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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2월 24일 새벽, 대구로 향하는 일제 세금마차에 기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마차에 실려있는 세금 8700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일제는 사건의 단서조차 전혀 찾지 못한다. 미궁에 빠진 완전범죄, 전대미문의 미제사건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1915년 경주에서 벌어진 세금마차 탈취사건으로 시작을 해봤는데요. 내돈 내놔! 내돈 내놔 내놔!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 일제가 운반하던 세금 마차에서 돈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예요.
류근/시인: 지난 주엔 철혈광복단의 만주 웨스턴 이었더니, 이번 주엔 경주 웨스턴+전설의 고향이 등장했네요. 요즘으로치면 현금운송차량이 털렸다는 건데, 요즘 현금 운송차량에는 삼중의 잠금장치가 되고 온전무장한 보안요원이 탑승하지 않습니까?
이윤석/방송인: 이건 다른 것도 아니고 세금이잖아요, 세금. 1915년 이면 일제강점기인데 그때는 원래 세금을 저렇게 운송을 했습니까?
박걸순/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당시 일제는 각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일단 해당 도청소재지로 보내죠. 그러면 도청소재지에서 수합해서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로 보내게 되는데 이때 우편배달망을 활용하게 돼죠. 그러다 보니까 신용과 신원이 확실한 일본인을 사전에 선정을 해서 그 사람에게 맡기게 돼죠.
이윤석: 그러면 결국 그 돈이 우리 땅에서 일제가 거둬간 돈, 아시죠, 우리땅에서 일제가 수탈한, 강제로 수탈한 그런 돈이잖아요. 그러면 그 돈을 가져간 사람이 우리 조선 사람들이면 통쾌해야할 것 같거든요. 야, 그거 내 돈이야! 가져와, 내돈 내놔!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의적義賊이죠. 그런데 이렇게 현금 실은 마차를 공격해서 현금을 탈취한 이런 사건은 우리가 강제로 병탐되기 전에도 있었던 일이예요.
류근/시인: 그래요 이쯤되면 연쇄 세금마차탈취 사건쯤 되는 건가요? 그런데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말이 있잖아요. 동종범죄 전과자에 의한 범행! 그러면 세금 마차만 전문적으로 노리는 그런 집단이 있었다는 뜻인가?
최원정: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애요.
이익주: 강제병탄 이전에 세금 실은 마차를 습격해서 현금을 강탈한 사람들은 의병이었어요? 이름이 밝혀진 사람도 있는데요.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한봉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봉수 (1883~1972)-조선말기의 의병장 1907~1910 3년간 세금 마차 6차례 기습), 1907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1910년에 잡힐 때까지 3년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저 세금 실은 마차를 기습해서 군자금을 마련합니다.
류근: 그러면 이것도 의병이 개입된 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게 1915년 이잖아요. 그때도 의병들이 할동을 했나요?
심용환/역사 작가: 공식적으로는 1910년에 강제병합이 되기 전에 의병활동은 다 진압이 된 걸로 발표를 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그 이후에 일제 기록을 보면 의병 정신을 이어 받아서 독립운동 무력항쟁 등 여러가지 활동이 이루어 지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윤석: 강제병합 이후에 일본이 강제로 수탈한 세금, 그리고 의병의 전술을 꼭 닮은 탈취사건, 저는 뭔가 느낌이 와요. 그런데 일제는 누가 한 일인지 실마리 조차도 못잡고 있다 이거 아닙니까?
류근: 그것도 신기하네요.
최원정: 그래서 지금 사건을 담당했던 순사부장의 수사경과보고가 있다고 하니까 그 현장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순사부장: 세금마차탈취 사건 수사경과 발표----------
류근: 많이 보던 분인데요~
박금수/순사부장役: 안녕하십니까 사건담당 순사부장 박금수입니다. 지금부터 1915년 12월 24일 새벽, 경주 효현동 효현교 부근에서 발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금마차탈취 사건의 사건수사 경과 발표를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경주 영일 영덕 등지에서 거둔 세금을 대구 도청으로 운반하던 중 일어난 사건으로 발견 당시 마차 속 세금 주머니는 모두 찢어져 있었고 8700원 상당의 현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현재 특정되는 용의자는 없으나 계속해서 수사의 망을 좁히고 있는 바 본 당국에서는 빠른 시일내 범인을 잡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윤석: 질문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매일신보의 이윤석 기자입니다. 정말 달리는 마차에서 돈만 사라진 겁니까? 다른 피해상황은 전혀 없습니까?
박금수: 네, 현재까지 보고된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마차 안에는 일반 우편물도 실려있었는데 우편물은 전혀 손상되지않고 오히려 이 현금뭉치만 사라졌습니다.
류근: 그럴 수가 있나요 달리는 마차에서 현금이 사라졌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박금수: 거, 누구셔?
류근: 저, 카더라 통신 류근기자입니다.
박금수: 요즘 조선기자들이 질문이 참 날카롭구만,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 이 다리가 바로 경주 효현교 라는 다리가 되겠습니다. 무열왕릉 남쪽 약 1.5km 지점에 있고 이 경주 시내에서 대구로 갈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지나가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마차에는 요렇게 마부가, 여기 마부가 보이죠, 마부가 한명 밖에 없었어요. 자, 그리고 뒤에 짐칸에는 돈다발 뭉치가 있었던 것이죠.
이윤석: 그러면, 범인들은 이 마차가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습격을 한게 아닐까요?
