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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무엘상 1:1-20
제목: 역전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일시: 2011. 10. 16. 하늘사랑교회 주일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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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였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매력 있는 여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남편 엘가나는 아내 한나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여자의 ‘자궁’이 ‘레헴’ 인데 이 단어는, 어머니의 모성애적 사랑을 나타내기도 하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한나는 비록 매력 있는 여성이었지만 자녀를 얻지 못한 슬픔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 엘가나는 자식을 얻기 위해 브닌나라고 하는 여인을 또 다른 아내로 들였습니다. 브닌나라는 이름에는 다산과 관련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 보면, 브닌나는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일 년에 한 번씩, 그의 온 가족들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 때 실로에 있던 제사장은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부터 실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장소였고(수 18:10), 사사기에는 여호와의 집이 실로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삿 18:31). 화목제를 마친 후 화목제물을 가족들에게 나누어 줄 때, 남편 엘가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의 분깃을 한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만큼 엘가나가 한나를 더 깊이 사랑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두 여인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한 지붕 밑에 두 여자가 살 만큼 큰 집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브닌나를 가리킬 때, ‘그의 적수인 브닌나’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한 남편을 두고, 두 여인이 격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이 싸움에서 한나는 판정패를 당하고 맙니다. 성경에는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1:6하).”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1:7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켜 본 남편 엘가나의 속이 상합니다. 한나에게 다가가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1:8하)”고 다정하게 위로하지만, 이러한 남편의 위로가 한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한나가 아이를 낳아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어찌 사람이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겠어요? 이미 할 만큼은 충분히 해보았어요. 그래서 더욱 절망스러운 겁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적어도 아이를 낳는 문제만큼은 한나의 손을 이미 떠난 문제에요.
더군다나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5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6상).” 이렇게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지요. 아니,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 아니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에요.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참, 머리가 아프시지요? 우리는 누구다 다 행복해지기 원해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남편 엘가나가 매력적인 여인 한나와 결혼할 때만해도 행복해 지기 위해서 결혼했겠지요? 그런데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둘째 부인 브닌나를 통해서라도 아이를 갖길 원해요. 그리고 실제로 많은 아이들을 낳아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던가요? 정말 그 가정이 행복하던가요? 이 이야기는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겪을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삶의 현실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첫째 부인은 남편의 사랑을 가졌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슬프고, 둘째 부인은 자식은 많이 나았지만 남편의 사랑을 가질 수 없어서 슬프고… 더군다나 이 둘 사이에는 사랑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남편인들 어디 행복하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그가 일 년에 한 번씩 하나님 앞에 제사들 드리러 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하소연 좀 하지 않겠어요? “아니, 하나님! 이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꺼? 우리 가정, 이거 언제쯤이나 평안하겠십니꺼?” 그러면서 가정의 화목을 구하는 화목제를 드리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괴로움의 이야기에요. 한 집안 안에서 행복해야 할 가족들이 서로 물고 뜯는 닭싸움 형국이 되어 버렸으니 이 어찌 괴롭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니, 참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도 남지요.
사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아요. 우리들은 이런 닳고 닳은 이야기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저녁 시간대에 방영되는 T. V 드라마 한 번 보세요. “아이구! 그 정도는 약과여, 약과! 그 정도로는 시청률 절대 못 올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계실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어디 남 이야기입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들 우리네 이야기이거든요. 누구나 행복해지기 원하지요? 그런 점에서는 같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나처럼 남편의 사랑은 받고 있는데 자녀가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브닌나처럼 자녀들은 낳아 키우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이구, 저 놈의 남편은 죽지도 않나? 그냥 없는 게 도와주는 거야!” 이렇게 속으로 생각할지도 몰라요. 누구는 간절히 원하는데, 또 다른 누구는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해요. 반대로, 남편 생각도 좀 해봅시다! 여기 계신 남자 성도님들 가운데, 오늘 성경 읽으시면서 “아이구! 엘가나라고 하는 남자, 참 능력도 많다. 솔직히 부럽다! 나도 예쁜 마누라, 둘 정도만 거느리고 살아 보았으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셨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고 부러워 보이는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그랬어요. 지나치는 것이 오히려 미치지 못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처럼, 그런 남자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어요. 요즘 같이 한 여자도 제대로 모시기 어려운 세상에, 두 여자를 모시고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 있어요. 재앙 말이에요!
어떤 사람은 실력이 있어요. 그래서 얼마든지 기회만 주어지면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 기회가 주어지질 않아요. 더군다나 한두 번 주어졌던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해서 실패의 쓴잔을 마셔본 경험이 있어요. 그러면 늘 주눅 들어있고, 의기소침하며 살아요. 참 안타깝지요?
어떤 사람은 능력도 있고, 기회도 주어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가정환경이 뒷받침해 주질 못해요.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충분히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정작 문제는 그 조그마한 기댈 언덕이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수성가해서 맨 주먹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결코 쉽지 않는 이야기에요.
