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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노동: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WORK WITHOUT THE WORKER(2021)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롤러코스트 2022
미래는 배제된 사람들 손에 달렸다
지금 우리에게는 상상이 필요하다. 지난 10년간 자본주의를 넘어 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을 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누가 그런 세상을 실현할 것이냐”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비전이 없는 운동은 맹목적이지만, 운동이 없는 비전은 훨씬 더 무기력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취업의 발판을 파괴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범위를 좀 더 넓혀야 할 것 같다. 나날이 증가하는 비공식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미세사업가”에게 과연 이전에 노동자 계층이 벌였던 것과 같은 강력한 노동운동을 전개할 힘이 있을까? 폭동, 살쾡이 파업(노동조합의 승인 없이 벌이는 파업-옮긴이), 폭력 시위는 유구하고 파편화된 잉여 투쟁의 역사에서 짧은 순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 이후로 많은 저술가가 이런 류의 투쟁은 어느 시대에든 반동적 충동에 이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룸펜”(반동 세력에 악용될 수 있는 최하층 계급-옮긴이)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지옥 정치”가 도래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지옥의 불길은 이미 거세게 번지고 있다. 자이르 보우 소나루(브라질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인도 총리), 도널드 트럼프 같은 신파시즘의 주술사들이 준동하는 가운데 피박탈자들과 사회적 지위를 잃은 중산층의 유서 깊은 동맹이 다시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안정과 희망을 좇아 반동 세력에 영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옥의 불길은 이제 21세기적 삶에 당연한 요소가 된 폭동과 봉기에 의해 도시 곳곳을 태우고 있다. 산티아고의 불붙은 버스와 지하철역, 홍콩과 에콰도르와 이란을 뒤덮은 시위, 미니애폴리스와 로스앤젤레스의 시커멓게 탄 경찰서가 보여주듯이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 연출하는 장관이 밤을 불태운다.
이렇게 불우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이 조직화되지 못한 채 반동 세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시스템의 변방에서 간헐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더군다나 이 무수한 잉여 인구가 자본에 재편입될 수 있는 시나리오마저 존재하지 않기에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우울한 대미에 접어들면서 잉여 인구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들에서 불길하게도 맬서스주의적(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식량 부족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학설로, 인구 감소를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저소득층의 자연적 혹은 인위적 감소를 주장한다-옮긴이) 시각이 반영되고 있다.
이 죽음 숭배에 가까운 인식을 가진 자들이 현재 빈민가, 전쟁, 부채가 서서히 야기하고 있는 파멸과, 오늘날 기후 재앙이 급속히 야기하고 있는 종말을 저지할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있다. 금융, 사업, 노동에 그저 단순히 “미세micro”(이 책에서는 “microwork”를 “미세노동”으로, “microfinance”를 “소액 금융”으로 번역했다-옮긴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미세만능주의라 할 이 음침한 해법은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 부호들의 욕심만 드러낼 뿐이다. 그들의 헛된 약속이 사실상 불우한 이들을 다시 인간다운 삶에 편입시키겠다는 대의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세노동 사이트가 약속하는 “일자리”와 “능력 개발”이 바로 이 책에서 그 허구성을 폭로하고자 하는 공허한 약속이다. 그런 헛된 약속 때문에 미세노동 사이트에서 지금까지 대규모 동맹 파업이나 테이터 및 알고리즘에 대한 파괴 행위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잉여성에 대한 논의가 무색할 만큼 얌전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미세노동자들에게 자본의 횡포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단이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충분한 인원이 가세한다면 파업을 통해 시스템 전체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된다면 벤처캐피털이 주춤하고, AI 사업이 휘청거리고, 알고리즘이 달갑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 위험한 실수를 범할 것이다. 대규모 파업까지 갈 것도 없이 콘텐츠 검열자들만 파업에 돌입해도 당장 사용자들의 피드에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사진이 넘쳐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행동은 불이 붙기도 전에 진압될 게 뻔하다. 과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페이스북에서 인종차별적 폭력 행위를 조장하는 것을 알고도 사측이 방관한 사례가 있다. 이에 페이스북 직원들이 파업을 결의했고, 콘텐츠 검열자들이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 메시지에 그런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잘 요약되어 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파업할 것입니다. 단, 페이스북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외주 노동자로서 비밀유지계약NDA에 따라 우리가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목격하는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중략) 페이스북의 정식 직원들과 달리 우리는 비밀유지계약에 의해 우려의 목소리를 낼 수 없기에 우리의 일에서 불가피한 윤리 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파업할 것입니다. 단, 그럴만한 여건이 돼야만 합니다. 현재로서 우리 콘텐츠 검열자들은 효과적으로 파업을 수행할 네트워크도, 플랫폼도, 경제적 기반도 없습니다. 더욱이 팬데믹으로 인해 저마다 고립되어 원격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독자적으로 파업에 돌입한다면 자칫 벌금을 물고 수입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 살고 있는 나라에 계속 살 권리마저 박탈당할지 모릅니다.”
