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아들을 경계한 시[示家兒]
군자는 과장하여 말을 않느니 君子不夸言
과장하는 말에는 알맹이 없네. 夸言無其實
성인께서 큰 길을 보여주시니 聖人示周行
무망(無妄)과 주일(主一)이 그것이라네. 無妄與主一
평생 살얼음 밟듯 조심해야만 平生臨履意
타고난 바탕을 지킬 수 있네. 可以保性質
몸 밖의 백 가지 천 가지 일은 身外百千事
이를 살펴 법도로 삼아야 하리. 視此以爲律
집안에선 스님처럼 지내야 하고 居家如釋子
마을에선 아낙처럼 처신하여라. 處鄕如閨婦
아낙네는 남을 항상 두려워하고 閨婦恒畏人
스님은 가난함을 싫어 않나니. 釋子不嫌窶
담박하게 지내며 행동 삼가야 淡泊而謹愼
출입함에 근심 걱정 면하게 되리. 出入免憂懼
너와 나 우리 모두 경계하여서 戒爾又自警
애오라지 눈 먼 소경 벗어났으면. 聊欲代矇瞽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아들을 경계한 시다. 아들아!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군자란 어떤 사람이냐? 말이 무거운 사람이다. 군자의 말은 결코 과장하여 으스대는 법이 없다. 실속 없이 떠벌리기만 하는 사람은 알맹이가 없다. 성인께서도 진실무망(眞實無妄)을 말씀하시고, 주일무적(主一無適)으로 일깨우셨지. 사람은 참되고 실다워서 망녕됨이 없어야 한다. 온전히 한 가지에만 집중하여 마음이 딴 데로 놀러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몸가짐은 깊은 물가에 선 듯, 살얼음을 밟는 듯이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그렇게 지켜야만 타고난 본래의 성품을 보전할 수가 있는 법이다. 그밖에 많은 일들은 모두 무망(無妄)과 주일(主一)의 가르침을 기준 삼아 감당해 나가면 된다.
또 말한다. 집안에서 지낼 때는 스님처럼 살 요량을 하고, 마을에서의 행동거지는 아낙네처럼 하도록 해라. 무슨 말일까? 아낙네는 늘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몸가짐을 살피곤 한다. 스님은 텅 빈 방안에서 가진 것 없이 지내도 마음만은 늘 넉넉하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가난을 동무 삼아 마음가짐을 다잡고, 아낙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듯 몸가짐을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번화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늘 담박함을 마음에 깃들이도록 해라. 또 삼가는 마음을 잠시도 놓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한다면 다른 근심과 걱정이 네 몸과 마음을 침탈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너희에게만 주는 가르침이겠느냐? 나 자신도 늘 경계하고 스스로 타이르는 말이니라. 우리 함께 이를 지켜, 눈 먼 소경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없도록 하자꾸나.
안정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던 그의 관력은 단출하다. 1749년(38세)에 처음으로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65세 때에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을 뿐이다. 70세 이후에 받은 통정대부·가선대부 등의 산직은 고령에 따른 예우에 지나지 않았다. 안정복은 관직보다는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특히 35세 때인 1746년에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부터 경세치용(經世致用)에 중점을 둔 그의 학문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는 18세기 중후반 사유하고 실천하는 학자이자 사상가였다. 조선후기 봉건체제의 붕괴로 야기된 제도적 모순과 서학의 충격 속에서 조선의 전통적 가치를 되살리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역사적 현실의 실증적 정립과 정신적 정통성의 확립을 위해《동사강목》과《열조통기》를 편술하였고, 목민관(牧民官)의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임관정요》를 저술하였다.
안정복이 살았던 당시에는 실학풍이 학문과 사상의 영역에서 선양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실학의 한 지도자인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성호학파에 속하였던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천주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비판적이었다. 그는 철저한 주자학자였고 전통성을 고집하는 전통적인 조선의 학자였다.
