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형통
2026. 7. 19(주일낮예배) 창세기 39:20-23
유 퀴즈에 세계시총 1위인 엔비디아(7천 1백조, 5조달러)의 젠슨 황 회장이 출연하였다. 젠슨 황은 유 퀴즈에 출연하여 2가지를 강조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간성이다. 젠슨 황은 회사 채용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인공지능의 발달로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젠슨 황은 똑똑한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공을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을 채용할 것이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기업에 우리 자녀를 취업시키려면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기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젠슨 황이 또 강조한 것이 회복탄력성이다. 넥플릿스에서 방영한 참교육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우진이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우진이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으니 수학문제를 풀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국어시험에서 틀렸을 때 아이가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 빗금을 치지 말고 다른 표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우진이 엄마는 초등학생인 아들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되어서 선생님에게 여러 가지를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젠슨 황은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스스로 분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한다. 그리고 젠슨 황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에게 실패할 기회를 만들어 줘야 나중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배우는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아이들은 더 강력한 회복탄력성, 끈기, 그리고 인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고, 새로운 것 배우고 탐구하면서 실패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 젠슨 황은 오히려 실패하여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실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가?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래서 태어난 자식들이 용사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취하며 살았는데, 그 결과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며 살았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노아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 족보에서 노아를 이렇게 설명한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노아는 그 시대에 의인이었고, 또 당대의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얻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노아에게는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은혜, 의인, 완전, 동행이라는 단어가 다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모든 단어를 다 가진 노아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노아는 100년동안 방주를 만들어야 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얻어서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소산물을 자랑하며 세상 사는 맛을 보고 있었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노아가 어렵고 힘들게 말씀대로 방주를 만든 노아는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삶은 편안했겠는가? 노아는 방주 안에서 대략 1년 10일(370일) 동안 지냈다. 그런데 온갖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또 배설물도 치워야 했다. 축구구장보다 30M가 더 긴 방주 안에서 노아는 매일 같은 일을 하였지만, 그 일은 표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주에서 나왔을 때 물로써 심판된 땅은 황폐와 척박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노아는 또 땀을 흘려야 했다.
이것이 은혜가 맞는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요셉이 형님의 시기로 인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다. 그래서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하는 요셉의 인생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 39:2)고 기록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여서 형통하였다고 하는데, 요셉은 보디발 집의 종이 된 것이다. 그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하여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다.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였다. 그때 요셉은 겉옷을 벗고 도망을 쳤는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려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시위대 뜰에 갇힌 요셉에 대하여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였는지 오늘 본문을 읽기 바란다.
(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지금 성경은 요셉을 함께와 형통이라는 2가지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시위대 뜰에 갇힌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또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였는데 요셉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형통이 맞는가? 영상을 먼저 보시기 바란다. 배우지망생이었지만, 길이 열리지 않아서 카페 알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유명한 감독이 카페에 왔기에 그 감독의 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감독은 전혀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낙심하였는데, 나를 도와주려하는 사람이 제작투자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작투자자가 나를 추천해서 꿈꾸던 배우의 길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 아닌가? 그런데 요셉의 삶은 도무지 형통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17살에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총리가 되기까지 13년동안 말할 수 없는 수고와 고생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러한 요셉의 삶을 성경은 형통하였다고 말한다.
왜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13년이 지난 후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이 요셉이 보디발 집의 종이 되고, 또 시위대 뜰에 갇힌 자가 되었음에도 그를 형통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대로 네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삼사대만에 돌아오리라는 그 언약을 성취하는 그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형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형통이라는 단어를 내가 원하는 일을 얼마나 잘 이룰 수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얼마나 부요하게 살고, 또 내가 세상 안에서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 형통의 기준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느냐?를 중심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는 어려움과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형통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은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제일 마지막에 한 말이 이순신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던 것이다.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겠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순신 장군에거 23번의 전쟁을 하였는데, 23번을 다 패하였다. 그렇게 한 번도 이순신을 이겨보지 못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봄 건강이 악화되었고, 61살의 나이로 죽어가면서 죽이지 못한 이순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처럼 남긴 말처럼 일본 왜구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수장을 잃어버린 왜구가 패전병처럼 일본으로 돌아갈 때 이순신 장군은 퇴로를 막아 서서 왜구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고 외쳤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 왜구의 퇴로를 막아서서 노량에서 전쟁을 펼치다가 전사한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왜 패잔병처럼 돌아가는 일본 왜구를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자 하였겠는가?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왜구의 후손이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이순신 장군은 왜구의 후손이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한 놈이라도 더 죽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도 전사하고, 이순신 장군이 주도하였던 노량해전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낳았다. 3대 해전(한산도대첩, 명랑, 노량)
이것이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의 삶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도망가는 왜구를 가만히 두면 편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구의 후손이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지 못하는 그 일을 위하여 목숨걸고 싸우고 또 싸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의 형통은 무엇인가? 내가 얼마나 안전하고, 지금 내 병사들이 내 말을 얼마나 잘 따르느냐?에 있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형통은 내 나라 조선이 강력한 나라가 되어서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하는 나라로 세워져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구 한 명이라도 더 죽여서 그들이 조선의 위엄을 알게 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는가? 우리의 형통은 나의 안전과 편안함에 있지 않다. 비록 나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간다면 그 삶은 형통인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은 형통한가? 전도서 1장에서 솔로몬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탄식과 한숨을 고백한다.
왜 솔로몬이 헛됨을 이야기 하는가?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한 솔로몬은 7년만에 성전을 건축하고, 13년동안 궁궐을 건축한다. 그래서 궁궐은 성전보다 갑절로 크고, 갑절로 화려하였다. 그 화려한 궁궐에서 솔로몬은 상아로 만든 의자에 금을 칠하여 그 위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그에게는 후궁과 첩이 1천명이나 되었는데, 여기서 후궁과 첩이 1천명이 되었다는 말은 솔로몬이 쾌락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복을 주어서 그의 나라가 강성함으로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솔로몬에게 자신들의 딸을 주어서 화친을 맺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인생노년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헛됨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리고,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헛됨을 이야기하는 솔로몬이 전도서 12장에서 너는 청년의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인생노후에 인생은 허무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성취하심에는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보여야 하는 것이 내 원함이 아니라, 말씀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형통은 내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 보이므로 형통의 기쁨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