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리 /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1952년 DSM-1에서 히스테리가 삭제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히스테리는 그 형태를 달리해서 출현한다. 충동과 자아 간의 역동적 관점을 버리는 안티-프로이트적 경향과 함께 독립된 진단 코드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DSM의 체제 속에서, 히스테리는 만성피로증후군, 불감증, 불면증, 우울증, 섬유근육통, 틱 장애 등 다채로운 형태로 드러난다. 억압된 것이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삭제된 히스테리는 오늘날 온갖 전환 증상으로 돌아온다. 히스테리가 그 자신을 팔색조처럼 재창조하고 있는 이러한 동시대 상황에서 그녀의 히스테리에 대해 우리는 어느 선까지 말할 수 있을까?(101)
히스테리, 기억의 질병
히스테리증자란 외상적으로 각인된 무의식적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체다.(103)
프로이트에 따르면 히스테리란 ‘기억의 질병’이다. 이전처럼 자궁이나 뇌, 때론 영혼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억하는 존재이기에 발생한 마음의 병”, 기억이 정신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 만들어진 증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병의 원인이 된 것은 억압된 무의식의 기억, 회상에서 배제된 기억인 셈이다. 안나 O를 비롯한 초기 히스테리 환자들을 통해 창안된 ‘자유연상(free association)’ 기법은 환자의 은폐된 기억, 말해지지 않은 사건 속에 그들이 겪고 있는 증상의 원인이 있음을, 그리고 그 증상은 환자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해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생리학적 분석이 아니라 이야기 행위로, 아픈 신체에서 아픈 기억으로 히스테리라는 동시대 질병 연구의 방향을 돌려놓는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많았으며, 친가/외가를 통틀어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할아버지의 무릎을 독차지한 그녀의 재롱과 애교는 가부장적인 배식구조에 예외를 만들 정도였다. 사랑받는 법을 잘 알고,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넘치는 그녀는 어떤 아이였을까!
그러나 유년기의 전환점은 어머니의 장사와 함께 찾아왔다. 경제력이 약한 남편을 대신해 어머니가 생계 전선에 뛰어들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어머니는 수입이 늘수록 집안일을 점점 미루기 시작하고, 급기야 아홉 살의 그녀가 다섯 살 남동생을 마치 엄마 마냥 챙겨야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악화된 부모님의 다툼(“덜 된 인간”, “저거, 지 아빠 닮아서”) 장면은 그녀에게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았다.
더 고통스럽고 결정적인 기억은 부모님이 그녀에게 보여준 이중적 태도다.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어머니의 변덕은 그녀의 경제관념에 심한 혼란을 초래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는 적당한 씀씀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돈을 써야 할 곳과 쓰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는 게 힘들다.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은 더욱 치명적이다. 늘 술을 마시던 아버지는 아무런 기준 없이 비일관적 태도로 딸에게 폭언을 내뱉으며 큰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의 난폭한 말은 고2가 된 그녀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는데, 아내와 딸로부터 무시당한 그는 새로운 술버릇(장롱 안 이불에 소변보기!)을 보이고, 경악한 두 사람은 그를 포기하고야 만다.
라캉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서 어머니의 주이상스를 규제하는 상징적인 법의 토대로 기능하지 않고, 법과 그 이면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언행 불일치의 아버지, 내로남불의 아버지로 기능하게 될 때 아이가 정신병적인 실재의 침입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아버지가 법의 대리인이 아니라 법의 제정자로 행동하는 경우 모순덩어리로서의 아버지는 최악의 경우 정신병적 불안을 유발하고, 최선의 경우 법에 대한 히스테릭한 저항감을 낳는다.,,,, 후기 라캉에게 신경증적 거세와 정신병적 폐제는 칼로 자르듯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거세는 폐제의 효과를 갖고, 또 어떤 주체는 구조적으로는 신경증자에 해당되더라도 몇몇 지점에서는 준-정신병적 파국에 빠져든다.(107-108)
그녀의 증상, “당신이 남자인지 보여주시오!”
또래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남편에게 극히 이상적인 바른생활을 요구했다. 가정생활에 충실할 것은 물론 술 마신 상태에서도 조금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환상을 품을 정도로(“이상적 아버지의 이미지는 신경증자의 환상이다”). 어느 날 만취한 남편에 대한 저항으로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밀고 나서(“여자가 머리 미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다시 반복될 시 이혼을 경고한다(히스테리증자의 저항).
