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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야’의 ‘1930년 미스 태국 실물’ : 박중신
학장님 저서인 ' 깨우침을 향해"에서 발견한 내용인데---- 태국의 ‘차이야’시에 가면 사원이 하나 있고, 법당 계단 부근에 해골 하나가 명찰을 달고 서 있다고 한다. 그 명찰엔 1930년 미스 태국 실물이라 적혀 있고---.
‘ 그 해골의 본래 모습이 무엇이냐 ?’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1930년에 미스 태국으로 뽑혔을 때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
‘ 그러할까 ?’ 라는 질문 속엔 ‘ 아니다 .’ 는 뜻을 담고 있다. 겉치장인 피부가 다 떨어져 나가고 해골만 있는 현재가 오히려 바로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어떤 이는 , 그녀가 이 세상에 막 태어나 지극히 순수해보였을 때라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어머니 배속이 그녀의 고향이므로 , 바로 태속에 들어있는 아기가 그녀 본래의 모습에 더 접근해 있다 말하기도 한다.
거대한 강을 이루는 물들의 출발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산골 옹달샘에 이르듯, 조금 더 추적해가면 , 아버지 정자와 어머니 난자 중 어느 하나를 본래 모습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다. 또 더 나아가 그 정자와 난자를 형성하게 만든 음식들이라 주장할 수도 있고---.
그러나 그것은 육체를 구성한 물질 측면에서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녀를 구성하는 것은 육체 이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요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 고집하는 남자도 있다면--- ? 그에게 ‘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연정을 느끼는 여인이 있는지 ?’ 그리고 ‘ 그 여자의 시체를 보고도 같은 크기의 애욕을 느낄 자신이 있는지 ? ’ 물어보아야할 것 같다.
죽은 미녀의 시체와 미모야 훨씬 뒤쳐질지라도 건강하게 살아 있는 여자를 두고, 아내 감을 선택하라 하면, 그도 역시 산 여자를 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육체 못지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다는 내용을 뒤늦게나마 수긍하게 되겠다.
미녀의 시체에 생명만 덧보태면 이제 그 녀의 마름다움은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
내 친척 중 심장 수술이 잘못되어 식물인간이 된 상태로 중환자실에 3년 넘게 누워있는 분이 있다. 그 분은 분명히 심장과 허파, 위장 등등 여타 장기가 이상 없이 작용하고 외모는 말끔하다. 게다가 또 육체적인 생명도 유지되기에 차마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을 못하기에 옛날처럼 매혹적인 존재로 보이질 않는다.
결국 말과 행동은 단순히 생명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생각에서 나왔을 것이며 , 다양한 생각들( 좋아한다, 미워한다, 슬프다, 기쁘다, 번뇌다 ,망상이다 하는 등등)은 모두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마음이란 것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생각들과 달리 영원성이 있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그래서 생멸(生滅)이 없는 절대적(絶對的) 바탕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를 나라고 여기거나 , ‘ 일시적인 생각들’을 나라고 보고 집착하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내 육체나 내 생각은 모두가 , 그 순간의 인연의 결합에 따라 어느 한 순간에 나타난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색즉시공 (色卽是空: 눈에 보이는 사물과 생각- ‘색’-은 텅 비어 실체가 없다.)이란 말이 실감되어진다.
한 순간의 모습이기에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집착(執着)이 사라지고 그 집착이 사라지면 갈등이나 번뇌(煩惱)도 사라지련만----
승조 스님이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서로 상하게 될 것이 염려되어, 차마 그냥 갈 수 없더란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 뭐 이라 싸울 것 있나 . 서로 잘 지내도록 하게---!’ 하며 지팡이로 호랑이 머리들을 툭툭 건드리자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호랑이들은 싸움을 멈추고 서로 헤어져 갔다고 한다.
“ 나”라는 집착이 없으면 , ‘이편 , 저편이란 경계의 구분 ’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 아닐까 ? 그 경지가 바로 , 온 세상 다른 모든 존재들과 한 몸을 이룬 해탈(解脫)의 세계이고---
승조 스님이 그 절대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호랑이들도 승조 스님을 인간이 아닌 ‘동료 호랑이’로 여기기에 스님의 화해하라는 말을 같은 동료 호랑이의 우정어린 조언으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인 것이고----.
그런 절대 경지에 있는 사람은 , 화해를 위해 다툼이라는 진흙탕 속에 뛰어들지라도 그 진흙탕이 그를 더럽힐 수는 없다. 오히려 양쪽 모두에게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자비의 힘이고, 스님자신에게는 해탈 문이자 영광의 문이다. 즉 , 보통 사람들 눈에 진흙탕 (번뇌)으로 보이는 것들 모두가 , 그에겐 ‘보리( 菩提: 깨우침)’이겠다.
