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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방편문
「보리방편문」은 벽산이 근본선‧석공관‧수능엄삼매‧밀교 관행‧염불 수행 등을 통합‧회통하여,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서른아홉 되던 해인 1936년 동안거 정진 가운데, 선정에 들어 「보리방편문」을 감득(感得)하게 된다. 이후 삼칠일 간 용맹정진을 감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무주는, "실상염불선으로써 정혜균등(定慧均等)과 자력타력 겸수의 염불선을 제창하여, 이 수법(修法)이 바로 성불의 피안에 이르는 첩경임을 강조하였으며," 라고 한다. 즉, 정혜균등의 실상염불선이며, 자‧타력 겸수의 염불선이다. 전자가 초기불교 근본선의 측면이라면, 후자는 대승불교 염불의 입장이다. 이처럼 인도 불교의 근본선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염불을 주체적으로 회통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실증(實證) 수행론인 석공관과 밀교의 관법(觀法) 수행을 깨달음의 수증론(修證論)으로 전개한다. 즉, 벽산은 물심불이(物心不二)이고,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 수행론을 설한 것이다.
「보리방편문」은 모두 이백여든 세[283] 글자로, 이백예순 여덟[268] 자인 『반야심경』보다 조금 많다. 『반야심경』이 한문뿐인 데 비해 「보리방편문」은 한글 조사도 포함하고 있다. 밀교의 관행처럼 상징이나 이미지를 관상하고, 실증적인 수행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경향이라 볼 수 있다.
무주에 의하면, 「보리방편문」의 특징은 총 일곱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불법의 궁극적인 집약적 교설이므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묘체(妙諦)이다. 둘째, 불변수연(不變隨緣)‧‧체용성상(體用性相)의 도리를 단언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의심을 끊는 법을 설하여 여래의 부동지(不動地)를 얻는다. 셋째,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마음을 한 대상에 머물게 하는 묘결(妙訣)이다. 넷째, 여래의 과상법문(果上法門)이므로 인과상응하여 범부위에서 오히려 상사각(相似覺)을 성취한다. 다섯째, 최고의 세계관 및 인생관, 최선의 생활관을 확립한다. 여섯째, 자력과 타력의 겸수이므로 지(知)‧정(情)‧의(意)의 조화적 수행이 되어, 법이적(法爾的)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빠르게 성취한다. 일곱째, 최선의 상념‧사유‧사색‧관조 등이며,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행법이므로 성불의 첩경이다.
1)실상염불선
(1)염불선
종교적 수행으로 염불은 참선보다 부담이 덜 하고, 어디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수행이므로 더 대중적이다. 정신을 집중하는 측면에도 칭명하는 염불이, 고요하게 집중하며 좌선하는 것보다 수월하다. 또 염불은 귀로 들을 수 있는 감성적인 면으로 여성적이며, 이에 비해 참선은 남성적이고 의지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지적이고 감성적[情的]이며 의지적인 면이다. 이러한 지(知)‧정(情)‧의(意)가 조화를 이루면, 일도 더 쉽고 재미있게 성취할 수 있다. 수행의 측면에서 염불이 감성적이라면, 상대적으로 선(禪)은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선에 치중하여 너무 지적이면 감정이 메마르게 되고, 염불에 치중하여 감정에 치우치면 들뜨기 쉽다. 두 가지를 상호 보완하고 조절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서로 조화를 이루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과 선이 융합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은 염불이라면 주로 칭명염불을 생각하므로, 본 연구에서 말하는 염불선과 조금 다를 수 있다. 본 연구에서 주장하는 염불선은 칭명을 포함하지만, 실상염불을 추구하여 선과 염불이 다르지 않음을 설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무주의 설법을 들어보기로 한다.
염불선도 역시 원래 최상승선(最上乘禪) 도리이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저 십만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도 못 되고 염불선도 못 된다.… 염불도 부처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스러운 극락이 십만억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방편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만법이 본래 부처일 때는 바로 선(禪)인 것이다.
