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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_시즌2]_210~220p_2021년_9월 17일(금)
Let us become the change we seek in the world. 우리 스스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가 되자. - Mahatma Gandhi [번역판_210p,
We have seen how NVC contributes to relationships with friends and family, at work and in the political arena. Its most crucial application, however, may be in the way we treat ourselves. When we are internally violent toward ourselves, it is difficult to be genuinely compassionate toward others. [번역판_211p, 우리는 NVC 가 친구 사이나 가정, 직장,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NVC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방법에 이를 적용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내면에서 스스로에게 폭력적이면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연민을 느끼기 어렵다.
remembering the specialness of what we are 우리가 특별한 존재임을 기억하기
In the play A thousand clowns by Herb gardner, the protagonist(주인공) refuses to release his twelve-year-old nephew to child-welfare authorities, declaring, "I want him to get to know exactly the special thing he is or else he won't notice it when it starts to go. I want him to stay awake. . . I want to be sure he sees all the wild possibilities. ‘허브 가드너’의 연극 일천광대(A thousand clowns) 에 나오는 주인공은 열두 살 된 조카를 아동복지시설에 넘기길 거절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 아이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알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점점 잃어가면서도 잃어버리는 것조차 모를 테니까요. 나는 이 아이가 깨어 있으면서...이 모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가능성을 보기 원합니다.
I want him to know it's worth all the trouble just to give the world a little goosing when you get the chance. And I want him to know the subtle, sneaky, important reason why he was born a human being and not a chair."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이 세상을 살짝 꼬집어서 깨워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이 아이가 알기 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낱 의자가 아니라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그 미묘하고 신비스러우면서 중요한 이유를 알기 원합니다.
I am gravely concerned that many of us have lost awareness of "the special thing" we are; we have forgotten the "subtle, sneaky, important reason" the uncle so passionately wanted his nephew to know.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잊어가고 있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연극 속의 삼촌이 조카가 알게 되기를 그토록 바랐던 이 ‘미묘하고 신비스러우면서 중요한 이유’를 잊어가고 있다.
When critical self-concepts prevent us from seeing the beauty in ourselves, we lost connection with the divine energy that is our source. Conditioned to view ourselves as objects - objects full of shortcomings - is it any wonder that many of us end up relating violently to ourselves. [번역판_212p, 자신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면 자신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어 삶의 원천인 신성한 에너지와의 연결을 잃게 된다. 스스로를 대상으로-그것도 결점투성이인 대상으로-보도록 훈련받아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We use NVC to evaluate ourselves in ways that engender growth rather than self-hatred. NVC를 활용하여 자기 혐오가 아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본다.
An important area where this violence can be replaced with compassion is in our moment-to-moment evaluation of ourselves. Since we want whatever we do to lead to the enrichment of life, it is critical to know how to evaluate events and conditions in ways that help us learn and make ongoing that serve us. Unfortunately, the way we've been trained to evaluate ourselves often promotes more self-hatred than learning. 자신에 대한 이러한 폭력을 연민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회는 바로 우리가 자신을 평가하는 매 순간 순간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 상황과 조건들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향으로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배우기보다는 자기혐오를 하는 쪽으로 자신을 평가받도록 훈련받아왔다.
Evaluating Ourselves when we've been less than perfect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자신 평가하기
In a routine workshop activity, I ask participants to recall a recent occasion when they did something they wish they hadn't. 교육을 할 때 나는 참가자들에게, 요즘 한 일 중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 하는 일이 있으면 떠올려보라고 부탁한다.
We then look at how they spoke to themselves immediately after having made what is referred in common language as a "mistake" or "error." Typical statements were: "That was dumb!", "How could you do such a stupid thing?" "What's wrong with you?" "You're always messing up!" "That's selfish!" These speakers had been taught to judge themselves in ways that imply that what they did was wrong or bad; their self-admonishment implicitly assumes that they deserve to suffer for what they've done. 그럴 때 자주 나오는 말에는 ‘이 바보’,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또 저질렀니?’, ‘너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네가 하는 일이 항상 그렇지 뭐.’, ‘넌 너무 이기적이야.’ 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거나 나쁘다는 식으로 [번역판_213p, 판단하도록 교육받아왔다. 이러한 자책 속에는 그로 인해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It is tragic that so many of us get enmeshed in self-hatred rather than benefit from our mistakes, which show us our limitations and guide us towards growth. Even when we sometimes do "learn a lesson" from mistakes for which we judge ourselves harshly, I worry about the nature of the energy behind that kind of change and learning. I'd like change to be stimulated by a clear desire to enrich life for ourselves or for others rather than by destructive energies such as shame or guilt.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기보다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우리가 실수를 했을 때 스스로를 가혹하게 비판하여 ‘교훈을 얻었다’고 하는 때에도, 나는 그런 교훈이나 변화 뒤에 있는 에너지의 성격이 걱정스럽다. 나는 이런 변화가 수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파괴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싶은 분명하나 욕구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Avoid shoulding yourself! 자신에게 ‘해야만 한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If the way we evaluate ourselves leads us to feel shame, and we consequently change our behavior, we are allowing our growing and learning to be guided by self-hatred. 우리가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수치심이 생겨 그 결과로 행동을 바꾸게 된다면, 자기혐오가 우리의 성장과 배움을 지배하게 된다.