박금수: 그런데 마차는 다리 위로 건너지 않고 강쪽으로 건너고 있었습니다.
류근: 이것도 좀 이상한데~
박금수: 이 마차가 다리에 왔을 때 이 다리 한복판이 파괴가 되어있었어요. 다리를 건널수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이 강쪽으로 건넜던 것이죠. 그런데 당시는 겨울이었어요. 강수량도 많지도 않고 강은 얼어 있었을 수 있고 울퉁불퉁하고 데코보코でこぼこ하고 여기저기 데스네 한강을, 일본말입니다. 건널려고 하니까 말이 안갈려고 그래요. 마부가 어떻게든 건널려고 말과 말씨름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말은 말을 안듣고~
이윤석: 그럴 때가 습격하기 좋은 타이밍 아닙니까?
박금수: 그때가 바로 짐칸을 턴 것이 아닌가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류근: 다리가 파괴되어 있었다. 이게 참 의심스러운 대목아닙니까?
이윤석: 다리가 파괴된 이유가 뭡니까? 그 전에 비나 눈이 왔나요?
박금수: 당신들이 직접수사해야 데쓰네~
류근: 갑자기 순사부장 갑질입니까?
박금수: 지금까지 수사한 바로는 범인들이 사전에 마차이동경로를 미리 알고 치밀한 계획하에 다리를 파괴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윤석: 그러니까 지금 설명을 들어보면은 계획된 범죄 같은데 지금 용의자가 전혀 없는 거예요? 아니, 내부자 소행일 가능성도 없습니까?
류근: 그리고 더 걱정되고 궁금한 거는 저게 지금 세금이잖아요. 탈취가 됐으니 해당 지역 세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시 걷어요?
박금수: 아직도 수사중이고~ 솔직히 잘 모르겠고~
류근: 배짱이야
심용환: 아는게 없어~
최원정: 그렇게 해서 범인을 잡겠어요?
박금수: 마지막까지 기다려 주시고~ 수사당국은 범인 색출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윤석: 설명을 들어보니까 강도사건은 아닌 것 같애요. 뭔가 있어요. 지금 다리가 부서지고 세금이 탈취되고~, 옛날 이럴 때 저희 어머니는 뭐야 이거 신문에 날일 아이가 이랬거든요. 그때도
심용환: 신문에 보도가 됐구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제가 그때 신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짜잔~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조선승객이 그 행랑 옆에 앉아있었으나 수상한 자인 줄은 생각도 아니했고, 마부외에 한명이 더 있었다는 얘기고 여기서 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돈이 없어질 때 그 조선인도 같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같이 오던 사람이 간 곳도 없는지라(1915년 12월 26일 매일신보),
류근: 저기 신문 내용을 보면 “8700원 분실 도적은 조선사람” 이래 가지고 조선 사람을 아예 명시를 하고 있잖아요. 갑자기 조선사람이라고 못을 박는 건 범인을 못잡을 것 같으니까 뒤집어씌우는거 아녜요.
최원정: 처음에는 조선 사람이 가져가기를 바랬는데 막상 또 조선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서 기분이 안좋네요.
이윤석: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우리가 추리에서 전제 두개가 잘못됐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부 혼자였다 습격당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습격을 당한게 아니라 애초에 또 한명이 타고 있었던 그 사람이 돈을 들고 조용히 내렸다. 요건 말이 되긴 되네요.
류근: 그런데 오히려 또 그 마차에 조선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금을운송하는 마차에 아무나 탈 수 있나요?
박걸순: 당연히 그렇진 않았죠. 세금을 운송하는 마차에는 사전에 일제 당국의 허가 받은 사람만 탈 수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바로 이 마차에 사전에 허가 받지 않았던 조선 사람이 타 있었던 겁니다.
류근: 둘이 공범인가?
최원정: 그래, 마부가 허가없이 누군가를 태웠다는 건 마부가 굉장히 의심스럽네요. 당시의 세금마차를 운행했던 그 마부가 송환돼 있다고 하니까요. 마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도록 할까요?
이윤석: 제 생각에는 마부가 결백하고 심지어 착한 사람일거예요. 아마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믿어 주세요. 얘길 들어 주세요.
-----------------이윤석/마부役: 일본 전통옷 입고 무대에 등장-------------------------
일본인 마부: 저는 그날 세금 마차를 끌었던 마부입니다. 그 조선인이 세금 마차가 출발하기 하루 전날 밤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음날 새벽에 나가야 되는데 잘까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가 자꾸~~
이윤석/수상한 조선인役: 계십니까? 콜록~콜록~ 거기 아무도 안계십니까요~~
이윤석/마부役: 이런 소리가 나는거예요. 그래 가지고 누가 왔나 싶어가지고 밖으로 나가 보니까 조선인이 ~비틀~비틀, 아이고 선생님이오 수고하십니껴, 콜록~콜록~ 제발 저 좀 살려주이소! 제가요 내일 대구 병원에 안가면 죽겠습니데이! 사람 살려! 선생님이여, 진짜로~~제발 좀 마차에 좀 태워 주이소!!
마부: 처음에 제가 아유! 안돼요!. 안돼 가세요! 몇번이나 돌려 보냈는데, 얼굴이 시커먼게 진짜 큰일 한번 치를 것 갔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선인을 우리집에 하루 재우고 다음날 마차에 짐칸에다 싣고 그리고 대구로 향했던 겁니다.
최원정: 그러면 죽기 직전에 환자가 돈을 갖고 도망갔다는 얘기예요?
