들고 선 동상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기사 차림을 하고서 법의 엄정함을 상징하는 형 집행자이다.
구 시청 왼쪽에 컬러풀한 상가가 길게 붙어 서 있다.
지금은 주로 기념품점이 들어 있지만 16세기 중반부터 청어를 비롯한 생선과 양초, 횃불, 소금을 팔던 상가라고 한다.
광장 동남쪽에 서 있는 석상은 체코의 가톨릭 순교자 네포무크의 성 요한상이다.
자유의 광장은 18세기 말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2세를 기념해 '빌헬름광장'으로 만들었다가 1차 대전 후 폴란드가 나라를 되찾은 뒤 빌헬름3세 동상을 비롯한 프로이센 기념물을 치우고 '자유의 광장'이 됐다.
2차 대전 때 서부 독일을 점령한 나치가 다시 '빌헬름광장'이라고 불렀고 전쟁 후 또 '자유의 광장'이 되는 굴곡진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자유광장 복판에 독특하게 생긴 분수대가 있다.
2012년에 세운 '자유의 분수'다.
라팔이라는 폴란드 건축가 겸 조각가가 돛을 상징하는 높이 9m 날개를 양쪽으로 세우고 양면 바깥쪽에서 물이 뿜어 나오게 만들었다. LED 등을 달아 밤에는 색색 조명을 밝힌다고 한다. 사람들이 분수대 사이를 걸어 지나가게 했다.
분수 너머 광장 북동쪽에 코린트식 기둥을 세운 궁전 같은 건물이 보인다.
전면 구조를 베르사이유궁 본떴다는 라친스키 도서관이다.
서부 폴란드 명문가 대지주이자 계몽교육자, 역사저술가인 라친스키 백작 (1786~1845)이 1828년 제안하고 돈을 대 지었다.
그는 프로이센 치하에서 포즈난 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식민통치에 협조했지만 프러시아 황제를 설득해 폴란드어 사용 허가를 얻어내고 포즈난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여러 도시 체계를 구축했으며 아담 미츠키에비치를 비롯한 문인 학자들을 후원했기에 지금까지 도서관 이름으로 남아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 도서관도 프로이센 당국에겐 내 저택으로 짓겠다고 한 뒤 폴란드 책을 감춰놓고 빌려준 폴란드어 보급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앞에 여인 좌상이 있다.
좌대 아래 사자 입에서 물이 나오는 간이 분수대를 겸하고 있다.
여인은 그리스 건강의 여신 히게아다. '위생'이라는 영어 hygiene(하이진)이 이 여신 이름에서 나왔다. 풍요와 다산과 영생을 상징하는 뱀이 여신이 쥔 접시를 핥고 있다. 의대와 간호대들이 흔히 학교 엠블렘으로 쓰는 상징이다.
라친스키는 1831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보건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돈을 내놓았고 포즈난 최초의 상수도도 세우는 비용도 댔다.
포즈난 사람들이 두 업적을 기려 1941년 세운 것이 이 건강의 여신상이다.
좌대 앞면에 라친스키의 부조상이 붙어 있고 여신의 얼굴은 라친스키 아내 콘스탄체를 본떴다고 한다. 좌대 옆면에 새긴 것은 동상과 분수대를 세운 내력인 듯하다.
광장의 동쪽 끝에 불에 그을린 듯한 사암 건물은 포즈난 국립박물관이다.
1904년 프로이센이 지은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을 독립 후 국립박물관으로 바꿨다. 지금은 소장품들을 분야별로 다른 국립박물관들로 옮기고 그림과 조각 갤러리로 운영한다.
높다란 병사 석상이 서 있다. 등에 소총을 둘러멘 병사가 창으로 말 아래 용을 찌르는 석상이다. 유럽 전역에서 섬기는 로마 기사 출신 성인 성 게오리기우스(성 게오르그, 성 조지)가 악의 화신 용을 무찌르는 조각상을 본떴다. 1차 대전 말기 1918~1919년 포즈난을 중심으로 일어난 폴란드 서부지역 민병대 봉기를 기린다.