그녀의 행동에 충격 받은 남편은 큰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술 취한 상태에서 베란다에 소변을 본 것이다.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그녀는 정신병적 불안(아버지 폐제의 효과)에 사로잡힌 채 즉각 이혼절차를 밟았다. 이후 남성전용 명품 숍에서 일하면서 잠시 만족스런 생활을 보내는 듯 했으나, 동료 여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심한 우울감에 빠진다.
히스테리에 대한 라캉의 공식이 말하듯, 그녀는 남자가 된 것이다. 그녀는 동료들을 남자의 시각에서, 남자라는 타자의 욕망의 시선에서 바라봤다.....언제나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서 강화된 나르시시즘적 이미지에 금이 갔다. 제일 예쁜 존재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우울감, 실제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우울감이 밀려왔다.....히스테리증자의 세계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쁜 사람과 못생긴 사람이 있을 뿐이다.....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히스테리증자는 특정한 여자가 여성성의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여성성의 핵심은 남자의 욕망과 주이상스를 촉발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 되는 데에 있다.(109-110)
그즈음 그녀는 남편과는 상반된 바른생활 사나이와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랑 역시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여의 자리를 맴돌며 불만족을 반복한다. 라캉의 말처럼 히스테리증자의 욕망은 결핍 자체로, 주이상스는 불만족으로 구성된다. 그녀는 애인을 유혹하면서도, 그 유혹의 목표는 언제나 불만족이라는 쾌락으로 향한다. 그녀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야기하면서도 타자에게 결코 포착되지 않는 대상이 것이며, 욕망이 초래하는 만족의 결여에 의해서만 환상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이 환상 속에서 그녀와 애인은 여자/남자가 아니라, 시스티나의 마돈나와 신이며, 둘 간의 쾌락은 무한으로 향한다. 그녀의 환상 속 절대적 주이상스는 이상화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지탱된다.
그녀에게서 고전적인, 자신의 삶을 옥죄는 히스테리증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폭군 아버지에 대한 저항과 폐제 효과, 이상적 아버지에 대한 환상, 여성성의 본질에 대한 지식욕, 결핍과 불만족을 반복하는 욕망/주이상스의 구조는 히스테리에 대한 탐색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무엇이 어제의 히스테리 증상을 대체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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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에서 진리는 증상을 통해 출현한다. 히스테리로 대변되는 그녀의 증상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억압된 고통스런 기억에 기인한다. “당신이 남자인지 보여주시오!” 성인이 된 그녀의 무의식은 결여와 불만족의 자리를 맴돌며 매번 이상적 아버지를 불러낸다. 히스테리 주체는 증상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매달린다.
이것은 비단 그녀만의 증상은 아닐 것이다. 라캉의 정신구조에 따르면 우리들 대부분은 신경증자로서, 히스테리와 강박은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너와 나의 일상에서 반복되고 있다. ‘신경질을 부리는 현상’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구조적 문제이기에, 그 구조를 탐색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최근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친구(늦깍이 정신의학과 레지던트)가 생겼다. 그와의 대화는 어떻게 전개될까? 이번에도 여전히 동일한 구조를 반복할까, 아니면 그와 함께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마침 정신과 의사를 만났으니 변화를 기대해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더 이상 무의식적 쾌락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 담화를 반복하는 자신의 무의식적 구조를 알아차리는 새로운 욕망의 주체로 옮겨가기를 상상해본다.
(히스테리가 갖는 저항의 힘은 때론 매우 강력하다. “히스테리가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이 주인 노릇을 하려는 자를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으로 가격하면 결국 그 이름과 질서를 바꾼다”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폭군 아버지의 법에 저항하는 히스테리 주체의 증상은 진리의 발현이자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데 있다.)
첫댓글 '신경질을 부리는 현상’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구조적 문제이기에, 그 구조를 탐색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DSM-1 진단에서 히스테리를 뺀 이유는, 정신장애로 보지 않는 이유인 만큼, 히스테리 증상은 삶을 살아가다보면 부딪히는 증상이다. 이 증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출할 것인가는 각자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정리정돈이 잘 된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