미세노동자들이 아무리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고 해도 아바타로 인간을 대체하고, 계정 삭제로 갈등을 말살하고, 비밀유지계약으로 재갈을 물리는 법적·소프트웨어적 장치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 없다. AI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이 늘어날수록 자본은 데이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노동자의 방해 공작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계학습이 노동 과정에 더욱 폭넓게 개입해 감시와 게임화를 통해 더 많은 갈등을 진압한다면 방해 공작이 발생할 여지는 줄어든다. 노동자의 집단행동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알고리즘으로 짓밟아버리면 노동자의 아우성은 사라지고 소프트웨어 코드의 조용한 콧노래만 남게 된다.
이처럼 노동자가 무기력해진 것이 미세노동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지금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비해 시스템의 노동의존도가 훨씬 낮아졌기 때문에 노동운동 전반에서 그 같은 무기력증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 성장 시대가 황혼기를 맞으면서 노동자의 교섭력이 약화되고 노조 가입자 수도 감소했다. 그리고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와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영국 노동당의 비주류 좌파 정치인으로, 우경화된 당내 주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5년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으나 2019년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옮긴이)의 집권 시도가 무산된 데서 볼 수 있듯이 대중적인 노동자 정당이 설 자리도 거의 사라졌다. 그런 정당은 노동운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노동운동의 기세가 쇠잔해졌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대오가 무너진 자리에 플랫폼이 입성해 다시금 자본이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구도를 만들며 초기 산업화 시대를 재현하고 있는 지금, “후기자본주의의 인간 선별 작업”으로 노동운동의 활로가 모두 막혀버렸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조합 없는 연합
임금이 아니라 잉여, 배제, 비공식을 특징으로 하는 미세노동 종사자들은 느슨한 형태의 노동자 연합체가 됐든 전형적인 노동조합이 됐든 간에 노동자를 조직화하려는 세력에게 어려운 숙제다. 그들이 전 세계에 산재해 있고 여러 미세노동 사이트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미세노동은 기본적으로 임시 노동으로서, 노동자가 사이트에서 일을 하는 날도 있고 하지 않는 날도 있다. 게다가 일을 하더라도 단시간만 일하는 날이 많다. 그래서 월이나 연 단위로 조합비를 받고 조합원 자격을 부여하는 기존의 노조 형태와 충돌한다. 더욱이 미세노동자와 의뢰인 간의 “계약”이 길어야 몇 분, 짧으면 몇십 초 동안만 유지되기에 임금의 변동성이 커서 조합비를 감당할 형편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설령 조합비가 큰 문제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직업 정체성을 토대로 하는데 미세노동자에게는 그런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세노동에는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직업이나 업종이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저성장 경제의 특징인 임시직 일거리들이 그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영국독립노동자연합IWGB 같은 신생 노동조합에서 직업이 아니라 불안정한 계약을 토대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면서 이 삭막한 현실에 몇 가닥의 빛줄기를 비추고 있긴 하다. 그러나 설령 그런 노동조합이 예외가 아니라 대세가 된다고 해도 미세노동자들이 주로 빈민가나 난민촌, 교도소, 강점지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세력권 밖에 있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에 가담하는 자체가 위험한 행위나 범법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지역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미세노동자들은 대체로 침실이나 인터넷 카페 같은 공간에 숨어 있어서 서로에게 잘 보이지 않고, 그들을 조직화할 만한 단체의 레이더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 더욱이 지역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장소에 집결하기가 무척 어렵다. 실제로 특정한 노동 플랫폼을 이용하는 노동자의 집단행동이 효과를 거둔 사례만 봐도 동일한 지역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다음은 영국 배달 앱 딜리버루 노동자의 조직화를 주도했던 캘럼 캔트Callum Cant의 설명이다.