Shame is a form of self-hatred, and actions taken in reaction to shame are not free and joyful acts. Even if our intention is to behave with more kindness and sensitivity, 수치심은 자기혐오의 한 형태이고 거기서 나온 행동은 자유롭지도 즐겁지도 않다.
if people sense shame or guilt behind our actions, they are less likely to appreciate what we do than if we are motivated purely by the human desire to contribute to life. 우리가 더 많은 친절과 배려로 대하려 할 때도, 그 행동들이 수치심이나 죄책감에서 나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이 진정으로 삶에 기여하고 싶은 순수한 욕구에서 나왔을 때만큼 고마움이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In our language, there is a word with enormous power to create shame and guilt. This is violent word, which we commonly use to evaluate ourselves, is so deeply ingrained in our consciousness that many of us would have trouble imagining how to live without it. It is the word ‘should’, as in "I should have known better" or "I shouldn't have done that."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키는 엄청난 힘을 가진 말이 있다.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흔히 쓰는 이 단어는 우리 의식 속에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이 말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를 정도이다. 그것은 ‘해야만 한다.’, ‘좀 더 잘 생각했어야만 했어’ 라든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만 했어’ 등으로 쓰이는 말이다.
Most of the time when we use this word with ourselves, we resit learning, because ‘should’ implies that there is no choice. Human beings, when hearing any kind of demand, tend to resist because it threatens our autonomy-our strong need for choice. We have this reaction to tyranny even when it's internal tranny in the form of a ‘should’. 우리가 이런 말을 쓰게 되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잃게 된다. [번역판_214p, 왜냐하면 ‘~해야만 한다.’ 라는 말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강요를 받으면 저항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때 자율성, 곧 선택의 자유라는 아주 강한 욕구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면의 소리라 할지라도 ‘~해야만 한다.’ 식의 폭력에는 그런 저항이 생긴다.
A similar expression of internal demand occurs in the following self-evaluation: "What I'm doing is just terrible. I really must do something about it!" 이와 비슷한 내면의 강요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다음에 나오는 자기 평가 속에 들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정말 한심해.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해.’
Think for a moment of all the people you've heard say, "I really should give up smoking," or, "I really have to do something about exercising more." They keep saying what they must do and they keep resisting doing it, because human beings were not meant to be slaves. ‘정말 담배를 끊어야 해’ 또는 ‘어떻게든 좀 더 운동을 해야만 하는데’ 라고 말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만 한다 는 말은 계속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다.
We were not meant to succumb to the dictates of 'should' and 'have to', whether they come from outside and inside of ourselves. And if we do yield and submit to these demands, our actions arise from an energy that is devoid of life-giving joy. 밖에서 오든 안에서 오든 ‘해야만 한다.’ 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와 같은 강요에 굴복하게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강요에 복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 행동에는 우리 삶에 생동감을 주는 즐거움이 없다.