그래서 ‘ 이 길로 곧장 가면 지옥으로 가는 가요 ? ’ 라고 물으니 ‘ 아-암 , 그렇지.’ 라고 대답하고 , 이어서 ‘ 이 길로 곧장 가면 천국도 갈수 있나요 ? ’ 라고 물으니 ‘ 아-암, 그렇고 말고 . 천국에도 가고 말구. ’라는 기묘한 대화가 성립되나 보다.
주행거리 30만 KM를 넘겼고 , 11년이 넘는 차이니 최고급차 보다 훨씬 더 눈에 뜨이기 마련이다 . 또 전북에 사는 내 친지들 중엔 나처럼 흰색 프라이드 낡은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낡은 하얀색 프라이드 차와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일단 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차를 몰고 나가면 , 다른 친지들에 비해 나는 그들 눈에 잘 뜨이기 마련이다. 아무튼 차와 그 차를 모는 주인인 나 모두 많은 대중의 시선을 끌며 존재하나보다.
약 1 주일 전 , 2차선 도로에서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있어서 머물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반대편 차선 너머 인도 위로 친지가 양손에 부피가 큰 짐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역시 곧바로 내 차와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반대편 차선에 있기에 모른 체 하면 되겠지만, 워낙 힘겹게 사는 그녀이고 보니 그냥 묵살하기가 좀 그랬다.
유턴 지역에서 돌아 그녀 앞에 차를 세워 짐을 싣고 그녀 아파트까지 갔다. ‘ 오랜만에 만났으니 차 한 잔 마시고 가라 .’는 그녀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우리 부부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갔다.
그녀가 차를 마련하는 동안 , 부부가 탁자 앞에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탁자 위엔 명예훼손 문제로 고소를 당했으며 , 약식 재판 결과 50만원의 벌금을 선고받았다는 통지서가 있었다. 외부 사람이 그 것을 보았다는 것을 주인이 눈치 채면 어색할까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해도 그 서류가 지남철처럼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차를 가져온 그녀는 ,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그 통지서를 대충 아래로 내려두고 찻잔을 올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며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둘째 아이 입학금 마련의 어려움과 고 3인 큰 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넋두리를 하다가 벌금 통지서를 받게 된 과정까지 설명해 주었다.
자신의 능력 이상의 자리에 가면 축복이 아니라 파멸이련만 ---그녀 남편은 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영업만 고집하다가 주위 친지들에게서 신용불량자로 몰락했다.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 다른 여자들 상대로 바람마저 심하게 피우다가 가출까지 했다.
가정주부에 불과했던 그녀는 딸 둘이 딸린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의 짐을 통째로 짊어지고 살아왔다. 아무리 피를 나눈 친척이나 다정한 친구일지라도 현실 생활 속에서 그녀의 완벽한 의지처가 되기엔 한계가 너무 뚜렷했다.
해결까지는 못해줄 지라도 그녀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불평이나 하소연에 대해 어떠한 짜증도 보이지 아니하고 묵묵히 들어주는 그런 대상----- 그런 다사로운 정을 가진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절집 대웅전의 나무 불상처럼 , 묵묵히 들어주는 하나님만이 처절한 삶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의지할 대상이자 위안이었다.
바로 이 때였다. 부근에 교회를 세우고 신도 확보에 나선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은--- . 의지 처를 찾아 방황하는 그녀는 , 그 목사가 접근하기에 최고 쉬운 존재였다.
큰 교회 목사나 신도라면 그녀의 하소연을 웬만큼 들어주다가 지루함 때문에 그녀를 멀리할 터인데---. 신자가 거의 없는 그 목사는 그녀의 하소연을 끈질기게 들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목사는 그녀에게 하나님같이 보이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그녀는 곧 그 목사의 최 측근이 될 정도로 교회 일을 열심히 돌보아 주었다.
그녀를 영원히 곁에 두고 싶은 그 목사는 ,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태에 있는 그녀의 생존 본능을 이용했다. 우선 중국 선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주선해주겠다 했고, 또 큰 딸을 중국에 무료로 유학 보내주겠다 고 말하곤 했다. 이런 말은 지칠 대로 지친 그녀에게 새 희망의 원천이 되었고 따라서 그녀는 교회 일에 더욱 몰두했다.
그러나 인간의 정이란 한 순간의 모습일 뿐 ,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 가장 서로 필요로 했던 이들은 철 천지 원수로 변했다.