“딜리버루가 노동력의 공급량을 더욱 늘리기 시작했다. (중략) 점점 더 많은 라이더가 매일 일했지만 전체 주문량은 그대로였다. 당연히 우리는 더 적게 일하고, 더 적게 벌고, 라이더 센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배달이 없는 시간에 서로 친해졌다. 내가 일을 하러 라이더 센터에 나가면 나 말고도 5~30명의 노동자가 대기 중인 상황에 익숙해졌다.”
노동의 공급량을 대폭 늘려서 노동자를 길들이려던 사측의 노력은 오히려 그동안 파편화되어 있던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 노동자들이 서로 대면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브라이턴, 런던, 사우샘프턴, 뉴캐슬, 옥스퍼드 등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살쾡이 파업의 바람이 강하게 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이 온라인에서 서로의 아바타만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기는 대단히 어렵다. 노동자의 조직적 움직임이 힘을 받으려면 개방된 만남의 장이 필요한데, 미세노동자들은 거리적 문제도 있지만 소프트웨어가 만드는 경계 때문에 서로 만나기가 여의치 않다.
이런 한계로 인해 미세노동자의 조직적 움직임은 온라인 게시판이라는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은 공간에 묶인다. 터커네이션TurkerNation과 엠터크그라인드MTurkGrind의 가입자들, 그리고 종합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터커와 관련된 글을 쓰는 사용자들은 둉료 노동자를 위한 모금 행사처럼 규모가 작고 비적대적인 행동을 전개한다. 이런 행동은 특정한 사이트의 메커니즘을 겨냥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일례로 터커들은 일방적인 평가 시스템에 반대하며 노동자가 실시간으로 의뢰인에 대한 평가를 게시할 수 있는 터콥티콘Turkopticon(원형 감옥을 뜻하는 ‘파놉티콘’과 ‘터크’의 합성어-옮긴이)이라는 웹사이트와 브라우저 플러그인을 개발했다. 의뢰인들도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는 터콥티콘의 존재만으로도 임금 착취와 같은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긴 하다. 그리고 이런 플러그인이 의뢰인의 행동을 단속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세노동 사이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또한 그것이 노동자의 집단적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될지는 몰라도 그 자체로 노동자들 대규모로 결집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목적이 어디까지나 의뢰인의 행동을 교정하는 데 있을 뿐 노동자의 집단행동을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터콥티콘은 혁명이 아닌 개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미세노동 사이트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자본의 불량한 행위를 고치려고 했던 다른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그 위력과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2011년 메커니컬터크 노동자들이 제프 베조스에게 임금 인상과 기능 개선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 취지는 베조스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터커는 살아 있는 인간일 뿐 아니라 존중받고 공평하게 대우받고 개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보장받을 자격이 있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어떤 편지에는 “나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라고 명쾌하게 쓰여 있었다.