민병대들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프로이센 군과 용감하게 맞서 전후 베르사유 조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한 봉기다. 포즈난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긴 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석상 골목 안쪽에 조금 조잡하게 보이는 성이 서 있다.
13세기 왕궁 겸 포즈난을 방어하는 성채였는데 복원 공사 중이다.
'폴란드 극장(Teatr Polski)'이 서 있다. 나라 잃고 포즈난을 비롯한 서부 폴란드가 프로이센 치하에 있던 1875년 세웠지만 민족 암흑기에도 폴란드어로 폴란드문화와 폴란드인 캐릭터를 구현하는 작품을 올렸다. 그래서 1차 대전 후 나라를 되찾은 뒤 '폴란드 극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차 대전 때 절반이 부서지자 시민들이 십시일반 복구비를 모아 세웠다.
시민의 극장이라는 자부심이 3층 창문 위에 새긴 글귀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Narod sobie)'에 깃들어 있다.
아담 미츠키에비치(1798~1855)
그는 나라 잃은 암흑기에 태어나 대학 다닐 때 학생 비밀결사를 만들어 애국적 혁명운동에 나선다.
1822년 첫 시집 '발라드와 로맨스'는 새로운 낭만주의의 선구가 됐고
'청춘에의 송시'는 자유와 박애와 진보를 향한 폴란드 청년들의 투쟁가가 됐다.
그는 학생 비밀결사를 조직한 혐의로 체포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추방된 뒤
모스크바에서 푸슈킨과 교유했다.
1830년 바르사뱌 독립 봉기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로 망명해
1834년 걸작 대서사시 '판 타데우시'를 썼다.
파리의 또 다른 폴란드 망명객 쇼팽이 이 서사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네 곡의 발라드도 불후의 명곡으로 남아 있다.
1848년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도우려고 로마에서 '폴란드 군단'을 조직했다가 진압됐고
1855년 크림전쟁이 일어나자 이스탄불로 가서 폴란드 의용군을 조직하려다 콜레라로 숨진다.
그는 불후의 시인일 뿐 아니라 말과 문학과 행동이 일치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여서
폴란드 국민의 열렬한 사랑과 숭배를 받는다.
폴란드가 나라를 홍보하는 해외 문화원 이름도 '미츠키에비치 인스티튜트'이다.
아담 미츠키에비치 공원
오른쪽 뒤로 보이는 기념비는 포즈난 사람들이 현대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1956년 봉기를 기린다. 시민들이 벌였던 유혈 반공 시위, 포즈난 봉기이다.
1956년 6월 기관차 공장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를 요구한 시위가 동맹 파업으로 이어지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로 번진다.
공산당사와 비밀경찰 본부가 습격당하자 군대가 나서 발포한다.
이틀 사이 열세 살 아이를 비롯해 공식 사망자만 67명에 이르렀다.
폴란드 공산 정부는 보도를 통제해 포즈난 바깥으로 시위가 번지지 않게 했지만
봉기를 계기로 그 해 10월 공산당 지도부가 바뀌고 신정권이 국민에게 일정한 범위의 언론 자유화와 소비 물자 공급 개선, 외국 여행 자유화를 약속하는 '10월의 봄'을 이끌어낸다.
기념비는 여전히 공산 치하였던 1981년에 세웠다.
그만큼 폴란드인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얘기다.
결국 폴란드는 동구 위성국 가운데 가장 먼저 민주화를 이뤄 공산권 몰락의 물꼬를 튼다.
오른쪽에 붙은 연도들은 1956년 봉기 이후 시위들이 일어난 해를 가리킨다.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 여류 설치미술가
막달레나 아바카로비치(1930~)의 작품이 늘어서 있다.
광장의 남동쪽엔 또 하나 신화를 소재로 삼은 분수대 동상이 있다.
태양의 신 아폴론(로마신화 아폴로)이다. 하프 비슷한 리라라는 악기를 켜고 있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선물한 악기인데 음악의 천재인 아들 오르페우스에게 물려준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찾으려고 저승으로 가 지하의 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부부 앞에서 리라를 연주해 감동시키고 아내를 데리고 가라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지옥문을 나갈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어기고 돌아보는 바람에 아내가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간다. 실의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연주하며 떠돌다 죽고 리라는 주인을 잃고도 계속 슬픈 음악을 연주하다 하늘에 올라가 별자리가 됐다고 한다. 거문고자리다.
