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4 주일설교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마 12:31~37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1596년에서 1650년 사이에 살았던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한 말이 되었을까요? 데카르트는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런 말을 했을까요? 생각을 못 하는 물건들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데카르트는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입니다. 한 마디로 천재입니다. 이 천재 철학자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답을 찾으려면 우선 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까마귀는 검다”라고 하면 “정말 모든 까마귀는 검은가? 검지 않은 까마귀는 없는가?”하고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유전병에 걸려 알비노 현상이 나타나면 색소가 사라져서 흰 까마귀도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의심이란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데 데카르트는 모든 존재를 의심하고 질문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말도 합니다. “1+1=2라고 할 때, 사실은 2가 아닌데 악마가 우리 생각을 조종해서 2라고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두고 ‘악마 가설’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말을 줄인 말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재미없죠. 귀한 설교 시간에 철학자 데카르트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철학은 사람들을 하나님과는 반대로 이끌었고 이것이 죄성을 가진 사람들과 잘 맞아서 사람들이 열광하며 철학자들을 따랐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계몽주의 시대에도 있었고 현대 사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이 말은 데카르트보다 사탄이 시조입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하나님 말씀이 맞는 말인지 의심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탄이 제공한 답은 하나님 말씀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가?” 이렇게 고민한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철학의 역사를 보면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토마스 흄 같은 경험주의자가 있습니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같은 이성주의자가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서 데이비드 흄 같은 회의론자가 나오고, 임마누엘 칸트 같은 불가지론자가 나왔습니다.
이런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성경의 계시와 성경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내가 경험한 것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이해되는 것만 진리라고 합니다. 수학적으로 증명되어야 사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경험과 이성으로 계시까지 판단하겠다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붙들고 자신을 건지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은 철학자들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철학자들은 똑똑하고 그들의 주장이 두드러져서 유명해졌지만 똑똑하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안 본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불신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는 사람과 자기 경험과 자기 판단을 믿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본 것만 믿는다고 하고는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작정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호되게 질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시비했습니다. 그러더니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자 예수님이 마귀 대왕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함을 지적하신 후에 31절 이하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31~32절의 말씀은 어려워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받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만 중요하고 예수님은 덜 중요하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성령은 중요하고 예수님을 덜 중요하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31~32절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 눈에 보통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메시아인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러 가지 그 사역으로 그가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특히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심으로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시는 메시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23절을 보면 백성들이 놀라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립니다.
이럴 때 정상적인 종교지도자라면 이런 일을 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메시아임이 확실하다고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 대왕의 힘을 빌리는 분이라고 주장했으니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자기가 본 것, 경험한 것이 진짜라고 주장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눈앞에서 경험하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다 인정하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부정했습니다. 보기 전에는 안 봐서 못 믿겠다고 하다가 보여 주면 이해되지 않아서 안 믿는다고 합니다. 방금까지 경험론자였다가 이제는 합리주의자로 돌변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믿지 않으려고 하면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보여 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처럼 보여서 의심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까지 부정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구제 불능입니다.
33절에서 예수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예수님이 능력 있고 훌륭한 분일 뿐 아니라 선지자가 말한 그 메시아라는 증거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열매를 보고도 예수님을 의심하니 상식적인 판단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34-37절 말씀을 보면 31-32절에 대한 오해가 풀립니다. 앞에서는 말로 예수님을 거역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4절 이후를 보면 사람은 마음에 있는 생각이 입으로 나오므로 말은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사탄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고 모욕했습니다. 그러자 34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뱀, 용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독사, 사탄의 자식은 곧 사탄입니다. 선한 열매를 드러내시는 예수님이 사탄이 아니라 악한 말을 쏟아내는 너희가 바로 사탄이라는 말씀입니다.
36-37절에서 예수님은 악한 말을 한 사람이 그 악한 말 때문에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무익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르고스(ἀργός)인데 무익하다, 헛되다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헛되다는 말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우상을 뜻하는 단어 가운데 어떤 형상을 뜻하는 단어 페셀(פֶּסֶל)이 있습니다(출 20:4). 그런가 하면 허무한 것을 뜻하는 단어 엘릴(אֱלִיל)도 있습니다(사 10:10).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말한 무익한 말은 우상 숭배자들의 말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학생들이 시시한 농담을 하고 있을 때 한 성도가 <마 12:36>의 말씀을 읽어주면서 시시한 소리 하면 마지막에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농담했다고 심판을 받는다고요? 뭔가 좀 이상하지만 반박을 못했습니다. 그 후에도 청소년들을 농담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농담한다고 심판받거나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좋은 농담은 분위기를 좋게 하고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하지만 누구를 조롱하는 농담이나 음담패설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누추한 농담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36절에서 말하는 무익한 말이란 예수님을 배척하고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려고 작정하고 덤비는 사탄의 말을 뜻합니다. 그들이 그런 악한 말을 한 이유는 그 마음이 악하고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지 않았을 때는 못 보아서 안 믿는 자들이지만 보고 나서도 자기들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본 것만 인정하겠다는 경험주의자와 내가 이해되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이성주의자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활보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성주의는 성경을 합리적 사상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에 이해되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기적과 영생을 부인합니다. 동정녀 탄생, 부활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부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 믿음의 기초인 성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성경을 이성으로 판단하는 사상들을 통털어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사실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입니다.
또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나타납니다. 주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가운데 퍼지기 쉬운 병은 자기가 기도하다가, 혹은 비몽사몽 가운데 경험한 것, 꿈속에서 본 것, 자기의 어떤 느낌까지 성경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거나 심지어 성경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설교 시간에 성경을 이야기하기보다 자기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 것, 느낀 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이 시대의 사도인 양 존경하며 열광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이 성경에 있는 것을 제거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제거할 것이며 성경에 다른 것을 더 하는 자에게는 지옥 형벌을 더 해줄 것입니다(계 22:18-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내가 경험하고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엇을 보았다고 그것이 계시도 아니며 성경만큼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 하늘에 다녀온 사람이지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무엇을 보았든지, 심지어 죽었다가 깨어나서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해도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말씀이 이해되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5살 아기는 어른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날마다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구동되는 원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우리가 어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홍해를 가르신 기적, 요단강이 멈추어 역류한 사실, 갈멜산에 불이 내려온 사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 오병이어도 5천 명을 먹이신 일 등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 많은데 모두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성경은 100%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보아서 믿거나 경험해서 믿거나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에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성과 경험은 모두 성경 아래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