터커들의 유일한 조직화 사례로 남은 이 캠페인의 발원지는 터커들이 동료 터커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개설한 온라인 커뮤니티 “위 아 다이너모We Are Dynamo”(‘다이너모’에는 ‘발전기’와 ‘정력기’라는 뜻이 있다-옮긴이)였다. 이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동안 가입자들은 이런저런 캠페인 아이디어를 올리고 투표를 통해 인기 있는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 개발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다이너모의 존재 이유는 “행동에 나설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춘 대중 집단, 곧 조합 없는 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다이너모의 존재 이유는 그간 다이너모의 존재를 무시했거나 어떤 사유로든 그 가입자들을 대표하지 못했던 전통적인 노동자 단체들을 대신할 단체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이너모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이너모는 메커니컬터크에 작업을 등록해서 신규 가입자가 진짜 터커인지 확인했다. 이를 간파한 아마존은 즉각 다이너모 계정을 삭제함으로써 신규 가입자가 유입되지 못하게 했다. 다어너모의 사례는 미세노동자들을 조직화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망하게 좌초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편지 캠페인은 지금까지 터커들이 유일하게 실행에 옮긴 집단행동으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메커니컬터크 노동자들이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으니 더 강한 집단행동을 벌이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캠페인은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화하는 데 그쳤다. 여기서 우리는 원자화되어 온라인의 비공식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고, 어떤 지속적인 행동을 벌이기에는 권력이나 재력이 부족한 노동자들이 부딪히는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플레이먼트나 애픈 같은 사이트의 노동자들이 이런 캠페인을 시도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수단을 폄하한다면 안일한 생각이다. 적어도 노동자들이 공동 투쟁을 마음먹도록 하는 효과는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노동조합이 쓰는 방법들로는 디지털 세상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고충을 해소할 수 없었지만, 온라인 게시판과 플러그인은 비록 계정 삭제나 불리한 평가, 비밀유지계약이 만드는 공포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을지언정 노동자들이 새로운 형태로 연대하게 만드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이제 막 시작된 노동자들의 디지털 공세가 과연 어엿한 노동운동으로 성장할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158~173)
무임금 투쟁
이 새로운 열망 위에 오래된 질문 하나가 맴돈다. 노동운동이 어렵다면 노동자들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폭동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조슈어 클로버Joshua Clover에 따르면, 지금처럼 성장이 정체되고 금융자본이 경제의 패권을 쥐고 있는 시대에는 “폭동이 잉여 인구의 생존 양식”이다. 클로버는 19세기부터 1973년(제1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연도-옮긴이)까지 이어진 생산 중심의 자본 축적 시대가 파업의 전성기였다면, 금융과 물류가 지배하는 현재는 노동조합의 울타리 밖에서 나날이 증가하는 잉여 인구가 폭동을 벼르고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이 위태로운 집단은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고 물가가 급등하는 현실에 맞서 런던의 폭동, 홍콩과 칠레의 시위 같은 형태로 저항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런 돌발적 소요 사태는 프란츠 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생생한 항거요, 조직화되지 않은 피박탈자들의 봉기다. 이 집단의 주요 구성원은 임금 없는 삶의 대명사라 할 수 있고, 사회의 변방으로 쫓겨나 국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관리되고 탄압받는 이민자와 재소자, 실업자들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업과 폭동을 구별하고, 이제 파업이 폭동에 자리를 내줬다고 보는 클로버의 시각은 미세노동이 지금까지 자본에 타격을 입힐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에 관해 솔깃한 해석을 제시한다. 필요 인구가 아닌 잉여인구, 임금 인구가 아닌 무임금 인구로서 간헐적으로 구글의 알고리즘을 훈련시키는 난민과 빈민, 실업자들이 자신의 위력을 발견하는 곳은 미세노동 사이트가 아니라 피박탈자들의 봉기 속에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을 받을 가능성이 좋게 말해서 가변적이라고 할 케냐 다다브 난민촌의 미세노동자들은, 클로버의 기준으로 봤을 때 2011년 그곳을 휩쓴 폭동에 가담했을 공산이 크다. 미세노동으로 힘겹게 생존중인 필리핀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산로케 폭동에 합류했을 수 있다.
그러나 클로버는 무임금 투쟁을 단일한 힘으로 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클로버는 폭동을 그 자체로 이 시대의 역사적 주체로 보았다. “폭동은 잉여 인구를 물색하고, 잉여 인구는 폭동의 팽창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자본에 의해 잉여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간과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폭동의 궤도에 불가항력적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전 세계 잉여 인구를 좌지우지하는 어떤 단일한 주체나 획일적인 동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지난 수십 년간 실업자와 하등 취업자의 여러 하위 집단에서 일시적이나마 약동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운동이 전개됐다. 이런 투쟁의 궤적이 온라인에서 악착같이 임금을 수렵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향후 행동에 일종의 이정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많은 실업자가 ‘생산’에는 직업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사람과 재화의 ‘순환’을 막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봉쇄’를 부활시켰다. 199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실업자들이 정부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저소득층과 실업자에 대한 지원 확대를 촉구하며 인근의 주요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인 피케테로Piquetero 운동이 바로 봉쇄가 대두된 계기였다. 21세기 들어서는 러시아의 해직 건설노동자들이 지원금을 요구하며 도시 진입로를 차단하는가 하면, 방글라데시 탕가일 지역의 실업자들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인근 도로를 봉쇄하고 식량 지원을 촉구하는 등 봉쇄 전술이 전 세계로 확산됐다.
