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15(화)
레스토랑 소렐라
참석자 : 권태, 천숙, 홍연, 허주
사회 :권태
사회자 : 흔히 어렵고 난해한 것을 형이상학적이라고 한다. 이 책 <형이상학>을 읽으면서 수많은 철학책들이 이 책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러셀의 서양철학사도 마찬가지다. 내용의 흐름이나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사를 처음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토론할 부분은 1권의 앞부분이다. 1권은 형이상학에 들어가기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이 들어간 내용이다. 앞서 읽었던 <영혼에 관하여>를 비롯하여 수많은 그리스 고전 문학이 언급되고 있다. 1장부터 시작해보자
1장 : 감각, 기억, 경험, 기술, 학문, 지혜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로 이 글은 시작한다. 이 문장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모든 인간은 앎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말로도 이해되고, 혹은 제대로 된 인간이면 세상이치를 이해하고 원인을 캐물어가는 앎에 대한 욕구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여러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책 내용에 기반하여 < 인간은 감각을 지니고 있으므로 감각을 즐기고 자연스럽게 앎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로 정리했다. 그렇다. 감각이 바로 앎의 시작인 것이다.
한발 더 나가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감각>으로 알게 된것을 <기억>으로 축적한다. 우리집 고양이는 아침마다 밥그릇앞에서 먹을 것을 기다린다. 고양이의 감각은 아침마다 밥그릇 앞에 나붓이 앉아 있으면 집사가 먹이를 준다는 것에 그친다. 그 반복되는 기억들이 주체적 경험과 기술로 발전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인간은 ? 밥이 어딨는 지를 알게되고 누가 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먹을 수 있다. 밥이 없으면 해 먹는 방법도 알아낸다. 반복되는 감각으로 인한 기억이 경험의 누적이 되어 인간에게 기술을 남겨주는 셈이다. 그리고 기술의 축적은 이론적 <학문>의 구축을 가져온다.
그 학문들 중에 가장 으뜸인 학문은 바로 사물의 원리와 원인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1장은 제목에 나열되어 있는 단어의 순서대로 인간 사유의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감각부터 지혜까지 한 눈에 쫘악~
2장 : 지혜의 특성
원리와 원인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1장에서 말했는데, 2장에서는 어떤 종류의 원인들과 어떤 종류의 원리들에 관한 앎이 지혜인지를 살펴보자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편적인 앎을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다. 우리가 찾는 학문의 본성은 실천학이 아닌 이론학이다. 그리고 이론학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실체를 다루는 <신학>이 가장 이론적이므로 신학이 으뜸 학문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신학>이라고 ? 중세는 물론 근대와 현대까지 종교가 끼치고 있는 영향들을 생각하면 슬쩍 불편한 구석도 있다. 그래서 중세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렇게 요모조모 활용해먹었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이 쓰여진 기원전 5세기를 생각하면 이해못할 바도 없다. 좁은 과학적 지식으로 사물의 본성과 원리와 원인을 파고들어가면 결국 초월적인 존재에 가닿는 것이 마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목적론적 고민을 하면서, 그 답으로 <지고의 선> < 좋음> <덕>을 생각하는 찰학자에게 초월적 존재외에 어떤 답이 가능하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부디 성당과 교회와 사원의 기복적 신으로 대체하지 말지어다.
3장 ; 원리 및 원인에 관한 옛 철학자들의 이론
소제목에 언급된 <이전 철학자>는 양극단의 두 부류를 말한다.
즉, 자연철학자와 신을 논하는 자.
신을 논하는 자로 언급된 사람은 호메로스(일리아드 오딧세이 저자), 헤시오도스(신들의 계보저자 ), 오르페우스(신비주의자) 등인데, 주석에만 슬쩍 언급하고 더 보태는 말이 없다.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생각에도 이들의 생각은 길게 언급할 가치가 없을 만큼 좀 별로였나보다.
신을 논하는 자를 패쓰하고,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달달외운 자연철학자로 바로 넘어가자.
탈레스는 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엠페도클레스는 지수화풍.
아낙시만드로스는 공기.
레우키우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이렇게 사물의 원리를 자연에 있는 재료로 본 자연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날가롭게 묻는다.
<음..그래..사물이 그런것으로 만들어 졌다고 치자. 니들 고민 많이 한것도 알겠다. 나름 일리도 있어 보인다. 근데 그 재료들은 어떻게 움직이지? 그니까 운동인이 뭐냐고 ? 뭐가 움직여야 세상이 돌아갈거 아니냐고. >
자연철학자들은 또 머리를 굴린다.
임기응변에 강해보이는 엠페도클레스가 냉큼 말한다. <세상에는 우애와 싸움이 있지. 그래서 지수화풍은 서로 화해하고 싸우며 그렇게 결합하고 분리되고 움직거리며 변화를 하는것이지>라고.
엠페도클레스 못지 않게 고민 좀 한 것 같은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속에 존재하는 <이성>이 운동과 변화를 만든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언급하는 아낙사고라스를 맑은 정신의 소유자라고 칭찬한다. 주구장창 계속 까다가 간만에 칭찬이 나오니까 공연히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자연속에 존재하는 이성이라니, 어쩌면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이 이후 범신론이나 애니미즘으로 진화 혹은 변질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의심이 슬쩍 들었는데, 심증만 있고 물증은 아직 없다.
4장 : 옛 철학자들의 이론 (계속)
한술 더 떠서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적 사고의 기틀을 확고히 다진다.
이들 원자론자, 즉 유물론자들은 원자들의 우연에 의한 충돌로 인해 운동과 변화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말하는 <질적변화>. 이런 단어와 이런 사상이 이천 몇백년을 뛰어남어 18세기 막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초가 되니 놀라울 따름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1 법칙 , 즉 양질전화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보게되어서 놀랐다.
양적축적이 질적변화를 가져온다는 양질전화. 이 이론은 철학을 넘어서 사회 혁명의 이론적 기틀을 다지는 사회사상으로 자리잡았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성김과 촘촘함이 변화와 변이의 원리라고 말한다. 꽉 차 있는 차이성들이 속성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결국 촘촘하게 양적 축적이 되면 질적변화가 온다는 말이 아닌가.
오래전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읽을 때의 피상적 이해를 넘어서, 유물론이 어떤 근거로 나왔는지 그 단초를 알게된 충격에 나는 아마 오늘도 밤을 새며 잠을 못자고 영화나 한 편 때릴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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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은 대략 앞부분만 토론하고 다음 토론으로 넘긴 터라 다음 토론정리때 묶어서 정리하겠습니다~
첫댓글 첫 토론이라 말들이 어지러웠는데
말끔히 정리하셨네요 ㅎ
수고많으셨습니다
경험이 기술과 학문으로 가는 과정을 보니,
박홍규 교수가 <형이상학>에서 강조하던 <누적된 데이터>가 떠오릅디다.
그니까 이제 우리는 누적된 데이터를 갖고 있어서 뭔가 쫌 쉬워진다능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