마부: 그 사람이 없어지고 돈도 없어지고~ 그랬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저는 생각하는거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다 말씀 그린 겁니다. 진짜 입니다.
--------당당당당당당—따라닷따라닷 삐릿-------공개수배사건 25시---이 마차에 환자로 위장하여 탑승했던 조선인을 공개수배합니다. 이 사람은 세금마차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대구와 경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람을 아시거나 목격하신 분이 있다면 아래 보이는 연락처로 제보바랍니다. 제보전화 국번없이 11X.
최원정: 이윤석씨의 모노 드라마를 보셨어요. 열열하시네~
류근: 진짜 죽을 거 같았어~
이익주: 쓰러지는 줄 알았어~
류근: 환자역활은 연기가 아니었어요~
최원정: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이제 환자로 위장해서 그 중간에 세금마차에 같이 탑승해서 돈을 들고 달아났다 그거잖아요.
류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아니라 돈과 함께 사라지다.
심용환: 조선인이 범인이다 라는 주장외에는 아무런 단서, 근거가 안나오기 때문에 결국은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가 또 무단통치 (무단통치-강제병합 이후 일본 헌병경찰을 앞세운 1910년대 식민통치 방식) 기간이고 일제의 삼엄했던 철통 같은 통치방식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고 더욱이 영구미제사건으로 딱 귀결이 되고 말아요.
이윤석: 이 사건의 범인을 아직도 현재까지도 모르는 겁니까?
이익주: 일제는 끝까지 이 사건의 범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된 다음에 이 사건의 범인이 스스로 밝혀져요. 1910년대 독립운동을 했던 박상진의 일화를 기록했던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약抄-1916년 편찬추정 독립운동가 박상진에 대한 기록)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박걸순: 고언실기약초에 의하면 총사령관 박상진이 사전에 세금마차 운용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를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합니다. 권영만을 환자로 위장을 해서 마차에 동승시키고 또 우재룡은 마차가 지나가는 효현교 부근에서 다리를 파괴하고 대기하도록 진행을 하지요. 박상진, 권영만, 우재룡, 이 세분은 光復會 라고하는 단체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입니다.
이윤석: 광복회, 저는 최근에도 들어본거 같애요. 계속~~ 광복절날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은 거론이 많이 되요~
최원정: KBS 다니시는 분들은 잘 알거예요. KBS 회관 바로 앞에 광복회관이 있잖아요.
이익주: 아니예요. 그건 다른 겁니다. 독립운동할 때 光復會 라는 이름을 부친 단체가 많이 있었어요. 대한광복회 또 광복군도 있잖아요. 대한광복단 여러가지가 있었는데~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윤석씨가 신문에서 본 광복회는 1965년에 유족 후손들을 위해서 만든 일제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들과 국가보훈단체예요. (현재 알려진 광복회-1965년 조직, 독립유공자와 유족 후손이 만든 보훈단체), 그리고 지금 이야기 하는 광복회 (光復會-1915년 대구에서 조직, 무장독립운동단체)는 1915년대 대구에서 만들어진 무장독립운동단체 입니다.
류근: 그렇군요. 그런데 또 그러구 보면 광복회도 생소하지만~~ 박상진 이란 이름은 더 생소해요. 김상진, 한상진, 오상진 까지는 알아요. 광복회 박상진 이라는 이름은 참 죄송하게도 처음 듣거든요.
최원정: 사실 많은 분들이 오늘 생소하다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어떤 분이셨어요?
이윤석: 지금으로 치면 대대로 금수저 집안에서 나고 자랐네요.
심용환: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댁 아시죠.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원정: 12대가 만석지기였잖아요.
이윤석: “동네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라고 말한 분이시잖아요.
심용환: 박상진이 경주 최부자댁의 사위였습니다.
최원정: 재력까지 갖췄네요.
이윤석: 정치권에서 명성이 높던 가문(정치家)+또 전국최고의 부자 가문(재력家)이 만난 로얄패밀리 였군요. 날개를 달았네요.
류근: 그냥 주말 드라마인데요.
박걸순: 집안만 좋았던게 아니죠. 박상진 개인도 아주 대단한 수제였습니다. 양정의숙(1905년 설립한 사립법학전문학교)에서 법학을 전공을 하게 되고 1910년 봄에 서울의 판사시험에 합격을 해 가지고 평양법원에 판사로 발령까지 나게 돼죠. 그런데 박상진이 판사직을 내던집니다.
류근: 1910년이면 그게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실시된 판사시험 아닙니까?
박걸순: 네, 그렇죠.
류근: 그러면 1호판사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1호 판사의 명예를 버린 것),
최원정: 그러니까 임용거부,
류근: 이 1910년 이란 숫자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1910년 봄이면 더군다나~ 경술국치 직전인데 제가 봤을 때는 판사시험 정도야 내가 합격해 줄 수 있어 하지만 일제의 명을 받는 판사라면 나는 안해버리겠다 이렇게 선언한 것이 아닐까.
이윤석: 맞는 얘기 같애요. 1910년에 합격을 했다면 그전에 법공부를 할때는 우리 지난 시간에 남한토벌작전 그래 가지고 의병들 많이 잡아가고 사형판결 내리고 그랬잖아요.(남한대토벌작전-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일본의 의병대토벌). 그걸 직접 보고 듣고 자라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익주: 맞아요. 박상진이 이런 선택을 한데는 스승의 영향이 아주 컸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서대문 형무소 그 당시에는 경성감옥(現서대문 형무소)이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구금되고 고문당하고 심지어는 사형도 당하였거든요. 그 첫번째 사형수가 누군지 짐작이 가세요?
