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파리, 로마, 피렌체, 유럽의 도시들을 통해 유럽을 읽는 시간, 로마 VS 명장 한니발, 르네상스의 꽃 메디치 가문, 세기의 스캔들 그리고 대영제국 엘리자베스 1세, 한 세대가 아닌 모든 세대를 위한 셰익스피어, 자유 평등-온 세상에 퍼지다 나폴레옹, 그들이 만든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가 고민해야 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해가 지지않는 나라 영국(England) 세계 최초! 의회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나는 과정과 망망대해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역사를 따라서!
송동훈/문명여행작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가 고민해야 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유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풍부한 문화 유산을 가진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이 땅에서 탄생한 로마 제국은 유럽의 문예 문화와 서양 역사의 중심이었죠. 오늘 첫 여정은 로마제국의 흔적을 찾아 로마와 칸네로 향합니다. (이탈리아 Italia, 수도: 로마 Roma, 언어: 이탈리아어, 인구: 약6천2백만명(2019, CIA), 면적: 약30만 평방킬로미터 (대한민국 면적의 약3배)).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장화 모양의 반도와 커다란 섬인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으로 이루어진 나라죠. (로마 Roma-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로,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도시),
우리나라 면적의 3배에 달하는 이 땅은 전국토가 문화재라 할만큼 역사와 문화의 보고입니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고대의 발자취와 중세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드디어 이 영원의 도시라고 하는 로마에 도착했네요. 로마는 아직도 옛날 멋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요.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카푸티 문디(Capute Mundi) 라고 불렀었거든요. 세상의 우두머리 라는 뜻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그러한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겠지요. 자부심 강한 이 땅을 정복하고자 한 평생을 바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맞수였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었죠. 이 황량한 땅은 칸네 평원입니다. 고대 로마군과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대격전을 벌였던 곳이죠. 기원전 3세기 중엽 로마는 당시 해상 강국이었던 카르타고와 총3번에 걸쳐 포에니 전쟁을 벌였는데요 (포에니 전쟁 Punic Wars-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싸움으로 BC 3세기 중엽-BC 2세기 중엽까지 총 3차에 걸쳤던 전쟁).
당시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장군 때문에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곳이 바로 칸네의 평원이네요.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이 지중해 패권을 두고 다퉜던 가장 역사적인 현장 중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칸네 평원 Canne-제2차 포에니 전쟁 중 가장 유명한 칸네 전투 (BC 216년)가 발발한 장소, 이곳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5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8만여명의 로마군에게 쾌승을 거둠), 평온해 보이는 이곳 칸네 평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는 칸네 전투가 벌어집니다. 로마는 단 하루만에 군사 8만명 가운데7만명이 몰살을 당합니다.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패배를 안겨준 이는 바로 세계의 전략가 한니발이었습니다. (한니발 바르카 Hannibal Barca (BC 247~BC 184)-도시국가 카르타고의 정치가이자 장군, 칸네 전투를 승이로 이끈 명장으로 꼽힘). 당시 그는 울던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 정도로 로마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죠.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파죽지세로 로마군을 격파한 한니발, 그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한니발의 원정경로: 프랑스-알프스산-티키누스-칸네-자마). 한니발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로마군을 물리쳤던 것은 사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 그러니까 로마는 반드시 무너뜨려야 된다는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이곳 칸네 평원에서는 대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던 한니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꿈을 좌절시킨 것은? 그 답을 찾아 다시 로마로 향하는 길,
로마 제국의 화려함과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유적 포로 로마노를 찾았습니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약 천년 동안 고대 로마의 상업, 정치, 종교의 중심이었음. 신전과 공화정, 최고의 정치기관 원로원 등이 위치),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을 가진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정치 상업 종교 등 모든 활동의 중심이었죠. 칸네 전투에서 거의 7만이 넘는 병사를 잃은 바로 장군이 전쟁에서 패해서 로마로 귀환할 때 당시 집정관 이었던 파비우스 막시무시를 비롯한 로마의 시민들은 성문 앞까지 나가서 바로의 귀환을 환영해 줍니다. 그가 전쟁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고 공화정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고 돌아와 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던 거에요.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로마인들이 서로를 믿지 않고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면 그리고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원로원의 희생이 없었다면 로마는 끝내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의 예를 들자면 그는 자신의 한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결국 한니발 정도의 훌륭한 장군은 로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을 하기 보다는 시간을 끌어서 그의 보급선을 잘라야 한다, 그걸 지구전이라고 얘기를 하는데요. 그런 지구전을 통해서 파미우스 막시무스는 굉장히 승기를 잡아갔어요.
거기에 분노한 한니발이 이 로마 인근까지 와서 로마 귀족들의 땅을 다 불태웁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땅만 남겨 놓고요. 결국은 사람들이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의심하고 그를 내쫓고 로마의 전략이 바뀌기를 기대했던 건데 그걸 알고 있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에 나타나서 자기의 모든 부동산을 국가에 헌납해 버립니다. 결국 자기가 한니발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재산을 포기함으로써 보여주는 거죠. 그의 헌신,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한니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거고 그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와요. 이곳 원로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0여 명의 의원들은 한니발과의 칸네 전투 때 시민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로원 Curia Julia-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정치기관). 이것이 로마라는 사회의 단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려한 유적들 곳곳엔 이러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이 길이 그냥 찻길이 아니거든요. 사실은 2300년 전에 로마인들이 만든 첫번째 가도(街道), 아피아 가도를 지금 제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아피아 가도의 첫번째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입니다. 당시 로마와 공화정의 집정관이었던 아피우스 클아우디우스가 만든 아피아 가도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이기도 합니다. (아피아 가도 Via Appia-군대의 이동과 물산유통을 위해 로마에서 브린디시까지 연결된 고대 로마 최초의 도로).
