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적에 / 최미숙
2학기 개학이 9월 1일로 다른 학교보다 늦었다. 그런 이유로 겨울방학은 1월도 중순이 지난 17일에야 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2월 봄방학 없이 12월 모든 학기를 끝내는 학교가 많다. 그래도 1월 중순은 너무 지루하다. 오미크론이 빠르게 확산되어 걱정이었는데 그나마 학생들이 집에서 생활하게 되어 다행이다. 늦었지만 우리도 방학으로 여유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
코로나는 졸업식 풍경도 바꿔 놓았다. 부모님과 후배들의 배웅도 없이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에게 졸업장과 상장을 받는 것을 끝으로 초등학교 6년과 작별했다. 몇 명의 학생이 고마웠다며 수석실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올해 6학년은 친구처럼 잘 통해 수업하는 게 재미있었는데 학교를 떠난다며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고 기특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교실 정리를 하는데 학생들 집으로 보내지 말라는 방송이 나온다. 무슨 일인지 교무실에 내려갔더니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학교 공사하러 온 아저씨 중 한 분이 확진자로 마스크를 벗은 채 교실과 복도를 돌아다녔고, 담배까지 피었다고 한다. 보건소에서 전교생 코로나19 전수검사를 하러 온다며 기다리라고 했단다. 6학년은 졸업식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보냈는데 담임이 전화해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영원히 기억에 남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교문 안쪽에서 검사가 시작되었다. 교사도 학생 뒤로 서서 기다렸다. 엎친데 덮친다고 눈까지 날리며 날씨가 매서웠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에서 1학년 아이가 소리 지르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며 몸을 빼려는 아이를 여러 명의 선생님이 팔과 얼굴, 몸과 다리를 잡고 면봉을 코에 넣으려고 했다. 처음 검사할 때 어른인 우리도 겁이 났는데 8살 아이는 얼마나 무서울까 싶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고서야 겨우 검사를 끝낸다. 어릴 적 내 모습이 떠 올랐다.
내가 살던 곳은 순천 구도심이다. 지금은 ‘문화의 거리’로 많은 예술가가 공방을 하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했지만 옛날에는 골목이 많았고 쓰레트 지붕에 양철과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대문 집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식 다다미 집도 몇 채 있었다. 우리 집은 갈색 페인트칠을 한 나무 대문이었다.
집 건너편에 영대이모(그렇게 불렀다)가 운영하는 미장원, 그 옆으로 일본식 다다미 집 할아버지 부부의 만화방, 우리 집과 나란히 붙어있는 친구 효진이 집 김약국, 그 앞에 천막을 쳐서 만든 점빵이 있었다. 1원짜리 눈깔사탕과 2원짜리 우유과자,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종이 과자, 무지개 색깔 사탕, 오다마 등 지금으로 치면 불량식품이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그때 우리가 가장 눈독 들이던 곳이다. 며칠에 한 번씩 앉은뱅이 상자를 놓고 땅바닥에 앉아 달고나(그때는 띠기라고 함)를 만들어 파는 아저씨가 동네를 찾아오곤 했다. 5원을 주면 달고나 하나를 받아 누름쇠로 찍은 모양을 그대로 떼어 가져가면 한 개를 더 주었다. 요즈음 오징어 게임에서 한창 유행하는 바로 그것 추억의 달고나다.
그 시절 내가 유일하게 접하는 문화생활은 앞집 할아버지 만화방에 가는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왜 그렇게 못 보게 했는지 소리 꽤나 들었다. 그래도 몰래 가서 이상무, 이근철, 임창, 엄희자가 그린 만화를 많이 봤다. 그중 독고탁이 나오는 이상무 선생님 작품을 가장 좋아했는데 나오는 족족 다 읽고 새로운 작품이 나오길 기다리다 주인 할머니에게 새 책이 나왔는지 물어보곤 했다. 다른 작가는 이름만 생각날 뿐 어떤 내용인지 까마득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이가 썩어 아린데도 치과 가는 게 무서워 꾹 참으며 끙끙 앓았다. 볼이 퉁퉁 부어오르고 나서야 엄마 눈에 띄었다. 옷을 입고 나서는 엄마에게 안 간다고 뻗대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다 잡혀 동네에 있는 삼화치과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시 도망갔다. 녹양간 골목으로 달리고 엄마는 잡으러 오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쫓고 쫓기는 고양이와 쥐 놀이를 한 꼴이다. 어린 내가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잡히기는 했지만 치과에 안 간다고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이 치료를 하려면 여러 사람이 붙들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가 좋지 않다. 치료 시기를 놓친 결과 어금니 대부분이 다른 것으로 덮여 있다. 이 가는 기계 소리는 공포스러웠고, 몸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치료가 끝나면 온몸이 아팠다.
가족이 모여 어린 시절 이야기할 때면 엄마는 꼭 치과 이야기를 한다. “아이고 저놈의 가시네 치과 한 번 데리고 가려면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녹양간 골목으로 잡으러 다닌 것을 생각하면….” 엄마 목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하다.
친정집에 가려면 어린 시절 살던 곳을 거쳐 간다. 흙길이었던 곳이 시멘트로 바뀌고 집이 새로 지어진 것 말고는 길 폭과 골목은 그대로다. 그곳을 지나며 팔방 놀이, 깡통 숨바꼭질, 삼팔선 놀이, 삔 따먹기. 자치기(우리는 똥딱기라고 했음), 잡기 마질, 고무줄 뛰기를 하고 있는 국민학생인 나를 본다. 같이 뛰놀았던 그 시절 꼬마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핍했지만 정겨운 그 때를 기억이나 할까?
첫댓글 어린 시절 아름다운 정경이 느껴집니다.
어린 시절에 즐겨 놀았던 사람들은 추억이 많아서 풍요로운 것 같아요. 선생님이 살았던 문화의 거리에 가면 어린 최미숙선생님을 만나게 되겠네요.
저도 고향이 순천이에요. 별량쪽 가까운 변두리 농촌마을요. 몇 달 전 중ㆍ고등 시절 누비던 중앙동과 웃시장 국밥이 그리워 찾아갔어요. 문화의 거리가 참 좋았어요. 다시 오겠다고 결심한 곳이지요. 그래도 도심지 중심이 집이었다니 부럽습니다. 훨씬 빠른 문화혜택이요. 전 만화방을 고등학교에 와서야 들어가봤답니다.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별량이면 날마다 학교 출근하면서 지나가는 곳인데요.
@최미숙 효천고등학교 인근 동네입니다. 그 학교 지을때 우리 집 밭이 들어갔어요. 그 밭에서 식구대로 고구마 캐던 일이 생각납니다.
하하. 뭐든지 용감해서 일 번으로 할 것 같은 선배님이 실은 겁쟁이였군요. 어린 시절의 기억,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문화의 거리에 살았으면 순천에서도 사대문에 안에 사신 거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