일동: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요. 진짜 어렵다.
최원정: 서대문 형무소는 가봤지만 서대문 형무소 사형수 1호는 누구였을까?
류근: 이것도 죄송하네요.
최원정: 옥사가 아니라 사형이 집행된 사람~~
이윤석: 안중근 의사는 중국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죠.
최원정: 우리가 왜 이걸 모르죠?
이익주: 1908년에 개소됐는데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이란게 있었어요.(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1908년 전국의 의병이 서울로 진격했던 작전), 우리 200회 의병특집에서 얘기했잖아요. 그때 서울 진공작전을 이끌었던 사람이 허위입니다 (허위(1855~1908)-조선말기의 의병장 서울진공작전의 군사장 그의 호를 딴 왕산로 旺山路가 서울 동대문구에 있다),
류근: 청량리 왕산로~
류근: 의연하게 나섰다. 정말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은 확실하 거 같네요.
이윤석: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최원정: 그런 훌륭한 의병장의 제자니 판사직을 거부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텐데, 이후의 행보가 궁금해 지는데요.
박걸순: 박상진은 이제 판사직을 사임을 하고 1911년에 중국 상하이로 갑니다. 여러가지 세계 정세도 돌아보고 독립운동에 관한 방략도 구상하기 위한 여행이었는데 마침 그때 상하이 인근은 신해혁명의 중심지였죠. (신해혁명-1911년 중국의 공화혁명 전제군주제 타도, 중화민국 건설), 1911년에 일어났던 신해혁명은 수천년간 계속된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건설했던 대단히 의미있는 그런 것이죠. 그 신해혁명의 현장에서 박상진은 민중들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건설되는 혁명의 과정을 직접봤고 그 과정에서 민중과 혁명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가지고 귀국을 합니다.
심용환: 그냥 돌아온게 아니라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쑨원을 2년 있다가 직접 찾아가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 민중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이야기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쑨원(1866~1925)-신해혁명을 이끈 중국의 정치가),
최원정: 쑨원을 직접 만났다고요?
심용환: 쑨원을 직접 찾아가서~
최원정: 근대 중국의 아버지라는 그 쑨원을~
심용환: 정말 대범하지 않아요? 그런데 좀 아타까운 건 신해혁명 후 2년 지난 때가 언제였느냐면 위안스카이 라고 중국북부군벌에 의해서 신해혁명이 위기에 처한 기한이어서 도저히 쑨원 입장에서는 도와줄 처지가 아닌 거예요. (중국북부군벌 위안스카이-신해혁명 직후 쑨원의 위기), 그래서 권총 하나를 선물로 박상진에게 주면서 격려했다고 합니다.
박걸순: 박상진이 중국에 갔을 때 쑨원도 만나지만 또 일설에 의하면 동북부 군벌이었던 장쭤린(장작림)도 만나 가지고 독립운동을 협의했다고 합니다.
박걸순: 1911년 중국에서 귀국해서 1913년 쑨원을 만나고 1915년에 박상진 선생이 광복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광복회가 내세웠던 중요한 투쟁강령은 독립군을 양성해서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쟁취한다고 하는 독립전쟁론에 입각을 한 거였죠. 광복회가 만들어질 때 그 창단이념을 적은 결의문이 있는데 이걸 이윤석씨가 한번 낭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윤석: 영광입니다--------------광복회 서약문------------
우리는 대한 독립광복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희생함은 물론, 우리가 일생 동안 목적하지 못할때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변하지 않고 적을 죽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천지신명 앞에 맹세합니다.
본인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목적을 만약 달성하지 못할 때는 자자손손이 계승을 하겠다. 그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궐기, 의지가 진짜 바로 돋보이네요.
류근: 독립선언서 공약 3장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의 원작인 것 같애요.
최원정: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군자금을 마련하고 무기를 비축하고 무력봉기 이런 어떤 용어들이 군대강령같기도 하고~~
함경도-최봉주, 평안도-조현균, 황해도-이관구, 강원도-김동호, 경기도-김선호, 충청도-김한종, 경상도-채기중, 전라도-이병찬,
이윤석: 일단 여기 두분은 아까 세금마차탈취 사건에서 환자역활해서 탈취한 권영만, 다리를 부순 우재룡~
류근: 저기 부사령 이진룡 밑에 〔 ? 〕는 뭡니까?
최원정: 밝혀지지 않은 인물인가요?
이윤석: 이쪽 일대에서 안중근 의사도 활동하지 않았나요?
최원정: 안중근 의사는 이미 돌아가신게 아닌가요?
류근: 광복회는 1915년이니까 안중근 의사는 1910년에 이미 돌아가셨죠. 1915년이면 백범 김구 선생쯤 안될까요.
이익주: 정말 저 자리에는 누구나 아는~부대장, 독립군 부대장이 저 자리에 있어요.
심용환: 광복군 부사령이었던 이진룡이 1917년 5월 25일에 체포가 됩니다. 그래서 이때 이진룡의 후임으로 김좌진을 임명하게 됩니다 (김좌진 (1889~1930)-독립운동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
이윤석: 청산리 대첩하면 김좌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박상진이 김좌진 위에 있네요. 높은 사람이네요.