어떤 사람은 능력도 있고, 기회도 있고, 기댈 언덕도 있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건강이 따라주지 못해서 무너지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살아갈 인생의 시간이 모자라서 무너지는 사람도 있지요. 어떤 사람은 남편 잘못 만나서, 어떤 사람은 친구 잘못 만나서, 어떤 사람은 부모님 잘못 만나서…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다들 고통을 당해요. 이 모두가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결핍들입니다. 완벽하게 갖추어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행복해 보이고,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누구나 말 못하는 어려움과 결핍들을 가지고 살아가더란 말이지요.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집을 나서는 가출청소년들이 일 년에 공식집계로는 6만 여명, 비공식집계까지 합산하면 매년 10만 여명이나 된다고 그래요. 그 원인을 연구한 여러 논문들 가운데 심리학자 프로이드가 제시한 일렉트라 콤플렉스라는 이론이 있어요. 프로이드는 인간의 성욕을 5단계로 구분했는데, 4세부터 7세의 어린 시기를 남근기라고 불렀어요. 이 시기의 아이들은 이성 쪽의 부모님에 대해서 성적인 연대의식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의 경우는, 엄마에게 애착을 느끼는 오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반대로 여자 아이들의 경우는, 아빠에게 애착을 느끼는 일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를 형성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러한 어린 시기에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사춘기 때에 그러한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서 가출이나 일탈 행위를 보인다는 겁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지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나, 그 대적 브닌나나, 모두 어느 한쪽은 충족이 되었지만, 다른 한쪽은 모자라는 결핍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두 사람의 행동이 각기 달라요. 먼저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는 브닌나는 어떻게 행동하지요? 옆에 있는 한나의 대적이 되지요. 한나를 격분하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어가면서 자신의 결핍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반대로 한나는 어떻게 합니까?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고통스런 기도를 드립니다.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게 만드는 계기가 되게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한나의 고통이 일순간에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녀의 고통의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지요? 먼저 10절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독하며…” 라고 기록하고 있고, 13절에도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말하고 있어요.
엘리 제사장이 한나를 향해 여자가 대낮부터 독주를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거룩한 성전에서 술주정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자 한나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15-16절).” 맞아요. 그녀는 한이 많은 여인이었어요. 어디 술을 마신다고 그녀의 고통이 해결되었겠어요? 그 누구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한들 위로가 되었겠어요? 그래서 그녀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여겼겠지요. 사실 그녀는 너무나 상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어요.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겠다고 서원하지 않았어요. 어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처럼 세상적인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도 믿음이에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 그녀가 엘리 제사장에게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라는 말했지요? 그런데 시편 62:8에 보면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우리 하나님은 피난처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토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점이라는 말이에요. 한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토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와 씨름 하던 야곱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창 32:26)”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세상적인 믿음이라고, 이기적인 믿음이라고 비난할지는 모르지만, 지금 한나는 고통 가운데 처절한 기도의 샅바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자신이 살 길임을 알기 때문이었던 거지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고통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의 샅바를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세요! 처음부터 너무 고상하게 믿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기도하세요! 힘들면 힘들다! 어려우면 어렵다! 나 좀 도와 달라고 기도 하세요! 유치한 것 같고, 세속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가장 기뻐하세요! 하나님은 그것도 귀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세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이에, 오랜 기도의 분량을 채운 후에, 한나는 점점 더 자신의 기도를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승화시켜 나가더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문제만 보이더니, 점점 한나의 눈에 문제는 보이지 않고, 문제 너머에 계신 축복의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더란 말이지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그녀의 기도는 놀랍게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지금 한나가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서원의 기도, 헌신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일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나 독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 나실인처럼, 자신의 귀한 아들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19절 상 반절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이러한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19-2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의 태를 닫으셨던 하나님께서는 기도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나에게 축복의 씨앗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잠시의 고통을 통과하게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단련하시고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부 간의 동침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에 하나님의 생각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와 고통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곤경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고, 이 세상의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으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한나는 훗날 사무엘상 2장 1절과 7절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삼상 2:1).”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한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한나의 이야기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아주 짧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고대세계에서 여성, 그것도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사무엘상의 첫 장부터 소개된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서는 매우 낯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첫 장부터 한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나 이야기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이방 여인 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룻과 한나, 둘 다 사사시대의 끝자락에 살던 비운의 여인들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힘으로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먹여 살려야만 했던 슬픔의 여인 룻, 더군다나 이방인이라는 사회적 편견까지 떠안아야만 했던 룻의 이야기나, 자녀를 낳지 못해 고통 가운데 신음하던 여인 한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요, 슬픔의 여인이었던 이 두 여인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편을 잃었던 슬픔의 여인 룻은 보아스라고 하는 언약의 사람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고, 그녀가 낳았던 후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만나고 있는 한나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그 결과,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삼았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나와 통곡과 눈물로, 때로는 서원과 예배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 보십니다. 슬픔이 변하게 기쁨이 되게 하시고, 탄식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십니다!
사사 시대의 마지막 이야기요, 왕정 시대의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룻과 한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섬겨야 할 참된 왕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사사기의 결론과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 왕을 비롯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스라엘 왕들의 실패담은 하나같이 이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참된 왕!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사랑의 왕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과연 누구 우리의 참된 왕입니까? 우리의 참된 왕은 한나를 향한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역전의 복으로 갚아 주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끝까지 믿고 의지해야 할 영원한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고통을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술로, 노래로, 돈으로,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할 때, 저와 여러분은 그 괴로움과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통곡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 헌신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예배의 언어, 기쁨의 언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생각이 여러분의 문제에 임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사랑의 주파수를 맞추십시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평강이 친히 우리의 삶을 주관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키는데 명수(名手)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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