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효자, 마을 이야기꾼>- 고0태(남, 72세) 2021.3.16.
하늘이 내린 우항 사랑, 하늘이 내린 효자. 그에겐 이런 수식어가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무덤덤하게 마을을 아끼고 사랑하며, 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하늘에 닿았을까? 그 주인공은 우항리 문화마을에 살고 있는 고0태 씨이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히 대하는 이웃 아저씨이다. 그런데 만나보면 볼수록 사랑으로 가득한 깊은 속과 드러내지 않고 실천하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어디 그 뿐이랴. 마을 이곳저곳 옛날과 지금을 모르는 게 없다. 그저 옆구리만 찔러도 절로 마을이야기가 나왔다.
우항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을 이룬 것도 다 이와 같이 묵묵히 마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게다. 우항리 마을공동체가 하나로 뭉쳐 유지하고 있는 힘의 근원이다. 어쩌면 우항리 사람들 모두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우항리 사람들은 누구든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마을을 위해 선행을 베풀고 있다.
고0태 씨 부부는 나라에서 큰 효자상을 받았다. 불편한 아버지를 평생 업고 다니면서 보살핀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 농악대의 상쇠를 맡아 꽹과리를 칠 정도로 마을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천면에 근무하던 면서기(당시는 면가가리라 함)가 고0태 씨의 아버지를 일본 보국대로 보냈다. 일본에 끌려가서 노무자로 일하며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질 때 폭발물의 파편을 다리에 맞았다. 해방이 돼서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때 파편에 맞은 다리가 온전하지 못했다. 조금씩 다리가 썩어 들어가서 결국은 서울 동산병원에 가서 한쪽 자리를 절단했다. 그 후 아들 부부는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어디를 가면 업고 다니는 등 온갖 보살핌을 다 했다. 고0태 씨는 마을에서 경로당을 짓는다고 할 때 자신의 땅을 기부해서 집 가까운 곳에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아버지가 경로당에 쉽게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지은 경로당은 1992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농어촌공사에서 나온 토지에 대한 보상은 경로당 자금으로 기부를 했다. 아버지를 배려해 준 어른신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도 부인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때 집사람이 고생 많았어요. 다리가 불편하시니까 소대변을 받았어요.”
고0태 씨는 그렇다고 집안이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1971년도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나르는 일을 했다. 커다란 짐자전거에 막걸리 4통자에서 6통자씩을 싣고 우천면 지역은 모두 배달을 다녔다. 당시는 면 소재지별로 양조장이 하나씩 있었다. 주문이 오면 안 가는 곳이 없었다. 한 번은 오원리에 배달을 갔다가 넘어진 적이 있다.
“마침 버스기사가 넘어진 걸 보고 버스 세워가지고 손님들 하고 같이 거들어줘서 일어났지요.”
젊은 날의 회고담이다. 그때 많이 다치지는 않았으나 막걸리 통자가 깨져서 난감했다.
막걸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시는 세무서에서 밀주조사를 많이 나왔다. 그러면 집집이 술을 감추느라 야단이었다. 이불을 많이 덮어서 냄새 나지 않게 하고, 장롱 뒤로 숨겨서 걸리는 거를 모면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양조장이 많이 감춰주었다. 밀주조사를 나온다면 미리 술 담근 집을 파악해서 세무서 직원을 데리고 술을 안 담근 집으로 안내하였다. 모두 이웃이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였다. 집에서 농주 좀 담가서 집안 어른들 봉양하겠다는데 굳이 박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고0태 씨는 우체국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우체국에서 판 물건이 석유였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다. 집집이 등잔불을 켜던 시절이다. 사람들이 석유를 살 땐 소주를 먹고 난 빈 됫병을 들고 왔다. 한 되 들이 병이라 해서 됫병이라 했다. 고종태 씨는 병목까지 가득 채워주려 하면 우체국장님은 그렇게 주면 남는 게 없다고 나무랐다. 그러면 안 볼 때 조금씩 더 주기도 했다.
고0태 씨는 군대에 갔다 와서는 농사와 목수를 했다. 그래서 오대산에 가서 사찰을 짓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쇠목성황당을 지을 때 매형과 같이 지었다.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고0태 씨는 마을 곳곳에 모든 관심이 있었다. 얼마나 마을을 사랑하는지 ‘쇠목성황당 유래’를 손으로 써서 가지고 있었고, 덕고산 신을 모신 이유, 쇠목시장, 쇠목 우시장, 유선라디오, 문화마을, 장리쌀, 유학계, 면사무소, 한우프라자 등 그야말로 살아있는 우항리의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