류근: 아니야, 지금 보니까 박상진, 김좌진 둘다 진짜 돌림이잖아요. 그런데 누가 봐도 윗상자 上진이 左진 보다는 위인게 분명합니다. 사실 이게 아재 개그 같애서 죄송한데 그렇게 따지면 좌진쯤 되면 왼팔쯤 되지 않을까?
최원정: 上진의 왼팔 左진~ 右재룡은 오른팔~
박걸순: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박상진이 김좌진을 동생이라고 표현을 하고 (아우야~), 또 김좌진은 박상진을 형이라고 표현을 하고 의형제를 맺었죠. 두분이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아주 각별한 관계였고, 이런 인간적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박상진이 김좌진을 만주로 파견을 했던 거죠.
최원정: 박상진이 김좌진을 파견한 거예요?
박걸순: 그렇습니다.
이윤석: 그러면 박상진이 없었다면은 청산리 전투도 없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심용환: 1917년 8월달에 군자금 6만원(현재가 약10억3천만원)을 박상진이 김좌진에게 줍니다. 동포들을 만주로 또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군사훈련도 받게하고 농사도 짓게 하고 (둔전이라고 하죠), 평소에는 경작을 하고 유사시에는 독립군의 역할을 하는 이런 것들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임무로써 박상진이 김좌진(만주 총책임자)을 보내게 됩니다.
류근: 지난번에 다루었던 신흥무관학교 내용과 너무 똑 같아요.
이익주: 바로 그거에요. 하나의 노선이 된 거죠. 실제로 박상진은 신흥무관학교 처럼 만주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해외독립군 기지를 만드는 것,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실제로 신흥무관학교에 자금지원도 합니다.
류근: 그러니까 아까 세금마차를 탈취해서 얻은 돈도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쓰였겠네요. 그런데 요즘도 국가예산에서 통상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게 국방비 거든요. 우리도 2019년도 전체 예산에서 약10%(약46조원)가 국방비예요. 군대를 양성하려면 지방의 세금마차 한번 탈취해 가지고 될 것 같지 않은데요.
이윤석: 김좌진 만주행에 6만원인데, 세금탈취 아까 8700원이었단 말예요. 그러면 그 고생을 일곱번을 해야 만주엘 한번 보낸다는 얘긴데~
최원정: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광복회의 군자금 마련 방법은요?
------------1917년 11월 10일 오후 7시경, 영남 제일의 부호 장승원의 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들이닥쳤다. 장승원에게 총을 겨눈 후 준비한 격문을 붙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데~
이윤석/광복군役: (류근 시인을 향하여) 조국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그리고 가슴에 격문을 붙이고 갑자기 사라진다)
류근/장승원代行: (어리둥절) 저 양반이 난 민족 시인이예요.
일동: 웃음
류근: 이게 뭐예요---오로지 광복을 외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도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를 주노라---------광복회--------작난 아닌데, 지금 나한테~
이익주: 장승원이란 사람은 그 당시 칠곡에 살고 있던 영남 제일의 부자 또는 한강 이남에 제일의 부자라는 말을 듣던 사람이예요. (장승원(1853~1917)-경상북도 칠곡에 살던 대지주 친일파 장직상의 아버지), 그런데 그 전에 박상진의 스승이었던 허위와 인연이 있습니다. 허위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된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허위가 1907년에 서울진공작전을 할 때 군자금을 내기로 하고는 안냈어요. 그리고 이때에 와서 제자였던 박상진이 군자금을 요구했는데 이때에도 또 거절합니다. 그래서 광복회가 장승원을 처단한 거죠.
최원정: 이유가 충분하네요.
이윤석: 스승님의 원수, 십년 동안 칼을 갈았다 아녜요.
최원정: 아예 군자금을 배당을 한 거예요? 재산이 많이 있으면 조금 더 내시오, 일종의 독립세 처럼~
박걸순: 사전에 액수를 통지해 놓고 그걸 받으러 가는 거죠.
심용환: 진짜 터프하다~
이윤석: 군자금 고지서~
심용환: 한쪽에서 쑨원 만나러 가고, 한쪽에서 부호에게 돈내라 하고~
박걸순: 광복회가 했던 친일부호 대표적인 사건들이 많이 나와 있지요.
1916년 5월 벌교부호 서도현 사살사건
1916년 5월 보성 박곡 양재성 처단사건
1916년 9월 대구부호 서우순 권총사건
1917년 1월 서인선 납치사건
1917년 11월 칠곡부호 장승원 살인사건
1917년 12월 문경부호 조시영 강도사건
1917년 12월 안동부호 안승국 강도사건
1918년 1월 아산 도고면장 박용호 살해사건
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1916년 9월달에 대구 권총사건입니다. 그 당시 대구에 살고 있던 친일 부호 서우순에게 사전에 액수를 통지하고 돈을 받으러 갔는데 사전 밀고를 해가지고 발각이 났다. 그때 일제 당국에서는 이걸 사건화 해서 이 범인들로 육혈포 강도단이라고 지목을 한 거죠.
최원정: 육혈포 강도단, 아는 단어인가요? 저는 생소한데~
심용환: 이게 1916년 9월 10일 그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인데 륙혈포 강도단 사건을 수사하면서 일본수사관들이 범인을 육혈포 강도라고 특정을 한 거죠.
최원정: 육혈衄血 衄이 코피라는 뜻이잖아요? 육혈이 코피예요. 코피나게 때리는 ~탁탁~
류근: 지난번에 鐵血光復團이 있었잖아요. 거기에서는 피 血자가 분명했는데, 육혈포에서도 저 혈자가 피 血자냐?
