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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 だれかれとなく歓迎し。(2023년 4월 30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8:23-28
행 28:30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30. パウロは、自費で借りた家に丸二年間住んで、訪問する者はだれかれとなく歓迎し、31. 全く自由に何の妨げもなく、神の国を宣べ伝え、主イエス․キリストについて教え続けた。」
지난 주일에는 바울이 행한 일들을 본보기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은 진리를, 시대의 요청과 양심의 소리에 합당하게 외치는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약속이라는 진리를 말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 감동하는 것을 진솔하게 전합니다. 나머지 결과는 주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로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마무리가 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여전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의 순종을 기억하는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순종한 것을 기억하며, 하루에 하루만큼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으로 활기와 생기, 그리고 삶의 보람을 취하는 건강하고 경건한, 결국 거룩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은 바울이 로마에서 2년을 더 머물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구절로 마무리가 됩니다. 여기서 다시금 사도행전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돌이켜 보고 싶습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은 누가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 1:1-2)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장선에 있는 글인데요. 복음을 믿고 주님과 동행한 사도들이 행하고 실천한 것들을 기록하여 남긴 글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의 동행일기(혹은 동행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기록의 기준은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인 것입니다. 열두제자로 대표되는 사도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내심을 받은 바울 사도의 활동이 무엇을 뿌리로 하고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늘 염두에 두고 말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공동체가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것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할까?
다만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과 그의 가르치심이었던 것이지요.
사도들이 가진 삶의 기준에 대하여 사도행전이 중요하게 전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바로 구제활동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애초에 구제활동을 위해 많은 후원과 기부활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재정적인 분배와 구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사도들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문제가 생기고 민원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이렇게 선택합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 6:2-4)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사역에 힘을 쓰겠다고 하고 구제활동은 이방인 출신의 신도들에게 일임하였다는 것인데요. 이 말씀은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들의 선택을 통해 교회가 가장 먼저 무게중심을 두고 있어야 할 사역의 영역은 곧 말씀과 기도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요. 교인들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선교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음전도하는 일에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에 무게중심을 두고 균형이 잡혀있지 않으면 디딤돌로 삼으려던 그 활동들이 복음전도의 걸림돌이 되어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회가 교회다워야 우리도 우리다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우리다워야 교회를 교회답게 바로 세울 수가 있는 것이지요. 복음이 우리를 우리답게, 사람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며 삶의 변하지 않는 반석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혹시 복음이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왔던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 있는데... 바로 “사영리”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지 한 장이 복음을 완벽히 설명한다... 라고 말하기에 복음은 너무도 깊고 넓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복음의 광장으로 들어가는 이정표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믿고, 멸망의 저주에서 구원받는 것이 곧 복음이 약속하시는 영생의 집에 들어가는 문고리를 잡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유명하고 근사하고 큰 교회 공동체에 머문다고 해서 그 문고리를 잡거나, 그 문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몇 대째 신앙생활에 성실한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고 그 영생의 집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요. 또, 교회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다고 해서 그 집 안에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과 구원에 관한 아주 기초지식(이정표)을 통해 영생의 집에 들어가는 문고리를 붙들었다면, 주님의 임재하심 안에 머물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영생의 집에서 사는 일상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나의 옛사람, 즉 멸망 당하여 지옥으로 가기에 마땅한 나의 자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생이고,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 안에서 수많은 다양한 신앙생활의 스펙트럼이 있는 것이지요. 삶의 자리에 따라서 다른 사명도 있구요. 사람의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강조점과 다양한 활동의 모습들이 있는 것이지요.
그 안에는 성공적인 인생의 여정도 있습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도 있구요. 재정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기억되는 생활도 있습니다. 각종 일상생활 가운데 순조롭고 형통한 삶의 모습들로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삶으로 보람찬 인생을 사는 생활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복음을 믿고 나서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겨주신 선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질은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선물이 없어도 주님이 계시면 우리는 문제가 있어도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지요.