종탑과 시계 사이 쇠로 만든 작은 문.
정오가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구시청 앞에 모여들어 고개 들어 그 문을 쳐다봅니다. 정각 열두 시에 문이 열리고 염소 한 쌍이 나온다.
앞으로 몸을 쑥 내밀더니 서로 안쪽으로 몸을 돌리고 마주본 다음 박치기를 한다. 모두 열두 차례 연달아 박치기를 한 뒤 문 뒤로 퇴장한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 마켓광장 구시청 시계탑엔 닭이나 성인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박치기 하는 염소는 포즈난이 유일하다.
16세기 중반 시청을 새로 짓고 종탑이 서자 요리사가 완공 파티 음식으로 굽던 양고기를 태워 먹었다. 요리사는 급한대로 염소 두 마리를 훔쳐와 구우려다 놓치고 만다. 염소는 종탑으로 도망쳐 서로 박치기를 하며 싸우다 포즈난 시청의 명물이 됐다는 얘기이다. 전설과 달리 염소상은 종탑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자갈 깔린 포도. 게스트하우스와 카페가 있는 정취 어린 뒷골목에 포즈난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로만 고딕 성당으로는 폴란드에서도 최고로 꼽힌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기 직전 사진 왼쪽 골목 모퉁이의 이층 모서리에 조각상 하나가 서 있다. 노란 건물 빛깔에 맞춰 조각상도 황금빛으로 꾸몄다.
가톨릭 성인상인 듯한데 천사가 받치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물건도 무엇인지 궁금하다.
유럽 도시에 가면 그 도시나 마을, 성당을 지켜주는 수호(주보)성인이 있는데 아마도 포즈난 수호 성인이 아닌가 한다. 거리에 서 있는 수호 성인은 대개 기념비나 탑을 세워 모시던데 이곳은 독특하게 동네 건물 모퉁이에 모셨다.
파사드가 하얀 빛, 밝은 고동색이 어울려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성 스타니슬라우스 성당이다. 1649년 예수회 성당으로 첫 삽을 뜬 뒤 몇 차례 공사가 중단되다 이어지다 하면서 1701년 완공해 봉헌됐다.
아름다운 파사드는 첫 건축가 바르톨로뮤 와소프스키가 죽은 뒤 1697~1701년 공사를 이어받은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니 카테나치의 작품이다.
예수회는 1773년 가톨릭 군주들 압력을 못 이긴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명령에 따라 해산된다. 그러면서 이 성당은 포즈난 교구 성당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파사드 맨 위 천사 부조상에 새겨진 IHS는 'Iesus Hominium Salvator(인류의 구원자 예수)'라는 라틴어 구절이다.
정문 위 파사드 중간에 선 조각상은 스페인 수도사로 파리에서 공부하다 가톨릭 수도회 예수회를 세운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1491~1556)이다.
예수회 초대 총장에 선출돼 회헌을 만들고 기반을 다졌다. 종교개혁으로 동요하던 가톨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고 1622년 시성됐다.
예수회는 회원 각자 인격을 완성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기도와 고행, 특히 봉사와 교육 사업을 중시했다. 18세기에 해산된 지 40년 만에 재건돼 제3세계 선교와 교육에 힘써 우리나라에선 서강대를 세웠다. 식민 착취에 신음하던 중남미 원주민을 보살피던 영화 '미션'의 수도사들도 예수회 소속이었다.
정문 위 아치에 새긴 라틴어는 '신의 집, 천국의 문'이라는 뜻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길이 55m 너비 34m 높이 27m의 주 예배당과 그 끝에 선 중앙 제단을 만난다. 성당 이름이자 이 성당이 모시는 성 니슬라우스 (1038~1079/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인으로는 처음 시성된 성인이다.
