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무
박경선
제주도는 여러 번 다녀와도 그리움이 쌓이는 먼 곳이다. 이번 1월에도 ‘제주도에서 일주일 살기’로 계획을 짜서 새벽 6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이는 제주도 집들과 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매단 듯 작은 불빛으로 반짝였고, 숲으로 웅크리고 있는 군락은 어둠의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듯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바다는 하얀 꽃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꽃밭처럼 환상적이었다. 45분의 거리를 날아와 비행기에서 내렸다.
거리를 걷는데 빨간 열매가 오종종히 달린 나무가 가로수로 서서 길손을 맞는다. 줄줄이 서 있으니 대형 화분들을 가로수 길에 놓아둔 듯하다. 도톰하고 둥근 푸른 잎이 윤기가 짙고 푸른 잎 방석을 만들어 빨간 열매를 가운데 도드라지게 오종종히 매달아 둔 모양이, 마치 부케를 들고 있는 듯하다. 어저께 내린 눈이 빨간 열매와 푸른 잎 사이에 남아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이 나무의 이름이 뭐지?’ 제주도의 가로수 ‘먼 나무’였다. ‘먼’이라는 말은 왠지 아득한 느낌으로 가슴에 저며 든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훗날’ 김소월의 시가 학창 시절의 풋풋한 감성에 깊은 울림으로 지금껏 고여있다. 사랑하는 연인을 끝내 잊지 못한 연정을 가득 채운 이 시를 드라마로 각색한다면 중국 청춘 남녀의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 ‘먼 훗날 우리‘라는 영화쯤 될 것 같다. 내게도 그런 풋풋한 첫사랑이 있었던가? 덕수궁 돌담을 돌면서 ’먼 훗날, 그리워지면 십 년 후, 오늘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든지요.‘ 하며 떠나왔던 그 사람! 어쨌든 ‘먼’ 이라는 말이 내게는 아득하고 아련한 느낌으로 가슴에 저며져 있다.
그런데, 가로수 이름이 ‘먼나무라니…….’ 경상도 방언에서 ‘뭔(무슨) 나무야?’ 하는 의문형 뜻이 먼저 떠올라, 나무 이름을 딱 부러지게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닌 듯 들린다. AI와 인터넷을 뒤져 종합해 보면, 제주도 방언으로 ‘먹낭’(검은 나무)이라 부르던 것이 먼나무로 표준어가 되었다는 설. 잎이 떨어지지 않고 멀리 남는다는 뜻으로 먼나무로 불린다는 설, 구슬 같은 붉은 열매가 오종종히 달린 모습이 멋스러워서 멋나무로 불리다가 먼나무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루가 길어 '먼(long)나무' 라는 설, 멀리서 보아야 나무의 모습을 온전히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먼나무가 되었다는 설들이 다양하게 떠돈다. 그렇다면, 김소운 저 『언문 조선구전민요집』에 ‘먼나무’ 아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을지 찾아보았는데,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외솔 최현배 선생이 편찬한 『우리말본』 책 이후에 나온 구전 동요 책들에는 나무 이름이 수록되었을 듯도 하다.
<십 리 절반 오리나무/바람 솔솔 소나무/ 달 가운데 계수나무/가자 가자 감나무/ 오자 오자 옻나무/ 방귀 뽕뽕 뽕나무/ 먼 거리의 먼나무>
어린 시절 기억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나무 이름은 재미있는 말놀이감이 되어왔다. 그 시절에는 먼나무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말놀이로 불러내며 놀았다. 지금 늙어가는 어른이 되어 눈앞에서 먼나무를 바라보니 재미있는 이름만 기억할 일이 아니다. 먼나무는 제주 바람 찬 바닷가 마을에서 겨울을 버티며 열매를 달고 있다. 새들이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린 가을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붉은 열매였지만, 겨울철 먹이가 부족한 새들에게 소중한 식량이 되어주기 위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공해와 염분을 이겨내고 병충해도 이겨내며, 고귀한 베풂의 마음을 품고 서 있다. 흰 눈이 내려도 눈 속에 붉은 열매를 숨기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다. 그래서 직박구리(찌르레기) 같은 새들은 빨간 열매를 초롱초롱 매단 먼나무가 곁에 있어, 그저 배부르고 마음 편한 든든함에 걱정, 근심이 없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 든든한 믿음의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을까? 내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 자신과 비교해 볼수록 먼나무는 더 멋스러운 자세로 서 있다. 겨울 양식 걱정을 할 새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이런 풍경을 눈으로 즐기며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우리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이겠다. 그래서 꽃말이 ‘기쁜 소식’인가? 새들도 이런 베풂의 마음을 지닌 먼나무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고마운 열매를 먹고 배설해 낸 씨로, 먼나무의 자손을 퍼뜨리는 일을 도와 공생 관계로 살지 않는가? 우리 사람들도 먼나무가 서 있는 이 거리를 멋스럽게 걸으며, 좀 더 따스한 눈길로 서로를 토닥거려줄 품을 열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먼나무의 꽃은 5, 6월에 피는데, 꽃향기는 아카시아 향기랑 비슷하단다. 빨간 열매 대신 황백색 잔꽃을 오종종히 매단 제주도의 가로수 길을 상상해 본다. 상상만으로도 그 멋스러움과 향기에 빨려 들어 정신이 몽롱해질 것만 같다. 1월의 붉은 동백꽃과 3월의 노란 유채꽃 매력을 뒤로 하고, 먼나무의 멋스러움과 하얀 향기에 취하고 싶어, 제주도 가로수 길을 걸으러 5월에 다시 한번 와봐야만 하겠다.그때는 귤나무의 귤꽃도 하얗게 피어난다니……
첫댓글 제게 먼나무와 같은 든든한 지원군은 바로 박경선 교수님이셔요. 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