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5)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과 원리원본 집필
⑧ 이요한 목사의 입교
1952년 12월 1일에 한 사람의 목사가 범냇골 움막집을 찾았다. 이요한 목사이다.(당시 37세)
아버님의 얼굴도 모르고, 주소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1916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서 남하한 분이다. 1936년 일본에 유학하여 1941년에 동아신학교(1943년에 일본 동부신학교에 합병됨)에 입학했다. 아버님이 일본에 유학한 해가 1941년이다. 이 목사는 2학년 때의 조직신학 시간에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만민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12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행위는 예수님을 배신한 행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왜 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그 후에도 다른 교수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불량 학생이란 낙인이 찍혔고, 후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발각된 사람은 이 목사 한 사람 만이었다. 이 목사는 그 후 도요바시(아이치현)와 후지노이(나가노현)의 군수 공장에서 일했다. 이때에도 일주간에 한 번씩 헌병이 찾아와 감시했다. 요주의 인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목사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고, 종전 후 귀국하여 여러 가지 계시를 받게 되었다.
이 목사는 “한국에 주님이 오신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 기성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시대적으로 개신교를 중심한 섭리는 끝났다.”와 같은 계시를 받았다. 또, 이상한 꿈도 꿨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호외가 배포된 꿈이다. 호외에는 “한국 주 재림!”이라는 문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이 목사는 이 꿈을 본 다음부터는 철야기도를 교회에서 하게 되었다.
어떤 때에는 누군지 모르지만 형무소에서 노동복을 입은 죄수들과 함께 걸어 나오는 사람의 모습도 꿈으로 보게 되었다. 이 목사는 많은 기독교인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 서울의 삼각산(북악산)에서 옥세현(玉世賢) 할머니를 만났다. 옥세현 할머니로부터 평양에서 기성교회의 반대로 흥남 감옥에 간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부터 이 목사는 그 청년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는 그 청년을 만나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6·25 전쟁이 난 후 이 목사는 그 청년을 찾기 위하여 부산에서 피란민이 많이 모이는 국제시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북한에서 온 것 같은 노신사를 만나 말을 걸었다. 그 노신사가 평양에서 온 사람인 것을 알고는 평양에서 흥남수용소로 간 청년에 관하여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노신사는 남이 아닌 옥세현 할머니의 남편이었다. 그는 아내가 문 선생을 따라 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청년이 있는 범일동으로는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이 목사에게 못을 박았다.
이 목사는 노신사로부터 자기가 찾고 있는 청년이 부산 범일동에 있는 것을 알고 범일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문패도 없고, 누구 집인지도 모르는 집 문을 두들겼다. 문이 열리니 그곳에는 어떤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분이 바로 아버님이었다.
그때 아버님은 이요한 목사를 보자마자 “이 선생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아버님에 대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위엄을 느꼈다. 운동선수와 같이도 보였다. 초면이지만 늘 만나고 있던 사람 같았고, 형님같이 친밀감을 느꼈다. 하지만, 왠지 가까이 가기 어렵고,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이 목사는 유명한 목사들과 많이 만났지만, 아버님은 그들과 다르게 비교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아버님은 이 목사에게 “26세 때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목사가 일본신학교에 있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퇴학당했을 때였다. 그 이야기를 아버님이 듣고는 “이 목사의 이름이 생명록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이곳에 오게 되었군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날로부터 아버님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목사는 아버님이 그날 들어오는 돈은 그날 모두 썼다고 말했다. 아버님은 누가 찾아오는지를 알고 있어서 ‘오늘은 누가 온다. 갈비를 사 먹자.’고 말씀하시며, 식사 준비를 하고서 기다리실 때도 있었다. 당시 아버님이 있는 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대부분 피란민들이었다. 배고픈 사람이 찾아오면 아버님은 반드시 마음껏 먹게 하시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있는 돈을 다 주셨다.
물론, 아버님에게는 돈 한 푼도 없었다. 돈은 저축하지 않고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있는 돈을 다 주셨다. 아버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기성복이나 싸구려 옷을 사 주셨지만, 새로 온 사람에게는 좋은 옷을 사 주셨다. 따르는 식구에게는 돈을 절약하고, 손님에게는 돈을 많이 썼다. 이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님의 돈 쓰는 방법이 그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