----------------박금수 박사 등장/전통무예전문가: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육혈포인데요. 여러분들, 서부영화에서 많이 보셨죠. 영화<셰인>에서 주인공이 재빠르게 연발사격을 하는 자세, 그런데 이걸 왜 육혈포 라 부르느냐 이렇게 탄창을 열어 보면은 구멍이 6개가 있어요. 여기에 총알들을 장전하는 거죠. 그래서 여섯 六자 구멍 穴자 그래서 六穴砲 라고 부르는 겁니다. 미국 콜트社에 육연발 권총, 38구경, 스미스웨손 등이 바로 이런 육혈포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실린더에 총알이 들어가서 연발사격이 가능한 권총들을 우리는 六穴砲 라고 불렀습니다.
최원정: 저걸 러시아 루레트 할 때 쏘는 총이죠?
이윤석: 영화에서 많이 봤어요.
박금수: 그런데 요즘 첩보영화나 홍콩 르와르 영화를 보면 이런 권총, 탄창식 권총들이 많이 나오죠. 영화 <영웅 본색>에 권총을 보면 탄창집을 넣어서 총들이 일렬로 있는거죠. 당시에 광복회원들은 주로 리벌버식 육혈포 권총을 사용했었는데요. 이게 탄창식 권총보다 일단은 저렴하고 구하기 쉬었어요. 총열을 짧게 만들 수 밖에 없어요. 파괴력이 약하고 정밀 조준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탄창식 총들은 총열을 길게 만들 수 있고요. 바로 가스를 밀어내는 힘으로 재장전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김좌진 장군이라든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 그리고 만주에서 활약한 많은 독립군들은 탄창식 권총인 마우저식 권총을 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최원정: 박금수 박사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활약이 대단하셨습니다. 광복회가 권총을 사용해서 무력투쟁을 한 거고 일벌백계로 부호들을 처단해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그런데 군자금을 만주로 보내야 될 것 아네요.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애요.
박걸순: 그래서 당시 박상진이나 광복회 회원들이 썼던 방법이 상회를 설립하는 겁니다. 일종의 보부상을 개설하는 거죠. 1912년에 대구에다가 자본금 24만원의 상덕태 상회를 설립하고 이후에 계속해서 중국 만주에 장춘, 봉천, 단둥 그리고 국내에 신의주, 평양, 해주, 인천 서울, 광주, 예산, 삼척, 충주, 인천~ 계속 이런 상회를 설립을 해 나가죠.
류근: 이름이 참 특이 하네요. 상덕태 상회? 명태 덕장 합쳐서 덕태?
박걸순: 상덕태 상회는 자본금 출자에 참여했던 (양정의숙 동창) 박상진의 상을 따고, 김덕기의 덕을 따고, 오혁태의 태를 땄다. 그래서 상덕태 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윤석: 저는 덕이 높고 크다 해서 상덕~태 상회다 이런 건 줄 알았어요.
심용환; 상회를 설립하면 일제의 규제를 덜 받을 수 있고 자금운용하는데 유리했던 것 같애요. 특히 곡물 수입대금 자금을 보내는 것처럼 꾸미기도 하고 해외로 돈을 보내는 데도 장점이 있었던 거죠.
최원정: 그러니까 일종의 비자금 조성할려고, 페이퍼 컴퍼니 만들고 하잖아요
심용환: (웃음) 페이퍼 컴퍼니?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죠.
최원정: 이건 불법이지만 그런 식으로 굉장히 절약있게 만든거예요.
이익주: 그래서 이게 군자금이 되잖아요. 또 한가지 필요한게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날수 있는 곳,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는데 이 장소로 가장 적합한 곳이~??
류근: 술집! (일동) 동의!
이익주: 여관이었어요. 그래서 여관을 만드는데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가면 바로 단동, 거기가 옛날 이름으로 안동현이거든요. 거기에 안동여관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광복회 모임과 회의를 수시로 열게 돼요.
이윤석: 영화나 드라마를 보게되면 비밀거점이 꼭 나오잖아요. 요번에 영화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보면은 빵집이나 약방에서 모여요. 하긴 인생은 빵아니면 약인데~
심용환: 정말 느낌이 확 오는데~
최원정: 명언이네요. “인생, 빵 아니면 약”,
이윤석: 상회와 여관이라는 데는 누가 드나들어도 이상하지가 않아요.
류근: 절묘한 아이디어죠.
이윤석: 박상진 이란 분이 정말 뛰어난 전략가였어요. 비상한 분이었던 것 같애요.
심용환: 오늘 의외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신채호 (신채호 (1880~1936)-일제강점기, 언론인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선생님이 안동여관에 체류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1년 봄인데 안동여관에 체류하면서 국내에 연락을 주고 받았던 아주 중요했던 독립운동의 장이었다는 거죠.
최원정: 보니까 박상진, 김좌진, 신채호, 이런 분들의 이름이 다 여기 나오잖아요. 역사의 퍼즐을 맞추다 라는 편이 딱 맞네요.
이익주: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근 조명을 받고 있는 의열단의 김원봉도 이 광복회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류근: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그 김원봉이예요?