어느 듯 교인이 7-80명에 이르게 되었을 때였다. 그 목사는 선교사 자리를 주선해줄 터이니, 그녀의 마지막 재산인 시가 3천 여 만원 밖에 나가지 않는 20평 서민 아파트를 팔아 2 천만 원을 교회에 희사하라고 했다. 이에 그녀는 반발했고 , 그 목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혹시 종교를 이용하려는 사기꾼이 아닌지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목사가 전주로 오기 전, 남원에서 활동할 때 물의를 일으켰던 내용들이 그녀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과 더불어 치료를 위한 안수기도를 운운하는 그 목사 활동도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하더란다.
이미 다른 교인들도 여타 다른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 목사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결국 교회 신도 7-80 여 명 중 10여명을 제외한 모두가 저항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그 목사는 그 10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나 보다.
타의에 의해 떠났기 때문에 , 분에 치받친 그 목사는 그녀를 비롯한 다른 5명을 명예훼손으로 몰아 경찰서에 형사 고발했다. 그리고 동기보다는 결과를 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수사관들이기에 , 그녀는 약식 재판에 의해 50만원 벌금형이 내려 졌다나 ----.
목사의 분풀이가 그 정도에서 끝나면, 생활에 열중할 수 없게 만드는 소송의 번거로움 때문에라도 그만 두련만---. 목사는 형사재판 결과를 가지고 민사 소송을 걸어 그녀의 집을 빼앗으려 하나보았다. 형부가 이런 내용을 알고 도와주다가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자 과부보다 더 못한 그녀의 처지가 나에게 몹시 안쓰럽기만 했다.
‘ 중재가 잘 이루어져 저 쪽에서 그만 둔다면 이 쪽에서도 정식 재판을 청구하지 아니하고 그만둘 의사는 있느냐 ?’ 물었다. 그녀는 화해로 처리하려고 중재자를 넣어보았지만 목사가 접촉 자체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 할 수만 있다면 중재를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흙탕 속에 뛰어드는 것이 꺼림칙해서 침묵을 지켰다. 서로 헤어질 즈음에서야 넌지시 의향을 한번 떠 보았다. 나라도 다시 한번 중재를 시도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녀는 아마 접촉도 못할 것이라 말하면서도 고소장에 나와 있는 목사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꼭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이 지푸라기 일지라도 붙잡는 상황처럼 보였다.
그 이후 내 생활은 상당히 흐트러졌다. 우선 매일 밤 7시쯤엔 집 사람과 두 아들에게 ‘ 신심명 (信心銘)’ 풀이 해주고 ,그 날 나아간 부분을 아홉 번씩 써보는 일이 어긋났다.
전혀 모르는 남자인 내가, 여자인 그 목사에게 화해 때문이라며 만나자고 섣불리 말했을 때 일이 더욱 꼬여버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묘안을 짜내자니 그것만으로도 내 일상생활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고심을 하다가 그 목사가 나를 피하지 못할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녀가 새로 개척했다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예배가 모두 끝나면 내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고 여러 교인들 앞에서 면담을 요청하면 성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원래 나의 주말은 매우 바쁘다. 토요일 오후 불교 대학에서 개최하는 법회에 참가하고 일요일엔 교회 예배 참가하기 때문이다. 결국 너무 피곤해서 어느 한쪽은 빠지는 날이 많다.
기독교인으로써 적을 두고 있는 교회 목사님께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로 결석이 잦은 터에, 남의 교회 예배에 가자니 웃음도 나왔다. 아무튼 짝을 우리 교회에 태워다 주고, 나 혼자 그 여자 목사의 교회를 찾아갔다.
가구점, 당구장, 건축회사 사무실 등등이 들어서 있는 5층 건물 꼭대기 한편에 그 교회는 있었다.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중재자 입장이다 보니, 적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긴장감은 아니지만 , 상주들을 전혀 모르는 초상집에 문상 가서 상주를 대면할 때 이상으로 서먹서먹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 8명을 앞에 놓고 예배를 인도하고 있던 여자 목사와 눈이 마주쳐 목례를 했다. 제일 뒤에 있는 여인이 나에게 예배 안내문을 주며 그녀 바로 앞자리를 권했다.
대중이 너무도 적어보이자 나의 출현이 미칠 파장에 염려가 되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신자가 생겼다는 기쁨이 매우 클 것 같은데 만약 중재하러 온 손님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실망을 넘어 짜증으로까지 변할지도 모르게 때문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심리 상태에선, 중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일단 오늘은 얼굴만 익혀두자. 그리고 ‘불교인’이 잠시 견학 온 것이라 말해서 나에 대한 기대치( 미래 신자 가능성 )를 조금도 품지 못하도록 해두기로 작정했다.