Translating Self-judgments and inner demands 자책과 내면적인 강요를 욕구로 바꾸기
When we communicate with ourselves on a regular basis through inner judgment, blame, and demand, it's not surprising that our self-concept gives in to feeling more like a chair than a human being. 우리는 날마다 내면에서 자기비판, 비난, 강요로 자신과 대화할 때, [번역판_215p,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기보다 의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A basic premise NVC is that whenever we imply that someone is wrong or bad, what we are really saying is that he or she is not acting in harmony with our needs. NVC의 기본 전제 중 하나는 우리가 누군가를 가리켜 잘못됐다거나 나쁘다고 할 때, 우리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 사람의 행동이 우리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If the person we are judging happens to be ourselves, what we are saying is, "I myself am not behaving in harmony with my own need." 만약 비판하는 상대가 자신일 경우, 우리가 실제로 말하는 의미는 ‘나는 지금 나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조화롭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I am convinced that if we learn to evaluate ourselves in terms of whether and how well our needs are being fulfilled, we much more likely to learn from the evaluation.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고 있는지, 그렇다면 또 얼마나 잘 충족되고 있는지 하는 측면에서 우리 자신을 평가하도록 배운다면, 우리가 그 평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커지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Our challenge then, when we are doing something that is not enriching life, is to evaluate ourselves moment by moment in a way what inspires change both (1) in the direction of where we would like to go, and (2) out of respect and compassion for ourselves, rather than out of self-hatred, guilt or shame.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우리의 과제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식으로 순간순간 스스로를 평가해보는 것이다. (1)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쪽으로의 변화 (2) 자기비하, 죄책감, 수치심에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중과 연민에서 나온 변화
NVC mourning: NVC로 자기 애도하기
After a lifetime of schooling and socialization, it is probably too late for most of us to train our minds to think purely in terms of what we need and value from moment to moment. 평생 동안 받은 학교 교육과 사회화 때문에 매순간 순전히 자신의 욕구나 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하도록 마음을 훈련하는 것은 우리 대부분에게 [번역판_216p, 너무 늦은 일인지도 모른다.
However, just as we have learned to translate judgments when conversing with others, we can train ourselves to recognize judgmental self-talk and to immediately focus our attention on the underlying needs.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판단하는 말들을 느낌과 욕구로 바꾸어 듣는 법을 배웠듯이, 자신을 판단하는 말을 할 때마다 곧바로 그 말들의 이면에 있는 욕구에 관심의 초점을 두도록 스스로를 훈련할 수 있다.
For example, if we find ourselves reacting reproachfully to something we did("Look, you just messed up again!), we can quickly stop and ask ourselves, "What unmet need of mine is being expressed through this moralistic judgment?"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해놓고 “봐, 또 잘못했잖아!” 라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자신을 보았을 때 즉시 생각을 멈추고 이 같은 판단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나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무엇인가 라고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When we do connect to the need - and there may be several layers of needs - we will notice a remarkable shift in our bodies. 그 순간 자신의 욕구 - 욕구는 여러 층위가 있을 수 있는 데 - 와 잘 연결되면 우리 몸에서 현저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Instead of the shame, guilt, or depression we likely feel when criticizing ourselves for having "messed up again." we will experience any number of other feelings. ‘또 잘못했잖아’ 라며 자신을 책망할 때 느끼는 수치심, 죄책감, 우울 대신에 여러 가지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NVC mourning: connecting with the feelings and unmet needs stimulated by past actions we now regret. NVC의 자기용서: 지금 후회하고 있는 행동으로 그 순간 충족할고 했던 욕구와 연결하기
Whether it's sadness, frustration, disappointment, fear, grief, or some other feeling, we have been endowed by nature with these feelings for a purpose: they mobilize us to pursue and fulfill what we need or value. 슬픔, 좌절, 실망, 두려움, 애잔함 등 우리가 이러한 여러 느낌들을 가지고 태어난 데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이런 느낌들의 목적은 우리가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The impact of these things on our spirit and bodies is substantially different from the disconnection that is thought on by guilt, shame, and depression. 이런 자연스러운 느낌이 우리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죄책감, 수치심, 우울 등 욕구로부터의 단절에서 오는 영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Mourning in NVC is the process of fully connecting with the unmet needs and the feelings that are generated when we have been less than perfect. NVC에서 말하는 애도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했을 때, 그로 인해 생겨난 충족되지 않은 욕구와 느낌에 온전히 연결하는 과정을 말한다.
It is an experience of regret, but regret that helps us learn from what we have done without blaming or hating ourselves. 이 과정에서 후회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때의 후회는 자기혐오나 자책 없이 그 경험에서 배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We see how our behavior ran counter to our own needs and values, and we open ourselves to feelings that arise out of that awareness. When our consciousness is focused on what we need, we are naturally stimulated toward creative possibilities for how to get that need met. In contrast, the moralistic judgments we use when blaming ourselves tend to obscure such possibilities and to perpetuate a state of self-punishment. 우리의 행동이 어떤 면에서 자신의 욕구나 가치관에 상반되었는지 보게 해주고, 그 같은 인식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번역판_217p, 의식의 초점이 욕구에 맞추어져 있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창조적인 가능성을 찾가 가게 된다. 반면에 자신을 질책할 때 쓰는 도덕주의적인 판단은 이런 창조적 가능성을 흐리게 하고 자책을 계속하게 한다.
