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53) 숙종 1
*숙종, 조카의 왕위를 빼앗다.
고려의 제15대 왕 숙종(肅宗)은 1054년 7월28일에 부친 문종과 인예왕후(仁睿王后)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며 무척 아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종이 죽으며 모든 종친과 만조백관이 그에게 갈 줄 알았던 왕위를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숙부의 몸으로 병약하고 나이 어린 조카, 헌종의 왕위를 강탈했다고 하지만, 숙종은 사실 명분상으로는 그다지 꿇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훈요 10조에 따라 형제상속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 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인망이 높은 왕족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빈번했고, 거기다 헌종은 총명은 했으나 어려서부터 소갈증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는지라 병치레가 심해서 과연 국왕 노릇을 제대로 할지가 불투명했던 상태였는데도 자신의 아들인지라 밀어붙인 것이지요.
실제로 왕위를 이어받은 헌종은 1년만에 왕위를 넘기고 얼마 안가 병이 악화되어 죽어 버린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성립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헌종이 조선의 단종의 대선배라면, 숙종은 바로 조선의 세조 수양대군의 대선배이네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숙종과 세조 두 사람의 대선배는 바로 신라에 있습니다. 신라 41대 국왕인 헌덕왕이 바로 그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헌덕왕은 애장왕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고 옥좌에 앉았지만,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선왕 헌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종친들이나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으며, 자신도 능력이 되는 야심가여서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걸, 형인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래저래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고, 어차피 본인이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이 워낙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 할 수도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병석에 누운 11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태후가 대신 수렴첨정을 하지만, 헌종의 병세가 날로 쇠약해져가자, 종친대표 계림공(숙종)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패권 다툼으로 이어지고, 결국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 하면서 게임은 끝이 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군주라고는 하지만 신하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기대한 만큼 여러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화도감을 만들어 화폐인 해동통보를 생산하고, 사찰도 많이 지어 불교를 융성케 했습니다.
숙종이 만든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화폐가 통용된 건 18C경으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불교에 대해서는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고려의 왕가는 대대로 성골 왕족을 중심으로 족내혼이 보편적이었는데, 이는 왕가의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족외혼과 가족윤리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1096년 숙종은 6촌 이내의 근친혼을 금지하는 명을 내립니다. 근친혼을 막은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유교적인 것은 나중 문제였고, 문벌 귀족들의 혼맥의 난맥상을 막기 위한 의도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이나 백성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여, 근친혼을 금하는 중국풍속에 호응도가 별로라서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신하건 백성이건 "그 딴 중국 풍습을 왜 우리한테 강요하나요??"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친혼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현재의 관념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왕조실록(54) 숙종 2
*동요하는 고려사회
숙종은 자신은 왕위를 빼앗다시피 물려받았지만, 그의 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등,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여 귀양을 보내버리고 왕수는 귀양지에서 객사하게 됩니다. 숙종 자신은 조카를 몰아내고 형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기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합니다.
이 때 형제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 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40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보다는 “내 핏줄이다” 인 셈.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왕수가 형제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라도 했던 모양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직접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습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입니다.
그 후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궁을 지으니.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을 당시 도저히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를 폐위시키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점에서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왕 숙종은, 조선의 태종과 세종을 비교하며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려 광종이랑 비교 당하기도 합니다.
비유하지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광종은 피의 개혁을 함으로써 국가 초석의 포석을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정치를 하여 외척이나 신권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사에는 이때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친 경우였습니다.
말년에는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난을 겪기도 하고, 또한 재위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려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었고, 송충이가 들끓어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하는데,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를 두고 왕위찬탈에 대한 천벌이라고 했대나요.
재위 말기, 여진의 침략에 크게 놀란 숙종은 그에 대한 대비를 세우고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여, 서경에 나아가 출정을 준비하려고 동명왕 사당에 참배하던 중에 병을 얻어 개경으로 환궁하다가 왕성 서문인 장평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레 안에서 죽게 됩니다.
사망 당시 52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 후배인 세조와 똑같네요. 재위 년수 10년에 부인 명의왕후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넷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