실업자들처럼 비공식 노동자들도 저항의 수단으로 봉쇄를 잘 이용한다. 인도반도에서는 인력거꾼들이 종종 신체와 인력거로 주요 도로를 막고 시장 현실의 개선을 요구한다. 2019년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투기성 재개발 사업지로 선정된 지역 중 한 곳에서 인력거 운행을 금지하자 인력거꾼들이 도시 곳곳을 차단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로 인해 도시 전역에서 심각한 교통체증이 발생했고, 시 당국은 속히 인력거 금지령을 철회했다. 이처럼 비공식 노동자들이 강경하게 나가야 마지못해 항복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비공식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공공 기관의 전형적인 행태다. 관료들은 비공식 노동자들이 인간과 물자의 순환을 완전히 중단시킬 위력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생태계가 파괴된 라틴아메리카에는 생계를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폐품 수거자들이 수두룩하다. 많은 도시에서 이들을 환경 재앙에 맞서는 전사로 고용했지만, 이들이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폐기장을 봉쇄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선 후였다. 로스앤젤레스의 노점상들도 시 당국과 숱하게 전투를 치르면서 비슷한 전법으로 가장 기초적인 법적 보호 장치나마 쟁취했다.
자동차나 석유 산업처럼 분업의 사슬이 촘촘히 엮여 있는 업계가 아닌 이상 위와 같은 행동은 대체로 생산이 아닌 순환을 공격한다. 인도의 비공식 노동계에서 관찰되는 조직화의 양상을 면밀히 분석한 리나 아가르왈라Rina Agarwala는 직접적인 임금 인상이 아닌 복지와 규제, 권리를 강화하는 형태로 재화의 탈상품화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에 관해 규명했다. 이를테면 비공식 노동자는 누군가와 고용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는 대체로 국가를 상대로 하게 마련인데, 인도의 비공식 노동자들의 경우 주로 도시의 순환을 방해함으로써 정부의 양보를 얻어냈다. 인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브라질의 집없는노동자운동MTST은 버려진 땅을 점거한 후 빈민가 외에는 살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방식으로 투기성 부동산 개발을 저지하고, 이를 통해 전략적으로 민간 주택의 순환을 차단한다. MTST는 이렇게 주택 시장을 교란함으로써 도시 개발계획에 피박탈자들의 이익이 반영되도록 만들었다.
이상으로 국가와 시장의 결합체로부터 배척당한 이들의 투쟁을 통해 다소나마 주민으로서 권리를 획득한 사례들을 살펴봤다. 플랫폼들이 도시 비공식 노동시장의 논리와 참여자를 자본 축적 체계의 핵심에 편입시킴에 따라 발생한 노동자의 요구와 전략에는 당연히 “자영업” 행상, 인력거꾼, 배달원의 요구와 전략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술이 현재 플랫폼 경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투쟁의 물결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비공식 노동자들의 시위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코로나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다. 2020년 7월 배달원 5000명이 브라질의 대도시 상파울루를 뒤덮으며, 플랫폼 자본에 대한 시위로는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집단행동을 벌였다. 일명 “모터보이”로 불리는 이 배달원들은 전기자전거를 타고 도시 전역에 물건을 배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이들은 대부분 상파울루 빈민가에 거주하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으로, 매일같이 자신이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생계를 이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임금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통사고와 폭행 같은 야만적 행위 때문이기도 하다. 그 야만의 희생자가 얼마나 많은지 도시 곳곳에 사망자를 기리는 흰색 “유령 오토바이”가 매달려 있을 정도다. 하지만 상파울루는 비공식 노동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사망한 모터보이를 대체할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메커니컬터크와 플레이먼트에서 일감을 구하는 사람들처럼 모터보이도 비공식 노동과 공식 노동 사이에 걸터앉아 그때그때 바뀌는 의뢰인을 위해 배달 심부름도 하고 우버이츠와 아이푸드iFood를 위한 음식 배달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한편, 음식 배달 플랫폼들이 노동력의 공급량을 늘리면서 기존 노동자를 에비 인력으로 강등시키자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남아메리카 전역으로 파업의 물결이 번졌다. SNS와 입소문을 타고 점점 더 많은 배달원이 결집함에 따라 공식 노동운동과는 또 다른 형태의 자발적이고 돌발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여기에 배달원 말고도 같은 지역에 사는 다른 피박탈자들까지 합류하자 노동자와 비노동자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분노하고 낙담한 이들의 단일 대오가 형성됐다. 