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峰和尙 火焰
불기 2567년 계묘년
천봉선문 10에 보이는 본문을 먼저 소개하고 시작 하겠습니다.
한 수자가 찾아와 선사에게 묻기를
“설봉선사가 화염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삼세제불이 다 화염 속에 있으면서 대법륜을 굴림이로다.’ 하니
운문선사가 이르기를 ‘화염이 삼세제불을 위하여 설법하고 삼세제불이 땅에서 듣는다.’라고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답하시길 “백운 깊은 곳에 앉은 것을 그리워하지 말고, 간절히 차가운 재로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을 꺼릴지어다.”
수좌가 다시 설명해 주시길 청하니 “조각 눈이 화로 위에 날아와서 다 없어지니 , 한 몸에서 형상은 없으나 공은 같지 아니함이이로다.”
수자가 구경을 다시 물으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삼세시방이 재는 날고 연기가 멸하고, 육범사성이 이마가 문드러지고 머리가 탓다.”
설봉스님은 덕산스님의 법을 이은 분으로
육조혜능대사 이후 청원행사 → 석두희천 → 천황도오 → 용담숭신 →덕산선감에 이르러 설봉의존과 암두전할 두 승이 탄생 하였습니다.
천 오백 명의 선지식이 一千五百人知識이
자리 깔아 문을 여니 백집이 빛난다. 鋪席開來耀百家로다
만일 천자의 분부를 전하지 않았다면 儻若不傳天子勑이면 勑 칙서
지금 어디에서 현사를 찾으랴? 如今何處覓玄沙리오
천목일 송
설봉스님이 어느날 일을 보는데 한 무더기 불을 보고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말하기를 보라! 산세의 부처님이 모두 이 불꽃 속에서 거룩한 법륜을 굴리느니라. 하니 이때에 현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나서서 말하기를 관청에서 요즘 분부가 내려졌답니다. 하였다. 이때에 설봉이 묻기를 분부에 무슨 일이 있던가? 하니 현사가 말하기를 아무도 저자를 쏘다니며 물건을 빼앗지 못하게 하였소 하매 설봉이 모르는 사이에 혀를 빼 물었다 하였다.
스님이 동산양개스님 휘하에서 공양주를 살때에
하루는 쌀을 일고 있었는데 동산스님이 와서 물으시길
“그대는 모래를 일어서 쌀을 가려내느냐 쌀을 일어서 모래를 가려내느냐?”
“모래와 쌀을 한꺼번에 다 가려버립니다.”
“그렇게하면 대중은 무엇을 먹느냐?”
그러자 스님은 쌀쟁반을 엎어버렸습니다.
“인연을 보니 그대는 덕산 스님이 맞겠다.”
또 하루는 동산스님이 물으셨다.
“무엇을 하고 왔느냐?”
“물통 만들 나무를 잘라 왔습니다.”
“도끼질을 몇 번 해서 잘랐느냐?”
“단번에 잘랐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그것은 이쪽에 속하는 일이다. 저쪽 일은 어떻게 하려느냐?”
“그대로 손을 댈 곳이 없습니다.”
“그것도 아직 이쪽 일이다. 저쪽 일은 어떻게 하려느냐?”
이에 스님은 그만두었다.
하루는 스님이 밥을 짓고 있는데 동산스님이 물으시길
“오늘은 밥을 얼마나 지었느냐?”
“두 섬을 지었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라지 않겠느냐?”
“그 가운데는 밥을 먹지 않는 스님도 있습니다.”
“갑자기 모두 다 먹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에 스님은 답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화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 일까?
선지식의 휘하에서 닦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혼자서의 수행은 어린아이가 세상을 혼자 사는 것 같다.
스님들이 자신들의 의식주를 다 해결하고 살았지
기술자들에 의지하지 않고 산다. 즉 일상이 도행이다.
한끼에 두섬이면 그 운집 대중의 수효에서 보이듯 중국 천하에
불법이 얼마나 융성하였으며 참다운 수행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돈황의 석굴만 보아도 굴이 2000여개 한 굴에 스님 서너명씩 거한다면 근 만명의 대중 스님이 살 수 있는 가람이니
지금의 한국 불교는 너무 침체 됨에 어떻게 구할 수 있을는지.... 막막하기만 하고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 시절에는 탁마하여줄 스승이 있다, 와 현 시대에는 없다.
