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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성가시게 하라 / 창 18:20-33, 눅 11:1-13
철원지역과 문산지역의 장마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인재인가 천재인가? 마상군 집사가 지난 금요일 오후에 별세했다. 지난 주일에 심방했을 때 ‘목사님, 나 더 살 것 같아요?’라고 물으시던 마집사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생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천재든 인재든 그 생명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듯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인간은 ‘예’하고 응답할 수밖에 없다. 성서를 체게적으로 읽지 않고 그냥 그날그날 아무렇게나 펼쳐지는 말씀이 그날에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성서를 적당히 읽는 어느 성도가 그날의 운세를 보려고 성서를 폈다. 그랬더니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는데 눅 15:16절의‘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였다. 되게 재수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구약을 봐야지 하면서 척하고 폈더니 슥 14:1절의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였다. 쓰디쓴 입맛을 다시면서 앞의 두 말씀은 잘못 나온 것이고 우리 한국 사람은 삼세번은 해야하니까 하면서 세 번째로 편 곳이 단 4:28절의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였다. 이런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쨌든 성서는 이렇게 보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서기 2천년대,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우리는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굴러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든 면에서 급격한 변화 앞에 당황하고 있다. 역사의 진전 속도가 너무나 빨라 우리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한계상황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미래 쇼크, 곧 미래충격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하면, 과학 기술문명이 최근에 와서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날마다 새로운 묽건들이 발명되어서 인간들이 적응하기 힘든 충격, 곧 쇼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싯돌로 불을 만들어 사용하던 옛날부터 개화기의 성냥을 거쳐 오늘의 전기나 가스를 쓰기까지 불과 100년이 안걸렸다. 또한 정부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서울에서 목포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철도를 만든다고 시공 중이거나 계획 중에 있다. 이와 같이 현대는 인간문명과 자연과학이 모든 분야에서 초고속으로 대단히 많이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아직도 개발되지 않았으며, 또 별로 개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미개발이요, 저개발인 분야가 있는데 그곳은 바로 기도의 세계인 것이디. 그런고로 우리 성도들은 기도의 세계, 영적인 영역에 도전해서 승리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고 인생에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모든 일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금광을 파면 금이 나온다. 은광을 파면 은이 나온다. 탄광을 파면 석탄이 나온다. 그런데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성도는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성서 본문은 기도에 관하여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다.
신약의 본문은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의 절실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매사에 조급하고 초조하고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매사에 느긋하시고 때를 따라서 처리하신다. 둘째, 이 본문은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하여도 계속하여 끊기있게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비유애 나타나 있는 모습은, 요구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들어주기가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밤은 깊었고, 식구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문화, 곧 풍속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문화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침에 문을 열어두면 온종일 열린 채로 둔다. 만일 닫혀 있으면 그것은 주인이 다른 사람의 방문을 거부한다는 표시이다. 문이 열려 있으면 아무나 와도 좋지만 일단 닫힌 뒤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이다. 그것은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받기 싫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닫힌 문은 함부로 두드리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 문화인 것이다.
또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생활수준은 형편이 없었다. 어떤 주석을 보면 여러 식구가 한 방에서 갈대같은 풀로 만든 요와 이불을 사용해서 잠을 자는데, 거기다가 사람들이 자는 옆과 침상 밑에는 양도 자고, 염소도 자고, 닭도 잔다. 그야말로 인간과 가축이 한 식구요, 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밤중에 일어나서 불을 켜고 떡을 찾으려 한다면, 온 식구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자는 가축도 깨어서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니 얼마나 실레가 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한밤중에 이웃집의 닫힌문을 두드릴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웃은 말하기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다 잔다. 내일 아침에 보자’라고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양없고 자존심도 없는 이웃 친구는 세 덩어리의 떡이 필요하다고 한다. 떡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인간생존의 필요한 물건이다. 그는 밤중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벗을 위해 떡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비록 이웃에 사는 이웃사촌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강청하므로 주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웃집에 사는 친구가 예뻐서 중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줄만하니까 준 것이 아니었다.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긴 되었습니다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예쁘고 기특하게 살아가나? 오늘날 믿는다는 성도들이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얼마나 한심한 일들이 많은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예쁘게 봐주시고, 착하게 뵈주시고, 기특하게 봐주시니까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본문 중에 ‘강청’이란 말을 살펴보자. 이 강청이란 말의 원어는 ‘아나이데이아’인데 ‘건방진, 지분지분거림, 성가시게 함, 고집, 뻔뻔스러움, 파렴치, 몰염치, 부끄러움을 모름’ 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도 지분거리니까, 하도 귀찮게 하니까, 하도 성가시게 하니까, 하도 집적대니까 준다는 말이다. 하도 몰염치하게 나오니까, 하도 뻔뻔스러워서 귀찮아서 주겠다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그 어떤 자존심도 내세울 수는 없다. 얻어가는 처지에 비록 자존심도 상하고 염치도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떡을 가져가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분거리고,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고, 하나님을 귀찮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분이 있다. 이 분은 하교 교목으로 시무 중이었는데, 교목생활이 체질에 딱 맞아서 대단히 신명나게 교목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버님이 암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하루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들 아무개 목사가 제가 죽기 전에 담임목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더란다. 그 아들 목사가 깜짝 놀라서 ‘아버지, 저는 교목이 딱 좋습니다.. 그러니 그런 기도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어떻게 어느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는데 담임목사 취임예배를 드린지 브름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 아버지는 자기의 젊은 아들이 반듯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평생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늙고 병든 아버지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하나님을 성가시게 했다. 하나님께 지분거렸다는 말이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하는 기도는 이렇게 능력이 있다. 효험이 있다. 죽음 앞에서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강심장이 아니시다.