여자 목사는 엄숙하게 느끼도록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서인지 , 일반 대화 때 목소리와 다른 가성(假聲)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찬송, 기도, 설교, 통성기도 등등 모든 절차 동안에 눈을 감고 철저히 그 목사의 말과 행동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 말과 행동을 통해 그 목사를 지배하고 있는 현재그녀 생각들을 파악해보기 위해서였다.
설교에서 그녀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는 자신의 수행상태를 질타했다. 절집에서도, 자신의 바른 의지를 생활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일치시키는 것( 안과 밖을 하나로 동일하게 만드는 것)을 ‘ 생활 속에서의 참선’이라 부르며 특별히 정진하는데, 목사가 그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일상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위선을 자각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다 느껴졌다.
또한 그 목사는, 말의 실수로 주위 사람들과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어리석음도 회개했다. 바로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신도들과 논쟁에 휩쓸려 이렇게 초라해진 자신과 교회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 같았다.
뒤 이어 ,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상대방을 다 용서했다는 표현을 했을 때, 누구인가 이제 중재자로써 제 역할만 성실히 하면 문제가 쉽게 풀릴 가능성이 엿 보여 기쁘게 생각되었다. 내 얼굴에 만족감이 떠올랐다면 중재 가능성에 대한 청신호 때문이었을 터인데, 그 목사는 설교를 듣고 성령의 감화로 받은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연이어서 그녀의 다음 말도 감명적이었다. 그녀는 나 밖에 있는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것 보다, ‘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니 내 안의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고 , 바로 그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진정한 신앙인 이다. ’ 주장했다.
‘ 바로 이런 주장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사이비 목사로 지탄 받을 수도 있겠다 !’ 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경우라면 , 오히려 그 목사를 위로도 해주며 , 화해를 주선하는 일에서 더욱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 여겼다.
집으로 돌아오며 교회에서 경험했던 내용들을 고려해서 목사와 나눌 대화 요점을 간추린 후 , 교회 주보에 나와 있는 전화 225-**** 로 걸어 보았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어 실패했다. 고소를 당한 친지에게서 받아둔 전화번호가 있지만 ‘누구에게서 받았느냐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나오면 매우 옹색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다음 기회를 찾기로 했다.
결국 수요일 밤 예배에 다시 참가해야 했다.
화해 제의 기회를 마련하려는 것이었지만 , 그 날도 너무 초라한 예배 규모를 보고 그런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주보엔 어른 예배로 되어 있지만, 4명의 어린아이들과 어른 2명이 전부였다.
외부 참가자에게 너무 초라 해보여 겸연쩍었는지, ‘ 수요일 예배는 원래 어린이들 성경공부가 주 목적이다.’ 고 목사는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를 향해서만 하는 말일 것 같았다. ‘ 교인 숫자에 너무 연연하는 목사라면--- ’ 하며 다소 실망감이 들었다.
아니 ! 초라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순간적으로 둘러 부친다면 신뢰에 금이 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교회 주보엔 분명히 어른 예배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배를 마친 후, 그 목사와 마주쳤을 때 나는 ‘어린이 예배’인 줄 모르고 참가했으니 실례한 것 같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요즈음 내 생활에서 해결해야 할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는데---- 면담 겸 점심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 ? 물어 보았다.
목사는 아주 반갑게 여겼다. 그러나 내일 오전엔 바쁘니 점심은 함께 못하고 2시쯤 차나 마시자고 했다. 그래서 지난 주일날 주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니 통화가 안 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자 자신의 전화번호는 사정상 알려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동안 사회생활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전화번호 알려주기를 꺼려하는 사람치고 문제 인물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특히 목사는 공인이기에 오히려 전화번호를 주위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주어야할 터인데. 그런 일반적인 관행을 무시해야할 정도이라면 평소 생활이 심각해 보였다.
그 녀는 대신 옆에 있는 40대 초반의 ‘김 집사’라는 여자에게 전화를 하면 자신이 받을 수 있으니 그곳으로 전화 하라고 했다. 연락이 원래 목적이었으니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일지라도 연락처를 받았으면 그만이겠지만 , 이 행동과 설교 때 사용하는 그녀의 가성( 假聲 )이 자꾸만 그녀 인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오후 1시 20 분경에 약속대로 김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목사와 통화를 할 수 있느냐 ? 묻자 바로 옆에 있다면 바꾸어 주었다. 그래서 그 목사의 집 부근인 차 집에서 그들을 2시 반에 만나게 되었다.