위와 같이 염불선은 칭명염불이나 화두(話頭)를 융합한 염불선이 아니다. 부처를 밖에 두고 찾으면 참된 염불도 아니고 염불선이라 할 수도 없다. 참된 염불이란 실상염불로 실상을 염하고 관하므로 실상염불선인 것이며, 내 마음이 부처이고 천지 만물이 부처 아님이 없으면 바야흐로 염불은 곧 선(禪)이 된다. 이때의 염불도 칭명만이 아니라, 염(念)‧지(止)‧관(觀)이 함께 하는 염불이다. 다시 말해 본 연구에서 염불과 선이 융합하는 것은 실상을 염하는 관법(觀法)과 자성을 깨치는 선법(禪法)이 결합한 것을 말한다.
사실 염불선과 실상염불선은 다르지 않지만, 중국에서 실행된 화두와 염불이 결합한 염불선과의 구별을 위한 것이다. 즉, 중국의 염불화두선과는 다른 수행이므로, 실상을 붙여 실상염불선이라 하는 것이다.
한편 원대 이전의 선과 정토의 결합은 원리적 동일성이 강조되지만, 원대 이후에는 화두와 염불의 결합으로 수행의 방법적 통합이 시도된다. 이 시기에 염불정토를 적극적으로 포섭한 인물이 중봉(中峰) 명본(明本)과 천여(天如) 유칙(惟則)(1286-1353)이다.
아래는 염불 화두에 대해 명본의 『광록(廣錄)』에 설해진 내용이다.
선(禪)이란 곧 정토의 선이며 정토는 선의 정토이다. … 참선이 생사를 요달하는 데 있고 염불도 생사를 요달하는 데 있음을 알지 못한다. … 거사는 오랫동안 정토를 공부하여 이제 소림직지(少林直旨)의 도를 흠모한다. 곧바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무엇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라는 화두를 염불하는 마음에 두라.
명본은 선(禪)과 정토가 다르지 않음이 모두 생사를 요달함에 있다고 설한다. 또 오랫동안 정토를 공부한 거사에게 '부모미생전'의 화두를 주며, 본래면목을 참구하되 염불하는 마음에 두라고 한다. 이것이 중국 불교사에 화두와 염불이 통합된 최초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선정일치(禪淨一致)가 유심정토의 개념에 의한 통합이라면, 이것은 구체적 수행법으로 염불과 화두의 통합이다. 어떻게 보면 화두를 중심으로 한 염불인 것이다. 다음은 유칙의 염불선 법문이다.
또 스스로 염불과 참선이 같지 않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다. 참선은 다만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는 뜻과 염불도 자성미타의 유심정토를 깨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어찌 두 가지 이치가 있겠는가. 경(經)에 '부처를 기억하고 부처를 생각하면, 현재나 미래에 반드시 부처를 본다'고 하였다. 이미 현전에 부처를 보았다면, 곧 참선의 깨달음과 어찌 다르겠는가. …다만 아미타불 넉 자를 화두 삼아 온종일 분명히 들어, 한 생각도 나지 않음에 이른다. 그리하여 차례를 거치지 않고 불위(佛位)에 오른다.
유칙은 자성미타 유심정토의 사상이 자성을 깨치는 선(禪)과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명본이 '부모미생전'의 화두를 제시한다면, 유칙은 '아미타불'의 4자 화두를 들라고 한다. 윗대보다 온전히 정토염불이 화두가 된 것이며, '왕생'의 내세를 '견불(見佛)'의 현재로 전환시켜, 선종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염불선은 중국 불교계에 대체로 원활히 수행되며 전개된다. 특정인이 아닌 대다수 사람에 의해 실천되며 칭명염불이 공안(公案)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러한 염불화두선은 "아미타불을 염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염해지는 아미타불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일으키고 염하는 자신과 염해지는 아미타불이 다름 아닌 하나가 될 때 공안이 해결되는 것이라 본다. 주굉(袾宏)은 '일심불란(一心不亂)'을 해석하여, "수행자가 화두를 들어 참선을 하거나, 반복적으로 염불을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그에게 염불이나 참선 양자 모두 '일심불란'의 상태로 이끄는 방법론이다."고 하였다.