실업자인 아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아들 한달에 십일조 100만원 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께 졸라댔더니 마침내 그렇게 되더라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시 81:10절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여러분, 인생의 목표가 무엇? 소원이 무엇? 입을 넓게 열어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라. 그리고 이 기도가 응답되어질 줄 믿고 감사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장남을 목사로 둔 어머니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 큰 아들은 목사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장사로 돈을 벌게 해서 부모를 모시고 살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은 이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큰 아들은 목사가 되고, 작은 아들은 사업을 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는 이렇게 강력한 효과가 있다.
여러분 중에 내 인생은 별볼일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나? 내 인생은 싶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나? 죽을 병에 걸려 혼자서 외롭게 몸부림치는 분은 없나?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오라. 그리고 입을 넓게 열어서 하나님께 요구하라. 하나님을 한번 성가시게 하라. 참 좋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의 근원자로서 복을 나누어 주면서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러면 성도들이 잘 되어야 한다. 농부는 가을에 거두어 들일 수확물의 양과 종류를 생각하면서 씨앗을 뿌린다. 아무렇게나 뿌리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실 축복을 계산하라.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내야 할 축복을 생각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뺏어내야 할 물건의 종류와 양과 질을 그려 보라. 그러면서 기도의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서 추수할 때까지, 얻게 될 때까지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라.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근심하지 말고 먼저 장밋빛 인생을 꿈꾸어라. 황금같은 삶을 계획하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설계하라. 그리고 나의 능력에 맞는 축복을 달라고 하지 말고, 그 큰 축복을 받을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우리가 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해야 하나? 그것은 인간다운 인간,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기도의 응답의 체험이 있고, 분명한 신앙이 있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 분도 하나님께 강청해야 한다. 그것은 내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남의 문제 때문이다. 그것은 내 일 때문이 아니라교회의 일 때문이다. 사회와 국가와 민족의 일 때문에 하나님을 성가시게 해야 한다. 국가가 잘 되어야 개인이 잘 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개인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 성도는 사회구원, 민족 공동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청해야만 한다. 나는 이만하면 등 따숩고 배부르니 내 일 외에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못된 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웃집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밤중에 찾아온 허기져 지쳐서 쓰러진 여행자를 위하여 강청했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성서는 그 벗이 어떤 벗인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좋은 벗인지, 악한 벗인지, 보고 싶은 벗인지, 보기 싫은 벗인지 모르지만 그는 허기진 벗이었다. 설령 그 벗이 아무리 밉고 싫더라도 일단은 먹여서 살려 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나?
아브라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구약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말한다. 이 오십 의인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죄인들을 주님은 다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기도하기를 ‘오십 의인 중에 5명이 부족하다면, 그 5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어서 40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10명까지 왔다.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십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늘 안타가운 것은, 왜 아브라함의 기도가 마지막 한명까지 내려가지 않았을까, 왜 십명에서 끝났을까 하는 것이다. 렘 5: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찾아볼 수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하나님께 한 사람이 의인을 걸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십명에서 그쳤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기도의 종말이 소돔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계속되는 한 소돔성에는 아직 약속이 남아 있었다. 창 19: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롯이여! 네가 있는 한, 이 소돔성에 유황불을 내릴 수가 없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롯 하나를 보아서라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을 성가시게 했어야 했다.
동유럽의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교회가 있었다. 동독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이 된 것도 독일교회들의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배경에는 로마 천주교회를 위시한 교회의 역할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분단도 교회가 일어나야 해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당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는 당연히 남북통일을 위하여, 이북의 동포를 위하여 하나님을 성가시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사는 민족 공동체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강청해야 한다. 아직도 자신의 문제를,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분은 하나님께 입을 넓게 열어서 기도하라. 그러나 개인의 문제가 해결된 성도는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임할 줄로 믿는다.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