self-forgiveness 자기용서
We follow up on the process of mourning with self-forgiveness. Turning our attention to the part of the self which chose to act in the way that led to the present situation. We ask ourselves, "When I behaved in the way which I now regret, what need of mine was I trying to meet?" 애도하는 과정은 자기 용서로 이어진다. 지금 후회하고 있는 그 행동을 하기로 선택했던 자신의 그 부분에게 관심을 돌려 다음과 같이 물어본다. ‘지금 내가 후회하는 그 행동을 했을 때, 그 때 나는 어떤 욕구를 충족하려고 했던가?’
I believe that human beings are always acting in the service of needs and values. This is true whether the action does or does not meet the need, or whether it's one we end up celebrating or regretting.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것으로 욕구가 충족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 그 결과가 축하할 일이 됐는지 후회할 일이 됐는지 관계없이 그 순간 자신의 욕구와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믿는다.
When we listen empathically to ourselves, we will be able to hear the underlying need. Self-forgiveness occurs the moment this empathic connection is made. 우리가 자신을 공감으로 들으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욕구를 들을 수 있다. 자기용서는 이런 연민으로 연결되는 순간에 생겨난다.
Then we are able to recognize how our choice was an attempt to serve life, even as the mourning process teaches us how it fell short of fulfilling our needs. 애도하는 과정에 우리는 당시의 선택이 어떤 욕구를 충족하는 데 못 미쳤는지를 알게 되지만, 자기용서 단계에서는 그 선택도 당시에는 나름대로 삶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NVC self-forgiveness: connecting with the need we were trying to meet when we took the action that we now regret. NVC 자기용서: 지금 후회하고 있는 행동으로 그 순간 충족하려고 했던 욕구와 연결하기
An important aspect of self-compassion is to be able to empathically hold both parts of ourselves - the self that regrets a past action and the self that took the action in the first place. 자기 공감을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두 부분 - 과거의 행동을 [번역판_218p, 후회하고 있는 자신과 처음에 그 행동을 선택한 자신 모두를 연민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The process of mourning and self-forgiveness frees us in the direction of learning and growing. 애도와 자기용서 과정은 우리를 자책과 우울에서 자유롭게 하여 배우고 성장할 수 있게 한다.
In connecting moment by moment to our needs, we increase our creative capacity to act in harmony with them. 매순간 욕구와 연결될 때, 우리는 그 욕구들과 조화로운 방법으로 욕구들을 충족할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키우게 된다.
The lesson of the polka-dotted suit
I would like to illustrate the process of mourning and self-forgiveness by recalling a personal event. The day before an important workshop, I had bought a light gray summer suit to wear.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애도와 자기용서 과정을 설명해 보겠다. 나는 중요한 워크숍을 하루 앞두고 여름 양복을 한 번 샀다.
At the end of the well-attended workshop, I was swarmed by participants asking for my signature, address, and other information. 워크숍이 끝나고 나는 사인을 부탁하거나 연락처 등을 묻는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With time closing in on another appointment, I hastened to attend to the requests of the participants, signing and scribbling on the many bits of paper thrust in front of me. 다음 약속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서 참가자들의 요청에 응하며 사람들이 내미는 종이에 사인을 했다.
As I rushed out the door, I stuck my pen-uncapped-in the pocket of my new suit. Once outside, I discovered to my horror that instead of the nice light gray suit, I now had a polka-dotted suit! 그리고 급하게 나가면서 뚜껑을 닫지 않은 채 펜을 새 양복 윗주머니에 넣었다. 밖으로 나온 뒤 나는 근사한 연회색 신사복 대신 잉크로 얼룩진 양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For twenty minutes I was brutal with myself: “How could you be so careless? What a stupid thing to do!” I had just ruined a brand-new suit: If ever I needed compassion and understanding, this was the time, yet there I was responding to myself in a way that left me feeling worse than ever. 나는 삼하게 자책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렇게 부주의할 수 있어.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잖아. 나는 새론 산 양복을 망친 것이다. 이때처럼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필요한 때가 없었을 텐데,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을 비참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Fortunately – after only twenty minutes – I noticed what I was doing. I stopped, looked for the need of mine that was unmet my having left the pen uncapped, and asked myself, “What need lies behind my judging myself as ‘careless’ and ‘stupid?’” [번역판_219p, 그러나 다행히도 20분 후에 나는 내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지 않은 채로 펜을 주머니에 넣었을 때 충족되지 않은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부주의하다’ 또는 ‘바보 같다’ 라는 자신에 대한 판단 뒤에 어떤 욕구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We are compassionate with ourselves when we are able to embrace all parts of ourselves and recognize the needs and values expressed by each part. 우리 안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표현하는 욕구와 가치들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낀다.