한편 신라 말기에 중국적 선(禪)이 전해진 이후, 고려 불교의 정토 수용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위의 염불화두선이 고려말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우선 정토 수용으로 지눌의 수선사(修禪社)는 유심정토의 입장에서 자력문에 의한 간화선 수행이 위주였다. 요세의 백련결사가 천태와 정토를 융합한 수행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즉, 천태의 공(空)‧가(假)‧중(中) 삼관과 법화참법으로 정토왕생을 추구한 것이다. 이때는 원‧명대의 본격적 염불선이 전개되기 전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염불선이 유행한 후에 여말삼사(麗末三師)의 정토관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백운 경한(1298~1374)은 석옥 청공(1272~1352)을 사사(師事)하고 무심선을 설하였지만, 특별히 정토염불에 관해서는 설한 바가 없다. 나옹 혜근(1320~1376)은 유심정토를 위주로 자성미타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반면 태고 보우(1301~1382)는 염불을 화두와 결합한 염불화두선을 아래와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진실로 부처를 염하고자 하면 바로 아미타불을 염하라. 12시와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아미타불 명호를 표상으로 마음과 눈앞에 두고, 심안(心眼)이 불명(佛名)으로 타성일편(打成一片)되어 생각 생각이 상속하나 생각마다 어둡지 않은 때, 차분하고 철저히 '염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반조하라. 오래도록 공능(功能)이 이루어지면 홀연히 마음에 생각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다운 본체가 확연히 현전하리라.
태고의 염불선은 아미타불을 염하는 가운데, '염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화두처럼 관하라는 것이다. 즉, 선(禪)적인 염불이고 정토이며 미타관(彌陀觀)으로 염불이 화두가 되어, 선정일치(禪淨一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염자시수(念者是誰)'를 참구할 때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마음으로 잊지 않고 기억하여 지니며, 둘째는 마음이 어둡지 않고 밝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마음의 본체인 적적(寂寂)의 측면이라면, 후자는 마음의 밝은 작용인 성성(惺惺)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염불선은 중국에서부터 유심정토의 사상을 배경으로 염불이 화두가 되는 염불화두선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고려 불교에 역시 지눌을 위주로 간화선을 받아들이고, 염불을 선적(禪的) 방편으로 수용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실상염불선
불도(佛道) 수행에 있어서 관상‧관념‧관찰‧선관(禪觀) 등은 같은 의미로 수행의 기본 방편이 된다. 관상의 내용이 추상적인 이념의 경우는 이관(理觀)이라 하고, 구체적인 사상(事象)을 관상하는 것은 사관(事觀)이라 한다. 이관은 제법실상을 관하고 제법개공을 관하며, 불의 법신‧실상신을 관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실상념(實相念)이고 실상관(實相觀)이며, 실상염불선이라 할 수 있다. 무주의 설법을 들어보기로 한다.
말하자면 "나라는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 우주에 있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 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이다. 즉, 일체만유는 생멸변화하는 것이나 실로는 불생불멸하는 무시무종의 존재로서, 영원히 상주하는 것임을 체달하는 관법이다.
무주가 말하는 실상관의 요지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둘째는 비어있는 가운데 무량공덕이 충만해 있으며, 셋째는 생멸변화가 없는 불생불멸의 존재임을 체달하는 관법이라는 것이다. 즉, 실상염불선은 일체개공을 전제로 하여, 무량공덕과 불생불멸을 관하는 것이 된다. 삼법인(tri- dharmapada)으로는 전자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이고, 후자는 열반적정에 해당한다. 이처럼 수행의 결과는 실상을 바로 보면 긍정과 행복이 충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후자에 관해서는 한역 초기 경전에 아래와 같이 나타나 있다.
여래의 본체는 금강으로 이뤄졌고 십력을 구족하였으며, 네 가지 두려움이 없어 대중 가운데 용감하고 장엄하다. …여래의 삼매는 일찍 감소함이 없고 이미 쉬어 영원히 고요하며 헛된 생각이 없다. 교만‧사나움‧망설임‧두려움‧탐진치 마음 등, 그물처럼 얽혔던 모든 번뇌가 다 멸하였다. 여래의 지혜로운 몸은 지혜가 한량이 없고 걸림도 없다. 여래의 몸은 해탈을 성취하여 모든 갈래가 이미 다해 다시 태어남이 없다.