이 아피아 가도는 처음에는 군용도로로 만들어졌습니다. 수천년을 이어져온 이 고대의 길엔 파란만장한 전쟁의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로마가 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을 물리치기 위해서 8만이 넘는 대군이 출발한 것도 이 길을 통해서 고요. 그리고 그들이 칸네에서 거의 몰살당한 이후에 패배의 비보를 전하기 위해서 파발마(擺撥馬)가 온 곳도 바로 이 길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듯 한 때 이 길은 로마와 동맹국을 이어주던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로마는 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그곳을 자기들이 힘으로 진압하고 거기에 주둔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맹국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그들과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인 어떤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가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상상하기 힘든 국제관계랄까요. 그런 걸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국제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게 바로 아파아 가도를 비롯한 도로였습니다.
한니발은 16년간 이탈리아 반도에 머물면서 로마의 동맹체제를 깨는데 주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로마가 도로를 중심으로 만든 동맹체제가 강력했기 때문이죠. 로마는 이 길을 통해 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데 그 도로의 길이가 8만 킬로미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피아 가도와 함께 로마 토목기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로마 시내에 물을 공급했던 수도교입니다 (클라우디아 수도교 Aqua Claudia-로마 도심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유적지로 로마 시내에 물을 공급했던 수도교 중 가장 보존이 잘 됨),
로마의 수도교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클라우디아 수도교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거의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구조물을 로마인들이 2300년 전에 이미 만들기 시작했다라는 게 정말 대단한 거 같애요. 특히 이 수도교라는 것은 멀리 있는 수도원에서 깨끗한 물을 날라다가 로마에 사는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한다 라는 목적으로 지어진 거거든요. 결국은 공동체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엇을 제공해야 되는가 이런 걸 이미 로마인들은 2300년 전부터 생각했던 거에요. 지금도 그걸 못하는 국가가 많은데~~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한 로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 대륙에 걸쳐서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아피아 가도와 같은 도로, 수도교 등의 최첨단 기술을 갖추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렸죠. 문명이란 것을 통해서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했던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유럽 전역, 북아프리카 혹은 아시아에 가도 이것과 똑 같은 문명의 흔적들을 볼 수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참 세계적 표준 이라는 걸 2300년 전에 자기들이 지배했던 영역 속에 확산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어쨌던 하나의 제국을,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그들의 힘이 참 놀랍게 느껴져요.
로마 인근도시 마리노, (마리노 Marino-로마 남쪽 구릉지에 자리한 와인 생산지로 1924년부터 시작된 포도축제로 유명함), 고대 로마시대에 로마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였던 이곳은 예로부터 비옥한 땅에서 생산된 백포도주로 유명한데요. 매년 포도 수확이 끝나는 10월이 되면 축제가 열립니다. 오늘날의 축제는 1571년에 있었던 레판트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열리기 시작했답니다. (레판트 해전 Battle of Lepanto-1571년, 그리스의 레판토 앞 바다에서 베네치아, 에스파냐, 로마 교황청의 기독교 연합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싸워서 크게 이긴 전투),
전쟁의 승리를 신께 감사드리고 풍요를 기원하는 행진이 펼쳐지죠. 이탈리아가 굉장히 비옥한 땅이거든요. 이렇게 포도도 많이 나고, 올리브도 많이 나고, 과거에는 밀도 정말 많이 났었어요. 이런 풍요로움이 고대 로마 제국의 부와 힘을 지탱해 주었던 근간이었죠. 긴 행진이 끝나고 사람들이 도시 중앙에 있는 분수대로 몰려듭니다. 이제 곧 분수에서 포도주가 나올 거예요. 그런데, 정말 분수대에서 물 대신 포도주가 쏟아져 나오는 걸까요? 거의 다 왔어요. 막상 분수대 앞에 도착하고 보니 분수대에서 포도주가 평상처럼 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와~~ 이렇게 호스에 와인을 마시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데요.
자세히 보니 분수대에서 포도주가 나온다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분수대에 연결된 관을 통해 포도주가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굉장히 달아요. 이탈리아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축제가 무르익자 사람들은 저절로 음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여행자의 마음까지 풍요로워지는 비옥한 땅, 이렇게 비옥한 땅이 있었기에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BS 세계테마기행 2646회 제1부에서 정리).
① 기원전 3세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서 파죽지세로 로마로 쳐들어갔다. 칸네 평원에서 로마 바로 장군의 8만 군사와 싸웠는데 로마군은 단 하루 만에 7만이나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② 패전한 바로 장군이 로마로 귀환할 때 집정관 막시무시와 많은 시민들은 그를 용서하고 귀환을 환영하였다. 막시무스는 로마에는 한니발 같은 장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로 그는 한니발에 대하여 지구전을 펼쳤다.
③ 한니발은 막시무스의 전략에 분노하여 막시무스의 땅만 남겨두고 다른 모든 귀족들의 땅은 불태워버렸다. 그때 막시무스는 원로원(지금의 국회)에 나타나서 자신의 모든 부동산을 원로원에다 헌납하였다. 원로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0여명의 의원이 시민들과 함께 한니발군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④ 한니발은 16년이나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의 동맹체제를 깨는데 주력했지만 로마군이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한니발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로마를 떠나야 했다. 막시무스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로마 시민들의 협력으로 로마는 한니발을 이길 수 있었다.