나의 출현은 그 목사에게 초라한 교회 모습을 더욱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찻집에서 나를 마주하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녀는 7-80명에 이르던 교인들이 떠나버리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재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에겐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그 녀는 ‘ 5명의 교인들로 구성된 자생적인 성경 공부 소모임이 있었는데 , 갈등을 일으킨 최초의 불씨라고 말했다. 이야기가 진점됨에 따라 그녀는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 신학 대학도 다녀 본 적이 없는 무식한 교인들이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 방향을 잃었고 ,나아가 목회자인 나를 비방하는 쪽으로 가더니 급기야는 퇴진요구에까지 이르렀어요. 그 다섯을 제외한 교인들은 착하기 그지없었는데 , 그만 그 악한 무리들의 선전 선동에 놀아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 저들이 나를 비방하는 죄를 더 짓지 않도록 제가 차라리 참고 떠나겠습니다. 라고--- 그리고 그들과 헤어져 나와서 현재 이곳에 새 교회를 마련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
명예훼손으로 상대를 고소한 것을 보면 결코 자비의 마음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쫓겨 나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련만---- 이런 경우 지혜롭거나 겸손한 인품이라면 화야 나겠지만 차라리 침묵을 지킬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함으로써 그녀는 자기반성의 자세가 부족할 뿐 아니라 , 둘러 부치기를 좋아하는 가벼운 인물로 자신을 끄집어 내렸을 뿐이었다.
뒤이어 그 목사는 ‘ 이제 그들에 대해 용서를 완료했더니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주셔서 이렇게 좋은 분을 보내 주셨다. ’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머리가 매우 어지러웠다. 잠재적인 교인이 아니라 , 화해시킬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점근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그 실망감이 적대감으로까지 변할 소지가 다분히 있는 대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 불교 공부에 심취해있는 돌이킬 수 없는 불교 신자이다’ 는 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애썼다.
“ ‘ 건전한 종교인 자세는, 시선을 외부에 있는 하나님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인간 내부에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고 그 누구에게나 있는 그 하나님 모습을 향해 가야한다,’는 발언은 불교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도, 시선을 내 밖에 있는 부처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내부에 있는 부처의 성품 ,즉 불성이라 불리 우는 모습으로 향해야하고, 바로 그 불성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 바른 불교 신자이자 부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설교 시간에 말하신 그 내용은 시간과 공간, 종교를 초월한 진리의 성격이 있어 보입니다. 불교인으로써 기독교 예배 견학을 온 나에게 정말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칭찬을 듣자 흡족하게 여겼다. 나는 뒤이어 말을 계속했다.
“ 둘째로, 원수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그 동안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용서했다니 대단한 신앙심이요 성경 내용에 행동을 일치시키는 모습이라서 보기에 좋습니다. 나는 원수라고 생각한 사람을 그렇게 용서하지 못해왔습니다. ”
“ ----- ”
“ 과거 언제인가, 그 당시 내 경제 수준으로 판단하면 막대한 물질적 손해를 입힌 인물이 있었는데------ , 법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의 목사이자 전국적인 재야 지도자이신 분의 요청에 의해 그를 용서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그 원수 같은 인물을 사랑까지도 하라 했는데 나는 거부했었습니다. 용서는 가능하지만 도대체 사랑까지 하라는 말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지요. 그런 나에 비하면 원수를 철저히 용서했다는 목사님은 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십니다. ”
이 칭찬이 내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그 교회 신자가 될 가능성에대한 기대치를 부풀리도록 부추겼나 보았다. 그녀 표정이 더욱 밝아지는 듯 보였다.
나는 그래서 견제구의 성격으로 다음 말을 계속 이어갔다.
“ 불교인이지만 지난 일요일에 교회 견학을 가게 된 것은 그리고 그 이후 오늘 이렇게 사적으로 또 만난 것은 , 생활 중 부닥친 어려운 난제 두 가지를 해결하는데 목사님 조언과 도움을 통해 해결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할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물론 이왕 생활 문제에 대해 면담하려고 나온 김에 성경에 대해서도 토론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도 했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선교 차 우리 집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점이 있어, 그 내용을 점검해볼 기회가 아쉬웠기 때문이지요. 그런대 이미 성경 학습 모임 때문에 교회가 곤욕스러웠다니 그 목적은 포기하겠습니다.“
목사는 그 말도 역시 자신의 구미에 맞는 내용만 편집해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경 공부라는 말을 듣고 새로운 활기를 느끼며 말했다.
“ 마침 잘 되었습니다. 원래 금요일 낮 11:30분에 성경 공부가 있으니 참가하시지요.”