스타니슬라우스는 남부 옛 수도 크라코프 태생으로 포즈난 인근 폴란드 왕조 발상지 그니에즈노에서 서품받는다. 1072년 크라쿠프 주교가 된 뒤 난폭한 국왕 볼레수아프 2세의 잔학상과 불의를 고발하고 왕을 파문해 대성당 출입을 막는다. 볼레수아프 2세는 크라코프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스타니슬라우스를 끌어내 살해한다. 이후 폴란드인들은 그를 '주교-순교자 스타니슬라우스'라고 부르며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받든다.
제단 가운데 붙은 1756년 그림은 스타니슬라우스가 하나님에게 사흘을 간구한 끝에 죽은 피에트로핀을 무덤에서 되살려내는 장면이다. 피에트로핀은 볼레수아프 3세 앞에 나가 증언함으로써 볼레수아프가 스타니슬라우스에게 한 모함을 풀어준다.
좌우에 선 조각상 중에 왼쪽이 '주교 순교자 스타니슬라우스'이고 오른쪽은 이름이 같은 성인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1550~1568)이다.
폴란드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 태어나 열일곱 살에 비엔나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환시를 보는 이적을 경험했고 예수회 수도사가 되려 했다가 집안에서 반대하자 몰래 빠져나가 600km를 걸어간 끝에 예수회에서 고행 수련하다 선종했다고 한다.
주교 스타니슬라우스는 폴란드인의 수호성인이어서 미국 시카고와 뉴욕 일대에 같은 이름의 폴란드계 성당이 많다. 폴란드가 1795년부터 1917년까지 주권을 잃고 국토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삼분당했을 때 미국으로 무더기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지금 폴란드계는 천만명에 이르고 인구의 3.2%를 차지한다.
주 예배당 양쪽에 늘어선 대리석 기둥이 웅장한데 사실은 모조 대리석이라고 한다. 2차 대전 때 성당이 심하게 부서져 전후 새로 지으면서 돈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주두 장식은 화려하다.
중앙 제단 바로 위 천장화는 18세기 폴란드 화가 카롤 당크파르트 작품이다.
그 천장화의 앞쪽 예배공간 위 파스텔톤 돔 천장화는 전후 복구 때인 1949년 스타니수아프 브로블레프스키가 그렸다.
'예수회 어머니들'이라는 라틴어 글귀도 붙어 있다.
예수회 소속 성당이던 게 벌써 240년 전인데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주 예배당 외에 열 개의 작은 예배실들이 있는데 그중 성모자상 아래 푸른 빛 성인의 그림을 모신 예배실이 눈길을 끈다. 3세기 말 결혼 금지령이 내린 로마의 젊은 군인들을 위해 결혼을 주재해 준 죄로 순교한 성 발렌티누스이다.
그래서 그가 순교한 날 2월 14일을 기념하면서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확인하는 날, 발렌타인 데이가 생겼다.
체코에서 발원해 폴란드와 독일을 가로지른 뒤 발트해로 들어가는 오드라강
(오데르강), 그 지류 바르타강이 포즈난 시내를 남북으로 지나가면서 기다란 강 속 섬을 만들었다.
거기 폴란드 최초의 성당이자 건국 초기 역사 현장 성베드로바울 대주교구 성당이 있다. 프랑스 왕국 발상지 파리 시테섬과 거기 들어선 노트르담 성당을 연상시킨다.
포즈난을 대표하는 성당이어서 흔히 포즈난 대성당이라고 부르고 섬 이름도 '성당 섬(오스트루프 툼스키 Ostrów Tumski)이다.
폴란드 건국은 미에슈코 1세가 960년 포즈난 동쪽 50km 그니에즈노에 세운 최초의 왕국 피아스트 왕조 때 이뤄진다. 폴란드 서쪽에는 영원한 앙숙이자 가해자 게르만족이 있어 건국 초기부터 슬라브족 이교도를 개종시킨다는 명분으로 폴란드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미에슈코 1세는 966년 체코 보헤미아왕국 공주를 신부로 맞아들이면서 서둘러 영세를 받고 가톨릭을 들여와 나라의 안정을 꾀한다. 그는 앞서 강으로 에워싸여 자연 요새인 이 섬에 궁을 세웠고 이곳에서 영세 받은 2년 뒤 포즈난 대성당을 짓는다.
성당 앞에 낯익은 분의 동상이 서 있다.