어떤 유명하신 목사님이 해외에 자주 말씀을 전하러 가시는데요. 한 번은 영국에서 집회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일정을 알고 그 목사님의 자녀가 아버지에게 영국에 가면 영국의 왕실근위대 캐릭터의 인형을 하나 사다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회 기간 중에 계속 근위대 인형을 살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지만, 좀처럼 발견할 수 없어서 노심초사하시던 중에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타기 1시간 전에 겨우 선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그 과정에 대해서 아들에게 무용담을 들려줄 생각으로 마음에 설램 가득하게 집에 도착을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고 아들이 달려나와 반기더랍니다. 그리고 선물을 낚아채듯이 받자마자 아버지의 말은 듣지도 않고 곧장 자기 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가더라는 것이지요.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우여곡절 이야기는 관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오매불망 아버지가 오면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선물에만 마음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복음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이처럼 아버지가 들려 줄 이야기나 혹은 아버지의 존재가 아니라, 그 손에 들려있는 선물만을 고대하고, 선물만을 주목하는 철없는 아들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선물을 가져다주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으면 선물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한들 고아원에서 선물을 받고, 선물 주는 이의 기념촬영배경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어쩌면 명절과 연말에 쌓여가는 선물상자가 아니라, 언제나 안심하며 기대고 동행할 수 있는 부모의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셋집에 찾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환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의 이런 태도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 9:21-22)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은 오로지 구원을 소개하고, 그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는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의 모든 욕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조언해 주지도 않았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바울은 문제해결이나 형통함을 위해,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알았습니다. 인간은 탐욕을 채울수록 더욱 탐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욕심과 탐욕을 가질수록 더욱 갈급해지고 오히려 더 만족을 알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잠 28:25)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5:10)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세속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기업이나 사회적 단체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에게 가시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면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임재하고 계신 주님과 매일 매일 동행하는 삶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동행의 증거를 하루에 하루만큼 쌓아 가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마치 나만의 사도행전을 기록하듯이 말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장래의 꿈과 비전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이루고 비전을 이루어 가는 일에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주님의 임재하심과 동행은 가장 큰 능력이 되고, 실질적인 권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성과나 결과, 혹은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으로 완성된 유익한 것들도 주님과 관계가 없다면 결국 우리에게 독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실패라고 여겨지고, 저주라고 여겨지는 것이라도 그것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맞닥뜨려진 것이라면 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든든히 세우는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된 구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2)
우리 눈에 기이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일을 완성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버려진 돌이었지만, 그 버려진 돌이 오히려 집의 머릿돌이 되어 그 집의 기준이 되고, 가장 소중하고도 능력이 있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며, 그 동행한 일과를 돌이켜 하루를 정리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버려졌다고 여겨지는 것들, 도무지 복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을 통해 능력을 행하실 주님을 믿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영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애쓰고 몸부림치다가 겨우 하나 낚아채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하신 곳에 머물러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지요. 영생의 삶을 포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연약해서도 아니고, 우리에게 유혹이 강해서도 아니고, 바로 주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내용의 유기성 목사님의 컬럼을 읽었는데요. 마음으로부터 동의가 되었습니다. 아주 특수한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 죄를 지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보는 사람이 있고, 나를 아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른 유혹에 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얼마든지 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에게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돕는 영적인 공동체가 필요하고, 동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주님의 임재하심을 공유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일과를 공유할 지체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데 그 일과를 기록한 동행일기를 신뢰할 만한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하시는데 자신이 없는 분이 계신다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 그런 마음이 없으신 분들이라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놀라운 삶을 기대해 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5)
이미 주님을 따르고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 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른 어떤 좋은 소문과 이미지보다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본받아 교회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복음에 대해 말하고 복음에 대해 들어야 하고 복음에 대해서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 중에 다음 달부터 주님과 동행하며 그 삶을 기록하는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실제로 연습하며 실천해 보는 기회를 나누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제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은 거룩한 성도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활기차게 그리고 생기 넘치게 살 수 있기를 도와 드리려는 것입니다.
물론 동행일기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영적으로 거룩하고 경건하게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습관으로 기도와 말씀 생활이 자신의 인생을 영생의 지평에서 살게 하는 일을 지탱하고 있는 분들은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다만, 기도와 말씀으로 사는 것이 수월하지 않고, 그래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로 인해 인생을 살면서 동시에 영생을 누리는 일이 어려우신 분들,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연약함으로 인해 일상생활의 보람을 체감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꼭 이번 기회를 붙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답고, 사람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복을 누리며 보람된 성도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해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이 놀라운 복된 삶을 누리는 일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거룩함의 소명을 완수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기 전,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환영하며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른 어떤 지식이나, 형통과 성공의 노하우를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무작정 들어주며 기분을 풀어주는 카운셀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공을 원하는 자들에게, 삶을 보람있게 살기 원하는 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육신의 아픔과 유혹으로 휘둘리는 자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에게까지 다시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거룩함을 위한 소명을 이루는 아름답고 행복하며 보람찬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성도의 삶을 위해서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고, 그 놀라운 증거들을 하루에 하루만큼 기록함으로 주님 앞에 삶을 쌓으며 지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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