“ 그러면 내일 성경 공부 후 제가 점심을 사기로 하지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내용은 오늘 보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더 이상 지체 시키지 말고, 그 점심 자리에 소송 상대인 내 친지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새로운 신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화시킬 우려가 있어 보여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 동안 접촉 과정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질 의사도 어느 정도 있다고 판명되었으니 이제 두 당사자들이 만나면 원만하게 풀릴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 속 다른 한편엔 , 설교 내용을 뒤집어가며 화해를 거부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불길한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는 설교를 들어 온 그 교회 교인들이 가능하면 점심 식사에 많이 참여해야 목사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어서 나는 말을 계속했다.
“ 가정적인 분위기로 교인 숫자가 아주 단촐 하니 가능하면 모두 식사에 나오면 좋겠습니다. 식당 예약 문제도 있으니, 목사님, 김 집사님을 포함해서 그 이외 몇 명이나 될지 저녁에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 ”
그날 오후 8시 경에 김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참여 예상 인원을 묻자 , 목사, 김 집사 본인, 김 집사 남편의 회사에 근무하는 여직원 1명이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데 그 정도 숫자가 될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겐 상당히 실망이 되는 대목이었다.
그 여직원이 회사 점심 식사 시간 제약을 받으니 , 교회 가까이에 있는 ** 구청 구내식당으로 하면 어떠할지 물어왔다. 화해를 주선하는 말이 오고가야할 식사 자리라면 차분하고 품위 있는 곳이라야 하기 때문에 요즈음 인기가 좋은 중인리 채식부패 식당을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내 계획과 빗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교회 가까운 곳 ** 곰탕집으로 장소를 정했다. 그 집 식당 규모라면 조용한 장소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인 한명 정도 더 추가해서 4명으로 예약하겠으니 가급적이면 한명이라도 더 참여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했다.
아울러 나의 고민 해결과 관련된 사람들이 3명 정도 더 합석할 것이니 양해 바란다며 소송 당사자와 여타 친지가 옵서버로 참여할 것을 대비해서 말해 두었다.
그 다음엔 그 친지에게도 전화를 해서 참가 다짐을 받았다. ‘목사는 화해 의지를 설교 때나 사적 면담에서 여러 번 강조했다. 성직자라는 사회적인 지위를 포기해가며 거짓말 하는데 한계가 있도록 나름대로 조치를 할 터이니 내 말을 믿고 화해 장소에 나와 달라. ’ 고----- .
그 친지도 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지난 세월 동안, 살아 갈 능력이 없어, 너무 괴롭고 외로웠다. 그래서 때로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식들을 생각하면 ,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절망을 이겨내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자 교회를 찾았는데-- 이런 결과를 가져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 하물며 이렇게까지 애써주시는데 시비를 떠난 무조건적인 화해라면 당연히 쾌히 따르겠다.’ 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11시 반에 예정된 성경 공부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원래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습관이라서 11시 25분에 교회에 도착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혹시 목사 측에서 눈치 채고 안나오는 것이나 아닐지 긴장이 되었다. 사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손님맞이를 위해 5분 정도는 미리 나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앉을 자리도 없는 씨메트 복도에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10여분을 보내다가 돌아서려는데 김 집사가 도착했다. 그녀는 늦게 온 것에 대해 그다지 미안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뒤이어 , 40대 초반의 남자가 추리닝을 입은 모습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나에게 임 집사라 소개하며 함께 앉았다. 성경공부를 시작할 낌새가 없어 나도 그들과 다시 5분가량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40분이 넘어서야 목사가 와서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손님보다 늦게 오는 무례함을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며 진지하게 살 사람들은 아니다 는 예측과 더불어 앞으로 목적했던 대로 진전시킬 자신감이 자꾸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성경 공부( 강의와 질문 대답을 예상한 )라고 말한 것과 달리 , 찬송, 기도, 설교 등 일방적인 예배를 보는 무례함을 보였다. 그 총 시간이 겨우 25분이라서 , 성의를 가지고 참여한 나에 겐 또 하나의 무례함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목사는 ‘ 오늘부터 민수기에 대해 공부 하겠다’ 말했지만 , 정작 신약, 구약 이곳저곳에서 자신이 아름답다 생각한 내용은 무조건 인용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는지 체계가 없어 엉망 이었다 . 당연히 성경 공부( 설교 ?)가 감동은커녕 시간이 아깝다는 불쾌함만 참가자 모두에게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목사 자신도 썰렁한 기분을 감지해서 배알이 틀렸나보다. 예배를 마치고 일방적으로 점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화해를 주선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단단히 꾸중(?)할 사안 이었다. 하지만 내 본래 목적이 있으니 그렇게 시작할 수는 없었다.