폴란드 사람들이 폴란드가 낳은 존경하는 인물을 꼽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빠지지 않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이다.
카롤 보이티와는 폴란드 남부 고도 크라쿠프 외곽 소도시 바도비체에서 태어나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크라쿠프 명문대 야기엘론스키대를 나왔다. 2차 대전 때 화학공장 노동자로, 채석장 인부로 일하며 공부했고 전후 1946년 사제로 서품된다.
1958년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크라쿠프 부주교가 됐고 결혼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을 쓴 저서 '사랑과 책임'으로 유명해진다. 1963년 크라쿠프 대주교, 1967년 추기경을 거쳐 1978년 제 264대 교황으로 선출된다.
아드리안 6세 이후 455년 만에 첫 비(非)이탈리아인이자 첫 슬라브계 교황이어서 세계가 놀란다. 그는 가톨릭 내 교회개혁에 힘썼고 받아주는 나라는 어디든 방문에 세계 가톨릭 집회에 가장 많이 참석하는 기록을 세운다. 우리나라에도 1984년과 89년 두 차례 왔다.
그가 폴란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각별한 이유는 폴란드의 민주화를 뒷받침하는 큰 힘이 돼줬다는 것이다. 1979년 이래 공산 치하에서만 세 차례 고국을 방문해 폴란드가 동구권에서 맨 처음 공산 체제를 무너뜨리도록 민주화의 열망을 심었다.
14세기에 처음 만든 이후 위에 왕관이 새로 얹혔을 뿐 원래 형태를 거의 유지해 오고 있다.
고도 포즈난을 상징하는 성채 위에 천국의 열쇠를 든 베드로와 칼은 든 바울이 서 있다. 두 사도는 포즈난대성당의 주보성인이다. 성문에 교차시킨 열쇠는 지방 정부를, 빨간 방패 속 왕관 쓴 흰 독수리는 13세기 말 포즈난을 수도로 정한 폴란드 왕 프르제미스와프 2세의 문장이다.
포즈난대성당의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건국 왕 미에슈코 1세와 용맹왕 볼레스와프 1세 부자를 비롯해 여덟 왕이 묻혀 있다는 점이다. 여러 차례 다시 지으면서 로마네스크, 바로크, 네오클라식 양식을 오가다가 2차 대전 말기 3분의 2가 부서져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고딕 양식이 됐다.
육중한 철문 손잡이가 물고기 모양이다. 이어오병의 기적을 뜻하는 듯.
정문에 서면 정면으로 높다란 중앙 제단이 보인다.
이 주 예배실을 포함해 12개의 크고 작은 예배실을 거느리고 있다.
황금빛 제단 벽은 여러 구획으로 나눈 그림이나 조각 작품 '폴립틱'으로 돼 있다.
14~15세기 작품이라는데 중앙 가운데 모신 성모를 양쪽 14명에 이르는 여자 성인들이 호위하고 있다. 아래쪽에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묘사했다.
성당섬을 이루는 동쪽 지류 시비나(Cybina)강을 건너간다. 다리 이름은 조르단이다. 교황청이 미에슈코 1세에게 영세해줄 사제로 파견한 첫 성직자의 이름을 땄다. 조르단은 영세 2년 뒤 포즈난 성당이 서면서 첫 폴란드 주교가 된다.
폴란드 포즈난, 잃어버린 영원한 제국의 수도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멋을 갖고 있는 구시가지 광장
우리에게 아주 낯선 도시 포즈난은 폴란드의 가장 오래된 도시로 늘 '최초'와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968년에 지어진 폴란드 최초의 대성당과 폴란드에서 최고로 많은 미술품을 간직한 국립 미술관 그리고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 대표적인 예다.
폴란드가 낳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고향이자 교황 바오로 2세가 대주교로 있었던 포즈난은 폴란드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의 도시다. 9세기말 작은 요새에서 시작된 포즈난은 바르타 강과 치비나 강이 만나는 V자형 지점에서 처음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정확히 말해 968년 미에스코 1세 때 폴란드 왕국은 두 개 강으로 둘러싸인 아주 작은 섬에서 시작되었다.