이익주: 그렇죠. (김원봉(1898~1958)-항일 무장독립투쟁 단체의 의열단 조직, 국내 일제기관 파괴-주요인물 암살),
류근: 그런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무장투쟁단체, 의열단과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류근: 진짜 오늘 얘기를 할수록 거듭 죄송해 지는데 박상진 이라는 인물과 광복회 라는 단체를 오늘 처음 알았거든요. 이렇게 보니까 우리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분들이고 단체인데 앞으로 정말 더 깊이 정확하게 기억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원정: 그냥 초석을 다졌다는 거 이상으로 그냥 독립운동사에 큰 페이지를 장식한 분인데~
류근: 이상할 만큼 모르고 있었어요.
이윤석: 외워둬야해요. 박상진은 김좌진의 형님뻘이었고 광복회와 의열단의 고모부뻘이었다.
이익주: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박상진은 3.1운동 하루 전날 사형선고를 받아요. 부호들을 처단하면서 일본의 수사망을 잘 피했는데 1918년 2월 1일날 체포되고 맙니다. 그리고 1919년 2월 28일날 재판을 받았는데(대구법원), 그때 보안법 위반, 공갈, 살인, 방화, 강도, 범인장닉, 그리고 총포화약류 취제령위반, 횡령 이런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최원정: 하필 왜 3.1운동 전날에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이윤석: 나라를 위해서 부도 명예도 모든 걸 바쳐서 치열하게 노력을 했는데 결국에는 공갈 살인범이 돼서~ 옥중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거 잖아요. 그때 심정이 어땠을까?
최원정: 본인이 보낸 김좌진 장군이 거뒀던 청산리 대승 소식도 옥중에서 들으신 거죠? 만감이 교차했을 거예요.
류근: 당시 박상진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 옥중에서 시를 하나 남깁니다. 제가 잠깐 읽어 드리겠습니다.
박상진의 옥중 절명시
어머니 장례 마치지 못한채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강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이내 몸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 걸어갈까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에
다행히 대장부로 태어났건만
이룬일 하나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는 회한과 비애가 느껴지죠. 그래도 참 구구절절 독립지사 애국지사 로서의 기개와 결연함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이윤석: 제가 감히 이 시에 조금 덧붙힌다면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이라고 하셨지만 지금 역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셨고 이룬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지만 독립이라는 큰 일을 결국 이루어내셨어요. 3.1운동 전날있었던 사형선고는 결국은 일제에 대한 사형선고가 되었다는 거, 그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최원정: 그야말로 부와 명예를 다 조국을 위해 바치신 분이예요. 남들은 부와 명예를 위해서 나라까지 팔아먹는데~
심용환: 사실은 오늘 제가 꼭 소개하고 싶은 사진이 하나 있어요. 이걸 제가 가지고 왔는데 이 거는 1961년 3월 5일 부산일보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이 “식량이 떨어진 선열의 유족” 이라는 제목이예요. 그리고 이분이 누구냐 박상진 선생의 아내였던 최영백 여사입니다.
“憂國의 그 얼” 만이 糧食
絶糧은 先烈 遺族에도
=35歲로 숨진 光復會獨立運動主導者 朴尙鎭氏=
81歲의 夫人 崔女史는 冷房서
최원정: (심용환 작가가 들고 있는 사진을 보며) 차디찬 방에서 저렇게~
류근: 우국의 그 얼만이 유족이 식량이 떨어져서 말이 됩니까? 배고픔과 병에 시달려~ 얼굴이 부은 崔女史~
심용환: 결국은 최영백 여사하고 박상진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빠져들게 되고, 박경준-박상진 의사 아들, 최영백-박상진 의사 부인, 문자 그대로 친척집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셨고~,
<제망자상진문 祭亡子尙鎭文> 박상진의 아버지가 쓴 제문---일곱 집안 백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고,
류근: 남편은 판사 까지를 박차고 모든 걸 다 던졌는데~
심용환: 애국과 위국 헌신의 결과 라는게 이렇게 비참한 고통속에 그 가족이 내던져 있다 라는 거잖아요.
이익주: 그것도 해방된 조국에서 일어난 일이예요!!
류근: 그러게 말입니다.
심용환: 45년도 아니고 61년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감당이 안돼요.
류근: 면목 없습니다.
심용환: 사실 우리가 무슨 때만 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보도하잖아요. 이젠 제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해서 그렇게 안하고 있다는 품격있는 사회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현대사에 이런 훌륭한 분들이 배고프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역사에서 끝까지 추격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이윤석: 사진 한장이 많은 말 보다도~
최원정: 드라마 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사셨던 광복회를 이끌었던 박상진, 역사에 대한 얘기나눠봤는데~ 저는 계속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 커 가지고 어떻게 마무리할까 싶어요.
류근: 고헌 박상진(1884~1921) 의사, 아까 광복회 창설문을 제가 들었잖아요. 보니까 우리가 일생동안 달성하지 못할 때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고 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자자손손 계승해서 지금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고 있는 것에 성공하고 있는가 또 일제 식민지를 다 극복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 되묻게 됩니다.
최원정: 이제 조명 받으실 분과 정리되어야 할 사람이 뒤바뀐 채 나라가 꾸려 나갔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오늘 이렇게 한탄해 하면서 박상진 열사를 다루고 있는 거 같애요.
이익주: 100년전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 있죠. 아까 세금마차탈취 사건을 일으킨 의병, 청주의 한봉수 의병장의 손자가 전에 국방부 장관을 한 한민구씨 예요 그리고 장승원의 아들이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최초의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장택상씨입니다. 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제는 단순하지가 않죠. 이제는 우리 삶 속에서 우리와 관계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되는데 얼마나 우리가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인물을 평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런 커다란 숙제를 안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는 일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힘과 무관하게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할 것인 것 우리가 이런 노력을 지금부터 더 많이 기울여야 될 것 같애요.