안정복은 창녕성씨(昌寧成氏) 성순(成純)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1녀를 두었다. 안경증(安景曾)이 그 아들인데, 초명이 학(壆)이다. 아들에 대한 경계는 위에 제시된 시 말고도 정묘년(1747년, 36세)에 쓴〈서여학아(書與壆兒)〉란 글에서도 보인다. 이때 한경증은 열여섯이었다. 안정복은 이 글에서 부부관계에서 근신이 중요함을 말하였고, 출입하고 사물을 대할 때 강(剛)을 귀하게 여기고 안일을 독으로 여겨야 함을 역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가 자식을 가르쳤던 덕목 여섯 가지를 뽑아, 외우고 생각하여 실천에 옮길 것을 당부하였다.
그 가르침은 이렇다. 첫째, 생활할 때는 경건하게 하고 방종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말할 때는 사리에 맞는지를 생각하고 비웃거나 떠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모든 일에 겸손하고 기세로 사람을 능멸하여 스스로 치욕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 셋째, 방탕하게 술을 마시고 학업을 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또한 말을 잘못하여 자신을 잃고 남까지 그르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니 더욱더 깊이 경계해야 한다. 넷째, 남의 잘못이나 남의 가정에 대한 장단과 시비를 말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찾아와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대꾸하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벗을 사귈 때는 특히 사람을 잘 가려야 한다. 비록 같은 문하에서 배우는 사람일지라도 친하게 지낼 사람과 소원하게 지낼 사람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모두 선생께 요청하여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해야 할 것이다.(후략) 여섯째, 남의 아름다운 언행(言行)을 보았을 경우 존경하고 기록할 것이며, 나의 글보다 나은 남의 좋은 글을 보았을 경우 빌려다가 자세히 보거나 혹은 베껴 써 놓고 자문을 받아 그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부터 교유와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아들 학에게 바라는 바를 여섯 조목으로 분절하여 간곡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아들을 경계하는 덕목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경문(警文)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안경증은 1777년, 선생이 66세 되던 해에 46세의 나이로 먼저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대한 애통함을 안정복은〈제망자문(祭亡子文)〉과〈제망자소상문(祭亡子小祥文)〉에 남겨놓았다.
다음에 함께 읽을 글은 안정복이 딸을 경계한 시 〈경여아(警女兒)〉이다.
아녀자가 지킬 행실 네 가지 뿐일러니 婦行無多只有四
애를 써서 부지런히 아침저녁 경계하라. 孜孜不怠警朝曛
모습은 공경으로 고요함을 생각하고 貌存敬謹宜思靜
언어는 자상하고 따뜻하게 할지니라. 言欲周詳更着溫
온화함과 곧고 매움 덕 가운데 으뜸이요 德以和柔貞烈最
솜씨는 주식(酒食) 외에 길쌈도 부지런히. 工因酒食織紝勤
장차 이 말 간직하여 마음 깊이 새긴다면 若將此語銘心肚
길한 복이 후손에게 넉넉하게 이어지리. 吉福綿綿裕後昆
딸아! 오늘은 아비의 말을 듣거라. 아녀자가 지켜야 할 행실은 복잡하지 않다. 다만 네 가지만 명심해두록 해라. 첫째는 겉모습이다.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는 태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마땅히 고요할 것을 생각해야지. 경박한 행실로 경망하게 행동하면 남의 손가락질만 받게 된다. 둘째는 언어다. 말씨는 자상해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 따뜻함이 깃들어 있어야겠지. 자상한 것과 수다스러운 것을 잘 구분하도록 해라. 셋째는 덕성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그 곧고 매운 기상이 없이는 온화함은 자칫 물러터져 줏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각별히 살펴야 한다. 넷째는 집안일이다. 계절 따라 술을 빚고 음식을 마련하는 일은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여기에 더하여 부지런히 길쌈하여 집 식구들의 의복을 마련하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아녀자가 겉모습과 말씨, 덕성과 집안 일, 이 네 가지를 잘 다스려 집안을 이끌어 나간다면 네가 어느 집에 시집가더라도 그 집안이 복을 받고, 자손들에게 그 복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하여라.