이에 자꾸 옛 스님들의 일화에서 해탈로 간 무문의 길을 엿보려고 하는 것이며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동산스님이 말씀하시길 “문간에 들어오면 반드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일찌감치 할말 다했다고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니 스님께서는 “제게는 입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동산스님이 “입이 없거든 내 눈을 돌려다오.” 라고 하니 스님은 그만 두셨다.
스님이 동산스님 회하를 떠나려 하자 동산스님께서 묻기를
그대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영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전에는 어느길로 나갔는가?
비원령으로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어느길로 나가려고 하는가?
역시 비원령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여기 비원령으로 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대는 그 사람을 아는가?
모릅니다.
어째서 모르는가?
그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이미 그를 모른다고 해 놓고 그가 모습이 없다는 것은 어찌 알고 있는가?
이에 스님이 대답이 없으셨다.
이렇게 제방를 섭하며 지내시다가 암두 스님과 예주 오산진이라는 곳에 갔다가 눈으로 길이 막혀 그곳에 묵게 되었는데, 암두스님은 매일 잠만 자고 스님은 매일 좌선만 하셨다. 그러다가 하루는 스님이 암두스님을 부르며 사형 사형 일어나 보시오 하니 암두스님이 무슨일이요 하셨다.
스님이 말하길 나는 금생에 틀렸나 봅니다. 전에 문수란 작자와 행각을 할 때는 가는 곳마다 그 친구가 귀찮게 굴더니 이번에 여기 와서는 사형은 노상 잠만 자고 있지 않소.
암두스님이 악! 하고 할을 하고 말씀하시길
잠이나 실컷 자 두시오. 매일 선상에 앉아 있는 꼴이란 촌구석의 토지신 같으니 훗날 사람들을 홀릴 것이오.
스님께서 가슴을 두드리며 말씀하시길 나는 이 속에 답답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감히 내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대가 훗날 우뚝한 봉우리에 띠집을 짓고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고작 그따위 말이나 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대가 본 경계를 그대로 하나 하나 나에게 말해 보게
옳은 점은 증명해 주고 옳치 못한 점은 잘라 주겠네
나는 처음 염관제안 스님을 찾아갔을 때 염관 스님이 상당하여 색과 공의 이치를 설하시는 것을 듣고 들어갈 길을 찾았습니다.
앞으로 30년동안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서는 안될 것이요!
다음에 나는 동산 스님에게서 개울을 건너다가 깨치고 지으신 게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절대로 남에게서 찾지 말지니 切忌從他覓 忌 꺼릴기
나와는 점점 멀어지리라 迢迢與我疏 迢 멀초 疏 트일소
그는 지금 바로 나이지만 渠今正是我 渠 도랑거 3인칭대명사
나는 지금 그가 아니다. 我今不時渠
그런 경계로는 자기 하나 구제하기도 부족하다네
다음에 덕산스님에게 묻기를 예부터 내려온 종문에 저도 자격이 있습니까? 라고 하였더니 덕산스님이 몽둥이로 한 대 때리시면서 뭐라고 하셨는데 그때 나는 물통 밑바닥이 쑥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암두스님이 악! 하고 할을 하고 말하시길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가보가 아니라는 말을.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됩니까?
훗날 그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 한다면 하나하나를 자기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대로 나에게 보여다오. 그렇게 되면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을 것이오.
스님께서는 이 말끝에 깨닫고 암두스님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일어나 연거푸 소리쳤다.
사형 오늘에야 비로소 오산진에서 도를 이루었소.
평창 하겠습니다.
삼세제불이 화염 속에서 법륜을 굴림과
불이 삼세제불을 위하여 설법함이여
네 보기에는 불이로다
문 없는 문에서 그대들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없었나니
현사와 암두 이와 같은 좋은 인연
어느 세월에 만날고
이와 같은 십년세월 다시 되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