삐진 그녀를 조심스레 달래어 점심 식사 장소에 나오게 만드는데 드디어 성공했다. 식당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 녀를 보고 후유하고 한숨을 내 쉬었지만 서서히 화해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식당엔 남편 바람 문제로 부부 갈등이 심각한 집 화해를 위해 내 부탁을 받고 뛰어 다니느라 고생한 손아래 친척이 하나 나와 있었다. 고생한바가 크기에 , 그의 노고도 치하할 겸, 또 목사가 말할 때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게 만드는 여건 조성을 위한 옵서버로 그도 초대 했었다.
소꼬리 곰탕을 시켜놓고 음식이 마련되는 동안 , 드디어 두 가지 상담 문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우선 2년 전 남편 간통 문제를 과거로 묻어두지 아니하고 현재의 사건으로 물고 늘어지는 사람을 소재로 ‘ 잘 사는 법 연습’ 이란 제목으로 내가 썼던 글 복사 본을 나누어 주며 , 실제 상황인데 해결 방안을 조언해줄 수 있느냐 물어 보았다.
목사는 ‘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 여자가 죽을 때 까지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거나 현재 그녀가 추진하는 대로 이혼을 해버린다면 성령의 힘이 부실한 것인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본격적으로 두 번째 사례로 들어갔다. 그동안 목사가 설교 시간에 인용했던 원수와 화해하고 용서하는 대목이 주류를 이루는 마태복음 5장과 여타 성경 구절을 적은 유인물을 함께 읽어 본 후에. 본격적으로 소송 상대인 내 친지의 가정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이야기와 그 이후 교회에 매달려야 했던 절박한 사연 , 그리고 그런 고통 받는 사람이니 교회에서 잘 돌 보아 주면 교회에 덕이 된다는 내용에 이르자 그들은 눈치 채고 표정이매우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에 내 연락을 받고 내 짝과 소송 당사자가 그 자리에 들어왔다 . 임 집사라는 남자는 ‘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고 분노를 표현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 정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사님이 아주 흠도 없다고 인정하리라 장담 하십니까 ? 그렇다면 누구나 교인들이 미쳐 제정신이 아니기에 목사님을 비방한다고 여기겠군요. 그러면 목사님이 그들 비방 때문에 피해를 볼 여지가 전혀 없으니 화낼 필요도 없잖아요 ? 오히려 화를 내지 아니하고 참으면 참을수록 영광이 되는 것 입니다. 반대로 미친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화낸 정상인이 오히려 비난받아야 하지요. ”
그들은 아무 대답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 -----.”
“ 평소 사랑하던 사람, 혹은 몹시 미워하는 사람을 보고 마음이 안 움직일 때---- , 이 수준에 도달해야 비로소 공부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 남을 평가하고 또 지도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이렇게 덕이 있는 모습을 보여야 교회도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또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가라앉힙시다. ”
이에 목사는 말했다.
“ 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이니 바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그 어느 누구도 절대로 비방해서는 안 되며 그런 교회를 비방하는 죄는 용서될 수 없습니다. 말씀 하신대로 인간에 대한 죄는 반드시 용서해야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비방한 죄는 용서하지 말라고 분명히 나와 있어요. ”
“-----------.”
“ 나는 그들과 결코 화해하거나 용서할 수는 없어요. 또한 화해 요청해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났으니 받아들일 수도 없어요. 소송을 위해서 이미 변호사를 고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설교시간에 그리고 나와 찻집에서 만났을 때 보였던 성자의 모습을 깡그리 내 집어 던지는 그녀를 보자 불끈하는 기운이 내 내부에서 치 솟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분노에 사로잡히면 어리석어진다며 마음을 추슬러나갔다. 더 이상 목사의 인품의 깊이를 헤아려볼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있는 바를 사실 그대로 조용조용히 짚어 나갈 뿐이었다.
“ 기독교를 세운 분은 예수님 이지요 ? 목사님이 만약 교회라면---그분은 교회 중 최고 우두머리 교회에 해당될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 예수님이 제자들이나 하나님에게 ‘ 이 원수들에게 꼭 복수해주십시오 !’ 라고 말 했습니까 ? ”
“-----------.”