그는 또 어린 손자를 위해서도 시 한 수를 따로 남겼다. 제목은 〈시소손(示小孫)〉이다.
젊은 날 책 안 읽고 놀기만 하다보면 少日優遊不讀書
늘그막의 성취가 검주 나귀 같게 되리. 晩塗成就似黔驢
궁한 살림 후회해도 건질 길이 없으리니 窮廬悔切將無補
손자에게 이르노라 나처럼은 되지 마라. 分付兒孫莫我如
손자야! 늙은 할애비의 얘기를 들어보련? 옛날 검주(黔州)란 고을에는 나귀가 없었더란다. 어떤 사람이 나귀를 구해 와서 산 밑에 매어 놓았겠지. 하루는 범이 내려와 나귀를 처음 보고는 신령스럽게 여겨 대단히 무서워하였더란다. 범이 차츰 가까이 다가가 건드려 보니, 사실은 별것이 아니라 겨우 뒷발질이나 잘 하는 미물이더라지. 그래서 범은 그만 그 나귀를 날름 잡아 먹었다는구나. 당나라 때 유종원(柳宗元)의 〈삼계(三戒)〉란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한 게로구나. 지금 너처럼 한창 공부해야 할 때 책을 안 읽고 그저 놀기만 하면, 마침내 검주 땅의 나귀처럼 되고 말겠기에 하는 말이다. 너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책도 조금은 읽었으니 남 보기에는 번듯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네 공부를 점검해 보아 차츰 네 밑천이 드러나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너를 업수이 여기고 가벼이 보며 경멸하게 될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니? 마침내 아무 이룬 것 없이 궁한 살림을 꾸려 나갈라치면 그때는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 할애비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니겠느냐? 너도 이 할애비처럼 어찌해 볼 수 없는 가난만을 네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느냐? 책을 읽어라. 마음 밭을 닦아라. 매일 매일 향상되는 그런 삶을 살아나가야지.
이 외에도 52세 나던 1763년에 어린 손자를 위해 지은 시가 한 편 더 있다.〈서증소손(書贈小孫)〉이 그것이다.
성인께서 밝은 훈계 남기셨으니 聖人垂明訓
어릴 때는 때 안 놓침 가장 귀하네. 蒙養貴及期
나이가 엿아홉에 이르게 되면 年至八九歲
책 읽기에 딱 좋은 때가 된다네. 正好讀書時
아침 일찍 일어나 동창 아래서 早起東窓下
책을 펼쳐 소리 내서 글을 읽어라. 展卷聲吾伊
마음 쏟아 눈동자도 안 깜빡이고 潛心目不迯
단정히 두 손 모아 무릎을 꿇네. 端拱坐必危
외우기를 마치면 다시 배워서 誦罷復受業
날마다 부지런히 읽어야 하네. 讀之日孜孜
책 속에 있는 것 그 무엇인가 書中何所有
성인 말씀 날 속이지 않으시리니. 聖言不我欺
삼가 받아 다시는 잊지 말고서 愼受勿復忘
하나하나 스승으로 삼아야 하리. 一一以爲師
먼 곳 감은 가까운 데서 시작을 하고 陟遐必自邇
높이 오름 낮은 데서 비롯된단다. 升高必自卑
손자를 위해 할아버지는 독서의 단계를 하나하나 따져서 보여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볕 드는 동창 아래서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다. 마음을 전일하게 해서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고 몰두한다. 두 손은 무릎 위에 단정히 얹고, 바른 자세로 앉아 전날 배운 내용을 다 외운다. 그리고 나서는 아침 밥 먹고 다시 새로운 수업을 받고, 온 종일 부지런히 읽고 또 읽는다. 옛 성현은 책 속에 절로 만종의 곡식이 있다고 했다. 한 마디 한 말씀을 모두 스승으로 삼아 하나하나 익혀 나가다 보면, 아마득히 어렵기만 하던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되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던 말도 아주 쉽게 이해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러니 다른 의심을 거두고 다만 부지런히 읽고 또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