위의 인용문은 용수가 설한 법신염불의 40불공법을 상기시키며, 삼매해탈과 지혜해탈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을 설한다. 초기 불교가 주로 공(空)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대승은 불공(不空)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실상을 관하는 것이 실상염불선이라 볼 수 있다. 즉, 불타의 무량한 공덕을 관상하지만, 일체개공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된다. 용수의 교설처럼 색신의 공(空)에도 집착하지 않고, 법신의 불공(不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관하는 것이다. 결국 실상관은 중도제일의제를 관하는 것이며, 공(空)도 포함되고 불공도 섭수하는 원융수행인 것이다. 이러한 실상관을 「보리방편문」에 적용해 보기로 한다. 「보리방편문」은 글자 그대로 깨달음의 방편이 되는 글이며, 선적으로는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방편의 글이다. 방편(upāya)이라 하면 첫째는 『법화경』의 '삼계화택(三界火宅)'이나 권실(權實)의 비유, 중생을 위한 대기설법(對機說法) 등의 경우이다. 둘째는 꼭 필요하고 핵심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수단이다. 십바라밀 가운데 일곱째 방편바라밀을 행하거나, 밀교에서 보리심이 원인이고 대비가 근본이며 방편이 구경(究竟)이라는 경우다. 둘째의 경우처럼 방편은 반야와 함께 중요하게 설해지는데, 『수습차제』에는 "보살의 수행을 요약하면 방편과 반야가 본질이다. 다만 반야 하나만이 아니며 방편 하나만이 아니다.… 반야에 의해 상견(常見)을 끊고 방편에 의해 단견(斷見)을 끊는다."라고 설한다.
「보리방편문」도 두 번째 의미이며 반드시 수행해야 할 방편이다. 우선 일체 법계를 공(空)‧성(性)‧상(相)의 셋으로 나누고, 삼신에 배대하면 각기 법신‧보신‧화신에 해당한다.
첫째는 허공 같은 마음 세계를 관하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염한다. 마음이 허공 같은 것은 공(空)의 측면이고 본체의 입장이다. 또 수능엄삼매의 백 가지 공덕 가운데 첫째에 해당하며, 공(空)을 관하고 법신을 염하는 것이다.
둘째는 금색 광명 맑은 물의 충만한 성품 바다를 관하며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염한다. 성품을 바다에 비유하여 관하고 보신불을 염하는 것이다.
셋째는 일체중생을 금빛 파도가 뛰노는 거품으로 관하며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염 한다. 일체중생을 파도의 거품으로 보며 관하고 화신불을 염하는 것이다. 위의 세 구절을 정리하면 마음을 허공에, 성품을 바다에, 중생을 거품 등으로 관하며, 각기 차례로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을 염하는 것이다. 전자는 공(空)‧성(性)‧상(相)에 해당하고, 후자는 법신‧보신‧화신이 된다. 또한 세 가지를 차례로 관하는 것은 일상삼매가 되고 차례로 염하는 것은 일행삼매가 된다. 이처럼 관법과 염염(念念)이 함께 하며 별관(別觀)으로 전개된다. 다음은 총관(總觀)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첫째는 허공 같은 마음, 바다 같은 성품, 거품 같은 중생을 공‧성품‧현상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게 된다. 세 가지가 하나같이 본래 다르지 않음을 관찰하며, 여기서 삼관이 일관(一觀)으로 합쳐지게 된다.
둘째는 위에서 염한 법신‧보신‧화신의 삼신이, 원래 한 부처임을 항상 염하는 것이다. 또한 삼념이 일념으로 합쳐지게 되며, 각기 별도로 관하고 염하던 것을 합쳐서 총체적으로 관하고 염하게 된다. 즉, 앞의 일관과 뒤의 일념이 합쳐져서 하나의 관찰과 하나의 염념이 통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과 성품과 중생은 하나임을 관찰하면서, 삼신일불인 아미타불을 상념(常念)하게 된다. 전자는 『화엄경』에 설하는 구절과 유사하며, 후자의 삼신일불은 여러 경론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아미타불은 우주 자체를 말하며, 대일여래 또는 비로자나불과 같은 뜻이다.
끝으로 모든 생멸상(生滅相)인 온갖 중생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마음 따라 변해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 모습으로 사유‧관찰하게 된다. 마치 『기신론』에서 설하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관계와 같다. 모든 생멸상과 무상한 제행이 심생멸문이라면, 아미타불의 일대행상은 심진여문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본래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지만, 본성의 청정한 마음은 요동하는 식의 근본이다. 무명이 멸할 때 요동하는 식도 따라서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같은 「보리방편문」은 관찰과 염송을 동시에 일으키는 수행법으로, 곧 대승의 묘문(妙門)이라 할 수 있다. 이승의 수행법을 넘어 대승의 지관겸수하는 실천행이며, 이를 통해 증과(證果)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