“ 만약성경 말씀 따로, 행동 따로 하면 , 입술만 천당 가고 온 몸은 지옥 갈 사람들이란 비난을 들을 터인데 --- 이래도 하나님 법을 내 던지고 인간의 법에 의존해서 송사를 계속할 것 인가요 ? ”
말문이 막힌 그 목사는, 상대방들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지 그리고 그 녀 가슴을 얼마나 응얼 지게 만들었는지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백화점식으로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 잠깐--- 이 자리는 화해를 위해 제가 주선한 자리이니 제 말을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 과거를 보면 섭섭함, 원망, 아쉬움이 생겨나기 마련이지요. 미래를 보면 초조함과 염려, 걱정 따위가 나오고---. 그저 과거와 미래를 딱 잘라내고 화해를 위해 모인 이 현재 이 순간 , 이 자리만 생각합시다. 이 순간에 충실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도 동의 하시겠습니까 ? ”
“ -----. ”
“ 목사님이 대답을 안 하시겠다면 , 김 집사님은 제 말에 공감 하십니까 ? ”
“ ----- ”
그들의 침묵은 어느 것이 그들에게 이로울지 헤아려 보기 위함으로 보였다.
“ 어느 대답이 유리할지 앞 뒤 재지 말고 단순하게 대답하시지요. 이 자리에 있는 저는 결코 수사관은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불유쾌한 과거를 소중하게 간직할 가치가 있나요 ?”
저돌적인 임 집사란 남자가 되받았다.
“ 하지만 저들은 가정을 파괴한 것과 똑 같아요. 그 파괴된 가정을 앞에 두고 용서하라면 가능 하겠어요 ? ”
“ 나는 일반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와 성경을 공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주장대로 그들이 문제 투성이 인물이라고 인정합시다. 병원엔 환자가 가는 곳이지 건강은 사람은 갈 필요가 없지요 ? ”
“ 그렇지요.”
“ 문제투성이 인물들이니 좋은 사람 만들어 달라고 교회 가는 것 아닙니까 ? 무능한 의사는 환자 병을 못 고치듯이, 무능한 목사는 문제투성이 교인들을 바르게 고쳐 놓지 못하는 법이요. 만약 떠나간 교인들이 악하고 문제투성이다고 계속 주장하면 외부인들에게 ‘ 나는 아직은 무능한 목사 혹은 무능한 기독교인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덕이 안 됩니다. ”
“--------.”
“ 환자들을 적으로 삼아 차고 찌르고 하는 것이 아직도 통쾌하고 짜릿한 재미로 생각되나요? ”
“ 내가 저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 가정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해주었는데 배신을 하다니요---. 배신당했을 때 나는 앞이 캄캄하고 얼마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임 집사라는 남자는 이쯤에서 화를 못 삭이는지 뛰쳐나갔다.
" 불교인이 성경 내용을 말하면서 화해를 이야기하니 다소 불쾌할지 모르나 ,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지요. 타 종교인에게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자세로 양측이 화해한다면 아름다울 것 같아 양측이 화해할 것을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해와 용서와 사랑은 진정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진리로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자 , 이제 모든 다른 생각은 내려놓고 , 우리 이제 먹는 일에 충실해집시다. "
목사는 고집이 대단했다. 끝내 식사를 거부하고 계속 고소당한 여자를 상대로 지난 과거에 섭섭했던 내용을 하나하나 되씹었다. 이렇게 가녀린 여인 내를 목사라 세워 놓은 무리들에 대해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즈음에 김 집사라는 여자를 잡고 말했다.
“ 아주 가난하게 생활하는 피고인의 경제 능력을 고려했을 때, 민사 소송에서 이길지라도 큰 경제적 이득은 없으리라 예측되는 대요. 또한 절망 속에서 허덕이다 자살이라도 하면 결코 교회에 덕이 안 되니까 이쯤에서 화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 ”
“ 지극히 무능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바로 자기 파멸적인 요소이다 는 세상 가르침을 그동안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소 모자라 보이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보았자 통 할리 없지만 그래도 한번 던져 본 말이었다. 그러자 그 녀는 말했다.
“저도 화해는 정말로 좋다고 생각하지만---- 목사님은 워낙 깊이가 있고 차원이 높은 분이라서 우리와는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그 높은 경지를 우리가 이해 못하면 우리 잘못이지 목사님 잘못은 아니 예요. ”
목종(木鐘) ! 그랬다 ! 목종이었다. 아무리 때려도 또 때려도 울리지 않는 ----
이 상태에 이르자 , 내가 이미 어느 한쪽을 편들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아주 분명했다. 즉 호랑이를 화해시킨 승조 스님과 달리 나는 이미 화해를 시킬 자격이나 능력을 상실해버린 중재자였다. 그리고 그 진흙탕으로 향한 그 길이 나에겐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이지 결코 해탈 문이 될 수가 없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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