이런 움직임의 진원지인 상파울루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몸으로 그리고 탈것으로 교량과 상점을 봉쇄하며 재화의 이동을 중단시켰고, 그러자 애초에는 몇몇 기업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됐던 파업이 도시 전체를 마비시키기에 이르렀다. 배달원들은 라틴아메리카와 인도반도 곳곳에서 비공식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전략대로 순환을 차단함으로써 도시 전역의 경제활동을 멈추게 했고, 정부가 나서서 그들이 일하는 플랫폼을 규제하도록 압박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국가에 경제 규제를 요구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시위도 잇따랐다. 예를 들면 2018년 케이프타운과 2019년 뭄바이에서 우버 기사들이 유류비 인하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우버 기사들은 노동의 필수 수단인 차량과 휘발유를 직접 구입해야 하는 만큼 그들의 요구는 재화의 가격과 관련이 있었다. 케이프타운의 우버 기사들은 지속적으로 도심이 주요 도로를 차단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파리의 우버 기사들도 비슷한 전술을 펼쳐 공항으로 가는 길을 막았고, 런던의 우버 기사들은 웨스트민스터(국회의사당과 버킹엄 궁전의 소재지-옮긴이)와 런던교통국 청사로 가는 길을 차단하면서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기후 정책에 항의했다.
이 같은 불만과 요구가 향후 미세노동자들의 행동도 촉발할 수 있다. 우버 기사나 비공식 배달원과 마찬가지로 미세노동자들도 순환의 통증을 점점 강하게 느끼고 있다. 노트북, 휴대폰, 인터넷 회선, 전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모두 자기 부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통증이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면, 예컨대 전기료가 급등하거나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진다면 미세노동자들이 우르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일지도 모른다.
미세노동자의 저항은 데이터의 순환을 차단하는 디지털 봉쇄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디지털 자본이 존재하는 비가시적 공간에서 봉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수많은 데이터 라벨링 노동자가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뗀다고 해도 파업자들을 대신해 작업할 노동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버나 딜리버루와 달리 미세노동 사이트는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자사가 서비스 중인 모든 국가에서 노동력을 조달할 수 있기에 노동자의 수가 보통 수백만 명에 이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대다수가 참여하지 않는 이상 집단행동은 오히려 불참자들의 작업 선택지만 늘려줄 뿐이다.
다른 영역의 비공식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여준 행동처럼 미세노동자들도 단순히 발을 빼는 것 이상으로 순환을 방해할 수단이 필요하다. 즉, 치밀하게 작업을 방해할 수 있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 형태는 대대적 태업이 될 수도 있고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기계 파괴’가 될 수도 있을 텐데, 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됐던 전술로 보통은 반란에 가까운 집단행동으로 전개된다. 19세기 영국 섬유업계에서 전투적으로 투쟁했던 러다이트 운동이 그런 행동을 단행했던 대표적 집단으로, 그들은 “배후에 있는 혁명적 목표가 실현될 가능성에 끊임없이 전율”을 느꼈다.
디지털 세상에서 ‘기계 파괴’는 어쩌면 상징적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데이터 파괴는 빅토리아시대에 방직기를 때려 부수던 행위와는 분명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데이터를 실제로 파괴하는 게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데이터 작업을 무산시켜 일시적으로 데이터의 전송을 막는 행위가 봉쇄에 더 가깝다. 어차피 데이터는 방직기와 달리 누군가가 차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나 존재하며 끊임없이 복제될 수 있기 때문에 파괴 자체는 실효성이 없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흐름을 막기만 해도 지금처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매력적인 무정부주의적 투쟁법이 된다.
그런데 여타의 온라인 집단행동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충분히 많은 노동자가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단 한 명이라도 처벌을 받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다. 러다이트 운동은 복면을 쓰고 야음을 틈타서 기계를 부쉈지만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은 그처럼 은밀하고 기민하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사이트의 면밀한 감시를 받는 미세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는 순간 저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173~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