Immediately I saw that it was to take better care of myself: to have given more attention to my own needs while I was rushing to address everyone else's needs.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응하기 위해서 서두르는 대신에 나 자신의 욕구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As soon as I touched that part of myself and connected to the deep longing to be more aware and caring of my own needs, my feelings shifted. 나는 자신을 더 잘 돌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슬픈 느낌을 받아들이면서 못쓰게 된 양복과 뚜껑을 닫지 않은 펜을 충분히 아쉬워했다.
There was a release of tension in my body as the anger, shame, and guilt I was harboring toward myself dissipated. 몸의 긴장이 풀렸다. 분노, 수치심, 죄책감등 내 자신에게도 향했던 분노, 수치심, 죄책감 등이 사라졌을 때 몸의 긴장이 풀렸다.
I fully mourned the ruined suit and uncapped pen as I opened to feelings of sadness arising along with the yearning to take better care of myself. 나는 충분히 아쉬워했다. 못쓰게 된 양복과 뚜껑을 닫지 않은 펜을. 내가 슬픈 감정들을 열었을 때. 내 자신을 더 잘 돌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난 슬픈 감정을 열었을 때. <자신의 욕구를 잘 인식하고 돌보기를 바라는 깊은 열망과 연결되자 내 느낌은 바뀌었다. 스스로에게 품었던 분노, 수치심, 죄책감이 사라지면서 몸의 긴장이 풀렸다.>
Next I shifted my attention to the need I was meeting when I slipped the uncapped pen into my pocket. 그런 다음 뚜껑을 덮지 않은 펜을 윗주머니에 넣었을 때, 내가 충족하려고 했던 욕구로 관심을 옮겼다.
I recognized how much I valued care and consideration for other people's needs. Of course, in taking such good care of other people's needs, I had not taken the time to do the same for myself. 그러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잘 돌보는 동안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But instead of blame, I felt a wave of compassion for myself as I realized that even my rushing and putting the pen away unthinkingly had come out of serving my own need to respond to others in a caring way! 하지만 내가 서두르면서 별 생각없이 펜을 넣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비난 대신 자신에 대한 연민의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연민 속에서 나는 두 가지 욕구를 보았다. 그 하나는 [번역판_220p,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는 호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의 욕구도 좀 더 잘 인식하고 돌보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욕구를 모두 인식하면 다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욕구에 대한 인식 없이 자책의 수렁에 빠져 있는 때와는 다르게 대응함으로써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해결방법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Don't do anything that isn't play! 즐겁지 않은 일은 하지 마라.
In addition to the process of mourning and self-forgiveness, another aspect of self-compassion I emphasize is in the energy that's behind whatever action we take. 애도와 자기 용서 과정에 더하여 내가 강조하고 싶은 자기 공감의 또 다른 면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뒤에 있는 에너지이다.
When I advise "Don't do anything that isn't play!" some take me to be radical, even insane. I earnestly believe, however, that an important form of self-compassion is to make choices motivated purely by our desire to contribute to life rather than out of fear, guilt, shame, duty, obligation. ‘내가 즐겁지 않은 일은 하지 마라!’ 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를 과격하거나 심지어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자기 연민의 중요한 형태를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의무감 등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삶에 기여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We want to take action out of the desire to contribute to life rather than out of fear, guilt, shame, or obligation. 우리는 행동을 취하기를 원한다. 우리 삶에 풍부하게 기여하기 위한 욕망으로부터 행동을 취하기를 원한다.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의무감으로부터 하기 보다는.
When we are conscious of the life-enriching purpose behind an action we take, when the sole energy that motivates us is simply to make life wonderful for others and ourselves, then even hard work has an element of play in it.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뒤에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을 멋지게 만들려는 영적인 목적과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록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즐거운 놀이 같은 요소를 느낄 수 있게 된다.
Correspondingly, an otherwise joyful activity performed out of obligation, duty, fear, guilt, or shame will lose its joy and eventually engender resistance. 마찬가지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도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의무감 등에서 한다면 그 즐거움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그 일 자체에도 저항감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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