박걸순: 패널들께서 박상진 선생에 대한 호칭을 들어보니까 선생 의사 열사 다양한 호칭들이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그분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가에 따라서 붙힌 호칭이 다르게 있거든요. 義士-무력 항거로 의롭게 죽은 사람, 烈士-맨 몸 저항으로 지조를 나타낸 사람, 그런데 지금 다 다르게 말씀하셨듯이 박상진 선생에게는 그 어떤 호칭에도 걸 맞는 독립운동의 굉장히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라고 평가를 할 수 있죠. 우리가 올해(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3.1운동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1910년대에 다양한 비밀결사 투쟁들이 있었고 그 가장 중심에 박상진과 광복회가 있었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이런 분들이 더욱 더 조명받고 각광받고 계속 발굴되고 해석되는 시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광복회와 박상진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하고 다음 시간에는 ‘조센징은 때려서 다스려라’ 무단통치 시대의 이야기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7화, “광복회와 박상진”에서 인용).
① 독립운동가 박상진은 생소한 이름이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경술국치 해인 1910년 봄 판사시험에 합격한 수제이고,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나라의 독립운동 위해 판사직 사임하고 1915년 광복회를 조직한다, 그는 명가문의 자제에다, 부인은 유명한 경주 최 부자댁의 딸이다,
② 1908년 9월 박상진의 스승 허위가 경성감옥(現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함, 사형수1호,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 장례까지, 박상진은 1911년 중국 상하이로, 쑨원의 신해혁명을 목격하고 귀국, 2년후 직접 쑨원 찾아가 대한제국 상황 도움요청, 쑨원 권총을 박상진에게 선물 격려,
③ 1915년 광복회 편제,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진룡 [ ? ], 지휘장 우재룡 & 권영만, 본부사무소 이복우. 전국단위 함경도-최봉주, 평안도-조현균, 황해도-이관구, 강원도-김동호, 경기도-김선호, 충청도-김한종, 경상도-채기중, 전라도-이병찬, 부사령 이진룡 1917.5.25.체포, 김좌진 후임 임명,
④ 박상진과 김좌진의 인간적 관계, 박상진 형 김좌진 동생 의형제, 1917년 8월 박상진이 군자금 6만원(현재가 약10억3천만원)을 김좌진에게 주고 만주 총책임자 임무, 백성들 만주로 이주 군사훈련 평소 경작생활 유사시 독립군 역할(둔전), 김좌진 (1889~1930) 1920.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 박상진이 없었다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도 없었을 수도,:
⑤ 1913년 박상진이 쑨원을 만나고 자기의 독립운동 노선, 자금 마련해서 혁명운동 근거지, 무기 비축 독립군 양성, 무력봉기 통해 일제타도 세가지, 1915년 광복회 투쟁강령은 독립군 양성해, 적당한 시기 독립쟁취 독립전쟁론, 광복회의 강령과 의열단의 강령은 일치,
⑥ 박상진과 광복회 회원들 권총으로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마련, 군자금 만주로 보내는데 상회 설립, 1912년 대구에 자본금 24만원 상덕태 상회 설립, 이후 중국 만주 장춘, 봉천, 단둥에, 국내 신의주, 평양, 해주, 인천 서울, 광주, 예산, 삼척, 충주, 인천~계속 상회설립, 상덕태 상회는 자본금 출자 양정의숙 동창 박상진의 상, 김덕기의 덕, 오혁태의 태를 딴것, 상회 자금보내는데 유리,
⑦ 1907~1910, 조선말기 청주 의병장 한봉수 3년간 세금 마차 6차례 기습, 군자금 마련, 1917.11. 10. 영남 제일 부호 장승원의 집 장승원 권총사살, 의병장 허위 추천 장승원 경상북도 관찰사, 1907년 허위 의병 서울 진공작전 때 장승원 군자금 약속하고 거부, 1908.9. 허위 사형 당하고 10년후 박상진 장승원에게 군자금 요구 또 거절, 허위의 원수 갚고자 광복회 장승원 처단,
⑧ 박상진은 부호들 처단하며 일본의 수사망을 잘 피했는데 1918년 2월 1일날 체포, 1919년 2월 28일날 재판, 보안법 위반, 공갈, 살인, 방화, 강도 등 죄목으로 사형 선고, 바로 3.1운동 전날, 박상진은 독립운동의 초석 다지고 독립운동사에 큰 페이지 장식, 앞으로 더 깊이 기억 해야,
⑨ 1961년 3월 5일 부산일보 기사, 남편은 판사 까지 박차고 모든 재산 다 던졌는데, 애국과 위국 헌신의 결과가 해방된 조국에서, 45년도 아니고 61년도에 비참한 생활고, 그 가족이 내던져 있다 라고 감당이 안돼고 면목없다고.
⑩ 1915년 세금마차 탈취사건, 한봉수 의병장의 손자 前국방부 장관 한민구, 그리고 1917년 권총사살 당한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 해방후 수도경찰청장 대한민국 최초 외무부 장관, 이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단순하지 않음, 이제 우리는 우리와 관계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데 역사적인 인물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커다란 숙제,
⑪ 어떤 경우에도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힘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3.1운동은, 1910년대에 다양한 비밀결사 투쟁들이 탄생시켰고 그 가장 중심에 박상진과 광복회가 있었다, 오늘 이후 이런 분들이 계속 발굴되고 해석되고 조명 받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