포즈난은 체코가 침략해 수도를 크라쿠프로 옮기기 전까지 70년간 왕국의 수도였고, 예부터 바르샤바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동서 교역의 중계상업도시로 성장했다. 13세기 들어 포즈난이 상업도시로 급성장하면서 도시의 인구가 팽창하자 지금의 구시청사와 중앙 광장이 있는 구시가지로 도시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포즈난의 상징인 대성당은 바르타 강과 치비나 강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해 있고, 도시의 업무를 관장하던 시청사를 비롯한 여러 개의 행정기구들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강 건너편에 세워졌다.
◆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도시
= 독일과 폴란드 양국 간 면세 특혜를 받아 막대한 부를 축적한 포즈난은 15~16세기에 들어 경제ㆍ문화적 성장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화재와 전쟁을 겪으면서 도시는 점차 쇠퇴해갔다. 지금은 폴란드에서 가장 커다란 국제 산업 견본시장이 매년 6월에 개최될 정도로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았고, 독일에 인접해 있어 여느 폴란드의 도시와는 달리 밝고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매년 열리는 국제 박람회와 많은 대학으로 인해 구시가지의 중심 거리인 폴비에스카 거리에는 외국의 비즈니스맨들과 젊은이들이 가득하고, 세계 유명 브랜드의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중앙역에서 볼거리가 모여 있는 구시가지 광장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소요된다.
크라쿠프의 중앙 광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시가지 광장은 아담하면서도 심보르스카의 시처럼 잘 정돈되어 있어 아름답다. 그녀의 언어적 유희를 빌리자면 포즈난의 광장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아름다움은 몇 배의 큰 감동으로 메아리쳐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한다.
가로, 세로 140m의 중앙 광장은 크라쿠프 다음으로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크다. 13세기에 만들어진 광장은 중세시대 시민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다.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이곳에는 포즈난 인근에서 공수된 싱싱한 채소와 치즈, 고기와 과일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농축산물 시장이 열린다. 그래서 과거에는 구시가지 광장을 '중앙시장 광장'이라 불렀다.
만약 포즈난에서 하루 정도 머물게 된다면 아침 일찍 광장에 나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현지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중세 분위기 물씬
= 광장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은 전쟁으로 파괴된 후에 새롭게 개축된 건물들이지만 철저한 고증을 통해 바로크 양식, 르네상스 양식, 고딕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중세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네모난 광장 모서리에는 각기 다른 형상의 분수대가 있는데, 이곳은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젊은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광장 중심에는 중세시대 때부터 1945년까지 도시의 일을 도맡아 해오던 구시청사가 요염한 자태로 서 있다.
구시청사는 1550년 이탈리아 루가노 출신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디 콰드로에 의해 4층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후 전쟁과 화재로 많은 부분이 파손되어 18세기에 높이 61m의 첨탑이 있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증축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1ㆍ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포즈난은 과거의 영화로움을 잃지 않았을 것이고, 건축물 또한 중세 그대로 보존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초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쇼팽도 포즈난을 방문해 중세의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한다. 쇼팽은 포즈난의 왕족 출신인 고르카의 초청으로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그만의 환상적인 피아노 선율로 시민들을 감동시켰다.
그 후 시민들은 쇼팽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구시가지 광장 아래에 '쇼팽 공원'을 만들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이 도시를 좋아했다고 하니 더욱 포즈난이 새롭게 보인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곧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낳는다.
중계무역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중세 때 쇼팽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포즈난에 초청되어 서유럽의 선진 예술을 펼쳤다. 지금은 과거에 화려했던 영화로움은 사라졌지만 이 도시를 영원히 지켜줄 대성당과 바르타 강이 있는 한 결코 포즈난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또한 쇼팽의 음악과 심보르스카의 시가 포즈난을 감싸고 있는 동안 이 도시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비록 수도가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겨가기는 했어도 포즈난은 잃어버린 영원한 제국의 수도로 시민들의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그들과 삶의 궤적을 함께할 것이다.
△가는 길=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경유해 폴란드의 바르샤바나 크라쿠프로 간 다음 기차를 이용하면 포즈난에 갈 수 있다. 바르샤바에서는 기차로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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