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은혜
2023. 7. 23(주일낮예배) 히브리서 10:11-18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2010년 스페인의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가 구글과 신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변호사인 곤잘레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연금을 체납하여 재산이 압류되고, 부당산이 경매로 넘어간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다 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글검색창에서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를 치면 곤잘레스가 연금을 체납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곤잘레스는 구글과 신문사에 그 내용을 삭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 결과 2014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는 이렇게 판결을 한다.
개인정보보호 지침규정에 의거하여 개인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라
이것이 잊혀질 권리이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하여 빅데이터 안에 있는 나에 대한 기록을 지울 수 있는 권리가 잊혀질 권리이다.
그런데 잊혀질 권리는 빅데이터 안에만 필요하겠는가? 성경에서 위대한 용서를 한 사람을 찾으라고 한다면 형님을 용서한 요셉일 것이다. 형님들의 시기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온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보디발 집의 총리가 되었다. 그런데 보디발 아내가 유혹할 때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라고 거절하였다. 그런데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겉옷을 잡았다. 그래서 요셉은 겉옷을 벗어두고 도망하였는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였다고 고함을 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시위대 뜰에 갇힌 요셉은 무엇이 가장 힘들었겠는가? 만약 제가 요셉이었다면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였는데 하는 생각으로 억울해 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형님들이 나를 종으로 팔았기 때문이다는 생각으로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요셉이 보디발과 그의 가족에 대하여 원망하였다는 구절이 없다.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진상규명을 하거나 형님들을 향하여 복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셉은 형제들을 만났을 때 바로의 궁중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울었다. 요셉은 형님들을 용서한 것이다.
어떻게 요셉은 형님들을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질문은 다윗에게도 할 수 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영웅이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다윗을 시기하여서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하다 먹을 것이 없어 진설병을 먹어야 했고, 또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어서 가드로 2번이나 망명을 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던 다윗이 엔게디에 있을 때였다. 사울이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왔을 때 다윗은 굴 안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사울이 급한 볼일을 보기 위하여 혼자 그 굴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하였다(삼상 24:4)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벤다.
어떻게 요셉과 다윗은 원수를 갚지 않는 용서를 할 수 있었겠는가? 연세대 김주환교수가 쓴 회복탄력성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경기도 수원에서 두부공장을 하는 김동남 사장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김동남 사장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한 번도 가난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김동남 사장은 1997년 IMF 때에 완전히 망해 버렸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도 안된다 는 그 좌절과 실패로 인하여 김동남 사장은 낙심하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어느날 술에 취하여 공원에 쓰러져 잠을 자고 있었는데, 노숙인 쉼터를 하는 우정섭 씨에 발견되어서 노숙자 쉼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술을 마시는 김동남 사장은 노숙인 쉼터에 들어갈 때 혼자 걸을 수 없어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 당시 김동남 사장은 이대로 죽느냐? 아니면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보느냐? 하는 마지막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김동남 사장은 노숙인 쉼터에 들어가서야 정신을 차린다. 그래서 이제 더 내려갈 곳이 없었던 김동남 사장은 노숙인 쉼터 근처에 작은 방을 두고 중고 두부기계를 마련하여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속 불량이 나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어다. 그런데 이러한 거듭된 실패를 통하여 이제 두부는 팔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연매출이 2,500-3,000만원이 되었는데, 4천만원을 꿈꾸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동남 사장이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부모 원망하고, 세상 원망하고, 좌절해서 술 마시고 그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절망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지요.
IMF로 인하여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지는 순간에 김동남 사장은 원망과 불평한 것이 너무 많았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게 한 부모님을 원망하고, 또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살 수 없는 세상도 원망하였다. 그렇게 원망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김동남 사장은 매일 술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회복이 된 김동남 사장은 고통의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감사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김동남 사장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는가? 대한스트레스학회 정회원으로 활동 중인 임희택이라는 분이 망각의 즐거움에서 이런 말을 한다.
기억을 다스리는 자가 행복해 진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심리적 고통은 기억에서 온다.
임희택 씨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기억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씀드리면 김동남 사장은 자신의 과거의 삶을 불평과 원망으로 기억할 때는 좌절과 낙심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기억을 기쁨과 감사로 바꾸었을 때 삶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불평과 원망의 삶을 새롭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을 하나 배우게 된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만물으로 말씀으로 지으셨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였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광풍이 불어올 때 말씀하여 주시면 잔잔하여 질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또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 전지하신 하나님은 나를 아시기에 나를 이해하고, 또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소리엘은 우리 우리 주님은 이란 찬송을 불렀다.
우리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 나보다 나를 더 사랑 하시는 주님
우리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의 주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주님
그는 살아계신 분 너무나 좋으신 분 나의 이름 부르며 다시 오실
우리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 나보다 나를 더 사랑 하시는 주님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구약시대 제사장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주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구약의 제사장은 서 있는 것이다. 또 우리가 죄를 짓고, 또 짓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장은 끊임없이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를 드려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것이다(히 10:11-2).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사역을 완전히 이루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베푼 은혜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또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있는지 함께 오늘 본문 히브리서 10장 17-18절을 읽기 바란다.
(히 10:17-18)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사하여 주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 하나님은 망각하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망각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되었다.
그러면 그 망각의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은 망각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이 40을 불혹이라고 한다. 사람이 나이가 40이 되면 뜻을 정하고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50세를 지천명이라고 한다.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 60을 이순이라고 한다.
혹시 이순의 뜻을 아는가? 논어에서 공자는 죽기 전 인생을 회고하면서 60세에는 귀가 순해져 어떤 말이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이순이 유래되었다. 이순(1964년생)이 되면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과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하면 그렇게 말해주니 참 고맙네 하고 반응한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나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한다. 그러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하면서 흘려 듣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말을 들을 때 그 말에 흔들리지 않고 흘려 들을 수 있는 나이가 이순이다.
여러분은 이순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가? 아주 오래 전에 노완우 목사님이 우리교회에 오셔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의 좋지 않은 모습을 말씀하였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교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고, 또 성도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고 도전받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도는 은혜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나를 무너지게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김집사가 험담한 말에 상처받고, 이집사가 한 말 때문에 분노하는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집사가 한 말이 내 가슴을 찌르지 않고 비켜나서 땅에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주워서 자기 가슴을 찔러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면 신앙생활은 정말 힘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망각하신 것처럼 나도 나를 분노케 하는 그 사실을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분노와 원망에서 자유로와 질 때 우리는 성도가 가지는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망각의 은혜를 받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가진 그 망각의 성품이 함께 하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기억하지만, 나를 분노케 하는 고통과 좌절은 잊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자유함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